VVIP 영주님의 품격 116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16화
116화
* * *
아인의 명령에 따라 영주들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움직인 건 루시우스였다.
루시우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첫 대군을 이끄는 경험에 상당히 긴장한 상태였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 기대하기는 했으나 예상보다 매우 빨랐다.
“후우.”
“왜 그렇게 긴장했냐?”
굳어있는 루시우스의 표정을 본 자크론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많이 티가 납니까?”
“모를 수가 없지.”
자크론의 말에 루시우스는 민망함에 볼을 긁적였다.
“저에게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루시우스는 기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특출난 재능을 타고난 덕분에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좋은 스승을 두었으며, 체계적인 훈련 아래에 실력을 키웠다.
그리고 영주의 눈에 들어 어린 나이에도 서임을 받으며 재능을 꽃피웠다.
이때까지만 해도 루시우스는 자신의 실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마족과의 전쟁에 나갔던 아버지와 스승이 죽고, 모시던 영주 가문 또한 몰락하며 루시우스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빈틈을 노려 침략한 이웃 영주는 루시우스에게 자신의 밑에 들어오라 권유해 줬지만 루시우스는 명예를 위해 그를 따를 수 없었다.
그래서 가족들을 데리고 달아났다.
하지만 내전으로 치안이 무너지고 위태로운 세상에서 홀로 가족을 지키는 건 루시우스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루하루 굶주리고 위험천만한 고비가 루시우스를 괴롭혔다.
“그때 제 주제를 알았죠.”
루시우스는 처음으로 자신이 무능하고 나약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나마 자신 혼자라면 어떻게 건사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가족을 지키기에는 부족했다.
그런데 그 무렵 마침 남부의 내전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루시우스는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가족들과 함께 남부에 내려갔고, 아인의 밑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더는 자만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자신감 또한 사라졌다는 겁니다. 과연 제가 잘해 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작은 임무라면 상관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는 8천의 군대를 이끌어야 할 자리이고 나아가 아인이 왕조를 열기 위한 전초전과 같았다.
그 무게는 루시우스에게 부담감으로 작용했다.
“별것도 아닌 문제로 고민하고 있구나.”
루시우스의 고백에 자크론은 코웃음을 쳤다.
“답을 알려주자면 이건 네가 전혀 걱정해 줄 필요 없는 일이다.”
“네?”
“어떤 실수를 하더라도 그 녀석이 결국 다 수습해서 정리해 버릴 테니까.”
자크론의 평가에 루시우스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일부러 실패하란 게 아니다. 딱히 부담 가질 필요가 없다는 거지.”
자크론은 이번 아인의 계획과 병력의 구성을 보곤 코웃음을 쳤다.
8천.
분명 엄청난 숫자는 맞다.
그렇지만 남부 대전의 경우만 보아도 이 정도 규모의 병력은 나왔다.
이후로 동부, 중부, 서부를 점령한 자의 군세로 8천은 오히려 적은 감이 있었다.
“이 8천은 말이다. 북부 연합을 확실히 이길 수 있으면서 딱히 군비가 부담되지 않을 정도로만 병력을 구성한 것이다.”
아인이 진짜 작정하고 병력을 모았다면 8천이 아니라 그 몇 배나 되는 군세를 모으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그게 실패해도 된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실패 한 번으로 어떻게 될 정도로 만만하지도 않았다.
“그렇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루시우스는 눈만 깜빡였다.
아인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규모의 군세를 가졌는지는 아무리 루시우스라도 알 방법이 없었다.
기사단은 늘 아인의 곁에 함께했으나 행정적인 업무는 그들의 소관이 아니었으니까.
기사단 외부의 사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알았으면 표정 풀고 제대로 해라. 이런 기회가 어디 흔한 줄 알아?”
“감사합니다.”
자크론의 격려에 긴장이 풀린 루시우스는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올렸다.
곧 루시우스가 기운찬 얼굴로 자리를 떠나자 자크론은 혀를 찼다.
“성격에도 안 맞는 말을 하려니 소름이 끼치는군.”
자신이 한 말이고 행동이지만 정말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젊은 녀석이 축 처져 있는 게 거슬려서 한마디 했지만, 도통 자신의 성격과는 맞지 않았다.
아인에게 따로 들은 말이 없더라면 이런 일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부러 시험해 보고 있다고 했나?’
로크를 서부로 보내서 기사 100명을 지휘하게 하고 직접 판단하게 한 것.
그리고 이번에 루시우스에게 군대를 이끌게 한 것.
아인은 휘하 가신들을 본격적으로 시험해 보고 있었다.
내전의 종식과 새 왕가의 탄생을 앞두고 벌어지는 이 일련의 시험들은 모두 어떠한 목적을 두고 있었다.
눈치가 없는 이들이라면 단순히 나중에 내려줄 직책을 생각하겠지만 자크론은 생각이 달랐다.
‘여기서 만족하지 않을 테니.’
플레턴과 함께 있을 때 크레시안 왕국뿐만 아니라 타국에 대한 야욕까지 드러낸 아인이었다.
지금 가신들을 시험해 보는 것도 앞으로 점차 거대해질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일 터.
자크론은 딱히 아인의 야망에 뭐라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었다.
충동과 쾌락에 따라 움직이는 건 자신 역시 비슷했으니까.
다만 기껏 지금까지 키워낸 제자가 위험한 길을 가겠다는 걸 방관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놈이 성공해야 나도 역사에 이름을 남기든가 하지.’
이미 물욕 따위에 흔들리기에는 너무 늙어버린 몸이었다.
나이가 젊어지는 비약이라거나 하는 게 나타난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재물은 무의미했다.
그렇기에 자크론은 사후를 생각해야만 했고 거기서 허망함을 느꼈다.
지금껏 쌓은 악명이 대단하다고 해봐야 몇 년 이내로 묻혀버릴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크론은 아인을 이용하기로 했다.
아인이 살아남아서 정말 대륙을 통일하는 군주가 되든, 아니면 마족을 모두 물리치든.
어느 쪽이든 하나만 성공해도 역사에 아인의 이름은 오랜 세월 남을 것이며 두 가지 전부 성공한다면 천 년도 노려봄 직했다.
그렇게 된다면 스승인 자신의 이름 또한 아인의 이름과 함께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제명한 녀석의 이름이 남으면 마법사 협회도 곤혹스럽겠지.”
자크론은 훗날의 마법사 협회가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생각하며 비죽 웃었다.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겠지만 굉장히 웃긴 광경일 것이다.
협회에서 제명까지 시킨 마법사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다니.
자존심 강한 원로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하면 즐거워서 참을 수 없었다.
* * *
“적들이 오고 있습니다…….”
타이온 백작가의 군대는 혼란에 빠져있었다.
적들의 군대가 만만치 않은 것도 있지만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들을 이끌었어야 할 타이온 백작의 장남인 루스 타이온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암살당한 것도 아니고 술을 먹다가 급사했다는 이야기에 사기는 바닥으로 꺾이고 말았다.
언뜻 사고처럼 들리지만 루스 타이온이 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걸 아는 이들은 그게 자살이란 걸 알았다.
‘후계자나 되는 녀석이 가문을 내버려두고 자살하다니!’
마음 같아서는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붓고 싶지만 최근 그의 정신이 얼마나 불안정했는지 아는 자들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타이온 백작의 죽음 이후로 공고했던 후계자 자리가 흔들렸고 가신들의 배신이 잇따랐다.
그런 와중에 이길 수 없는 상대가 나타났으니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루스 타이온의 죽음 이후 타이온 백작가를 이끌게 된 건 기사단장인 헥스 자작이었다.
그는 사사롭게는 타이온 백작의 사촌 동생으로 루스 타이온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한 가신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법사가 아니었던 탓에 다른 가신들에 비해 발언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후우.”
헥스 자작은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친왕실파를 무너트렸을 때만 해도 세상 모든 걸 가진 것 같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상황이라니.
사촌 형이었던 타이온 백작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게 무너지고 말았다.
“너희는 모두 항복하라.”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희만이라니요?”
헥스 자작의 이야기에 기사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 생각을 강요할 수는 없지. 항복할 사람은 조용히 이 자리를 떠나주길 바란다.”
결전을 각오한 헥스 자작의 말에 기사들은 갈등에 빠졌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길을 선택해 줬으면 했다.
그러나 막상 함께 죽자고 말하려니 입술이 굳어진 것처럼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또 모르는 척 떠나자니 발걸음이 천 근처럼 무거웠다.
“저항한 귀족이야 죽는 게 당연하지만 항복한다면 목숨만큼은 살려줄 겁니다. 차라리 항복을 하시지요.”
“맞습니다. 네패스 대공은 실력 있는 이들을 잘 대접해 주기로 유명합니다. 헥스 자작님이라면 분명 한자리를 챙겨줄 겁니다. 딱히 타이온 백작님과 나쁜 감정도 없지 않았습니까?”
타이온 백작의 죽음이 아인에 의한 것이라는 걸 모르는 이들은 항복을 권했다.
그러나 헥스 자작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사촌 형의 죽음에 아인이 관여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나올 수 없었다.
‘황금십자회가 녀석에게 넘어갔다. 이거 하나라면 정말 우연일 수도 있어. 그런데 레일리 왕녀까지 숨기고 있었다?’
레일리 왕녀의 존재 자체가 상대의 진의를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이번에 마법사 협회까지 아인에게 붙었다는 것에서 헥스 자작은 확신을 가졌다.
처음 아인이 황금십자회에 알린 것처럼 협회와 관계가 우호적이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아인은 철저히 자신들을 속이고 황금십자회를 탈취해 간 것이다.
‘백작 각하의 죽음도 필시 놈의 짓이겠지.’
하지만 헥스 자작은 이 사실을 알고도 기사들에게 발설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되면 누구도 죽음을 피하려 들지 않을 테니까.
타이온 백작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기꺼이 제 목숨을 내버리려고 할 것이다.
설령 그것이 개죽음에 불과하다는 걸 알지라도.
‘죽는 건 나 혼자로 충분하다.’
기사단장임에도 타이온 백작을 지키지 못하였고, 후계자인 루스 타이온마저 죽음으로 내몰았다.
자신은 마땅히 목숨으로 그 책임을 다하는 게 옳았다.
“아니. 난 마지막까지 싸우겠다.”
헥스 자작의 말에 기사들은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봐도 헥스 자작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눈치였다.
말로 설득하는 정도로는 그 결심을 바꾸기 힘들어 보였다.
“그럼 저도 따르겠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아무 의미도 없는 개죽음이 될 테니까.”
“단장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난 다르다. 타이온 백작가의 기사단장으로서 적을 앞두고 검을 휘둘러보지도 않을 순 없지.”
“그럼 저희 역시 타이온 백작가의 기사로서 싸워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헥스 자작과 기사들 간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말리려는 기사들과 죽으려는 헥스 자작의 충돌에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어쩌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굴렀다.
“다들 죽고 싶어서 환장했느냐? 아직 살날도 한참 남은 것들이!”
“몇 살이나 차이가 난다고 그러십니까? 같이 살거나 같이 죽는 거 아니면 못 받아들입니다.”
부단장의 고집에 헥스 자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신만큼이나 기사들의 고집도 장난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 개죽음에 불과한 일에 기사들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구나.”
“그럼 생각을 바꿔주시는 겁니까?”
부단장이 반색하는 순간 헥스 자작은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뻐억!
“켁!”
빈틈을 보이던 부단장은 그 일격 한 번에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졌다.
주변의 기사들은 그 돌발 상황에 넋이 나가버렸다.
“이게 무슨?”
퍼억!
헥스 자작의 공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가까이에 있던 기사 몇 명이 더 쓰러지고 나서야 그들은 상황을 알아차렸다.
헥스 자작은 자신을 막으려는 기사들을 제압해 놓고 홀로 죽을 생각이었다.
“아, 안 됩니다! 제발 뜻을 바꿔주십시오!”
“비켜라!”
헥스 자작은 뽑지 않은 검을 쉼 없이 휘둘렀다.
예전부터 자신과 함께 고생한 동료도 있었고 아직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기사도 있었다.
그러나 헥스 자작은 출중한 실력으로 가로막는 기사들을 모두 때려눕혔다.
“헉헉!”
그러나 주변의 기사들을 다 쓰러트렸을 때 헥스 자작도 땀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나이는 젊지 않았고 상대한 기사의 수도 본래라면 이길 수 없을 정도였다.
어디까지나 기사들이 너무 당황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과 실력 있는 기사들을 먼저 제압한 덕분이었다.
‘두 번은 못 해먹겠군! 두 번 할 기회도 없겠지만…….’
헥스 자작은 멍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가신에게 눈길을 주었다.
“적들이 오면 모두 항복해라. 할 수 있겠지?”
“자, 자작은 어쩌려고?”
“해야 할 일을 해야지.”
헥스 자작은 성문을 개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허둥거리며 지시를 따랐고 헥스 자작은 말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말을 데려와라.”
“말이라면 옆에…….”
“저놈 말고. 프릭스를 데려와.”
프릭스는 헥스 자작이 얼마 전까지 타고 다니던 명마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상처도 입어 이제는 은퇴한 상태였다.
“왜 프릭스를?”
젊고 튼튼한 말 대신 이제는 제대로 달리지도 못할 말을 고르는 그의 행동에 모두가 의문을 표했다.
“녀석도 마지막까지 싸우는 쪽을 원할 테니까.”
곧 시종이 프릭스를 데려오자 헥스 자작은 힘껏 그 위에 올랐다.
프릭스는 무장한 헥스 자작의 무게에 아픔을 느꼈으나 묵묵히 그를 받아들였다.
“가자! 우리의 마지막 질주다.”
헥스 자작이 고삐를 쥐자 프릭스는 부상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기쁘게 달려나갔다.
남겨진 이들은 헥스 자작의 뒷모습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헥스 자작은 한참을 달려 아인이 보낸 군대와 마주할 수 있었다.
“헥스 자작?”
사전에 초상화로 얼굴을 확인한 이들과 황금십자회의 귀족들이 헥스 자작을 알아보고 당황했다.
타이온 백작가의 기사단장이 병력도 없이 혼자 나타났으니.
“어쩐 일로 혼자 왔소?”
“우리 타이온 백작가는 무조건 항복할 것이다.”
“그 말을 하려고 직접 온 것이오?”
“아니.”
스르릉.
헥스 자작은 그대로 검을 뽑았다.
“기사단장인 나는 기사단장으로서 적을 상대해야겠지.”
“혼자서 죽을 작정이오?”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다.”
헥스 자작의 말에 귀족들은 고민에 빠졌다.
고작 적 한 명을 죽이는 건 어려울 게 없었으나 그의 명예로운 행동에 망설임이 들었다.
저러한 기사를 과연 죽여도 될 것인지에 대한 의문.
그리고 싸운다고 해도 명예로운 기사를 단체로 공격할 수는 없었다.
마땅히 상대를 선별해서 내보내야 할 텐데 헥스 자작은 꽤 실력 있는 기사였다.
어중이떠중이가 나갔다가는 괜히 희생자만 나올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제가 나서야겠습니다.”
상황을 살피던 루시우스가 직접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인의 깃발을 내걸고 있는 그 모습에 헥스 자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대는 누구지?”
“내 이름은 루시우스다. 네패스 대공 전하의 명을 받들어 휘하의 군대 8천을 이끌고 있지.”
헥스 자작은 반색했다.
상대는 단순히 실력 있는 기사가 아니라 아인이 보낸 대리인과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눈앞의 이 기사를 무찌르는 건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상대로서 부족함이 없구나.”
헥스 자작은 상대가 마음을 바꾸기라도 할까 걱정되어 바로 달려들었다.
프릭스는 마치 전성기에 이른 것 같은 속도를 내며 헥스 자작을 루시우스의 앞으로 옮겨주었다.
채앵!
루시우스는 헥스 자작과 검을 부딪치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휘릭!
헥스 자작의 검이 번개처럼 움직이며 연이어 루시우스를 몰아붙였다.
루시우스가 타고 있는 말이 상대의 기세에 눌려 주춤거렸다.
“저, 저거 위험한 거 아니오?”
그 모습을 본 귀족들은 당황했다.
만일 여기서 헥스 자작에게 패배하기라도 한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물론 전쟁의 결과까지 바뀌지는 않겠지만 헥스 자작이 얻을 명성이 아인에게 타격이 되기 때문이다.
비록 아인이 없는 자리라지만 대공이 선택한 기사의 위치는 그만큼 막중했다.
“괜찮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를 본 자크론과 기사들은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헥스 자작은 분명 강했다.
아마 이 자리에 있는 다른 기사들도 헥스 자작을 쉽게 꺾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루시우스는 달랐다.
‘로크 단장님이 그랬다지. 싸움이 시시해서 당황할 정도였다고.’
루시우스는 로크가 서부를 다녀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헥스 자작과 검을 부딪치며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상대가 결코 약한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너무 손쉽게 막아내고 있었다.
루시우스가 인상을 찡그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상대는 분명 명예롭고 강한 기사인데 그런 기사를 상대로 느끼는 감상이 고작 ‘시시하다’라니.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헉헉!”
헥스 자작도 처음에는 몰아붙이는 상황에 신이 났지만, 곧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상대는 전혀 빈틈이 없었고 호흡 역시 일정했다.
반면에 자신은 다시 땀범벅에 입은 연신 헐떡거리고 있었다.
“힘들게 해서 미안하오.”
루시우스는 짧은 사과와 함께 반격에 나섰다.
명예로운 기사를 상대로 괜히 모욕을 준 거 같아서 민망했다.
“큭!”
루시우스의 반격에 헥스 자작이 급히 검을 회수했으나 무의미했다.
촤악!
루시우스의 검은 헥스 자작과 그가 타고 있던 말 프릭스의 머리까지 일격에 베어냈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씁쓸한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