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15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15화
115화
* * *
크레시안 왕국의 결혼식은 내가 알던 결혼식과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
나라마다, 신분마다, 지역마다 결혼 문화가 제각각이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내가 해야 했던 결혼식은 일단 하루만 하는 게 아니었다.
닷새라는 긴 시간을 잡아두고 온갖 절차가 진행되었다.
도로나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멀리서 온 하객이 중간에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도록 이런 문화가 생겼다는데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실제로 이런 긴 결혼식을 진행하는 건 왕실이나 대영주들 정도가 유일하다고도 하고.
닷새 중 첫날은 쉽게 끝났다.
오전에만 손님을 맞이하는 간단한 일정을 치르고 오후는 그저 담소를 나누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으니까.
그러나 둘째 날부터는 본격적으로 여러 행사가 이루어졌다.
셋째 날에는 예물을 교환했고, 넷째 날에는 합방이 있었다.
그렇다.
닷새의 결혼식에서 넷째 날에 공식적으로 합방이 있었다.
왜 중간에 합방이 있냐고 물으니 마지막 날에 양측의 의사를 다시 묻기 전 서로에게 문제가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럴 거면 차라리 첫날에 있는 게 맞지 않는가 싶지만 문화가 그렇다니 받아들일 수밖에.
마지막 닷새에는 그나마 내가 알던 결혼식과 흡사하게 진행되었다.
지구에서 친구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했던 경험을 살렸는데 준비가 제대로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결혼식을 하는 내내 정신이 어딘가로 나가 있던 기분이다.
‘어쨌든 이걸로 끝났다.’
마지막으로 신혼부부라는 걸 알리는 전통의상을 이틀 더 입어야 한다는 걸 빼고 모든 절차가 끝났다.
그렇다면 이제는 예정된 일을 진행할 때였다.
“준비는 다 되었겠지?”
“물론입니다.”
모든 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결혼식 도중에는 웃고 있던 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진중한 얼굴로 내 말을 경청했다.
내 결혼식은 귀족들에게 있어서는 짧은 휴식이었다.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던 귀족은 없었겠지만.
“보급은 이미 완료했고 병사들의 상태도 만전입니다.”
“그럼 예정대로 세 부대로 나누어 타이온 백작가로 진격한다.”
출정 계획에 관해 설명하며 황금십자회 멤버인 중부 귀족들을 보았다.
그들도 마음의 정리를 끝냈는지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이번 작전에는 마법사 협회가 참가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제법 큰 술렁임이 있었다.
마법사 협회 장악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협회 쪽에서 결국 백기를 들고 협력하겠다는 뜻을 보였으니까.
난 협회가 나를 따르기로 한 증거로 타이온 백작가를 제물 삼기로 했다.
어차피 군대와 함께할 것이기에 승리는 당연한 것이고 협회는 숟가락만 얹으면 되었다.
그것만 잘 해내면 나는 협회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많은 이권을 제공해 주기로 했다.
“마법사 협회까지 움직이다니.”
“크레시안 왕가에서도 못했던 일인데.”
남부 연합의 영주들이 나를 향해 부담스러울 정도의 눈빛을 보내왔다.
“별도로 궁금한 사안이 있나?”
“네패스 대공 전하께서는 언제 출정하십니까?”
한 귀족이 질문을 던지며 나를 대공 전하라 칭했다.
왕녀인 레일리와 결혼을 하게 되면서 내 작위가 다시 한번 뛰어올랐기 때문이다.
이건 백작처럼 그냥 자칭한 것과는 의미가 달랐다.
레일리의 존재를 공표하면서 얻게 된 작위였기에.
“결혼식은 끝내야 하지 않겠나?”
이 전통의상을 벗기 위해서는 이틀이 지난 뒤 굳이 부부가 서로에게 다른 옷을 갈아입혀 줘야 했다.
말이 닷새지 실제로는 일주일짜리 결혼식인 것이다.
다만 마지막 절차는 참관인이 굳이 필요하지 않아서 보통은 닷새만 결혼식으로 보고 있었다.
실제로 전통의상을 벗을 때까지 결혼식에 하객이 남아있는 경우는 드물다고 하고.
“이 옷만 벗으면 바로 갈 예정이다.”
중부에 모인 군대의 숫자는 약 1만 2천.
그중에서 내 병력이 8천이었다.
그런데 그들을 이끌어야 할 내가 계속 빠질 수는 없는 일.
일단 먼저 보내기는 하지만 급하게 뒤쫓아갈 계획이었다.
“따로 움직이시면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당연히 대비는 되어있다.”
군대와 떨어져서 움직이는 것이기에 철저한 호위가 준비되어 있었다.
당장 이번에 서부를 다녀온 100명의 기사를 포함해 내 정예 대부분이 나와 함께 움직인다.
기사 100명이면 솔직히 왕의 호위라고 해도 과한 숫자였기에 내 안전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더 질문이 없다면 그만 출발하지.”
내 허락을 끝으로 크레시안 왕국의 내전을 끝내기 위한 출정이 시작되었다.
* * *
루스 타이온은 타이온 백작의 장남으로, 그의 뒤를 이어 작위와 영지 등 모든 것을 물려받을 후계자였다.
하지만 그의 입지는 전혀 단단하지 못했다.
아버지인 타이온 백작과 달리 마법사의 재능은 전혀 타고나지 못했으며 정치적 수완 역시 백작의 것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전까지 루스 타이온은 자신의 자리가 흔들릴 거라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왜냐하면 다른 형제라고 해서 마법 재능을 타고난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이온 백작의 죽음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변수로 인해서 그 단단하게만 보였던 지반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으로 발생한 문제는 가신들의 충성에 조건이 생긴 것이었다.
후계자이기에 당연히 자신을 따라줄 거라고 믿었던 가신들은 이권을 요구하였고, 그것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자신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 틈에 다른 형제들까지 자신의 자리를 넘보기 시작하면서 루스 타이온은 생각도 못 한 손해를 입어야 했다.
“아버님이 살아계셨을 때만 해도 나와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던 주제에!”
충성에 대가를 요구한다는 건 자신을 진심으로 따르는 게 아니란 의미였다.
물론 나이부터 경험, 마법의 부재 등 많은 부분에서 자신이 아버지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건 알았으나 결국 그 자리를 물려받을 후계자라는 건 변치 않았다.
그런데도 가신들의 태도는 상당히 쌀쌀한 편이었다.
황금십자회의 모두가 마법사였기에 비마법사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자리에 앉혀준 건 다 아버님인데 감히!”
루스 타이온은 그날 밤새도록 방에서 이를 갈아야 했다.
그러한 불만조차 면전에 대고 말할 수 없는 입지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히 대가를 약속받은 가신들은 제대로 자신을 따라주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어차피 자신의 자리는 안정될 테고 그러면 나중에라도 가신들을 누를 수 있었기에 루스 타이온은 분노를 애써 삼켜냈다.
하지만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 네패스 백작의 군대가 중부로 넘어왔습니다!
갑자기 들려온 청천벽력 같은 소식.
동의는커녕 통지조차 없이 군대를 불렀다는 말에 타이온 백작가는 긴장 상태로 들어갔다.
상황을 파악하고 항의하기 위해 몇몇 가신이 아인을 찾아갔으나 그들은 그대로 소식이 끊어져 버렸다.
루스 타이온은 얼마 전 실종된 카타리나를 떠올렸다.
아버지의 가신 중 하나였던 그녀는 이유조차 제대로 밝히지 않은 채 그의 허락 없이 멋대로 아인을 찾아갔다.
그리고 실종되었다.
마지막 행적을 추적한 끝에 네패스 백작령을 나왔다는 것까지는 확인했으나 그뿐이었다.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이후의 행방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한 번은 우연일 수 있지만 두 번은 우연이 아니지.”
루스 타이온은 어리석지 않았다.
가신들의 잇따른 실종의 원인이 아인임을 추측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목적.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게 좋은 목적일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역시 우리를 제거할 생각인가?”
루스 타이온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타이온 백작가에 남아있는 전력은 가신들의 군대를 모은다고 해봐야 3천 안팎.
고작 이 정도 군대로는 몰려올 네패스 백작의 군대를 감당할 수 없었다.
소문으로 들었을 뿐이지만 네패스 백작은 엄청난 재능을 가진 천재 마법사였으니까.
그런데 나쁜 소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 세상에! 왕녀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죽은 줄 알았던 레일리 왕녀가 돌아왔습니다!
마치 무언가로 세게 후려친 듯 뒤통수를 얼얼하게 만든 소식.
피의 연회로 죽은 줄로만 알았던 크레시안 왕가의 혈족이 한 명이나마 살아 돌아왔다.
상대의 이름은 레일리 크레시안.
크리스텔 왕비가 낳은 왕가의 정통성을 잇는 왕녀였다.
뭐, 그녀의 등장이 충격적이기는 했으나 엄연히 따지면 그 자체로는 위협이 되지 않았다.
친왕실파는 이미 모두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지지 기반도 없이 왕녀가 돌아와 봐야 왕녀를 따를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레일리 왕녀는 하필이면 남부 연합의 수장이자 타이온 백작의 죽음 이후 황금십자회를 장악한 아인과 혼인을 한다고 공표했다.
이 소식에 왕국 전체가 뒤집혔다.
다른 귀족도 그렇지만 특히 대영주파는 간담이 서늘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철저히 속아온 거야!’
왕녀의 혼인이라는 중요한 문제가 갑자기 정해졌을 리 없었다.
네패스 백작은 처음부터 왕녀와 한편이었고, 그 사실을 숨긴 채 행동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황금십자회에 접근했던 것도 모종의 계획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아버지인 타이온 백작의 죽음조차 네패스 백작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알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전투를 대비해 물자를 모으고 병력을 대기시켜 두기는 했다.
하지만 적들의 숫자나 장비, 경험 등은 아군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차이가 컸다.
직접 싸우지 않고도 승패를 예상하는 게 전혀 어렵지 않을 정도로.
“백작 각하,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그때 아인의 군대를 주시하던 이들에게서 보고가 올라왔다.
루스 타이온은 이것이 부디 좋은 소식이기를 간절히 빌었으나 마음속으로는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무슨 소식이지?”
“그것이…….”
보고를 올려야 할 마법사의 표정이 무척이나 침울했다.
애초에 지금까지 올라온 소식 중에 좋은 소식은 전혀 없었다.
기껏 고생해서 오랜 숙적이었던 친왕실파를 꺾고 남부 연합과 동맹을 맺었다고 여겼지만 그 이후부터는 내리막길만 걷고 있었으니까.
“혼인이 끝난 네패스 백작이 대공의 자리에 올랐으며 1만이 넘는 군세를 북상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마법사 협회까지 포함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희망이 없는데 협회마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나쁜 경우보다도 더한 소식이었다.
루스 타이온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렇게나 중립을 떠들어대던 마법사 협회가 중립을 지키지 않을 정도라면 이는 상대의 승기가 명백하다는 소리였으니까.
이 모든 게 그저 지독한 악몽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여전히 비참한 현실이었다.
‘내 목을 노리는 거겠지.’
상대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행동이기에 그 의중을 이해하는 게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이해하면 할수록 절망이 드리워질 뿐이었다.
“적들은 얼마나 걸린다더냐?”
“진군 속도로 봤을 때 이틀이면 도착할 겁니다.”
1만이 넘는 군대가 움직이고 있는데도 고작 이틀.
이틀 뒤라면 모든 게 짓밟히고 말 것이란 사실에 루스 타이온은 좌절했다.
“이 타이온 백작가가 이렇게 끝나는 건가?”
루스 타이온은 자신의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했다.
어느 왕국에나 있는 평범한 귀족 가문이 아니라 이웃 왕국에서 망명한 왕족의 후예이며 크레시안 왕가와 대립한 대영주파의 선봉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황금십자회를 이끌었던 자신의 아버지는 매우 뛰어난 영주로, 탁월한 정치적 수완과 전술적 식견으로 친왕실파를 쓸어버린 영웅이었다.
“적이 아무리 강대하다고 해도 타이온 백작가의 후계자라면 포기해선 안 됩니다!”
“그럼 나더러 어쩌라는 건가?”
싸워봐야 필패.
항복한다고 해도 상대가 자신을 살려줄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하필 레일리 왕녀가 살아 돌아왔으니.
친왕실파를 없앤 타이온 백작은 레일리 왕녀에게 이미 미움을 단단히 샀을 게 분명했다.
“마법 하나 못 쓰는 내가 무슨 수로 1만 군대를 상대한다고!”
만약 기적적으로 1만 군대를 막을 수 있다고 해도 뾰족한 방법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이미 상대는 왕국에서 가장 드넓은 영토를 차지했으니까.
“세상이 원망스럽구나! 나에게 아무런 기회도 주지 않고 이렇게 죽음으로 내몰다니!”
루스 타이온은 서럽게 소리쳤다.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모든 걸 다 준 듯했으나 그것이 손에 들어오기 전에 온갖 더러운 꼴을 보여주며 그를 좌절시켰다.
“술을 가져와라.”
“무, 무슨 말씀입니까? 이런 상황에 술이라니요?”
“제정신으로는 도무지 못 버티겠단 말이다!”
루스 타이온의 고함에 마법사는 화들짝 놀랐다.
지금껏 꽤 오래 그를 모셔왔으나 고함을 지르는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빨리 술을 가져와라!”
“아, 알겠습니다.”
마법사는 서둘러 하인을 시켜 술을 가져왔다.
하인은 냉큼 술을 가져왔으나 건네주는 표정에는 온갖 감정이 다 드러나 있었다.
적들이 오고 있다는데 술을 마신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수가 없던 것이다.
게다가 루스 타이온은 원래 술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이걸로는 부족하다!”
“얼마나 마시려고 그러십니까?”
딱 한 병의 술이 준비된 것에 루스 타이온은 아예 역정을 냈다.
마법사는 부디 이것만으로 만족하기를 바랐으나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엄청난 양의 술이 올려졌다.
그리고 다음 날.
적들의 진격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 다시 루스 타이온을 찾았던 마법사는 모든 술을 퍼마시고 죽어있는 자신의 주인을 보게 되었다.
“아아!”
술에 취해서 억제하지 못했는지 정말 죽을 생각으로 술을 계속 먹은 건지.
마법사는 루스 타이온의 마지막 뜻을 알 수 없었으나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깨달았다.
그가 모셔왔던 이 가문이 몰락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