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IP 영주님의 품격-112화 (112/250)

VVIP 영주님의 품격 112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12화

112화

* * *

황금십자회는 중부 권력의 핵심이다.

그들 대부분이 나에게 넘어온 건 곧 중부의 눈과 귀를 장악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 때문에 타이온 백작가의 잔당은 내 군대의 진격을 상당히 늦게 알아차렸다.

“군대라니? 동맹의 허락도 없이 멋대로 군대를 들이는 게 말이 되는 겁니까?”

결혼식 준비를 위해서 왕궁을 드나들던 나를 향해 뒤늦게 타이온 백작의 가신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내가 군대를 들인 것에 대해서 소리 높여 항의했다.

실제로 동맹에게 허락 없이 들어온 거라면 문제가 될 부분이기는 했다.

“허락은 받았지.”

하지만 이들은 동맹의 대상이 아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그 이야기를 왜 댁들에게 해줘야 하지?”

“그럼 대체 누구에게 허락을 받았다는 겁니까?”

“나.”

내 군대와 남부 연합의 군대를 들이는 것.

그것을 지시한 것도, 허락해 준 것도 모두 나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왜 말이 안 되지?”

나는 남부 연합의 수장이지만 동시에 황금십자회의 수장이기도 했다.

동맹이라고 해도 엄연히 이름이 다른 독립된 세력들.

그러니 허가를 받는 과정은 필요했고 나는 황금십자회의 이름으로 이를 받아주었다.

“궤변이오!”

“그래, 궤변이지.”

누군가의 외침에 나는 흔쾌히 긍정해 주었다.

맞다, 궤변이다.

내가 요청하고 내가 허가를 내리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을까?

그렇지만 절차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급한 일이라서 같은 멤버들에게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으니 실수는 있었어. 인정하지.”

“그게 실수란 말로 해결될 문제요!”

“그러니까 아까부터 대체 왜 그대들이 따지는 거지?”

이들은 모두 내 영향력 아래에 들어오는 게 싫어서 황금십자회를 떠났던 몸이다.

황금십자회와도 연관이 없는 엄연한 별개의 세력.

내가 이들에게 황금십자회의 일에 대해 굳이 전달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도, 동맹을 맺을 땐 우리도 있지 않았습니까?”

“동맹은 남부 연합과 황금십자회의 동맹이다. 황금십자회에서 나간 그대들에게 동맹의 일에 대해 알려줘야 할 어떤 이유도 없지.”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린 이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자신들의 처지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스르릉.

내 신호에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사방에서 검을 든 기사들이 다가오자 타이온 백작가의 가신들이 겁먹고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무슨 짓입니까?”

“잊었나? 지금은 내전 중이다. 상대 영주가 이렇게 대놓고 돌아다니는데 잡지 않으면 바보지.”

일부 사람들은 중부가 완전히 정리되었다고 착각하는 데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동맹은 남부 연합과 황금십자회만 해당된다.

중부의 다른 세력들은 동맹의 대상이 아니니까 이는 곧 적이란 의미였다.

“그대는 명예도 모르오! 무장하지도 않은 상대를 붙잡으려고 하다니?”

“명예라…….”

어느 귀족의 호통에 실실 웃음이 나왔다.

그런 게 있었다면 타이온 백작을 암살로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같잖은 연기를 하면서 눈물까지 흘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역에 따라 같은 귀족마저 차별하는 치들이 명예를 떠드는 건가?”

이들이나 카타리나라는 여자나 딱히 차이는 없을 것이다.

내가 명예가 없는 건 사실이지만 이들이라고 딱히 명예롭지는 않다.

“그, 그건…….”

“됐다. 다 잡아라.”

쓸데없이 말싸움하면서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결혼식을 앞둔 왕궁에서 피를 보는 것도 안 될 일이고.

그렇기에 나를 찾아와 항의하던 귀족들은 모두 그대로 붙잡혀서 지하 감옥으로 옮겨졌다.

결혼식이 끝나면 그때 처형할 것이다.

“군대가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와서 항의할 게 아니라 전쟁을 준비해야 할 텐데. 어지간히 멍청하군요.”

마침 같이 소란을 들은 네일이 다가와 끌려간 귀족들을 평가했다.

“그렇군. 그런 점에서 카타리나라는 여자가 그나마 똑똑했을지도.”

적어도 누가 우위인지 정도는 구분했다.

“아니, 꼭 그렇지는 않나?”

뭐, 이후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서 내 앞에서 멋대로 입을 놀리다가 당해버렸지만.

게다가 다니엘이 그녀를 붙잡아 고문해 국새를 찾아왔는데, 이 과정에서 나온 평가가 굉장히 나빴다.

멍청한 여자라고 욕한 걸 봐서 또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방금 저 귀족들처럼 내가 자신들과 동맹이라고 계속 착각했는지도 모르고.

피아 식별 하나 제대로 못 하다니. 저런 머저리들을 데리고 친왕실파를 무너트렸을 타이온 백작의 유능함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막상 죽이고 나니까 아쉽다.

가뜩이나 쓸모 있는 인재가 없는데.

“국새는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레일리에게 의향을 물어야겠지.”

새로 만드는 게 어려운 건 아니고, 또 그게 맞기야 하다.

그래도 새로운 나라를 세울 건데 국호나 국새를 그대로 쓸 수는 없으니.

물려받는 건 왕궁으로 충분했다.

“그녀가 보관할 수도 있고 그냥 없애버릴 수도 있고.”

“아마 없애겠지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 국새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괜히 그런 걸 남겨두는 건 네패스 백작 각하를 두고 딴마음을 품었다는 의미로 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겠지.”

기껏 고생해서 구해 온 다니엘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차피 없어질 물건이란 건 매한가지였다.

이런 걸로 나와 협상하려고 한 카타리나라는 여자도 참 멍청했지.

국새가 건국 설화와 엮였는데 뭐 어쩌라고.

나를 용인하지 못하는 왕국민이 있더라도 상관없다.

왕녀인 레일리가 존재하는 한 나는 힘뿐만이 아니라 정통성마저 문제없이 갖출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거 비싼가? 나무로 만들었다는데.”

“신성수가 상징성은 크지만 돈으로 거래되는 물건은 아닙니다. 그래서 값을 매기기 힘들 거 같습니다.”

“이거 참, 녹여서 팔거나 다른 걸 만들 수도 없고.”

재활용조차 못 하니 정말 쓸모없는 도장이었다.

“애물단지로군.”

곧 남부 연합의 영주들과 함께 레일리가 도착했다.

나는 직접 나서서 모두를 맞이해 주었다.

“자, 모두 안으로 들어가지.”

일행을 맞이한 곳에는 중부의 귀족들이 몇 명 모여있었다.

내 초청장을 받고 온 황금십자회 멤버들이었다.

그들은 군대를 이끌고 등장한 남부 연합 영주들을 보며 표정이 굳어있었다.

내가 앞서서 상황을 설명했고 그들은 내 편이라는 걸 강조했지만 분명 심란할 것이다.

그래도 한때 동료였던 타이온 백작가가 사라지게 될 걸 알았으니까.

이들이 거기에 상처받지 않고 돌아올 보상에 만족할 수 있는 속물이기를 바랄 수밖에.

“직접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군요. 저는 남부 연합의…….”

“아, 반갑습니다. 저는 중부에서…….”

두 동맹의 귀족들은 서로 모여서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그러나 표정에서부터 서로 다른 온도 차가 드러나고 있었다.

남부 연합의 영주들은 하나 같이 여유 만만인 반면에 황금십자회는 혼란스러워하고 걱정하는 기색이 만연했다.

‘뭐, 그것도 오늘까지지.’

어차피 이제는 모두 한식구가 될 사이인데 서로 분위기가 냉랭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서로가 가지고 있던 비밀도 모두 공유하면서 거리를 좁힐 것이다.

그게 저들이 원하던 건 아니겠지만, 억지로라도 한배를 타게 된다면 어차피 다른 선택지는 없어질 것이다.

망망대해에서 배를 뛰쳐나가면 익사할 수밖에 없으니까.

“이미 이 자리에 온 모두가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말해 두어야겠지.”

나는 레일리와 손을 맞잡고 귀족들 앞에 나섰다.

그에 중부의 귀족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그들로서는 레일리를 직접 보는 게 처음이니까.

하지만 이내 표정이 조금씩 굳어졌다.

“왠지 누굴 닮은 거 같은데?”

“얼굴이 많이 익숙한데?”

레일리는 자신의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이제는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녀를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은 이제 이 나라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 자리에 있는 귀족들은 좋든 싫든 내 뜻을 따라야 했다.

“헉! 레일리 왕녀 저하!”

“뭐라고?”

“정말 저하시잖아!”

소란스러워진 중부 귀족들과 달리 남부 연합은 조용했다.

그에 중부 귀족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들만 놀란 시점에서 이미 남부 연합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설마 남부 연합이? 아니, 하지만 분명 남부 연합을 만든 건 마이어드 후작가라고…….”

“설명해 줄 테니 모두 진정하게.”

우선 소란을 가라앉혔다.

그러나 말 그대로 소리만 내지 않고 있을 뿐이지 흔들리는 동공과 초조한 손짓을 감추지는 못했다.

“내 곁에 있는 분은 레일리 왕녀 저하시다.”

어째서 왕녀가 살아있는지부터 어떻게 나와 약혼을 하게 되었는지.

그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럼 백작 각하께서는 왕실을 재건하시는 겁니까?”

“아니.”

한 귀족의 질문을 바로 부정했다.

단호한 대답에 귀족들의 표정이 모호하게 변하며 레일리에게 시선을 향했다.

“전 마이어드 후작가의 가주로서 네패스 백작 각하께 충성을 다할 겁니다.”

시선을 받은 레일리는 직접 나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자신의 진심을 전달했다.

그제야 귀족들도 안정을 되찾았다.

왕녀가 살아있다는 부분에서는 놀랐지만 결국 크레시안 왕국이 부활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 충성의 증거로 우선 이번 서부에서 얻은 영지를 모두 네패스 백작 각하께 바치려 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녀의 발언에는 다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전에 아무런 이야기도 전해 듣지 못한 바였으니까.

“그게 무슨?”

“충성스러운 신하를 자처하는 몸으로서 이 나라를 이끌게 될 분께 마땅히 해드려야 할 일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저희는 이미 뜻을 모았습니다.”

레일리의 말을 남부 연합의 영주들이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나섰다.

자기들끼리는 이미 이야기가 끝났다는 뜻이다.

하긴, 이런 내용을 논의도 없이 이야기할 리는 없었다.

만일 그랬다면 즉각 반발했을 테니까.

‘그런데 대체 왜?’

정말 나에게 그냥 땅을 바치고 싶어서는 아닐 것이다.

같이 서부에서 싸웠던 로크나 자크론이라면 뭔가를 알 텐데 미리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게 아쉬웠다.

아무리 내 가신이라도 약혼녀이자 대영주인 레일리에 비하면 순서상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부디 저희의 마음을 받아주십시오.”

대놓고 거절하기에도 뭐한 상황이었다.

분명 나에게 뭔가 바라는 게 있기는 할 텐데.

“그 문제는 나중에 논의하지.”

정보가 부족하니 일단 뒤로 미뤄야 한다.

다행히 레일리는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잠시 샜군. 어찌 되었든 나는 크레시안 왕국의 왕녀 레일리 크레시안과 정식으로 혼인을 치를 것이다. 결혼식에서 그녀의 신분을 공표할 테니, 이를 왕국 전역에 알려주길 바란다.”

“마땅히 따르겠습니다.”

“축하할 일인데 당연하지요.”

남부 연합은 진심으로 좋아했고 중부에서는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그 와중에 이 자리에 나온 일부 귀족 영애들의 표정이 어둡게 물들어 있었다.

언감생심 이 나라에서 제일 고귀한 여성이 될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텐데 그게 날아갔으니.

아무리 그래도 애초에 혼인한다고 모은 건데 귀족 영애들을 데려오는 건 대체 무슨 경우야?

내 생각에 황금십자회는 절대 타이온 백작의 가신들을 쓸어버리는 것에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저런 뻔뻔한 이들에게 그러한 동정심이 있을 리 없다.

그들의 영토를 나눠준다고 하면 얼씨구나 좋아할 거 같았다.

“그럼 이 자리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각자 자유롭게 이야기들 나누도록.”

아까 일에 대해서 묻고 로크에게 보고도 받을 겸 나는 서둘러 자리를 파했다.

그렇다고 해도 나와 내가 이끌고 나온 레일리를 제외하면 모든 귀족은 자리에 남았다.

서로 나눠야 할 대화가 꽤 많을 테니.

대체로 한쪽이 일방적으로 묻고 한쪽은 대답만 하는 쪽이겠지만.

“그럼 이제 설명 좀 해주시겠습니까?”

레일리를 데리고 별도로 마련된 방으로 갔다.

로크도 금방 따라붙었지만 일단은 레일리에게 묻는 게 먼저였다.

“남부 연합의 과시예요.”

“과시?”

“중부의 귀족들에게 우리는 네패스 백작에게 이만큼 충성한다고 보여주는 거죠.”

“이해가 잘 안 됩니다.”

굳이 서부의 영토라는 보상을 걷어찰 만한 이유로는 부족했다.

“그게 말이죠…….”

레일리의 시선이 로크에게 향했다.

그에 로크는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하고 나에게 서부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하아.”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비교적 쉬운 싸움이 되리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내가 전장에 없었는데도 적이 마구 항복했다니.

그나마 맞선 적도 순식간에 무너트리며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승리를 얻었다.

그 원인이 내 명성에 있으니 남부 연합은 기껏 노력한 게 무색하게 권리를 주장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차라리 이러한 사실을 모를 중부의 귀족들에게 충성심이나 과시하기로 한 것이다.

뭐, 나로서도 나쁘지는 않았다.

적당히 챙겨준다면 뒷말이 나오지는 않을 테니까.

다만 의외인 건…….

“혹시 이 계획을 준비한 게 누구입니까?”

“그, 그건 왜…….”

“일단 레일리는 아닐 테니까요.”

명백하게 중부 귀족을 자극하고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는 게 느껴지는 계획이다.

레일리라면 이런 계획을 생각할 리 없다.

그렇다면 남부 연합의 영주 중 누군가가 준비한 계획이란 소리였다.

“레일리, 당신이 직접 귀족들의 다툼을 부추기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압니다.”

“아, 그게…….”

“혹시 바이든 자작입니까? 아니면…….”

의심스러운 귀족들을 하나씩 나열하는데 레일리의 표정이 매우 나빠졌다.

왜 이렇게 심각하게 반응하는지 알 수 없었다.

딱히 화가 난 건 아닌데.

“화가 난 건 아닙니다. 다만 누군가가 당신을 업신여기고 이용하려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서…….”

“미안해요.”

“네?”

“알고도 받아들인 거예요.”

“아니, 왜?”

나는 능력에 따른 기용과 성과에 대한 보상을 적극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레일리는 이러한 나와 달리 소외되는 이들, 피해를 본 이들을 챙기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봤다.

그러나 지금 이 행동은 거기에 명백하게 위배된다.

남부 연합이 딱히 중부 귀족들에게 꿇리는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안했거든요.”

“불안해요?”

“당신이 다른 귀족 영애한테 한눈을 팔까 봐.”

“농담이라면 재미없습니다.”

레일리는 내 진심을 안다.

내가 그녀에게도 별다른 관심이 없으며 그 이유가 취향 때문이 아니라 야망에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알아요. 아는데도 막상 소문을 들으니까 저도 모르게 흔들리더라고요.”

이어지는 말에 차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외척은 위험하다.

왕이 가진 권력도 대단하지만 그 정실부인인 왕비의 권력 역시 매우 강하다.

그래서 제대로 된 왕이라면 외척이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게 맞다.

왕가의 혈통을 타고났으며 교육을 받았을 그녀가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는데.

그런데 이제 와서 레일리는 남부 연합의 영주들을 크게 끌어안으며 중부 귀족들을 한 방 먹이는 데 동참했다.

“왕녀라는 신분은 당신과 혼인하는 순간에 그대로 빛이 바래게 되어버리죠. 그러면 나에게 남는 건 마이어드 후작가뿐이에요.”

레일리의 말에서는 묘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본래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야 한다.

내전으로 인한 혼란 탓에 각 지역에서 때로는 여성이 귀족 가문을 이끄는 가주이자 자신의 땅을 가진 영주가 되기는 했으나 이는 극소수.

게다가 대영주로서는 레일리가 유일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어요.”

레일리는 나의 야망과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내가 레일리와 혼인을 하려는 이유 역시 철저한 계산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니까.

그러니 같은 이유로 자신이 아닌 다른 귀족 영애를 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혼인이야 그녀와 하겠지만 첩을 들이는 건 얼마든지 자유로웠고 경우에 따라서는 훗날 그녀가 버려질 수도 있었다.

본래라면 대영주 세력을 버리는 일은 어리석지만 일국의 군주에게 대영주 하나 정도는 그리 대단할 것도 없었다.

하물며 마이어드 후작가는 세력이 약해진 직후였으니 더욱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나를 지지해 줄 귀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제는 친왕실파가 완전히 사라진 크레시안 왕국에서 레일리를 지지해 줄 유일한 세력은 남부 연합이었다.

“그들이 있다면 어떤 경우에도 나를 버릴 생각은 못 할 테니까.”

지지해 주는 귀족이 있다면 레일리는 그저 자리를 지키는 게 아니라 첩들을 누르고 휘어잡을 힘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군요.”

레일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해서 혼인을 한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란 걸 아니까 그녀는 일말의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의 기반을 마련하기로 했고 남부 연합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녀의 행동을 뭐라고 하기도 어려운 게 원인을 제공한 상대는 나 자신이었다.

묘하게 레일리에게는 약해지고 휘둘리는 느낌이라서 그녀가 속으로 불안해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