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10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10화
110화
【 혼인을 앞두고 】
남부 연합의 영주들이 중부에 도착했다.
그들의 방문은 큰 의미가 있었다.
서부 침공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여 크레시안 왕국의 다섯 지역 중 네 곳을 점령했다는 것.
그로써 왕국을 평정하기까지 단 한 걸음을 남기고 있다는 것이 세간에서 생각하는 의미겠지만 나에게는 다른 의미가 더 컸다.
레일리.
그녀와의 혼인과 함께 그녀의 정체를 완전히 공표해야 할 때였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지.’
레일리와의 첫 만남 이후 약혼.
거기서 다시 혼인을 앞둔 지금까지 이어진 시간 자체는 결코 긴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싸워온 입장에서는 단 하루조차 짧다고 말할 수 없었다.
‘혼인 준비는 잘되고 있으려나?’
저번 약혼식 준비는 상대적으로 편했다.
예물을 제외하면 마이어드 후작과 남부 연합의 영주들이 주관해 주었으니까.
그렇지만 이번 혼인은 중부에서 진행할 예정이었고, 그것을 주관할 사람은 나였다.
결혼식 장소는 크레시안 왕실의 흔적이 남아있는 왕궁으로 정했다.
이 장소 선정을 놓고 남부 연합에서 많은 이야기가 나왔다.
어차피 크레시안 왕국을 재건할 게 아니라 새로운 국가를 세울 거라면 아예 왕궁을 허물고 새로 짓는 게 낫지 않느냐는 의견.
그렇지만 내전으로 피폐해진 현재 왕궁을 지을 여유 따위는 없다는 반대.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의견이 나왔지만 나는 효율을 생각해서 왕궁으로 장소를 확정지었다.
전 왕실의 흔적이 남아있는 장소를 선택한 건 레일리에 대한 존중의 의미이기도 했다.
피의 연회 이후 죽었다고 알려진 그녀는 그때 이후 처음으로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 보는 것일 테니까.
중부에 마땅한 장소가 없었던 것도 문제였고.
‘그나마 멀쩡한 건 타이온 백작의 성인데.’
아직 타이온 백작의 잔당이 남아 있는 곳을 결혼 장소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다니엘을 통해 카타리나를 제거한 뒤 그들은 나에게 그녀의 행방에 대해 계속 캐묻고 있었다.
나는 모르쇠로 일관했지만.
‘이상한 일도 아니니까.’
중부의 치안은 아직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내가 넘겨받은 지역은 빠르게 안정되었지만, 타이온 백작의 영역은 그러지 못했다.
타이온 백작이 나에게 죽고 황금십자회가 분열되면서 큰 혼란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떨어져 나간 타이온 백작의 가신들은 어떻게든 그 장남에게 권력을 안전하게 이양시키려 했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타이온 백작의 자식이 장남만 있던 것도 아닌 데다 가신 중에서 제 몫을 챙기려는 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치안을 유지하는 것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무리 치안이 나쁘다고 해도 영주 귀족이 위협을 받을 일은 어지간해서는 없다.
무장한 기사들이 지키는 마차를 습격하는 간 큰 도적은 존재할 수 없으니까.
고작 머릿수 좀 믿고 덤벼든다고 해도 기사는 혼자서도 도적 열 명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치울 실력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대체로 그렇다는 의미지 절대적으로 안전을 보장해 주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모르쇠로 일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남부 연합의 영주들이 그냥 오는 게 아니다.
서부의 점령 유지와 안정화에 필요한 최소한의 전력을 제외한 전 군대를 이끌고 오고 있었다.
레일리와의 혼인을 위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북부를 침공하고 내전을 종식시켜 왕국을 안정시키겠다는 선언을 할 예정이다.
당연히 그 전에 후환이 될 수 있는 타이온 백작의 잔당은 짓밟을 것이고.
나에게 복속한 황금십자회 멤버 중에서도 이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대세는 이미 정해진 상태였다.
그들에게는 점령한 영지를 보상으로 주는 것으로 적절하게 달래줄 것이다.
뭐, 성공을 위해서 타이온 백작이 죽자마자 나에게 갈아탄 이들이니까 과연 얼마나 의리를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네일 준남작, 준비는 잘되어 가나?”
내 물음에 네일이 시커멓게 늘어난 다크서클을 보여주었다.
이전에 휘하 병력 체질 개선만 해도 행정 관료들이 죽어나갔는데 갑자기 혼인까지 준비한다고 하니 확실히 버거웠을 것이다.
아무리 많은 인력을 퍼부어도 소용없는 게, 나와 레일리의 신분을 생각했을 때 귀족이 직접 책임자로 나서서 일일이 검수해야 할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난 이 시대의 혼인 절차나 규정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 그 부분을 네일에게 모두 일임했고, 그때 그는 처음으로 나에게 원망하는 눈빛을 보냈다.
혹시나 해서 영웅 정보를 보니까 소속은 변하지 않았지만 조금 철렁했다.
“개국 공신이 고작 준남작일 수는 없지. 내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미끼를 살살 던지자 네일은 한숨과 함께 운명을 받아들였다.
“잘 챙겨주시리라 믿습니다.”
네일답지 않은 사족이 붙었지만.
라이언이라면 모를까 어렸을 때부터 귀족답게 교육을 받아온 네일이었다.
뒤에서라면 모를까 면전에서 대놓고 보상을 요구하는 건 귀족답지 않았다.
그러나 내 성격에 익숙해졌는지, 아니면 보상 심리나 반발인지 네일은 대놓고 좋은 작위를 요구했다.
거기에는 고작 남작으로 한 단계 승작하는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의지가 묻어났다.
“내 성격 다 알지 않나?”
“아니까 문제지요. 이게 끝이 아니라 시작 아닙니까?”
전쟁에 필요한 군수 물자나 식량 배급 계획 등 네일은 많은 부분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래서 네일에게는 일찌감치 내 목표를 알려준 것이었다.
남들처럼 왕국의 내전을 끝내는 선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면 뒤를 대비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래. 앞으로가 시작이지.”
북부를 남겨둔 채 평화가 찾아오리라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대륙을 정복하기 위한 기나긴 여정이.
* * *
“군대가 넘어와?”
휘하 기사의 보고에 그라시아 남작은 생각에 잠겼다.
서부를 점령한 남부 연합의 영주들이 군대를 통째로 이끌고 중부로 넘어왔다.
‘설마 우리를 공격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저 안일하게 동맹에 기대려는 생각이 아니었다.
남부 연합의 인력 부족 문제는 심각했다.
말이 남부 연합이지 동부에 이제는 서부까지 얻었다.
그걸 누가 다 다스리고 관리하겠는가?
때문에 황금십자회 멤버들은 아인의 아래에 복속한 뒤부터 남부 연합에서 떠맡고 있던 업무 일부를 대신 담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배신을 한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을뿐더러 남부 연합의 인력난을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네패스 백작 각하로부터 이런 편지가 왔습니다.”
기사는 냉큼 아인이 전달해 온 편지를 내밀었다.
그라시아 남작은 편지를 읽고 나서야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서부에서 넘어온 남부 연합의 군대에 라일이라는 약혼녀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정식으로 혼인을 할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날짜가 코앞이잖아?”
실제로는 그렇게 급하지 않았으나 귀족의 결혼식이라면 성대하게 열리는 게 기본이었다.
그리고 손님들 역시 그 규모와 격식에 맞는 준비가 필요했다.
아인의 지위는 백작으로, 대영주이자 넓게 보자면 크레시안 왕국을 통일할 것이 유력한 실질적인 왕에 가까웠다.
그런 인물의 결혼식에 제대로 된 선물도 준비하지 못한 채 참석할 수는 없었다.
“아니,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야? 적어도 반년, 아니 3개월 전에라도 연락을 줘야지.”
그라시아 남작은 투덜거리면서 급하게 선물을 준비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문에 있는 가장 귀한 물건들을 확인해 보았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마땅한 선물을 구할 수 없다면 가보라도 꺼내야 할 판이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아인의 눈에 들 수 있다면 절대 손해는 아니다.
‘지금도 귀족이 부족한 상황이야. 북부까지 정리하면 더욱 그럴 테지.’
눈에만 들어도 승작은 기본이고 측근에 들어가면 대영주 자리도 노려봄 직했다.
걸리는 게 있다면 경쟁 관계라고 할 수 있는 남부 연합의 영주들.
이전부터 아인을 따라왔던 그들은 이번에 서부까지 점령하면서 자신들의 가치를 드높였다.
중부 귀족들로서는 남부 연합 영주들보다 자신들이 밀린다는 걸 모를 수 없었다.
‘뭐라도 공을 세우면 좋겠지만 그건 힘들겠지.’
이제 남은 건 북부 연합 하나뿐이다.
북부는 척박한 땅이고 북부인들은 강인한 전사였다.
친왕실파와 싸우고 또 타이온 백작의 죽음 이후로 갈라진 황금십자회로서는 그곳을 노릴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러니 지금으로선 귀한 선물이라도 바치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무래도 중부로 넘어온 군대가 걸립니다.”
그때 기사가 다시 군대에 대한 주제를 꺼냈다.
“응? 결혼식을 앞두고 있으니 당연히 군대를 데려오겠지.”
그라시아 남작은 처음과 달리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중부는 어디까지나 동맹이었지 본거지가 아니었으니까.
남부 연합의 영주들로서는 만약을 대비해서 자신들을 지킬 군대를 데려오는 게 보통이었다.
“그게 규모가 많이 이상합니다.”
“얼마나 되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적어도 4천입니다.”
“4천?”
호위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과도한 숫자였다.
기껏해야 200~300명을 예상했던 그라시아 남작의 눈가가 가늘게 휘어졌다.
‘전쟁을 위한 병력이다.’
규모만 봐도 목적을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걸 숨기지도 않고 그대로 들였다는 건 분명 꿍꿍이가 있다는 소리다.
“혼인 다음에 바로 북부를 칠 생각인가? 아니, 하지만 지금 오는 군대는…….”
그라시아 남작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어째서 남부 연합에서 4천이나 되는 군대를 중부로 보냈는가?
결혼식은 사실상 명분일 뿐이다.
그렇다면 북부 연합을 노리나?
하지만 그러기에는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경계를 넘어온 게 아인의 군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남부 연합의 군대라는 것.
본거지인 남부, 첫 점령지인 동부, 이번에 새로 얻어 안정화해야 하는 서부 등.
병력을 나눠야 하는 장소가 이렇게 많은데도 4천이나 빼서 보내왔다.
“혹시 네패스 백작 각하의 군대도 오고 있다는 소식은 없나?”
“4천의 병력 중에 네패스 백작 각하의 기사가 100명 정도 있다고는 들었습니다.”
“기사 말고 군대 말이야! 다른 지역에 있는 군대!”
그라시아 남작의 다급한 목소리에 기사는 황급히 다른 지역에 정보를 물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 경계 지역을 지키고 있던 마법사로부터 보고가 올라왔다.
“동부에서 약 3천의 움직임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남부에서도 똑같이 약 3천입니다.”
다른 지역에 흩어져 있던 아인의 군대 6천이 몰려오고 있었다.
서부에서 오는 영주들의 군대를 합하면 자그마치 1만에다가 지금 아인이 중부에서 보유 중인 병력도 2천이었다.
1만 2천의 대군.
대영주라도 쉽게 모을 수 없는 엄청난 규모다.
더구나 아인은 농노를 징집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모두가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정예 군대가 집결하는 것이다.
“북부 연합 공격.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주변을 완전히 정리하려는 거야.”
그라시아 남작은 그 보고를 받고 나서 아인의 목적을 알아차렸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 방해가 될 상대를 정리하려는 거다.
이는 막을 수 없었다.
애초에 경계를 넘어온다고 먼저 공격하기에는 중부의 전력이 너무나도 약했다.
“주변이라고 하시면?”
“타이온 백작가를 치겠지.”
그라시아 남작은 한때 타이온 백작의 가신이었던 인물로, 그의 영지는 타이온 백작가와 이웃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긴장되었다.
1만이 넘는 군대가 자신의 영지 바로 옆을 지나간다는데 어떤 영주가 긴장하지 않을까?
게다가 설마 싶지만, 만약 그 칼날이 자신에게도 온다면?
‘네패스 백작은 처음에 보여줬던 어리숙하고 선량한 인물이 아니다.’
마족 말릭과의 싸움 이전에 이야기도 없이 마법사들을 들였을 때부터 알아차렸다.
그라시아 남작이 타이온 백작을 배신하고 아인에게 붙은 것도 어렴풋이 아인에게서 위화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족과 싸울 때 비로소 그 위화감의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인은 자신들을 속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라시아 남작은 딱히 거기에 화를 내지 않았다.
비록 자신들을 속이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이득이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의리를 생각해 타이온 백작의 장남에게 붙었다면 이번에 넘어오는 군대에 모두 쓸려나가고 말았을 것이다.
‘부디 내가 줄을 잘 잡은 것이었기를.’
그라시아 남작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기를 바라며 결혼식에 참석할 준비를 서둘렀다.
* * *
“그라시아 남작이 그나마 좀 낫군. 만족스러운 속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알아차리기는 했어.”
지역의 경계에 있던 마법사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그라시아 남작이 내 군대의 동향을 확인했다는 내용이었다.
나름 타이온 백작이 신뢰하던 인물이었던 만큼 머리도 잘 쓸 테니 내 의향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언제 마법사를 배치해 두셨습니까?”
네일은 내가 그라시아 남작의 상황을 염탐한 것에 놀라며 물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배치한 적 없네. 원래부터 있었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보고를 한 건 내 휘하 마법사가 아니라 협회 소속 마법사야.”
내 대답에 네일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중립을 절대 원칙으로 삼았던 협회의 마법사가 지금 나에게 그라시아 남작의 정보를 밀고한 것이다.
물론 내가 조금 회유해 두기는 했지만 그게 통한 것 자체가 이미 협회에서 나를 지지하는 세력이 상당하다는 의미였다.
“대체 왜 협회의 마법사가 영주님께 그런 보고를 한 겁니까?”
“그냥 젊은 마법사의 치기일 수도 있고, 흐름에 맞는 변화일 수도 있지.”
만일 플레턴을 비롯한 원로들이 계속 나를 거부하는 쪽으로만 행동했다면 나도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마법사 협회가 탐나고 마족과 싸우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해도 지금 협회의 힘은 과도하게 강했다.
귀족과 같은 특권 계층도 아닌 평민과 농노들이나 모인 협회가 무력만으로는 왕국 제일이다?
게다가 중립이란 건 말이 좋아서 중립이지 외부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다는 소리다.
일개 영주라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겠지만 일국의 군왕이 그런 이들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 있을 리 없다.
그렇다고 협회를 찍어누르려고 한다면 나 역시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을 터.
협회 스스로가 나에게 복종하는 게 나로서도, 그들에게도 좋은 결말이었다.
“이 왕국의 주인이 누구인지 이제는 윤곽이 훤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