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08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08화
108화
* * *
“이런 경험도 다 하는군.”
기사단을 이끌고 적들을 무너트린 로크는 처음으로 느껴보는 생소한 감각을 기이하게 여겼다.
전쟁이 쉬웠다.
선두에서 적 기사단을 돌파하는 것부터 시작해 기사들을 뚫고 적 보병 한복판을 휩쓸고 물러나서 정비하는 일까지.
이 모든 게 너무나도 손쉽게 이루어졌으며 별다른 위협이 없었다.
이는 비단 로크만 느끼는 감각이 아니었다.
휘하의 기사들 역시 같은 느낌을 받았다.
대열을 맞추지 못해 낙오하거나 적에게 당하는 기사가 없다 보니 전투 자체가 매우 안정적이었다.
“훈련이 확실히 효과가 있는 모양입니다.”
로크를 보조해 준 기사가 반색하며 말했다.
한 번의 전투만으로 기사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자신들은 강하다.
어쩌면 지금은 사라져 버린 근위기사단과 비교해도 전혀 꿇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사들은 자신감이 넘쳐났다.
말도 휴식시킬 겸 잠깐 물러났지만 이대로 다시 들이쳐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 같았다.
“그런 모양이야.”
로크는 그 말에 수긍했다.
아인의 훈련은 효율적이지만 직접 훈련받는 기사는 죽을 맛이었다.
자신들끼리 하루에도 수십 차례를 겨누다 보면 나중에는 실력보다는 체력과 오기가 승패를 나누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뒤를 생각해 체력 분배를 하자니 당장 눈앞의 상대가 자신과 적당히 싸워줄지 의문이고.
승자는 승자와, 패자는 패자와 겨루는 방식의 특성상 첫 번째 조에서의 싸움이 가장 치열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처음부터 힘을 빼면 이후 싸움이 상당히 어려워지기에 체력을 효과적으로 쓰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체력 분배가 상당히 능숙해졌어.”
기사의 체력은 상당하다.
평생 단련해 온 몸이고 체계적인 싸움법을 익히기에 과하게 힘을 쓰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대련에서나 통하는 이야기고 막상 전장에 서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작은 부상조차 즉시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전장의 특성 때문이다.
그 때문에 경험이 부족한 기사는 체력을 아끼지 않고 적 하나하나를 상대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조언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부분도 아니었다.
눈앞의 적이 어린아이라면 모를까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훈련된 기사였으니.
괜히 체력을 아끼려다가 죽으면 하소연도 할 수 없었다.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로크는 형편없이 당하는 서부의 군대를 보며 혀를 찼다.
괜히 다섯 지역 중에서 최약으로 취급받는 게 아니란 걸 증명하듯 서부의 군대는 형편없이 밀리고 있었다.
하긴 내전 동안 대영주들이나 싸웠을 뿐 중소 영주들은 눈치만 봤으니 제대로 된 경험을 쌓았을 리 없었다.
아무리 좋은 장비를 갖추고 열심히 훈련한다고 해도 결국 실전을 겪어보지 않은 군대는 정예가 될 수 없는 법.
눈앞에서 동료들이 처참히 죽어 나가자 사기가 눈에 띄게 꺾여갔다.
아무리 패색이 짙어져도 잘 훈련된 병사라면 마지막까지 투지를 꺾지 않는 법인데 상대는 초반에 기세가 넘어가자마자 자멸하고 있었다.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실 텐데.’
로크는 아인으로부터 이번 일이 나름의 시험이라는 걸 들었다.
세력의 규모가 커지면 아인이 없는 곳에서 싸우게 되는 일도 생길 것이기에 이를 맡을 만한 역량이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 했다.
그런데 상대는 거듭해서 항복만 하고 기껏 호기롭게 맞서온 적들도 부딪치자마자 무너졌다.
상대의 수준이 이렇게까지 떨어질 줄이야.
‘그 마족 같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군.’
로크는 말릭을 떠올렸다.
말릭은 끔찍하게 강한 상대였다.
월등하게 강해진 기사단으로도 몇 명을 빼고는 접근조차 쉽지 않았고 기껏 다가가 봐야 마나 실드 하나 제대로 뚫지 못하고 방해하는 게 전부였다.
다행히 아인과 탈론의 협공으로 생각보다 수월하게 처치했으나 직후 요새를 움직이며 둘마저 손 쓸 수 없는 저력을 보였다.
때맞춰 나타난 마법사 협회의 지원이 없었다면 절대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걱정인데.”
로크는 만일 북부 연합마저 이렇게 오합지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이 고심했다.
적이 약한 걸 걱정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도 참으로 기구했다.
* * *
“항복! 항복이다!”
전투는 양측의 규모를 생각하면 싱거울 정도로 빠르게 끝났다.
일찌감치 승기를 잡은 남부 연합은 혼란에 빠진 서부의 군대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마법사들의 반격도 없었고, 지휘해야 할 영주들도 자크론 때문에 제대로 행동하지 못해 어처구니없이 무너졌다.
전쟁이 얼마나 쉬웠는지는 생포한 병력의 숫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내전은 패배할 경우 망하는 게 확정이기에 패색이 짙어져도 항복하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 포로의 숫자가 적의 총병력과 거의 맞먹었다.
“끄응.”
덕분에 아군의 피해도 적었으니 분명 대승이지만 남부 연합의 영주들은 찝찝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래서야 아인의 힘만 확인한 격이었다.
“이거 어쩌는 게 좋겠소?”
“네패스 백작 각하가 보내주신 기사단이나 마법사들의 활약도 월등했으니…….”
하다못해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나서지 않고 해결된 거라면 아인의 영향력을 감추고 생색이라도 내봤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활약이 너무 월등했기에 그럴 수도 없었다.
“이렇게 된 거, 방법은 하나뿐이오!”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 있던 루카인 남작이 눈을 빛냈다.
“그게 무엇이오?”
따지고 보면 이번 서부 침공을 계획한 장본인이었기에 영주들은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그를 보았다.
“우리 가치를 증명하지 못했다면 충성심이라도 증명해야지!”
“충성심을?”
“우리가 무슨 수로 말인가?”
이제 슬슬 아인에게 자신들이 필요할까 염려될 지경에 이른 영주들은 과연 그런 방법이 있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루카인 남작은 자신했다.
“이번에 서부에서 얻은 영지들을 백작 각하께 바칩시다.”
“아니, 그러면 우리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도 아무것도 얻는 게 없지 않소?”
“다르오.”
한 영주의 항의에 루카인 남작은 고개를 내저었다.
“처음 내가 서부 침공을 이야기했던 건 중부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소.”
“그러고 보니 그랬지.”
서부의 영지를 탐내고 있던 남부 연합의 영주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생각해 보면 자신들은 결국 중부 귀족들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자신들만으로 서부를 침공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어떻게든 달성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아무리 아인의 활약이 대단했더라도 어쨌든 진행을 맡은 건 남부 연합이었고 중부의 귀족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과정이야 어쨌든 중부 귀족들의 개입 없이 성공적으로 서부를 점령했소. 그리고 이 서부를 네패스 백작 각하께 온전히 바친다면 우리의 충성심을 입증한다고 볼 수 있지.”
“과연.”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실속은 없었지만 어쨌든 중부 귀족들에게 남부 연합이 한 지역을 통째로 바칠 정도로 충성심이 깊다는 걸 보일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네패스 백작 각하께서 어떤 분이신데 설마 서부를 그대로 받으시겠는가? 일정 부분은 다시 돌려주시겠지.”
이어지는 루카인 남작의 말 역시 그럴싸했다.
게일 남작조차 그의 이야기를 듣고는 감탄할 정도였다.
“확실히. 네패스 백작 각하께서는 인색한 분이 아니시니까.”
“즉, 어차피 우리는 어느 정도 몫을 받을 것이고 중부 귀족들에게는 한 방 먹이는 것이로군.”
“생각을 잘했군. 루카인 남작, 이런 친구가 아직 혼처를 못 구했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야.”
돌연 아픈 부분을 찔러드는 이야기에 루카인 남작이 몸을 흠칫 떨었다.
“고, 곧 할 것이오.”
“마땅한 상대가 있나? 내전으로 워낙 망한 가문이 많아서…….”
동부는 대영주들 때문에 중소 영주의 가문은 싹 망한 상태였다.
중부의 경우에는 혼기가 찬 영애들이 모두 아인만 보고 있었고.
게다가 아인을 뺀 남부 연합은 은근히 변방에서 온 귀족이라며 무시하는 경향도 있었다.
루카인 남작이 연합 내에서 지위가 좋은 편도 아니었기에 혼인 동맹을 맺기에는 별다른 이득이 없었다.
“이곳 서부에는 있지 않겠소?”
하지만 루카인 남작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다른 지역이라면 몰라도 서부에는 아직 많은 가문이 남아있었다.
이번에 항복한 가문만 줄을 세워도 남부 연합의 가문보다 더 많을 정도였다.
거기에 자신의 짝이 될 귀족 하나 없겠는가?
문제는 그쪽도 항복하면서 영지를 몰수당할 처지라는 건데, 때문에 루카인 남작은 격에 맞는 상대와 혼인하겠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버렸다.
그냥 가문을 지키고 싶어 하는 귀족 영애와의 혼인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루카인 남작의 이야기에 남부 연합 영주들의 눈이 짜게 식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이득도 없고 사랑도 없다면 그 혼인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소? 차라리 첩이나 더 들이고 말지.”
자신을 바라보는 영주들의 시선에 루카인 남작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이런 기만자들이!”
언제 혼인하냐고 만날 때마다 자신을 괴롭히던 이들이 막상 혼인하려고 하니 이득이니 사랑이니 타령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음. 뭐, 루카인 남작의 뜻이 그러하다면 응원하겠소. 그런데 루카인 남작, 혹시 그 의견을 레일리 왕녀 저하의 뜻으로 해도 괜찮겠는가?”
그때 잠자코 지켜보던 게일 남작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뜻밖의 말에 루카인 남작은 당황했다.
“아니, 갑자기 왜…….”
대놓고 공을 가로채겠다는 말에 루카인 남작뿐 아니라 다른 영주들도 의아한 눈으로 게일 남작을 보았다.
“왕녀 저하께서 중부의 영애들 때문에 걱정이 많다는 걸 알 거야.”
“그거야 그렇지만…….”
“방금 그 계획을 레일리 왕녀 저하의 뜻으로 보고한다면 네패스 백작 각하께서도 레일리 왕녀 저하께 고마워하시겠지.”
“그러면 나는 어쩌란 말인가?”
“자네, 레일리 왕녀 저하께 크게 실수한 전적이 있지 않나?”
게일 남작의 지적에 루카인 남작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그 일로 인해 언제 아인의 분노가 자신을 향할지 몰라 걱정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번 서부 침공도 따지고 보면 그 일로 걱정하다가 나온 계획이었다.
“그건 내가 몇 번이나 사죄를 드렸는데…….”
“말뿐인 사죄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름 이것저것 선물도 보냈지만 사실 그런 것으로도 어찌할 수 없다는 걸 루카인 남작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 앞에 서면 루카인 남작은 언제나 눈치 보기에 바빴다.
“하지만 이번 일만 도와주면 레일리 왕녀 저하께 저지른 잘못을 갚을 수 있겠지.”
“음.”
이쯤 되자 루카인 남작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아인에게 인정을 받아봐야 레일리 왕녀가 앙심을 남기고 있다면 후환이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조금 아쉽지만 차라리 이 기회에 실수를 무마하는 쪽이 정신적으로 나을 수도 있었다.
“물질적인 보상이야 레일리 왕녀 저하께서 다시 돌려주실 테니 걱정하지 말고.”
“으음.”
여전히 루카인 남작이 망설이자 게일 남작은 마지막 비장의 수단을 꺼냈다.
“서부 귀족들의 재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괜찮은 귀족 영애가 있는지 물색해 보도록 하지.”
게일 남작의 이야기에 루카인 남작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직접 일일이 확인하는 것보다야 게일 남작의 정보력을 이용하는 쪽이 훨씬 빠르고 성과도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야…….”
루카인 남작의 동의를 받은 게일 남작은 개선장군처럼 위풍당당하게 레일리 왕녀를 찾았다.
레일리 왕녀는 이번 침공에서 마땅한 소득을 내지 못한 것에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왕녀 저하, 괜찮으십니까?”
“아니요. 이래서야 네패스 백작이 우리를 쓸모없다고 여기지는 않을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침 루카인 남작이 괜찮은 의견을 내었으니 들어보시겠습니까?”
게일 남작은 루카인 남작의 의견을 전달해 주었고, 그제야 레일리 왕녀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건 안 돼요. 분명 그거라면 네패스 백작도 만족하겠죠. 하지만 그러면 루카인 남작의 공을 빼앗는 건데…….”
레일리는 자신이 피해를 본 영주들을 챙겨주기로 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런 자신이 다른 영주의 공을 강탈할 수는 없었다.
“레일리 왕녀 저하께서 네패스 백작 각하의 관심을 못 받으면 어차피 그 시점에서 저희 남부 연합은 끝장나는 겁니다.”
게일 남작은 유려한 언변으로 설득에 나섰다.
어차피 남부 연합과 레일리 왕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과 같은 운명이었다.
중부 귀족이라는 공통된 적을 두었기에 뜻을 같이해야만 했다.
“남부 연합만 감싸면 그것도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레일리 왕녀는 거기에 의문을 제기했다.
네패스 가문의 안주인이 될 몸으로 남부 연합만 너무 감싸는 것도 문제가 아니냐는 말에 게일 남작은 몸을 흠칫했다.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이 아닌 게, 아인이 차등을 두지 않는 이상 그녀는 남부 연합과 중부 귀족을 동등하게 대우하는 게 옳았다.
그녀가 밝힌 뜻에도 그게 맞는 것이었으니.
‘이거 어쩌지?’
마냥 공평하게만 대하면 아랫사람의 충성을 받기가 어렵다.
아인은 실력에 따른 우대가 확실했지만, 레일리 왕녀는 그럴 수 없었으니까.
“그럼 네패스 백작 각하께서 다른 귀족 영애와 혼인하셔도 상관없으십니까?”
이번에는 레일리 왕녀 쪽에서 흠칫했다.
“사정에 따라서 말을 바꿀 수는 없어요. 그래서야 누가 제 진심을 믿겠어요?”
“그건 백작 각하와 혼인한 뒤에야 통하는 말입니다. 혼인을 못 한다면 거기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왕비라면 차별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래서는 남부 연합의 도움을 받아 왕비가 되기 힘들다.
모순의 굴레에 빠진 레일리 왕녀였다.
“그리고 루카인 남작은 왕녀 저하께 큰 실수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 빚을 없던 것으로 해주는 것이니 쌍방에 이득이 되는 거래입니다. 루카인 남작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게일 남작의 꼬드김에 레일리 왕녀는 점차 의지가 약해졌다.
루카인 남작이 실수를 저지른 것도 사실이니까.
그리고 루카인 남작이 그 문제로 계속 마음고생하고 있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 안 되는데…….”
“루카인 남작을 언제까지 힘들게 하실 겁니까? 자비를 베풀어주시지요.”
게일 남작은 자신의 설득이 통한 것에 남몰래 미소 지었다.
레일리 왕녀는 공평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그녀의 입장일 뿐이다.
아인의 제안을 거절해 가면서까지 레일리 왕녀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한 게일 남작은 반드시 성과를 내야만 했다.
그리고 아마 아인도 이를 어느 정도 용인하리라 생각되었다.
그렇기에 면전에서 제안을 거절한 자신을 쉽게 놔준 것 아니겠는가?
게일 남작은 이 또한 아인이 바라는 일이라고 굳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