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07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07화
107화
* * *
“이제야 좀 싸울 만한 상대가 나왔군!”
서부 침공이 시작되고 얼마나 지났을까?
거듭되는 항복과 무혈입성에도 지쳐갈 무렵 마침내 남부 연합은 싸울 만한 상대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에 이대로라면 차마 공을 세웠다고 말할 수도 없어 초조해하던 남부 연합의 영주들은 적의 등장을 오히려 반겨주었다.
“아예 적이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군요. 겨우 공을 세우겠습니다.”
바이든 자작과 게일 남작은 앞을 가로막은 수천의 군대를 보았다.
서부의 영지 절반이 변변한 싸움조차 없이 무너지고 있는 동안 걱정이 많았으나 이제야 체면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흐허허허!”
루카인 남작도 무척이나 기뻐했다.
비록 희생자가 나오겠지만 이것으로 자신들의 서부 침공이 떳떳해질 수 있었다.
이후에 받을 몫을 정당히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두 방심하지 마세요.”
레일리 왕녀는 마이어드 후작가의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이미 마이어드 후작가 내에는 레일리 왕녀의 정체에 대한 이야기가 퍼진 상태였다.
실제로 이를 대놓고 물어보는 이는 없었으나 가신들에게 은근슬쩍 확인한 이들은 얌전히 레일리 왕녀를 따랐다.
무엇보다 그녀가 아인과 혼인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움직였다.
‘후작가가 이대로 주저앉는 줄 알았는데 살길이 보인다.’
마이어드 후작가의 기사가 눈을 반짝 빛냈다.
카이로스 백작가와의 싸움 이후로 마이어드 후작가의 위세는 예전만 못하게 되었다.
당시에 입었던 피해를 전혀 회복하지 못한 채 간신히 버티고만 있던 처지.
그러나 레일리 왕녀의 등장은 이런 마이어드 후작가의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해 줄 수 있었다.
게다가 이번 서부 침공만 제대로 성공한다면 그 보상을 통해 마이어드 후작가의 힘도 상당히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네패스 백작가의 지원군이 오기야 했지만, 주축은 어디까지나 마이어드 후작가였기 때문이다.
“작전대로 대응하겠습니다.”
게일 남작은 일찍이 서부의 영주들이 어떤 식으로 싸움을 걸어올지를 예측했고 이번 역시 그 경우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남부 연합의 군대는 막힘없이 자연스럽게 대형을 갖추고 전투를 준비했다.
뿌우우!
나팔 소리가 울리고, 상대 진영에서 먼저 진격이 시작되었다.
기병들이 측면을 노리고 정면으로 보병들이 돌격해 오는 정석적인 공세.
남부 연합에서도 이에 맞선 대응에 나섰다.
“좌익은 우리가, 우익은 네패스 백작가가 맡는다!”
약속된 신호가 보내지고 기사들의 대규모 충돌이 일어났다.
꽈앙!
마치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 같은 굉음과 함께 충돌한 기사들이 나가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양쪽이 피해를 입은 게 아니라 한쪽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었다.
‘저게 뭐지?’
후방에서 충돌을 주시하던 게일 남작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네패스 백작가의 기사단이 만만치 않다고는 생각했는데 기마 돌격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고 상대를 밀어내고 있었다.
상대는 과연 같은 기사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형편없이 무너졌다.
‘좌익은 정상인데?’
반면 좌익에서는 나름 팽팽한 대치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병력의 수에서 압도적이기에 무난하게 이기리라 예상되었지만 우익은 병력이 앞서는 것도 아닌데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싱거운 결과가 나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정예라고는 생각했지만…….’
기사단장인 로크 자작이 특별히 고른 정예들이라고 말하기는 했다.
실제로 아주 훌륭해 보였고.
그렇지만 이건 예상 밖이었다.
단순히 기사들의 실력이 좋은 것만으로는 절대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없으니까.
‘장비부터 말이 안 되는군.’
게일 남작은 눈을 크게 뜨고 우익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네패스 백작가의 기사가 찌른 창이 상대의 갑옷을 그대로 꿰뚫고 내장을 파헤쳤다.
마주 검을 부딪치던 어느 기사는 불과 몇 번 합을 주고받은 것만으로 상대의 무기를 깨버렸다.
심지어 잘 훈련된 군마가 상대 군마를 고꾸라뜨리는 광경도 보였다.
‘재물을 마구 썼다더니, 말한테 영약이라도 먹였나?’
게일 남작은 자신도 모르게 정답을 짚어냈다.
기사 개개인의 전투력도 중요하지만 타고 있는 말의 수준도 중요하다고 생각한 아인은 명마를 적극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으면 늘어나는 기사들에게 말을 지급하는 게 힘들었기 때문이다.
기사에게 형편없는 말을 줘서야 영주로서의 체면이 살지 않기에 품종 좋은 말들을 사들이는 한편 상점에서 말에게 쓰는 영양제를 대량 구매했다.
효과는 들어간 보주의 양만큼 만족스러웠다.
“으아아악!”
마침내 우익이 무너지자 적 보병들이 혼란에 빠졌다.
네패스 백작가의 기사단이 적 보병의 측면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이 광경을 본 서부 영주들은 난리가 났다.
“마법사들은 뭘 하느냐!”
믿었던 기사단이 당한 상황에 그들은 유일한 버팀목인 마법사들을 들볶았다.
하지만 마법사들도 마땅한 대응책이 없었다.
기사들이 제대로 버텨줬다면 뭐라도 준비하겠는데 그럴 시간도 없이 순식간에 당했기 때문이다.
“아군이 뒤섞여서 공격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멍청한 놈들! 저 기사단을 막지 못하면 이 전쟁에서 절대 못 이긴다! 당장 공격해!”
아군 때문에 공격할 수 없다는 말에 영주는 호통을 치며 마법사의 멱살을 쥐었다.
휩쓸리는 게 충성스러운 기사이든 아니면 일개 병사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항복한 것도 아니고 저항한 그들에게 상대가 자비를 베풀어줄 리 없었으니까.
패배하면 그에게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군을 같이 공격할 수는…….”
“아니면 네놈들이 죽고 싶으냐!”
스르릉!
영주가 직접 검을 빼 들고 위협하자 마법사는 당황해서 허우적거렸다.
진짜로 아군까지 휩쓸어서 공격하자니 후환이 두려웠다.
어차피 패배는 확정된 거 같은데 그런 무리한 짓을 했다가 분노한 기사나 병사들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마법사 협회에서도 아군을 공격한 일에 대해서는 분명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승패조차 뻔한 상황인데.
하지만 마냥 거부하기에는 당장 눈앞에 드리운 칼날이 너무 무서웠다.
‘젠장! 그냥 도망칠 걸 그랬다!’
마법사들이 달아나지 않은 것에는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첫째는 애초에 마법사의 사망률이 매우 낮다는 것.
이는 후방에 위치하는 마법사의 특성상 다른 병과와 달리 그들이 잡힐 때는 이미 승패가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대는 굳이 마법사를 죽이기보다 사로잡는 쪽이 이득이었다.
둘째는 상대가 네패스 백작가라는 것.
아인은 지금껏 자신이 상대한 마법사들만큼은 확실히 보호해 주었다.
협회의 마법사들이 아인을 동경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 배려심이었다.
자신들과 같은 평민 출신도 아니고 귀족이 같은 협회의 마법사들을 해치지 않고 챙겨주는 것이었으니.
비록 이 전장에는 아인이 없었지만, 남부 연합이 그의 뜻을 따를 거로 생각했다.
“빨리 공격하지 못할까!”
“아, 알겠습니다.”
마법사는 마지못해 앞으로 나서서 마법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처참했다.
네패스 백작가의 기사단은 그 잠깐 사이에 병사들을 종횡무진 휩쓸고 이미 승기를 가져온 상태였다.
‘어떤 마법으로 공격하지? 피해가 나면 그것도 문제고 아무 피해가 없어도 문제인데.’
“어서 공격해라!”
고민하던 마법사는 칼날을 드리운 영주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마법을 날렸다.
작은 불길이 일어나 네패스 백작가의 기사들을 향해 날아갔다.
“음?”
네패스 백작가의 기사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불덩어리를 멍하니 바라봤다.
마법사가 공격에 나선 건가 싶어서 처음에는 경계했는데 날아오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딱히 막지 않고 피해도 지장이 없을 정도로.
콰앙!
실제로 가볍게 범위를 벗어나자 마법은 애꿎은 땅을 공격했다.
위력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피하지 않았더라도 방패만 제대로 들었다면 별로 위협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똑바로 공격해라!”
“어억! 나 죽는다!”
이에 영주가 다시 멱살을 잡으려고 하자 마법사는 갑자기 비명을 꽥꽥 질렀다.
“뭐, 뭐야?”
느닷없이 마법사가 괴성을 지르며 발버둥 치자 영주는 당황했다.
혹시 실성이라도 했나 싶었다.
“이건 플레턴 원로님의 마법!”
“으잉?”
“꽥!”
마법사는 갑자기 이상한 말을 남기더니 풀썩 쓰러져 버렸다.
영주는 이게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 다른 마법사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소문을 들은 적 있습니다! 플레턴 원로님은 마법사에게만 통하는 보이지 않는 공격을 날린다고!”
“뭐라고?”
“아, 맞아! 네패스 백작은 플레턴 원로님의 제자였지!”
다른 마법사가 그 말을 받아주었다.
“하지만 적군에 네패스 백작은 없다고 했다!”
“상대 마법사 중에도 혹시 배운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전쟁에 앞서 상대를 파악하는 건 당연한 일.
영주는 적군에 아인이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인이 비전 마법을 멋대로 유출한 게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마법사들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눈치 빠른 이들은 방금 마법사가 실제로 공격을 당한 게 아니라 그런 척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제가 나서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으어억!”
뒤이어 다른 마법사도 갑자기 비명과 함께 고꾸라졌다.
영주는 눈앞에서 마법사가 둘이나 당하자 긴가민가하며 전장을 살폈다.
적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데 이쪽의 마법사들이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수가 있나?”
“네패스 백작이 천재라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니까요.”
마법사들은 아인의 업적을 하나씩 열거하며 두려워하는 척했다.
“아무리 그래도 보이지도 않는데…….”
“고등한 마법사는 먼 거리에서도 상대의 마나를 탐지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이대로라면 마법을 준비하는 족족 당하게 될 겁니다.”
그 아인이 이 자리에 없으니까 모순이 발생했지만 영주는 정신이 없어서 그 부분을 생각지 못했다.
대신 영주는 눈이 뒤집혔다.
비싼 돈 들여가며 거둬놨던 마법사들이 애물단지로 전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럼 한꺼번에 공격하면 되지 않는가? 아무리 그래도 모두를 노리지는 못하겠지!”
“현명한 생각이십니다! 즉시 해보겠습니다!”
영주의 의견에 마법사들은 오히려 이를 반기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으어억!”
“아악!”
그리고 마법을 쓰는 시늉을 하던 이들이 한꺼번에 나자빠졌다.
그 광경에 영주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이쯤 되면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들이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걸.
“이것들이 날 바보로 아는 것이냐!”
분노한 영주가 마법사들을 베려고 할 때였다.
“아, 앞을 보십시오!”
쓰러져 있던 마법사 한 명이 기겁해서는 소리쳤다.
“또 나를 속일 셈이냐!”
그러나 영주는 마법사의 말을 믿지 않았다.
쓰러진 척한 놈이 지금 멀쩡한 걸 봤으니까.
“마, 마나 실드!”
하지만 마법사는 식겁하며 서둘러 자신의 주변으로 마나 실드를 펼쳤다.
다른 마법사들도 허둥지둥 마나 실드를 펼치고 있었다.
그제야 영주도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고 뒤를 돌아봤다.
화르륵!
아까 마법사가 날린 것보다 몇 배는 더 큰 화염이 그들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으, 으아아악!”
영주는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지만 화염이 훨씬 빨랐다.
시뻘건 불줄기가 일대를 뒤덮었다.
* * *
‘저것들이 뭐 하는 거지?’
자크론은 아인에게 선별되어 서부 침공에 참여한 마법사 중 한 사람이었다.
아인의 선별 기준이 성장이 부진한 마법사였는데, 자크론 역시 이를 피해 갈 수 없었다.
아인에게 가르침을 받을 정도로 영락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아인을 가르칠 수도 없었다.
다른 마법사를 계속 봐주는 것도 귀찮았기에 차라리 몸이나 풀 겸 전장에 나섰다.
아인도 이를 반겼다.
아무래도 경험 많고 강력한 힘을 가진 자크론이 있으면 위험한 상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만약 갑자기 마족이 나타나도 자크론이라면 지원군이 올 때까지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고생하며 온 보람도 없이 자크론은 온종일 돌아다니기만 해야 했다.
가는 곳마다 상대가 항복해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싸움을 나름 반겼는데 네패스 백작가의 돌격 한 번에 승패가 나뉘어 할 일이 없어졌다.
그에 짜증이 치민 자크론은 심심풀이라도 할 겸 과감하게 적 후방에 침투했다.
그리고 거기서 괴상한 짓거리를 하는 마법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도대체 뭘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상대 마법사를 먼저 파악한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어 공격을 날렸다.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수준으로.
아무리 이제는 아인의 밑에 있다고 하지만 협회의 마법사를 몰살시키기라도 했다가는 협회를 장악하려는 아인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법사들은 모두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애꿎은 영주 한 명이 거기에 휩쓸려 죽고 말았다.
“왜 아무도 안 막아준 거야?”
자크론은 불에 타서 허우적거리던 영주와 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마법사들의 행동에 당황했다.
마법사들이 제대로 마나 실드를 펼쳤으면 충분히 막았을 텐데 모두 자기들끼리만 실드를 펼쳐서 영주를 버렸다.
아무리 놀랐다고 해도 저만한 숫자의 마법사들이 단 한 명도 영주를 챙기지 않는다는 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지간히 인심이 없는 놈인가 보군.’
그러나 그것도 잠깐.
어차피 내전에서 영주를 죽이는 거야 별다른 문제가 아니었기에 자크론은 관심을 꺼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