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05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05화
105화
【 남부 연합의 계획 】
“서부는 우리가 차지해야 하네.”
남부 연합의 영주들이 모인 자리에서 루카인 남작이 의견을 꺼냈다.
아인에게 보고를 올리기 위해서 회의의 내용을 정리하고 있던 게일 남작의 손이 멈췄다.
“갑자기 무슨 말인가?”
뜻밖의 의견에 당황한 건 게일 남작만이 아니었다.
연합의 다른 영주들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루카인 남작을 보았다.
어차피 서부나 북부도 곧 원정의 대상이 되겠지만 자신들이 차지해야 한다는 말에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누구로부터 차지한다는 것인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네패스 백작 각하한테 서부를 넘겨줄 수는 없다, 이런 의미는 아니겠지?”
게일 남작은 심각한 얼굴로 루카인 남작을 보았다.
남부 연합의 세력은 점차 커지고 있지만, 그 전력의 핵심은 아인과 아인이 이끄는 군대였다.
연합의 영주가 전공이나 보상을 욕심내서 아인과 경쟁하려고 한다면 이는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
“오해하지 말게. 내가 말하는 대상은 중부의 귀족들이니까.”
루카인 남작은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리고 서둘러 말을 정정했다.
“중부의 귀족?”
“조만간 서부 침공이 있을 텐데 중부 귀족들이 끼어들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루카인 남작은 동맹을 맺은 중부의 귀족들이 서부의 영토를 탐낼 것을 우려했다.
확실히 남부 연합이 움직일 때 함께 움직이겠다고 하면 거절하기에는 어려웠다.
그리고 일단 참전하게 된다면 중부 귀족들에게 관례상 보상을 나눠 줘야 한다.
아인이 재물에 관대한 타입이라는 걸 고려하면 남부 연합의 입장에서는 중부의 귀족들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저 먼 북부라면 몰라도 서부까지는 마땅히 우리가 가져야지.”
“하긴, 이번에 중부를 흡수하는 계획에서 우리가 지출한 비용이 적은 것도 아니고…….”
다른 귀족들도 루카인 남작의 말에 동의했다.
이번 중부와의 일에서 남부 연합의 귀족들은 딱히 이득을 본 게 없었다.
아인이 계획을 바꿈에 따라서 무력을 투입하지 않았고 동맹의 대가로 받은 영토는 모두 그가 차지했다.
물론 이는 동부 원정 당시 아인이 자신의 몫을 상당히 줄인 것을 고려한 결과였지만 남부 영주들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수로 서부를 차지하겠다는 건가?”
“다른 지역과 달리 이번에는 네패스 백작 각하를 두고 우리끼리 직접 나서보는 게 어떤가?”
“우리만으로?”
이어지는 루카인 남작의 의견에 귀족들은 당황하며 눈치를 보았다.
내전이 시작되고 전장에 나서지 않은 귀족은 없지만, 그들에게는 각자 믿을 구석이 있었다.
마이어드 후작이든 아인이든 믿을 만한 세력이 앞장서고 자신들은 뒤를 받쳤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대영주들의 존재를 배제하고 자신들끼리 나서자는 말에 덜컥 겁이 났다.
만에 하나 패배한다면?
성과가 문제가 아니라 목이 날아갈 것을 걱정해야 했다.
“너무 위험한 생각 아닌가?”
“다른 지역이라면 나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걸세. 하지만 서부가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서부는 분명 약하지만 승리를 보장해 줄 정도는 아니었다.
영주들이 쉽게 수긍하지 않자 루카인 남작은 해답을 내놓았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떤가?”
“어떻게 말이지?”
“레일리 왕녀 저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지.”
“으음?”
생각지도 못한 의견이 나오자 영주들은 고민에 빠졌다.
아인이 아니라 레일리 왕녀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의견은 나름의 장점이 있었다.
어쨌든 대영주 세력이 하나 참가하는 것이고 그에 따라서 위험 부담이 적어지니까.
“우리가 남부 연합의 이름으로 묶여있지만 결국 네패스 백작 각하의 측근은 가신들 아닌가?”
“그렇기야 하지.”
“그 가신이란 이들이 하나 같이 능력이 출중하니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버려지지 않으려면 줄을 잘 서야 해.”
아인은 분명 남부 연합에 내전의 승리를 안겨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인의 세력이 커질수록 단독으로 행동하는 일이 많아질 것이고 남부 연합의 입지는 애매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이미 예전에 나와 있었다.
레일리 왕녀가 아인에게 직접 고개를 숙이면서 피해를 본 이들을 우선해서 챙기겠다는 뜻을 보였던 것.
그 자비로움을 생각하면 차라리 레일리 왕녀를 따르는 게 자신들에게 이로운 일일지도 몰랐다.
“흠.”
게일 남작은 이러한 연합의 분위기를 상당히 흥미롭게 구경했다.
실제로 동부 원정이 끝난 뒤부터 아인에게서 남부 연합의 존재가 조금씩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인 개인의 세력이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기에 연합 전체가 아인에게 뒤처지는 것이다.
물론 남부 연합도 열심히 세력을 키우고는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애초에 아인의 성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기도 했고.
‘최근에도 급격하게 세력이 팽창하던데, 도대체 재물이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군.’
혹시 동부 원정에서 슬쩍한 게 있나 싶어서 꼼꼼히 살펴봤지만 짚이는 부분은 전혀 없었다.
‘어쨌든 딱히 나쁜 생각은 아니군.’
아인의 측근이 되기 어렵다면 레일리 왕녀의 측근이 되는 쪽이 그나마 나은 선택이란 건 분명했다.
물론 기존부터 마이어드 후작을 따랐던 가신이 존재하지만, 자신이나 바이든 자작을 제외하면 딱히 의미가 없었다.
다른 가신들은 레일리 왕녀의 마음을 전혀 사지 못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바이든 자작은 레일리 왕녀에게 좋은 흐름이 나오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나섰다.
남부 연합의 이득을 위해서도, 레일리 왕녀의 영향력을 위해서도 루카인 남작이 꺼낸 제안은 반드시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연합의 이름으로 시작할 싸움을 허가도 받지 않고 진행할 수는 없네.”
그러나 애석하게도 게일 남작은 찬물을 끼얹어야만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수장을 내버려둔 채 남부 연합 멋대로 움직였다가는 아인의 분노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칫 잘못해서 레일리 왕녀가 이 일의 주동자로 보이게 되면 두 사람의 관계가 흔들릴지도 몰랐다.
게일 남작은 절대 아인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아인은 예전보다 훨씬 더 성장해 있을 테니까.
그게 개인이든 세력이든 말이다.
“허가를 받으면 되는 거 아닌가? 레일리 왕녀 저하를 먼저 설득하고 우리끼리 움직여보자고.”
루카인 남작은 게일 남작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어차피 남부 연합의 군대는 마땅한 일이 없어서 훈련만 거듭하는 중이었다.
아인이 굳이 막을 명분이 없는 것이다.
“그럼 내가 직접 방문하도록 하지.”
바이든 자작은 가신으로서 후작가를 방문하고 오랜만에 레일리 왕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직접 나서기로 했다.
그렇게 남부 연합 영주들의 회의가 끝났다.
* * *
“서부를 우리끼리 침공하겠다는 말인가요?”
레일리는 바이든 자작의 요청에 의문을 품었다.
굳이 아인이라는 걸출한 영웅을 놔두고 남부 연합이 개별적으로 움직여야 할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루카인 남작은 단순히 서부에 눈독을 들인 것 같지만 이는 왕녀 저하께도 좋은 제안입니다.”
“어째서죠?”
레일리는 자신에게도 좋은 제안이라는 말에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이전과 달리 지금 네패스 백작의 세력은 매우 거대합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커지겠지요.”
아인을 따르는 이들의 숫자는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많은 전투를 치르고 희생자가 나오더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아인 네패스라는 젊은 귀족이 크레시안 왕국의 내전을 평정하리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줄을 잘 서기 위해 모두가 안달이 난 상태였다.
“네패스 백작의 옆자리를 탐내는 중부의 귀족 영애들에 관한 이야기는 들으셨을 겁니다.”
“그걸로 저를 계속 괴롭혔죠.”
생각만으로 머리가 아파졌다.
어서 혼인을 서둘러야 한다며 빚쟁이처럼 그녀를 독촉하던 행태는 얼마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설마 네패스 백작이 다른 여자를 눈에 둘까요?”
레일리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아인에게는 야망이 있었다.
여자에 정신이 팔려 엉뚱한 곳에 관심을 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야망이.
그런 사람이 고작 귀족 영애들의 유혹에 빠져서 왕녀인 자신을 배신한다고 하면 레일리는 수치심을 참지 못할 것이다.
야망이라는 게 사실은 그냥 자신이 마음에 안 들어서 했던 변명이 되어버리는 꼴이기에.
“후우.”
레일리의 확고한 믿음에 바이든 자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말씀까지는 안 드리려고 했는데…….”
심상치 않은 바이든 자작의 분위기에 레일리는 당황했다.
무언가 짚이는 게 있지 않고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반응이었다.
“동부에서의 일입니다.”
바이든 자작은 동부 원정 당시에 아인의 첩실 자리를 두고 영주들이 은근한 제안을 했던 일을 고발했다.
“그래 봐야 첩이잖아요.”
레일리는 딱히 첩을 들이는 데 반대하는 견해는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는 일국의 왕녀로 태어난 몸으로, 사랑 없는 혼인은 예정되어 있었으니까.
게다가 당장 그녀의 아버지였던 국왕만 해도 첩을 여럿 둔 몸이었다.
“네패스 백작은 나이도 젊고.”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첩을 찾는다는 귀족도 있는데 아인처럼 한참 젊은 나이에 첩을 두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첩의 신분이 귀족이라면 말이 좀 다르지요.”
바이든 자작의 말에 레일리의 눈가가 휘어졌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일국의 왕녀와 일개 귀족 영애를 비교하는 게 자존심 상하지만 자신의 처지가 좋은 편도 아니니까.
그리고 그녀에게 마이어드 후작가가 있다면 첩으로 들어올 여성에게도 가문이 있었다.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에 아인을 공략하려고 들면 꽤 골치 아파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왕녀 저하께서 네패스 백작에게 귀족 출신 첩을 들이지 말라고 하실 수 있으십니까?”
말을 꺼내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아인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러겠다고 덥석 수긍해 주면 좋겠지만 첩을 들이는 문제는 쉽게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레일리의 행동을 불쾌하게 여겨 괜히 관계만 멀어질 수도 있었다.
“불가능하지요.”
차마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레일리는 치를 떨었다.
왕가가 멀쩡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왕녀를 내버려두고 멋대로 첩을 들여서 놀아난다면 이는 왕실에 대한 모욕.
적어도 그녀가 뭐라고 지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배경이 되어줄 왕실이 없는 상황에서라면 그녀는 전적으로 아인의 존중에만 매달려야 했다.
“그리고 이건 정말 예외적인 경우지만 첩이 안주인 자리를 꿰찬 역사가 없지도 않습니다.”
바이든 자작은 몇몇 귀족 가문의 사례를 들었다.
안주인이 일찍 죽었거나 가문이 몰락했거나.
심할 때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첩에게 푹 빠져서 부인을 내쫓은 경우도 존재했다.
주로 남자 쪽의 위세에 비해 여자 쪽은 힘이 약할 때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니 서부는 마땅히 왕녀 저하께서 가지셔야 합니다.”
남부의 대영주인 마이어드 후작가의 영토와 서부의 영토를 합한다면 아무리 아인이라도 이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첩을 들이는 데 있어서 그녀의 의견을 존중할 수밖에 없게 될 터.
바이든 자작은 그 부분을 강조했다.
“마이어드 후작가만으로는 절대 부족합니다. 왕녀라는 정통성? 혼인하는 순간에만 의미가 있지 이후에는 무용합니다. 그러니 이 기회에 서부를 점령하고 남부 연합 영주들을 거두십시오.”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레일리는 신중하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고 곧 거기에 수긍했다.
“바이든 자작의 의견에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네요. 하지만 제가 이를 받아들이는 건 네패스 백작을 의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서부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지.”
레일리는 한창 바쁠 아인을 돕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걸 모르는 이가 없었지만 바이든 자작은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 * *
“남부 연합의 편지입니다.”
남부 연합에서 편지가 올라왔다.
이 자체는 전혀 특별할 게 없었지만, 편지를 전달한 전령이 이상했다.
기사.
물론 중요한 내용이 유출되지 않도록 솜씨 좋은 기사를 보낸 걸 수는 있겠지만 문제는 그 숫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전령으로 기사 열 명이라고?’
한 명도, 두 명도 아니고 기사만 자그마치 열 명.
심지어 남부에서 제일 실력 있는 기사들을 가려서 뽑은 것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내용이기에 이렇게 신경 쓴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부에 무슨 큰일이 있었나?”
“아닙니다.”
“그런데 왜…….”
“저희도 내용은 알지 못합니다.”
대표로 편지를 전한 기사가 비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분명 중요한 내용이 적혀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표정이었다.
물론 나라도 그럴 것이다.
열 명이나 되는 기사들을 가려서 보냈는데 그 내용이 단순한 보고라면 그게 더 이상하니까.
“알았네. 오느라 고생했으니 편히 쉴 수 있도록 해줘야겠지.”
“고마운 말씀이지만 호의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서둘러 돌아가야 하니까요.”
고생한 기사들에게 좋은 숙소와 술을 내려주려 하는데 기사들은 돌아가야 한다며 이를 거절했다.
반드시 신속하게 편지를 전하고 답장과 함께 서둘러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그럼 답장을 준비할 때까지만이라도 쉬고 있게.”
난 전령을 이렇게 고생시키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에 의아함을 느꼈다.
그러나 명령이 그렇다는데 내가 이를 붙잡고 늘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편지를 읽고 내용을 확인해 보는 수밖에.
‘으음?’
그런데 막상 열어본 편지의 내용이 많이 이상했다.
남부 연합이 갑자기 나를 내버려둔 채 서부를 공격하겠다는 이야기.
물론 어디까지나 허락을 구하는 내용이었으나 대체 왜 이런 결론이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겉으로는 내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자신들끼리 해결하겠다는 거지만…….
‘설마 그럴 리 없지.’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굳이 남부의 최정예인 내 군대를 내버려두고 자신들끼리 움직일 이유는 없으니까.
내가 참가하면 곤란하다는 의미로 봐야 했다.
하지만 도대체 왜?
‘공을 탐내서? 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을 텐데?’
레일리는 공을 탐내는 성격이 아니고 똑똑한 게일 남작이 위험성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남부 연합의 의견이 이렇게 모였다면 분명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혼자서는 답을 내릴 수 없다는 생각에 마나 파장을 통해 남부 연합에 직접 문의해 보았지만 돌아온 답은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이었다.
‘설마 남부 연합이 나를 배신하려는 건 아니겠지?’
뻔한 거짓말에 갑자기 남부 연합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