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02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02화
102화
“라이언 경, 내가 예전에 말했을 텐데. 기사는 그만두고 싶다고 그만둘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은퇴를 거론하는 라이언에게 따끔한 일침을 날려주었다.
용병의 고용 관계와 기사의 군신 관계는 명백히 다르다.
물론 그렇다고 늙어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하는 건 아니다.
기사와 같이 몸을 쓰는 자리는 나이가 들면 실력이 쇠퇴하기에 일선에서 물러날 때가 온다.
그러나 아직 라이언은 그때가 아니었다.
로크도 남아서 기사단장 일을 하고 있는데 라이언을 벌써 놓아줄 리 없지 않은가?
“알아보니까 기사가 은퇴할 수 있는 경우가 몇 가지 있긴 하던데요?”
라이언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기사의 은퇴에는 허락이 필요하지만 영주가 어지간해서는 기사를 붙잡을 수 없는 몇 가지 경우가 있었다.
밑에서 영주를 따랐던 기간이 아주 긴 경우나 엄청난 공을 세운 경우.
그렇지만 라이언은 해당되지 않는다.
밑에 있던 기간이 긴 것도 아니고 준남작 작위를 줄 만큼 공은 세웠으나 독보적이지는 않다.
내가 거부하기 힘들 정도는 아니란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영주로서 문제가 있어 따를 수 없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라이언이 대단한 사고를 쳐서 내 밑에 두기 껄끄러운 상황도 아니다.
“제대로 다시 알아보게. 경은 그 경우에 해당되지 않으니까.”
“끙! 그래서 제 부탁은 들어주실 겁니까?”
잠깐 앓는 소리를 낸 라이언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빅터에게 힘을 달라는 부탁.
이전이라면 솔직히 이런 부탁을 받았더라도 거절했을 것이다.
라이언의 마음은 나름 높이 사지만 그것만으로 빅터에게 투자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일단 고려해 두지.”
“평소와 달리 대답이 좀 애매하신 거 같은데…….”
“돌아가서 빅터 경과 대련 한번 해보면 왜 그런지 알 거야.”
“네?”
뜬금없이 대련을 해보라는 말에 라이언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나는 굳이 라이언의 의문을 풀어주지 않은 채 축객령을 내려 그를 내보냈다.
그렇게 라이언이 내쫓기듯이 나간 뒤 등받이 깊숙이 몸을 기댔다.
라이언의 부탁은 분명 내 원칙에 어긋났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빅터를 외면해 왔던 태도를 바꿀 것을 결심한 뒤였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보주에 여유가 생겼다는 것, 빅터가 말릭의 토벌에 큰 공헌을 했다는 것, 마족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알아냈다는 것 등등.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쩌면 빅터의 잠재력이 내 예상보다 높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마음을 움직였다.
‘어쩌면 지금껏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나는 처음부터 5티어로 시작하고 그에 따른 마법 재능이 주어진 탓에 등급과 재능을 어느 정도 동일시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 보면 릴리아나는 그 천재적인 재능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영웅 정보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빅터는 프레드와의 싸움 때도 그렇고 이번 말릭과의 싸움에서도 급격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위니스가 가이스트의 사상에 공감하게 했던 투쟁이 성장의 요소가 된다는 말.
어쩌면 그 말은 영웅마다 성장의 방향성을 달리해야 한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
‘빅터가 재능이 부족했던 게 아니라 내가 제대로 이끌지 못했던 거야.’
영웅 정보를 보고 등급과 스킬을 보면서 그것만으로 해당 영웅에 대해 필요한 정보를 다 파악했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해당 영웅이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눈앞에 보이는 등급과 상점에 있는 승급권에 정신이 팔렸으니까.
‘멍청하게도.’
위니스가 보주를 퍼주었지만 휘하의 기사는 이미 수백 명이다.
그들에게 일일이 승급권을 사주려고 했다가는 아무리 보주가 많다고 해도 한계가 올 수밖에 없다.
하물며 지금처럼 보주에 여유가 없었던 이전에는 더욱 그랬을 테고.
그런데도 난 현재의 등급과 나이를 통해서 대략적인 잠재력을 추측하고는 기준치에 미달한다고 생각되는 기사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루안을 중심으로 공방 장인들의 실력이 일취월장했고 재물을 아낌없이 풀며 품질 좋은 장비들을 만들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기사들의 재능을 모두 끌어냈다고 말할 수 없다.
내가 좀 더 세심하게 신경 썼다면 빅터처럼 실력이 월등히 늘어난 사례가 이전에도 나왔어야 하니까.
‘그리고 재능이 꼭 싸움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고.’
영웅의 유형이 전투형이라고 해서 그 재능이 굳이 전투에만 몰려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당장 라이언만 해도 그런 경우였다.
2티어 전투형 영웅으로서는 충분히 합격점이지만 지금 나에게 그 정도 수준의 영웅은 그리 의미 있는 전력이 아니다.
그런데도 내 기사단에서 라이언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명예에 현혹되지도 않으며 내 선택과 결정을 존중해 주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나에게 한정된 얘기만이 아니다.
라이언은 자신을 두고 가라는 빅터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다.
만약 라이언이 망설였거나 남아서 같이 싸우기를 결정했다면 말릭을 놓쳤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런 라이언의 태도를 나무랄지도 모르나 다른 기사들과 명백하게 다른 라이언의 개성은 분명 의미가 있다.
적어도 한 명쯤은 다른 관점에서 보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하니까.
‘다 갈아엎어야겠군.’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을 모두 바꿔야 한다.
기사나 마법사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영웅 정보가 존재하지 않는 이들 중에도 릴리아나처럼 숨겨진 재능을 가진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지위를 막론하고 모두를 시험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바빠지겠어.’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피곤해져 왔다.
하지만 이렇게 바쁜 것에 대해 별다른 불만은 없었다.
결국 이 모든 게 내 힘으로 돌아오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 * *
‘대련을 해보라고?’
라이언은 아인이 했던 말에 의문을 가졌다.
대련을 해보라는 건 빅터의 실력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긴, 몸 상태도 점검해 봐야 하니까.’
이상하게 아무런 상처조차 없었으나 겉으로만 그럴 뿐 실제로 멀쩡한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검을 겨루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도 없고.
그리고 분명 아인이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었을 테니 라이언은 그 말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마침 돌아가서 확인한 빅터는 잠들지 못한 채 멀뚱히 누워만 있었다.
“계속 누워있어서 그런가. 좀처럼 잠이 오지 않더군.”
“잘됐네. 그럼 나가서 몸 좀 풀까?”
“차라리 그게 좋긴 하겠어.”
라이언의 제안에 빅터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장비를 챙겨 연병장에서 서로 마주했을 때 라이언은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어째 예감이 썩 좋지 않은데?’
라이언은 자신이 가진 특유의 감이 보내오는 경고에 위화감을 느꼈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대치했을 때에나 느꼈던 감각이 다른 인물도 아닌 빅터에게서 느껴졌다.
이는 상당히 이상한 일이었다.
빅터의 실력은 라이언에게 거의 근접하기는 했으나 결국 비등한 정도였지 빅터가 라이언을 넘어선 것은 아니었다.
하물며 이렇게 좋지 않은 예감을 느낄 정도라면 제법 실력에 격차가 나야만 했다.
‘정말 뭔가 변화가 있었나?’
감을 신뢰하는 라이언은 방심하지 않고 예리한 눈으로 빅터를 주시했다.
그 과도한 경계와 긴장에 빅터는 의아함을 느끼며 선공에 나섰다.
휙!
수많은 노력으로 만들어진 가볍고 경쾌한 찌르기.
라이언은 다급하게 옆으로 몸을 날려 회피에 성공했지만 표정이 굳어졌다.
그저 한 수일 뿐이지만 지금껏 빅터가 했던 그 어떤 찌르기보다 완성도가 높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뭔…….’
라이언이 옆으로 피함과 동시에 빅터의 칼날이 뱀처럼 휘어지며 라이언의 뒤를 쫓았다.
검의 방향 전환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이를 받쳐주는 동작 또한 신속하면서 유려했다.
쨍!
이번에는 회피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라이언은 단검을 들어 이를 방어하고 반대쪽 손으로 공격에 나섰다.
두 자루의 단검을 이용하기에 얼마든지 자유로운 공방이 가능하다는 게 라이언의 특기였다.
그러나 빅터는 물러나지 않고 손을 뻗어 라이언의 공격을 붙들었다.
덥석!
“어?”
순식간에 손이 낚아채인 라이언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로크와 겨룰 때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대응.
재빠른 속도를 장점으로 내세워 왔던 자신이 손을 잡혔단 것에 라이언은 경악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빅터는 라이언을 끌어당겨 무너트리며 간격을 좁혀왔다.
빡!
“꽥!”
이어지는 주먹 한 방에 라이언은 그대로 침묵했다.
“아, 미안…….”
자신도 모르게 급소에 가까운 쪽으로 주먹을 뻗은 빅터가 뒤늦게 당황했다.
어쩐지 대련 내내 기분이 이상했다.
가볍게 날린 공격이 어쩐지 너무 정확하고 강하게 펼쳐지는 데다 라이언의 움직임도 훤히 읽히고 있었다.
거기에 정신을 팔다 보니 제법 위험한 공격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작 이 정도에 대응을 제대로 못 하고 당하는 라이언의 모습이 의아했다.
“몸이 안 좋을 거라 생각해 봐준 건가?”
“아이고! 봐주긴 뭘 봐줘?”
일격을 당한 라이언은 아인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힘을 달라고 기껏 부탁한 보람도 없이 빅터는 급격하게 성장해 자신을 훌쩍 뛰어넘은 상태였다.
이게 아인이 직접 한 일인지 아니면 빅터 스스로가 성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자신의 부탁이 무의미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미 빅터는 충분히 강했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힘이나 달라고 해볼 걸 그랬나?”
라이언은 잠시 후회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인이 절대 공짜로 힘을 줄 리 없다는 걸 라이언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분명 그만큼 고생을 요구할 것이다.
“힘?”
“아니, 아무것도.”
혼잣말을 들은 빅터의 물음에 라이언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계속할까?”
빅터가 뒤로 물러나 다시 자세를 잡자 라이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직 제대로 적응도 못 한 것 같은데 이 수준이라면 적응이 끝난 뒤에는 격차가 더욱 명백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 그러고 보니 배는 안 고프냐?”
라이언은 대련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빅터의 관심을 돌렸다.
생각해 보면 계속 누워있느라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한 상태였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데 굶길 수는 없어 묽은 수프를 먹이긴 했으나 건장한 기사가 그 정도로 충분할 리 없었다.
“듣고 보니 상당히 배고픈 거 같기도 한데.”
“그럼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아직 식사 시간이 아닐 텐데?”
“환자가 깨어났는데 말하면 뭐라도 주겠지.”
라이언은 빅터가 다시 대련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식당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 * *
중부 안정화는 동부 안정화와는 많이 다르게 진행되었다.
남부 연합과 중부가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무력 침략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남부 연합에서 소득을 내지 못한 건 아니었다.
황금십자회 세력이 통째로 나를 따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타이온 백작의 가신들을 비롯한 일부 영주들이 떨어져 나갔지만,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들도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전망을 보면 결국 중부가 내 발아래에 떨어질 미래를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동맹의 대가로 남부 연합이 중부의 일부 지역을 얻어갔기 때문이다.
그 지역들은 주로 아직 황금십자회가 장악하지 못한 친왕실파의 영역이었다.
나는 그곳들을 빠르게 흡수하고 영웅을 육성하기 위한 새로운 방안을 준비시켰다.
“끄응.”
네일은 내가 요구했던 것들을 정리하면서 고생한 탓에 안색이 좋지 않았다.
“준비는 다 되었나?”
“그렇습니다.”
“고생 많았군. 시간이나 인력이 부족했을 텐데.”
네일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내가 시킨 일이고 나를 위한 일이기에 최대한 지원을 해주었지만, 그것을 고려해도 상당히 과중한 업무였다.
“다행히 모두 잘 협조해 주더군요. 영주님의 명성 덕분입니다.”
“그건 다행이군.”
이제 크레시안 왕국에서는 더 높이기도 힘들 정도의 명성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중부에서 직접 전투를 벌인 건 이번이 처음인 데다 비록 상대는 마족 하나였지만 그 규모는 어떤 전투보다 거대했다.
한때는 중부에서 제일의 위세를 자랑했던 친왕실파와 현재 중부를 장악하고 있는 황금십자회.
여기에 내가 이끄는 남부 연합의 전력에 마법사 협회까지 참전하여 네 개나 되는 세력이 마족과 싸웠다.
자세히 보면 친왕실파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지만, 이 싸움이 세력 하나가 전멸할 만큼 대단한 규모의 전투였던 것으로 꾸며주게 되었다.
파르티아 요새 역시 내 명성이 오르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말릭의 소멸 이후에 요새를 움직이던 힘이 완전히 사라지고 시간이 지나 얼음마저 녹자 그대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내전이 이어지는 동안에 그 잔해를 수습하거나 요새를 재건하기에는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나와 파르티아 요새는 그대로 방치되었다.
덕분에 망가진 파르티아 요새를 구경하는 이들이 생겨났고 그들이 퍼트린 소문이 내 명성을 크게 끌어올렸다.
“그럼 예정대로 진행하게.”
“알겠습니다.”
네일이 내 명령을 전달하러 떠나고 얼마 뒤, 영지 곳곳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우선은 기사단.
기사들의 재능을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시합을 열었다.
규칙은 열 명의 인원을 한 조로 편성하여 자신을 제외한 이들 모두와 한 번씩 겨루는 것.
이를 3회 반복하여 상위권 성적 다섯 명은 다른 조에서 올라온 이들과 뒤섞어 재차 겨뤘고, 하위권도 하위권끼리 모아 겨루는 걸 반복시켰다.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지만 이를 통해서 휘하 모든 기사의 수준과 특기를 세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불만이 나오지 않도록 막대한 재물을 풀었다.
작위가 없는 견습 기사에게는 서임과 명검을 지급할 것을 약속했고, 서임을 받은 정식 기사에게도 재물과 명마, 기사단 내 지위 상승 등 눈 돌아갈 조건을 내걸었다.
이런 상황은 마법사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마법사들에게는 내가 직접 가르치는 시간이 추가되었다는 것.
이를 통해 현장에서 장단점을 파악한 다음에 이를 어떻게 성장시킬지 논의하며 집중적인 육성에 나섰다.
변화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집단 전투가 핵심인 병사들은 최대한 실전과 유사하게 훈련을 편성하고 부대 단위로 성적에 따른 보상을 내렸다.
‘아직 부족해.’
내 재물 퍼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중부, 남부, 동부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내고 곱절은 상회하는 보상을 제시했다.
오죽하면 다른 귀족 밑에서 일하는 이들이 내 밑으로 들어오려고 해 귀족들이 곤란해졌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단 몇 주 만에 이런 지출이라니. 크레시안 왕가가 건재했더라도 이걸 감당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지출된 금액을 살피던 네일이 혀를 내둘렀다.
어지간한 영주라도 파산했을 거라고 생각될 만큼 불과 몇 주 만에 증발해 버린 재물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이걸 잠깐 하고 마는 것도 아니고 주기적으로 하겠다고 했으니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비용이었다.
“대체 어디서 재물이 나오고 있는 겁니까?”
“그럴 만한 곳이 있네. 뭐, 몬스터 부산물 덕분이기도 하고.”
아무리 실전처럼 하고 싶어도 한계가 있으니 군대를 동원해 레이드도 빡세게 하고 있었다.
부대를 번갈아가며 진행해 그야말로 작업장을 돌리듯이 레이드가 이어졌다.
“그것도 이상합니다. 자꾸 어디서 몬스터가 튀어나오는지. 중부에서는 맹수도 구경하기 힘든데…….”
네일은 뒷말을 흐리며 설마 하는 의심이 담긴 시선을 나에게 보냈다.
그에 난 딱히 부정하지 않은 채 가볍게 시선을 마주쳤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요.”
침묵에 담긴 의미를 알아들은 네일은 굳이 더 묻지 않았다.
어쨌든 나쁜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자꾸 어디서 몬스터가 나오고 막대한 재물이 끝없이 쏟아져도 이 모든 건 영지의 전력을 향상하는 데 쓰이고 있었다.
“성과는 어떻지?”
“폭발적입니다. 그렇지만 들인 재물만큼의 값어치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전혀 아닙니다.”
네일은 효율이 낮다고 이야기했다.
나도 동의했다.
재물 좀 많이 푼다고 눈에 띄게 실력이 향상되거나 갑자기 진보를 이루리라는 건 헛된 생각이다.
물론 열심히 노력하고 있을 테니까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겠지만 빅터처럼 급격한 성장이 일어나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체질 개선이었다.
“하압!”
바깥 연병장에서 기합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훈련 시간은 한참 전에 끝났다.
그러나 연병장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은 돌아갈 기미가 없었다.
누군가가 강제로 시켜서 남은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추가 훈련을 하고 있었다.
“재물은 언젠가 떨어지겠지. 그렇지만 몸에 붙은 습관이 쉽게 사라지진 않아.”
당장 눈앞의 작은 이익이 아니라 미래를 보는 장기적인 변화였다.
이전이라면 여유가 없어서 해내지 못했겠지만, 위니스 덕분에 목돈이 생겼으니 충분히 투자할 만했다.
비록 이 때문에 내가 6성으로 승급할 길이 멀어지고는 있지만…….
‘어차피 랜덤 상자니까.’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모르는 랜덤 상자에 허튼 기대를 품는 것보다야 백배 천배 나은 결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