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98화
VVIP 영주님의 품격 98화
98화
* * *
퍼석!
탈론이 날린 화살에 머리가 꿰뚫린 순간 말릭은 불쾌한 죽음의 감각에 몸서리를 쳤다.
비록 그 육체가 진짜는 아니라고 해도 이 느낌만큼은 진짜 죽음과 똑같은 것이었다.
“제기랄!”
하지만 이쯤은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말릭이 참을 수 없는 건 아인이 무언가를 알아차리고 요새를 수색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일부러 요새까지 움직였던 건데!’
말릭이 요새를 움직인 것은 단순히 전력으로 써먹기 위함이 아니었다.
부활에 필요한 시간을 벌고 적들이 요새에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미 요새 안에는 기사들이 들이닥쳐 사방을 뒤지고 있었다.
우당탕!
와장창!
이미 요새가 움직이면서 한바탕 쑥대밭이 된 상태인데 기사들은 아예 가루라도 만들 생각인지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만한 것들은 모두 깨부쉈다.
그러나 효과적인 수색 방식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파르티아 요새의 비밀 통로는 특정한 물건을 건드리면 드러나도록 장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장치는 비밀 통로가 드러나지 않게 움직일 때 망가지지 않도록 조치를 해둔 상태였다.
즉 현재 요새 내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이를 본다면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안으로 들어오는 미친 짓을 할 줄이야.’
마법사 협회에서 요새를 통째로 얼렸어도 말릭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요새 안으로 들어올 엄두는 내지 못하리라 여겼으니까.
실제로 기사들은 이후 말릭이 모습을 보이자 말릭에게 집중했지 요새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아인이 갑자기 요새를 수색시켰다.
‘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딱히 요새를 의심할 만한 단서를 흘리지는 않았기에 말릭은 거기에 의문을 품었다.
행여 자신이 말실수를 한 부분이 있나 되짚어 봤으나 전혀 짐작되는 게 없었다.
“빨리 흔적을 지우든가 해야겠군.”
말릭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숨겨진 밀실 전체를 뒤덮고 있는 복잡하고 고등한 마법진.
그 주변에는 죽음에서 부활할 때 필요한 제물들이 가사 상태로 고정되어 있었다.
가이스트가 말릭에게 내려준 힘은 마나가 늘어난다거나 마법사로서 역량이 상승하는 단순한 게 아니었다.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물론 그러한 힘이 아무런 대가가 없이 주어질 리 없었다.
이를 위해서는 굉장히 복잡한 조건들이 필요했고 상당한 제물이 있어야 했다.
‘이곳을 버리기에는 아쉬운데.’
이 장소를 준비하느라고 들인 공이 보통이 아니었다.
게다가 제물 역시 까다롭기 그지없어서 쉽게 구할 수 없었다.
그가 소속된 마족들의 세력인 크로노스에서 조달을 도와주지 않았으면 혼자서는 아예 이런 준비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도 비밀이 새어 나가게 둘 수는 없지.”
말릭이 밀실을 없애기 위해 마법을 준비할 때였다.
타악!
빛살 같은 속도로 날아든 무언가가 말릭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큭!”
갑작스러운 기습에 말릭은 당황하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젠장! 벌써 온 거냐?”
습격자의 정체는 빅터였다.
소년의 안내를 받아 비밀 통로를 알아낸 빅터는 라이언과 함께 내부로 들어와 밀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밀실에서 말릭이 무언가를 하려는 것을 보고 서둘러 뛰어들었다.
“야! 너 혼자 돌격하면 어떡해!”
라이언은 빅터의 행동에 기겁했다.
상대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힘을 품고 있는 강대한 마족이었다.
몰라보게 실력이 늘어난 로크나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루시우스, 다니엘 같은 이들이 엄청난 지원을 받고서도 아직 채 쓰러트리지 못한 녀석.
자신들로서는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우웩! 여긴 또 뭐야?”
뒤따라 들어온 라이언은 밀실의 끔찍한 참상에 속이 매스꺼워졌다.
기이한 마법진은 제쳐두더라도 그 주변에 말뚝으로 고정당한 사람들의 모습은 역겹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자세히 보니 그들은 죽은 게 아니었다.
생기 있는 얼굴에 미약한 숨이나 체온까지.
정신을 잃기는 했으나 살아 있는 상태였다.
“이거 설마 인신 공양 같은 건가? 그 미개한 의식이 아직도 남아 있어?”
짐승을 제물로 바쳐서 풍년을 기원한다거나 하는 의식은 어느 국가에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었으나 인신 공양은 아니다.
먼 과거에는 그런 일이 자주 행해졌으나 지금에 이르러선 그런 짓을 하는 순간 사교도로 몰려 교수대에 목이 매달릴 것이다.
“미친 사교도들이나 가끔 한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마족들이 사교도와 무슨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지.”
빅터의 추측에 말릭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음? 그러고 보니 내전으로 사교도들이 활동하기 시작한 곳도 있다고 듣긴 했는데…….”
라이언은 얼마 전 주워들은 소문을 떠올렸다.
새롭게 영입한 기사에게 들은 이야기로 그는 타국에서 도망친 탈영병 출신이었다.
내전으로 고통받는 건 어디나 똑같지만, 그의 고국은 사교도가 득세하기 시작해서 도무지 남아 있을 수 없다는 말을 들었었다.
“보면 안 될 걸 봤구나.”
말릭은 라이언과 빅터의 말에 이를 갈았다.
이곳의 흔적을 지우는 것 말고도 해야 할 일이 생겼다.
눈앞에 있는 기사 둘을 반드시 죽여서 입막음을 하는 것이었다.
“염병…….”
말릭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 라이언은 식은땀을 흘렸다.
무심코 꺼낸 말이었는데 아무래도 마족의 입장에서 그냥 넘어갈 수 없던 내용이었던 모양이다.
“라이언 경, 지원군을 데려와 줘.”
“뭐? 넌 어쩌고?”
“놈을 붙들어둬야지.”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우리가 상대할 놈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
“내 목숨의 가치가 방금 얻은 정보보다 의미 있을까?”
빅터의 반문에 라이언은 말문이 막혔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저 마족에게는 상당히 치명적일 수도 있는 정보일 터.
분명 이 정보는 아인에게 전해야만 했다.
“이건 꼭 필요한 정보다. 저 마족한테 희생된 동료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알려야 할 정보고.”
“빌어먹을!”
라이언은 말릭에게 휩쓸려 죽은 이들을 떠올렸다.
거대한 요새에 깔려 죽거나 지진으로 갈라진 틈으로 추락하고, 마그마에 휩쓸리고.
아인 휘하에서는 흔치 않은 큰 피해였다.
아마 루퍼스 때보다도 몇 배나 되는 사상자가 생겼을 것이다.
“그럼 네가 가든가! 이럴 땐 원래 젊은 놈이 살아야지.”
라이언이 빅터를 대신해 나서려 했으나 빅터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잖아?”
내전으로 수십 차례나 이어진 전투에서 빅터는 누구보다 아군의 안위를 신경 쓰며 싸워왔다.
위험에 처한 아군을 구한 횟수만 10번이 넘어갈 정도로.
그런 빅터가 아군을 사지에 두고 물러날 리 없었다.
라이언은 그런 빅터의 고집을 잘 알았다.
무능하기 이를 데 없는 자신을 원망하는 빅터는 자신보다 가치 있는 이들이 끝까지 살아남아 아인을 보필해 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아군을 위해 헌신해 왔다.
“더 이상 동료의 희생을 늘리고 싶지 않아.”
라이언은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지금은 빅터의 말대로 지원을 부르는 게 고집을 피우는 것보다 훨씬 중요했다.
게다가 라이언으로서는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명분이 있었다.
“그 작위가 거저 얻어진 게 아니라는 걸 경도 알 텐데?”
빅터는 그저 평기사에 불과했지만 라이언은 준남작이었다.
오차드와의 싸움을 앞두고 아인은 자신의 명령에 불복종했던 기사들을 두고 그 명령에 따른 라이언에게 작위를 주었다.
그 의미를 기사들도 이해했다.
“진짜 염병…….”
라이언은 이 상황이 너무 싫었다.
그런데도 빅터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지금껏 곁에서 지켜봐 오면서 빅터가 어떠한 인간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누가 순순히 보내준다고 한 것처럼 말하는군.”
말릭은 자신을 앞에 두고 다투는 빅터와 라이언의 모습에 기가 막혔다.
자신을 가로막던 기사들에 비해서 이 둘의 실력은 그렇게 뛰어나 보이지 않았다.
하필 좁은 밀실이라는 장소가 걸리기는 하지만 그래 봐야 자신의 마나 실드를 뚫지 못하는 상대다.
위협이 될 요소는 지원군이 오는 것뿐이었다.
“여기서 다 죽…….”
파악!
눈가를 스쳐 가는 칼날에 말릭은 눈을 부릅떴다.
어처구니없게도 빅터는 말릭의 마법을 막기 위해서 자신의 검을 던지는 선택을 했다.
“지금!”
그 순간 라이언은 재빨리 출입구를 향해서 몸을 날렸다.
말릭으로서는 이를 제지할 수 없었다.
재차 마법을 쓰려고 할 때 빅터가 맨손으로 거리를 좁혀들어 왔기 때문이다.
마나 실드를 쓰기에는 여유로웠으나 라이언을 공격하기에는 각도가 나오지 않았다.
“미친 새끼가!”
제 몸을 내세우는 그 행동에 말릭은 어쩔 수 없이 빅터를 우선해야 했다.
시뻘건 화염이 곧장 라이언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라이언은 방패로 얼굴을 막으며 그대로 뛰어들었다.
‘이 정도는 그 기사도 했다.’
빅터는 오웰 남작가와 싸우던 순간을 떠올렸다.
후방을 기습해 아인을 죽일 뻔했던 프레드라는 기사.
그는 마법사가 펼친 화염의 벽을 검으로 갈라내는 솜씨를 내보였고 마법사들의 마나 실드도 단숨에 깨부쉈다.
물론 상대인 말릭의 실력은 당시 마법사들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도 장비만큼은 그 기사보다 월등했다.
푸확!
거센 불길에 갇힌 건 잠깐이었다.
그러나 그 잠깐 사이 빅터는 이곳이 자신의 최후가 되리라고 직감했다.
방패와 투구로 감싼 얼굴이 화끈거리고 눈이 고통스러웠다.
다른 부위는 더했다.
외부로 맨살이 나온 것도 아닌데 열기에 익어버린 갑옷이 피부를 익히며 녹아들고 있었다.
살면서 겪어본 적 없는 형태의 끔찍한 고통이었다.
하지만 아직 움직일 수 있었다.
빅터는 이를 악문 채 나아갔다.
‘진짜 미친놈이잖아?’
말릭은 그 광경에 기겁했다.
장비를 믿었다면 착각이다.
급조한 마법이라도 말릭의 실력이라면 저런 장비 따위는 녹여버릴 수 있었다.
실제로 그 잠깐 사이에 갑옷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내부에 있는 몸 역시 당연히 멀쩡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상대가 멈추지 않았다.
“꺼져라!”
팔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품으로 파고드는 빅터를 향해 휘둘러졌다.
쩡!
빅터는 건틀렛으로 말릭의 주먹을 흘려내며 거리를 더욱 좁혔다.
말릭은 경악했다.
빅터의 속도가 예측보다 너무 빨랐다.
검을 던진 것에 이어서 이번에는 아예 제 몸을 날려서 덮쳐들었기 때문이다.
우당탕!
말릭과 빅터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검을 던질 때부터 이상했는데 이런 건 분명 기사의 싸움 방법이 아니었다.
육탄전을 상정한 훈련을 받기는 하지만 일부러 손에 쥔 검을 버리고 맨손으로 싸우는 건 머저리나 할 짓이니까.
하지만 지금만큼은 유효했다.
서둘러야 했던 말릭은 마나 실드를 아예 쓰지 않았고 덕분에 빅터를 처치하지 못한 영향으로 접근을 허용했다.
콰악!
빅터는 핏발 선 눈으로 말릭의 팔을 붙잡아 꺾으려 했다.
말릭의 근력도 만만치 않아 쉽게 꺾이지는 않았으나 잠깐 힘을 겨룰 정도는 되었다.
“크아아!”
말릭은 포효하며 빅터의 구속을 떨쳐내려 했다.
육체적인 능력이 오차드보다 약하다고 말릭이 정말 약한 건 아니었다.
빅터의 팔이 서서히 밀리며 금세 말릭이 신체의 자유를 되찾을 듯이 보였다.
빠각!
그 순간 빅터는 머리를 망치처럼 내리쳐 투구로 말릭의 얼굴을 찧었다.
생각지 못한 충격에 말릭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빡! 빠악!
빅터의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연달아서 심지어 빅터 자신의 이마가 찢어져 피가 흘러내림에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말릭은 피범벅이 된 얼굴로 빅터의 얼굴을 보았다.
마치 피눈물을 흘리는 것 같은 눈동자와 시뻘겋게 익어 녹아내리는 피부.
그러나 자신을 향한 살의만큼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내가 설마 고작…….’
빡!
물론 이번 한 번을 죽어도 금세 부활할 수 있었다.
아직 준비된 제물은 충분했고 밀실을 파괴하지 않았으니 마법은 자동으로 발동할 테니까.
하지만 그런데도 말릭은 웃을 수 없었다.
부활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약간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미 다른 녀석이 밀실을 빠져나갔으니 다음에 부활했을 때에는 적들의 지원군이 바깥을 둘러싸고 있을 것이다.
밀실에는 다른 통로도 없었다.
‘그 아인 네패스인지 뭔지나 협회도 아니고 이놈에게 발목이 잡혀서…….’
죽음.
몇 번이나 경험한 가짜 죽음들이 아니라 진짜 죽음에 대한 공포.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경험을 해봤기에 더욱 잘 알았다.
그 기분 나쁜 감각은 절대 여러 번 경험해 보고 싶은 게 아니었다.
“크흐흐!”
빅터는 얼빠진 말릭의 표정에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마법을 제쳐두고 봐도 마족의 육체는 자신보다 강했다.
그런데 막상 뒤엉키기 시작하자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하고 있었다.
이렇게 개싸움을 해본 적이 없다는 증거였다.
하긴 생각해 보면 빅터 자신도 그랬다.
어렸을 때는 스승에게서 이러한 싸움법도 분명 배웠으나 멋이 없다 여겼다.
실제로 기사들은 이런 형태의 싸움을 선호하지 않았고 대련에서는 아예 개싸움을 하지 않았다.
검을 놓치거나 패배를 인정하거나.
적당히 제압되는 선에서 대련을 그만두기 마련이었다.
그런 빅터가 이런 싸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과거 기사단장 자리를 두고 로크와 라이언이 싸웠을 때였다.
모든 기사들이 충격을 받았던 그 싸움을 빅터는 다르게 보았다.
진짜 전장도 아니고 서로 감정도 없는 둘이 왜 그렇게 처절하게 싸웠는가.
아인에게 받을 보상 때문에?
아니다.
용병 출신인 두 사람에게는 그런 처절한 개싸움이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용병이란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도 않은 채 자신들을 소모품처럼 여기는 영주의 명령에 따라 위험한 전장에 내몰린다.
그리고 그들은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도 못했다.
그러니 이런 막무가내 개싸움이야말로 그들이 가진 최고의 무기일 수밖에 없었다.
부족한 것들을 뒤집을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게 이것뿐이니까.
하지만 과연 약자의 전법이었다.
다른 상대도 아니고 이 끔찍한 마족에게조차 유효했으니까.
태생적으로 강인한 마족들은 약자의 전법을 알지 못했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같이 가자.”
귀기가 서린 빅터의 말에 말릭은 몸을 떨었다.
익숙하지만 이번에는 더욱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죽음이 그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