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97화
VVIP 영주님의 품격 97화
97화
【 단서 】
“블리자드!”
콰콰콰!
켈렌을 중심으로 발현된 마법이 파르티아 요새를 휩쓸었다.
차갑다 못해 모든 것을 꽁꽁 얼려버릴 듯한 혹한이 요새를 뒤덮었고 성에와 고드름이 끼며 요새의 움직임이 가로막혔다.
거대한 파르티아 요새가 통째로 얼어붙는 광경은 그야말로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세상에나…….”
같은 마법사인 황금십자회 역시 나와 별다를 바 없는 반응을 보였다.
역사나 인원 등 두 집단은 라이벌이라 말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격차가 있으나 그것이 이 정도이리라고는 황금십자회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드넓은 전장에서는 아무리 강자라도 뭉치지 않고 흩어져서 싸우게 되는 경우가 많고 더구나 이 방법은 막대한 마나를 요구했다.
언제까지 전투가 이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섣불리 쓸 수 없는 강자 하나만을 없애기 위한 필승 카드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해치웠나?”
완전히 얼어붙은 파르티아 요새의 모습에 기사들이 반색했다.
지금까지 재앙과도 같은 모습을 보였던 말릭이지만 이러한 마법에 살아남으리라고는 예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나 협회의 마법사들의 생각은 달랐다.
말릭이 어떠한 마법을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 육신이 조각나서도 이런 짓을 벌인 놈이다.
제 진짜 몸도 아닌 요새가 얼었다고 죽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무슨 섭섭한 소리를 하는 거지?”
어떻게 된 영문인지 파르티아 요새의 위에 말릭이 멀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혹시나 하고 아까 죽은 자리를 살폈으나 내 기사들에 의해 조각났던 육체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게 대체…….”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는 듯이 멀쩡한 모습에 당혹스럽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쉽게 당해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절 피해가 없는 모습이다.
‘무슨 마법을 쓰고 있는 거지?’
마족 정보를 다시 불러내서 보유하고 있는 스킬을 샅샅이 살폈지만 마땅히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숙련도가 높은 스킬들은 이미 모두 사용했고 숙련도가 낮은 스킬들에도 이 상황을 이해할 만한 이름을 가진 스킬은 보이지 않았다.
“에이든이 죽고 나서도 너희는 여전히 거슬려.”
말릭이 팔을 앞으로 내밈과 동시에 다시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얼려두었던 바닥이 쩌적 갈라지고 차갑게 식어버린 마그마가 다시 열기를 되찾았다.
“대체 무슨 마족이지?”
원로들의 표정에도 여유가 사라졌다.
협회로서는 마족의 재등장에 대비해서 준비한 비장의 기술이었을 텐데 그게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것이다.
파르티아 요새를 얼리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협회에서 바라던 결과는 그 정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고위험군 마족 명단에 없습니까?”
자크론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협회에서는 살아서 달아난 마족들의 특징이 기록된 명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목격자가 죽어서 정보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마족도 있다. 그런 케이스겠지.”
그러나 플레턴에게서 나오는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원로들이 머리를 맞대고 말릭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했으나 유의미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 녀석은 터무니없군. 전쟁에서도 이만한 수준의 마족은 본 적이 없다.”
가이스트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말릭의 힘은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그것을 알고 있는 나도 협회의 실패에 다시 초조함을 느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정보가 부족했다.
육체가 죽었는데 어떻게 다시 나타났는지.
파르티아 요새처럼 다른 건축물을 조종하는 건 아닌지.
마족 정보를 통해서 확인되는 내용으로도 도무지 힘이 짐작되지 않아 마땅한 대응을 내놓을 수 없었다.
‘마냥 버티기만 할 수도 없고.’
말릭은 마나를 아낌없이 퍼부으며 우리들을 위협했다.
그야말로 자신에게 한계란 없다는 듯이 강력한 마법을 연달아서 퍼붓는데 이를 막아내는 협회의 원로들이 곤혹스러워할 지경이었다.
‘분명 약점은 있을 텐데.’
저러한 힘을 가지고도 마족들은 바로 복수에 나서지 않고 아직까지 숨어서 틈을 엿보고 있었다.
그건 그들의 힘이 완전하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충분한 힘이 있다면 처참한 패배를 맛봤던 마족들이 바로 복수에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
‘문제는 약점을 찾을 방법이 없다.’
시스템을 통해서도 파악되지 않는다면 다른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
차륜전으로 끊임없이 병력을 희생시키면서 마나가 먼저 바닥나 후퇴하게 만든다는 식으로.
그렇게 해서라도 확실히 이길 수만 있다면 고려해 보겠지만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다.
말릭의 입장에서는 마나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달아나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리고 마나를 회복한 뒤 다시 쳐들어오는 걸 반복하면 결국 크레시안 왕국 자체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었다.
타국의 지원은 솔직히 기대하기 힘들었다.
인류는 현재 내전으로 골치 아픈 상황에 처했고 내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앞으로도 그러한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마족이 출현한 돌발 사태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이미 한 번 뽑아서 피를 묻힌 칼을 얌전히 거둘 수 있을 리 없으니까.
‘설마…….’
문득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일전에 나는 게일 남작에게 타국이 우리가 손대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질 거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건 게임에서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내전을 알고 있기에 한 말이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내전보다도 더 치명적인 재앙이 일어나리라는 걸 게임을 통해서 이미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마족과 연관이 있나?’
어쩌면 피의 연회 자체가 마족의 마지막 발악이 아니라 원대한 계획의 일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의 연회는 마족이 일으켰으나 그에 결탁한 대영주들이 분명 존재한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런데 말릭은 이번에 메디치 후작으로 위장한 채 자신을 숨기고 있었다.
각국의 군주들이 자신들의 파벌을 중심으로 여러 나라에서 했던 연회.
그 기밀을 입수해 각국의 수뇌부를 일거에 휩쓸어버린 마족들.
대영주들의 결탁이라고만 생각했던 그 일이 사실은 철저히 마족들에 의해 준비된 것이라면?
단서는 이전에도 있었다.
오차드는 라닌 후작가의 사생아인 길모어를 남몰래 조종했다.
조종당하는 길모어 자신조차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의지라고만 생각했을 정도로 그 조종은 간교한 면이 있었다.
더구나 직접 인간으로 위장하는 것까지 가능하다면…….
‘메인 스토리에 나왔던 대영주들.’
내가 게임에서 마주했던 대영주들이 정말 인간이 맞을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내전에서 힘을 키운 대영주들은 많이 튀어나왔고 그중에는 일국의 군주를 넘볼 만한 거대 세력도 여럿이었다.
그들도 사이가 좋은 쪽과 나쁜 쪽이 있었으니 모두 마족이라고 의심할 수는 없으나 반대로 모두 인간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뒤에서 힘을 키우면서 기회를 엿보는 게 아니야. 확실하게 인류의 전력을 깎아먹을 수 있도록 암약하고 있는 거지.’
오차드가 라닌 후작가의 사생아인 길모어에게 접근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길모어의 신분으로는 라닌 후작가를 좌지우지할 능력이 없었다.
어쩌면 오차드의 목적은 길모어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라닌 후작에게 접근하는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동부 내전에 남부 연합이 끼어들면서 그 계획이 어그러졌다면?
‘하지만 메디치 후작은 다른데.’
힘을 키우고 싶었다면 메디치 후작으로 위장한 마족들은 타이온 백작을 중심으로 한 대영주파를 꺾고 중부를 장악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마족들은 정체를 숨기느라 친왕실파가 몰락하는 동안 제대로 힘을 쓰지 않고 있었다.
아직 확보되지 않은 라닌 후작보다야 당장 이용할 수 있던 메디치 후작 쪽이 가치가 높았을 텐데도.
‘게다가 라닌 후작은 그저 대영주일 뿐이지만 메디치 후작은 마법사였다.’
마족으로서 힘을 쓰기에도 마법사였던 메디치 후작 쪽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메디치 후작은 거의 방치하다시피 해놓고 라닌 후작가에 공을 들이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였다.
그나마 여기 파르티아 요새만큼은 지켜냈지만.
‘왜?’
그러자 다시 의문이 들었다.
메디치 후작의 신분을 포기할 거라면 진즉 포기했어야 한다.
그렇지만 마족들은 파르티아 요새만큼은 지켜내고 있었다.
타이온 백작은 수차례나 공격했지만, 번번이 메디치 후작의 저항에 막혀 파르티아 요새를 점령하지 못했다.
‘둘의 목적이 다르다?’
오차드는 혼란을 일으키는 게 목적이었다면 메디치 후작은 파르티아 요새를 지키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친왕실파를 이기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전장이 유리해지면 친왕실파는 진격을 요구할 테고 메디치 후작도 파르티아 요새로 오게 될 일이 없을 테니까.
실제로 파르티아 요새를 소유한 것은 메디치 후작이 아니라 요크 공작이었다.
‘요새 안에 뭔가가 있다.’
갑자기 요새를 조종하는 것 자체가 기이한 일이다.
저러한 마법을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이 해낼 수 있을 리 없다.
“네패스 기사단은 들어라!”
요새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이 모든 게 그저 나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이런 불확실한 일로 기사 전력을 나누는 건 전략적으로 보자면 해선 안 될 선택이지만…….
“파르티아 요새 내부에서 수상한 것을 찾아내라!”
지금으로서는 다른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난 도박사는 아니지만 아무 이득도 없이 피해만 보고 물러나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음?”
내 지시에 모든 이들이 의문을 표했다.
이 상황에서 느닷없이 얼어버린 파르티아 요새를 수색하라는 건 이상한 지시였으니까.
그러나 기사들은 오히려 이 명령을 반기고 있었다.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적어도 지금보다는 낫군!”
지진과 마그마라는 자연재해에 맞서는 것보다는 훨씬 반길 만한 명령에 기사들은 앞다투어 파르티아 요새로 진격했다.
콰콰쾅!
그러자 기사들을 향해 말릭이 서둘러 요격에 나섰다.
하지만 요격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말릭을 상대로 수비적인 태도를 일관하며 선두에서 버티고 있던 로크나 루시우스, 다니엘 같은 영웅들이 행동을 바꿔 공세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위협도 안 되는 요새로 들어가는 기사들을 요격하는 행동 자체가 무언가 있다고 인정하는 행동과 다를 바 없었으니.
“정말 요새에 뭔가 있구나!”
“이 귀찮은 것들이!”
말릭은 자신을 가로막는 기사들을 상대로 필사적으로 맞섰으나 좀처럼 성과를 내지 못했다.
육체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져서 오차드에 비해 대응이 매끄럽지 못했다.
더구나 저격수인 탈론의 존재는 말릭에게도 치명적이었다.
“제발 좀 떨어져라! 이 거머리 같은…….”
퍼석!
내 보조를 받은 탈론의 화살이 말릭의 마나 실드를 부수고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아까도 그랬듯 말릭의 존재감은 여전했지만 잠깐 숨 돌릴 틈은 얻을 수 있었다.
이제는 녀석이 다시 나타날 때까지 요새 안에 들어간 기사들이 성과를 내길 기다릴 뿐.
* * *
“하마터면 죽는 줄 알았네.”
파르티아 요새 안으로 들어온 라이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크나 루시우스 등 실력 있는 기사들의 경우에는 마족과 직접 대치하며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끼어들 실력이 되지 않는 기사들은 마법사들 곁을 최대한 지키며 광범위한 마법에 희생될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요새 안으로 들어가라는 명령은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런데 대체 여기에 뭐가 있다는 거지?”
외부는 협회의 마법으로 꽁꽁 얼었으나 요새 내부는 비교적 온전한 상태였다.
그 안으로 들어온 기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요새를 뒤지기 시작했으나 하나같이 의문을 품고 있었다.
“뭐라도 있으니까 찾으라고 명령하신 거겠지.”
빅터는 의욕을 내며 요새를 뒤지고 다녔다.
오차드 때도 그렇지만 말릭은 그보다도 더 강력한 마족이었다.
그나마 이번에는 최소한의 역할이라도 할 수 있었으나 빅터는 그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다음에는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아인과 측근들과의 격차는 갈수록 멀어지고 있었으니까.
그건 노력 따위로는 어찌하지 못할 드높은 벽이었다.
‘하지만 이번 마족은 힘으로는 이길 수 없다.’
어찌 된 영문인지 죽였는데도 다른 몸으로 나타났다.
거기에 요새를 조종하는 기이한 모습도 보였고.
아마 단순히 죽이는 것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부류의 마족일 터.
사실 이런 마족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지만 빅터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아인이 요새를 수색하라고 시킨 것에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믿었다.
“뭐 좀 찾았나?”
“아니, 이쪽은 없다. 다른 곳으로 가보자.”
흩어졌다가 다시 마주친 기사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면서도 초조함을 느꼈다.
만약 이곳에 아무것도 없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족이 보여주는 힘은 상식을 아득히 넘어섰고 심지어 협회조차 고전하고 있었으니까.
벌컥!
“으헉!”
그때 빅터가 열어젖힌 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아마 친왕실파 잔당을 따르는 이로 추정되는 이들이 방에 숨은 채 떨고 있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저희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절대 마족과 결탁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바닥에 납작 엎드리자 빅터는 딱한 시선을 보냈다.
‘이들에게도 재앙이었겠군.’
지금껏 따라왔던 메디치 후작이 알고 보니 마족에다가 갑자기 요새가 움직였다.
달아날 이들은 달아났지만 미처 떠나지 못한 이들은 움직이는 요새에 갇혀버린 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의 딱한 사정을 봐줄 때가 아니었다.
“메디치 후작이 뭔가를 숨겨둔 장소를 아는 사람 없나?”
“모, 모릅니다!”
“사소한 단서라도 좋다! 평소에 자주 가는 곳이라거나 아니면 이 요새에 숨겨진 비밀 통로를 알고 있는 자가 없나?”
“저희는 그냥 일하는 하인이라서 그런 건…….”
쓸모 있는 이야기가 없자 빅터는 실망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아는 사람이 없나? 원한다면 넉넉한 보상을 주겠다.”
“저 알아요.”
그런데 모여 있던 이들 중 어린 소년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말했다.
“안다고?”
“네. 비밀 통로를 알아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라이언은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소년의 행색은 비루했다.
요새의 비밀 통로 위치 같은 중요한 정보를 알 만한 신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게 장난치다가 실수로…….”
라이언의 추궁에 소년은 겁먹은 얼굴로 냉큼 자신의 잘못을 실토했다.
메디치 후작의 숙소 주변에서 실수로 물건을 떨어뜨렸는데 그게 우연히도 비밀 통로를 열었다는 이야기였다.
“거기가 어디지?”
빅터의 눈이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