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96화
VVIP 영주님의 품격 96화
96화
* * *
파르티아 요새로부터 멀리 떨어진 산등성이 위에 두 사람의 인영이 모습을 보였다.
앞에 선 여성 위니스는 일반인이라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까마득한 너머에서 날뛰는 말릭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위니스 이사님. 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때 위니스의 뒤편에 선 이가 입을 열었다.
위니스와 같은 제복을 입은 그는 위니스의 뒷모습을 향해 미심쩍은 눈길을 보냈다.
“상부에서 내린 지시를 굳이 어길 필요가 있었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이사님이 징계를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뒤에 선 사내의 염려에 위니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무슨 짓을 했다는 거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능청스러운 위니스의 행동에 사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가 모시기 쉽지 않은 상관이라는 건 옛날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일을 저지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저기에 있는 후보자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가이스트가 멋대로 영역을 침범해서 계약을 진행했다는 걸 알게 된 뒤 타르타로스에서는 대대적인 보복을 계획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후보자에 대한 시험을 중지시켰다.
하지만 위니스는 이러한 사실을 전달하지 않았을뿐더러 이번 일에 대해 타르타로스가 지급하라고 나눠준 보상마저 꺼내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 자신의 힘을 일부 깎아내 보주를 지급하는 선에서 마쳤을 뿐.
“아무리 이사님이라도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을 그렇게 멋대로 어기시면 징계를 면치 못할 겁니다.”
그 때문에 예정된 문제가 일어나고 말았다.
후보자가 감히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마족이 출현한 것이다.
만일 저 마족에 의해서 위니스가 선별한 후보자의 육체인 아인이 사망할 경우 위니스는 책임 추궁을 피할 길이 없었다.
“이런, 어떻게 알았나?”
위니스는 자신의 행동이 수하에게 모두 발각된 것에 의구심을 품고 사내를 돌아봤다.
타르타로스는 철저하게 실력 위주로 돌아가는 집단이었다.
임원이라는 명함을 갖고 있는 이상 위니스의 실력은 일개 사원에 불과한 사내를 한참 상회했다.
더구나 상부의 지시는 후보를 선별했던 그녀에게 직접 내려왔기에 일개 사원이 알 만한 부분이 아니었다.
“저 따위가 어찌 이사님의 행동을 알았겠습니까? 상부에서 추가적으로 연락이 왔으니까 알았지요.”
“으음.”
사내가 명쾌하게 해답을 말해 주자 위니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의 제멋대로인 일탈을 상부에서는 벌써 알고 있던 것이다.
“애초에 가이스트의 개입 때문에 상부의 시선이 쏠린 상태에서 들키지 않으리라 생각하신 겁니까?”
가이스트의 영역 침범으로 인해서 상부의 눈과 귀가 집중된 상태.
지금의 상황이 가지는 무게는 남다른 면이 있었다.
“그럴 리 있나? 나도 계속 숨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네. 그래도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은 몰랐지만.”
위니스는 타르타로스의 정보부가 보여준 신속함에 감탄했다.
그들의 뛰어난 솜씨에 허를 찔리기는 했으나 타르타로스의 일원으로서는 기쁜 오산이었다.
“상부에서는 어서 빨리 사전에 지급하기로 한 보상을 주고 후보자는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라고 했습니다.”
“그래. 나한테도 그랬었지.”
“그런데 왜 가만히 계시는 겁니까?”
사내는 위니스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위니스가 타르타로스에서도 고위층에 속하는 자리에 있다지만 이건 그녀보다도 윗선에서 내려온 지시.
이렇듯 태연자약하게 구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부에서 주라고 한 보상이 마음에 안 들어서 말이야.”
위니스는 품 안에 넣어뒀던 원래 예정되어 있던 보상을 꺼냈다.
[6티어 승급권]
“적당한 보상 아닙니까? 6티어 승급권은 랜덤 상자에서도 드문 확률로 나옵니다. 그런 걸 확정적으로 준다면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게 문제란 말이야.”
위니스는 신현우가 이 승급권을 손에 넣었을 때 어떻게 행동할지를 예측했다.
별로 어려울 것도 없었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후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가이스트에 대한 위협을 설명했으니 망설이지 않고 승급권을 썼을 것이다.
“우리가 후보자들을 선별한 이유가 뭔지 모르는 건 아닐 텐데.”
위니스의 목소리에는 묘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
지금의 위기 정도는 제 스스로 헤쳐 나가 뛰어넘어 주었으며 하는 기대심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사내의 표정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이사님은 후보자에게 너무 가혹한 잣대를 들이미시는 거 같습니다.”
맞춤형 시스템을 기준으로 저 마족의 힘은 6티어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는 가이스트의 개입을 고려하지 않은 평가로 실제 수준은 그를 상회하는 7티어라 봐도 무방했다.
타르타로스 같은 외부 세력이라면 모를까 이 세계의 단일 세력으로 7티어에 맞서려면 최소한 일국의 총력을 퍼부어야만 했다.
“저 후보자는 아직 햇병아리입니다. 지금이라도 예정된 보상을 지급하는 게 옳습니다.”
사원의 완강한 설득에도 위니스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기이한 열망이 일렁거리는 눈으로 그녀가 고른 후보자를 주시했다.
결국 사원은 다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 * *
콰아앙!
파르티아 요새 자체가 되어버린 말릭의 기이한 마법은 전장의 흐름을 단숨에 움켜쥐었다.
요새 자체가 적이 되어버려서야 기사의 날카로운 검은 아예 통하지 않게 되니까.
마법사들이 열심히 공격을 퍼부어서 일부를 깎아내기는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콜로서스 브레이크!”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말릭 또한 마찬가지였다.
말릭은 자신을 노리는 마법사들을 집중적으로 노리며 무시무시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저런 걸 대체 어떻게 이기라고?’
육체 자체가 요새다.
마법사라도 수준이 떨어지는 저티어의 경우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튼튼했다.
그나마 상대가 가만히 맞아준다면 어떻게든 강력한 공격을 준비해서 끝장을 보겠지만 말릭이 그런 틈을 내줄 리 없었다.
그렇다고 기사들이 시간을 벌 수도 없었다.
움직이는 요새를 가로막을 존재가 있을 턱이 없으니.
5티어 영웅인 탈론이나 4티어로 올라온 다른 영웅 모두 마찬가지였다.
릴리아나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도 딱히 달라지는 게 없었을 것이다.
“쯧! 고약한 상황에 처했구나.”
옆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스승이자 마족과의 전투 경험이 풍부한 자크론이었다.
하지만 자크론의 표정 역시 좋지 않았다.
요새를 이루고 있는 대부분이 불로 태울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네가 다시 또 마족과 싸우게 될 줄은 알았지만 설마 벌써 싸울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된 마족 같구나.”
“방법이 없겠습니까?”
“모른다. 전쟁에서도 저만한 수준의 마족은 제대로 들은 바도 없어. 저번의 놈과는 아예 수준이 다르다.”
자크론이 이렇게 표현할 정도라면 역시 가이스트라는 세력의 개입으로 힘을 얻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은 최대한 물러나라. 지금으로서는 협회의 지원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자크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후방에서 거대한 규모의 마나가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일전에 오차드와의 싸움에서도 느껴본 적 있는 순간 이동 마법이었다.
그래도 협회 본부가 있는 중부라서 그런지 예상보다 협회의 지원이 신속했다.
“마침 왔군. 하긴, 얼마 전에 마족이 출현했으니 비상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겠지.”
계속해서 밀리고 있는 전장에서 처음으로 들어온 희소식이었다.
실제로 순간 이동 직후에 상당한 마나를 품은 이들이 막강한 존재감을 내뿜기 시작했다.
“협회의 마법사들이 도착한 건가?”
말릭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잠시 공격을 중단했다.
협회는 강하다.
소속된 인원이 모두 마법사이다 보니 병과를 조합하는 전술을 쓸 수는 없으나 이 자리에는 이미 내 기사단과 중부의 군대가 모인 상태였다.
다른 걱정 없이 마음껏 화력을 퍼부을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것이다.
퍼엉!
그때 협회 쪽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마법이 발동되었다.
협회에서 사용한 마법은 단숨에 주변의 기후를 바꾸었다.
바닥이 갈라지고 마그마가 들끓고 있던 땅이 갑자기 살얼음이 끼면서 굳어가기 시작했다.
6티어인 말릭의 마법을 억제할 정도의 위력.
협회에 그에 대등한 수준의 마법사가 있을 리는 없으니 이건 여러 마법사가 협동해서 일으키는 고등한 마법이 분명했다.
“기사도 그렇겠지만 역시 마법사도 뭉치면 강해지는군요.”
아무리 강한 기사라도 적진을 혼자 돌파해 낼 수는 없다.
그 사이에서 홀로 종횡무진하는 건 가능할지 모르나 응축된 대군을 돌파하는 것과 틈을 파고드는 건 엄연히 다른 일이었다.
그러나 수준이 떨어지더라도 여러 기사들의 기마 돌격은 이를 행할 능력이 있었다.
이는 마법사도 마찬가지였다.
한 마법사로는 이만한 규모의 광범위한 마법을 절대 펼칠 수 없다.
아무리 독보적인 마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결국 한계라는 게 있으니까.
5티어인 내 마나는 아무리 거대하더라도 원로 서너 명 수준에 불과했다.
수십의 원로 마법사를 보유한 협회에서 협동으로 펼치는 마법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역시 협회는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
나로서는 도무지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말릭의 힘을 억제할 수 있을 정도로 협회의 힘은 뛰어났다.
저러한 힘을 그저 중립이라는 이유로 방치하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웠다.
“그래. 생각해 보면 전쟁에서는 네놈들 때문에 고생을 했었지.”
협회의 대응에 말릭의 목소리가 사나워졌다.
“그 원수도 이 자리에서 갚아주도록 하지.”
하지만 말릭은 여전히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협회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상대할 자신이 있다는 의미일까?
만일 그렇다면 말릭이라는 녀석의 전력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크레시안 왕국 전체 전력의 과반이 이 자리에 집결한 상황이었으니까.
내전으로 인해서 전력이 많이 깎였다지만 그것을 고려해도 단신으로 맞상대가 되리라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아무리 마족들이 개판으로 싸웠어도 인류에게 패배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여기 있었군! 그대가 네패스 백작인가?”
말릭의 마법을 봉쇄한 협회의 원로들이 내 주위로 다가왔다.
그런데 그들 중 한 원로가 나를 향해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
일면식도 없는 상대였기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협회의 원로님을 뵙습니다. 제가 아인 네패스입니다.”
전장인 만큼 형식을 갖출 여유가 없어 다소 간결하게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크게 문제 될 부분은 아니었다.
상황도 상황이고 원로의 권위가 대단하다고 해도 나도 이제는 백작의 작위를 가진 대영주였으니까.
협회의 후배로서 이 정도면 충분히 예의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원로는 내 인사 따위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내 제자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네?”
“내 수제자 티아라 말이다!”
그제야 왜 이 원로가 나에게 이토록 감정을 표출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원로의 이름은 켈렌.
내가 내기를 통해서 휘하에 종군시켰던 티아라의 스승이었다.
“제가 무엇을 했단 말씀입니까?”
하지만 이와 별개로 내가 마치 몹쓸 짓을 한 것처럼 구는 그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기에 대해서라면 이미 예전에 협회와 대화가 끝난 내용이다.
물론 협회 쪽에서 반길 내용은 아니었으나 원인은 티아라에게 있고, 종군이라고 해봐야 1년이라고 기간을 명시했었다.
그러니 이런 반응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구 멋대로 귀족 작위를 내려!”
“아, 그거 때문이었군요.”
그제야 켈렌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티아라에게 작위를 내린 것이 단순히 협회의 마법사들을 끌어들이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니 1년만 종군시키겠다던 제자에게 작위를 내렸던 게 협회에서 티아라를 빼가려는 행동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공을 세운 이에게 마땅한 포상을 한 것뿐이지, 그녀는 기간만 채우면 돌려보낼 겁니다.”
“거짓말은 아니겠지?”
켈렌이 나에게 눈을 부라렸다.
아무리 협회의 원로라도 대영주에게 이런 태도는 분명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협회의 일원으로서는 마땅히 받아들일 만한 것이었다.
협회에서 원로들에게 막강한 권한을 준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기껏 열심히 가르친 마법사가 귀족이 되거나 그 밑으로 들어가서 협회를 떠나는 걸 우려하기 때문이다.
“이 친구야,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인가?”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나 파장으로 연락은 몇 차례나 주고받았지만 직접 얼굴을 마주하는 건 정말 오랜만인 내 첫 번째 스승 플레턴이었다.
“스승님을 뵙습니다.”
“그래. 하지만 지금은 인사나 나눌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구나.”
플레턴의 시선이 나를 훑더니 자크론에게로 향했다.
자크론은 비뚜름하게 웃었다.
“아직 안 죽고 살아 있었구나. 명줄이 참 질겨.”
“누가 할 소리를.”
내 두 스승이 서로를 향해 살벌한 눈빛을 보냈다.
생각해 보니 이 두 사람의 관계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서로의 실력은 인정하고 같은 제자를 두었지만 해묵은 감정은 있을 테니까.
자크론은 제명되기 이전에 원로 살해라는 잘못을 저질렀고 그런 자크론을 처벌하기 위해 그를 제압했던 게 플레턴이라고 들었다.
“뭐, 지금은 마족에 집중해야 할 때지.”
두 스승의 대치는 플레턴이 먼저 물러나면서 끝났다.
“하긴.”
자크론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만큼 말릭이라는 마족이 보여주는 힘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협회의 작전은 뭐냐?”
“마족을 상대할 전술이라면 뻔한 것이지.”
플레턴이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원로 켈렌으로부터 막대한 마나가 휘몰아쳤다.
또한 그의 주위에서 수십 개의 보주가 떠오르는 게 보였다.
보주가 품고 있는 마나를 빼내어 자신이 사용하는 마법의 위력을 증폭시키는 것으로 보였다.
‘저런 활용법도 있었나?’
설령 알았더라도 아까운 보주를 쉽게 소모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렇다 해도 이건 눈여겨볼 필요가 있었다.
위니스 덕분에 보주의 재고에 여유가 생긴 참이었으니.
우웅!
뿐만 아니라 근처의 원로들이 켈렌을 향해 마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마나를 일부 전송하고 방대한 마나를 안정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돕는 마법이었다.
“허…….”
그 모습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마족들이 유독 강한 편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어떻게 인류가 승리했는지 의문이 남는 부분이 있기는 했다.
그런데 지금 이 모습 한 번에 그런 의문이 사라졌다.
지금 펼쳐지는 마법은 4티어인 원로들이 5티어는 물론 6티어마저 범접할 수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니까.
물론 쉬운 마법은 아니었다.
한평생을 동고동락한 원로들이기에 저런 짓이 가능하지 다른 마법사가 준비 없이 흉내를 내려다가는 도리어 자폭하는 꼴이 될 거다.
중심이 되는 마법사의 위험이야 말할 것도 없고 보조해 주는 마법사에게도 굉장히 섬세한 마나 운용이 필요했다.
‘역시 아직 난 미숙하구나.’
시작부터 5티어였다고 협회를 조금 우습게 봤던 모양이다.
그들이 쌓아온 역사와 지식은 내 수준을 아득히 상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