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95화
VVIP 영주님의 품격 95화
95화
랜덤 상자와 비슷한 것으로 장비 강화가 있는데 다행히 절대군주에는 장비 강화 시스템은 없었다.
뭐, 나중에는 생겼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더러운 꼴을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
‘랜덤 상자는 P2W의 상징이지.’
P2W 구조의 핵심은 랜덤 상자에 있었다.
만일 그저 돈으로 확정적으로 강해질 수 있다면 유저들은 결제해야 할 금액의 상한선이 정해지게 된다.
최고 수준의 영웅을 두고 성장시키는 데 얼마쯤이면 된다고 견적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견적이 너무 거금일 경우 유저들은 결제를 꺼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랜덤 상자는 이것을 막아준다.
‘확률은 거지 같으면서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갖게 만들어.’
혹시 이 정도 결제하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확률이라는 것이 참으로 무섭다.
로또 복권의 당첨 확률이 낮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소수의 성공한 사람들을 보고 너도나도 복권을 산다.
어차피 실패하더라도 잃는 금액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다.
작정하고 강해지려고 마음먹은 사람의 경우에 랜덤 상자는 그야말로 늪이다.
상한선이 얼마인지를 가늠할 수 없이 돈을 들이붓게 되니까.
그리고 어느 정도가 지나면 본전 생각을 하면서 계속 돈을 쓰게 된다.
이 정도면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같은 말도 안 되는 마음으로.
‘그래서 차마 지를 수 없었다.’
위니스에게 받은 막대한 보주를 가지고서도 나는 이 랜덤 상자를 건드릴 수 없었다.
지금까지 VVIP 시스템의 온갖 혜택을 누려왔지만 랜덤 상자는 아예 무게가 달랐다.
난 VVIP 시스템이 가져다주는 달콤한 보상이 좋았던 것이지 그를 위한 역겨운 구조와 소모될 재화가 좋았던 게 아니다.
그래서 차마 상자를 건드리지 못한 채 차라리 확정적으로 전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영웅들의 승급권을 구매했다.
만약 6티어 승급권이 나온다면 그쪽이 최선이겠지만 그 가능성에 기대는 것 자체가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야망이 크다고 해도 내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 그따위 도박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난 게이머였지 도박사는 아니니까.
“너희에게 공포가 뭔지 알려주마!”
털복숭이 마족 말릭이 앞으로 달려들었다.
동시에 엄청난 규모의 마나가 일대를 뒤흔들었다.
나 역시 5티어로서 최고 수준의 영역에 있는 마법사지만 6티어는 역시나 격이 달랐다.
“플레임 인페르노!”
쿠르릉!
말릭이 마법을 쓰자 일대의 지반이 뒤흔들리더니 바닥에서 마그마가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나름 가파르지만 푸르렀던 산새가 순식간에 죽음의 땅으로 물들어갔다.
“쓰벌…….”
참으로 파격적인 나의 기사 라이언이 그 광경에 걸쭉한 욕설을 내뱉었다.
그야말로 상식에서 아득하게 벗어난 터무니없는 위력의 마법.
말이 좋아서 마법이지 이쯤 되면 자연재해의 영역이었다.
“크크크! 잔챙이들을 잔뜩 모은다고 뭐가 될 줄 알았다면 착각이야.”
말릭이 나를 비웃었다.
실제로 이 한 번으로 위풍당당했던 내 기사들을 충격에 빠트리고 수천의 군대에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오차드를 죽인 인간! 네 녀석이 직접 나서서 나와 승부를 보자!”
파악!
신나서 떠들던 말릭의 어깨가 꿰뚫렸다.
나에 이어서 새롭게 5티어가 된 드래고니안 영웅 탈론.
5티어 승급권의 구매에 필요한 보주의 숫자는 4티어 승급권들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6티어 승급권은 랜덤 상자에서 나오니 5티어 승급권은 단일 상품으로서는 가장 비싼 아이템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만한 값을 하는 아이템이었다.
“크억!”
말릭은 통증에 어깨를 감싸며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아까 요새 위로 쪽지를 날릴 때와도 비교할 수 없는 막강한 위력.
진심으로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 탈론이 쏘는 화살은 발리스타에 필적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뜻밖인데?’
아무리 탈론의 화살이 막강하다고 하지만 말릭은 생각보다 더 힘들어하고 있었다.
마법적인 위력을 봤을 때 말릭이 오차드보다 약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애초에 오차드를 죽인 것으로 명성을 떨친 내 앞에 당당하게 나온 것만 봐도 그렇다.
물론 오차드 때에는 탈론이 곁에 없었다.
하지만 단지 탈론이 강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저 녀석 마법은 대단하지만, 육체 능력은 의외로 뛰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느낀 것을 탈론 역시 간파한 듯했다.
오차드와 싸우지는 못했지만 오차드에 대한 이야기는 탈론 역시 들은 상태였다.
향후 마족을 상대하는 데 탈론의 전력은 반드시 필요했기에 사전에 정보를 주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게 보이는군.”
대략 3티어 수준일까?
어쩌면 약한 척 위장하는 속임수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겉으로 봤을 때 말릭은 오차드보다 육체 능력이 약해 보였다.
대신 마법 쪽은 훨씬 뛰어나니 실제로 붙으면 압도할 수 있겠지만…….
“그러면 이야기가 다르지.”
상대의 방어력이 약하다면 일격에 숨통까지 끊을지 모르는 탈론의 저격이 가지는 가치는 크게 올라간다.
‘오차드보다 강한 마족이라면 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는데.’
아무리 마족이라도 마법 실력과 육체 능력이 마냥 비례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자크론이 오차드를 약하다고 말했던 게 이해가 가는 상황이다.
‘마법 재능이 뛰어나면서 육체 능력까지 뛰어난 마족은 마법사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지.’
대단한 영웅이었다는 에이든이 끝내 죽을 수밖에 없던 이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나 자신은 뛰어난 마법사지만 내 곁에 있는 건 기사부터 시작해 암살자와 궁수 등 온갖 다양한 전투 방식을 익힌 영웅들이다.
플레턴이 마족을 상대할 존재로 나를 고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
다양하게 구성된 군대의 강함은 개인의 전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
“토, 통한다! 마족에게 공격이 먹혔어!”
말릭이 한 번 휘청하는 모습을 보이자 겁먹었던 이들이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마냥 이기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 이들의 눈빛에 생기가 감돌았다.
“우리도 나서자! 네패스 백작 각하를 도와서 마족을 처치하는 거다!”
곧이어 온갖 마법들이 말릭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들의 공격은 말릭에게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으나…….
콰콰콰!
형형색색의 마법들이 말릭의 시야를 가릴 때 탈론의 저격이 매섭게 날아들었다.
사람이 쏜 화살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 공기를 짓이기는 소닉붐과 함께 다시 말릭이 상처를 입었다.
마나 실드를 안 쓴 것도 아니다.
말릭은 분명 엄청난 마나를 담은 마나 실드를 썼으나 탈론의 화살은 마나 실드를 관통해 버렸다.
“이게 무슨…….”
말릭이 아연실색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다른 이들이 공격하는 동안 내가 가만히 있던 건 아니다.
나 역시 공격에 가담하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공격은 아니다.
난 탈론의 화살에 마법을 부여해 주고 있었다.
‘굳이 내가 직접 공격하는 건 비효율적이지.’
내가 나보다 뛰어난 마법사인 말릭의 마나 실드를 뚫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4티어로 성장한 로크와 루시우스, 다니엘이라고 해도 쉽지 않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이를 찾자면 5티어 전투형 영웅인 탈론일 수밖에 없다.
그럼 답은 간단하다.
탈론에게 힘을 몰아주면 된다.
‘굳이 내가 주인공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탈론은 내 기사다.
전장에서 탈론이 공을 세우더라도 내 명성이 오르면 올랐지 떨어지지는 않는다.
물론 내가 직접 싸워서 이기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어차피 명성은 이미 충분히 쌓았어.’
게다가 엄밀히 따져서 내가 지금껏 일대일로 승리를 거둔 강적은 없다.
오차드?
기사 4명과 4티어 마법사인 자크론이 함께 있었고 자크론은 상성상 오차드를 상대로 유리했다.
그럼 그 자크론은?
연합군과 싸운다고 이미 마나를 반절쯤 날려 먹은 상태가 되어서야 싸움을 걸었다.
더구나 영웅 정보를 읽고 전투 방법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다.
애초에 군주의 역량이라는 건 혼자서 적들을 때려잡고 다니는 게 아니라 아랫사람을 잘 다루는 거다.
위니스로부터 들은 절대군주의 이야기에서도 이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평범한 지구인 출신이라는 자가 갑자기 엄청난 힘이 생겨서 타르타로스를 세웠을까?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 광신도 같던 모습을 보여주던 위니스가 무력을 크게 강조했을 것이다.
그런데 위니스는 업적을 칭송하면서도 무력 자체를 칭송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마법도 뭣도 없는 지구에서 무력이 강한 사람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이 세계의 1티어 기사만 해도 지구에서는 최상급의 전투력, 2티어부터는 과연 지구에 범접할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 드니까.
타르타로스에 넘어가서 힘을 키웠을 수야 있겠지만 그에게는 나와 같은 시스템이 없었을 테니 그것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위니스도 바닥에서 시작했다고 말했겠지.
“이게 뭐야? 이게 뭐냔 말이야! 오차드를 죽인 영웅이라며!”
“나 혼자서 죽였다고 누가 그러든?”
발작하듯 소리치는 말릭을 비웃어 줬다.
애초에 마법사는 후방에서 공격하는 유리 대포 같은 것이다.
마나 실드를 쓸 수 있다고 앞에서 싸우는 마법사는 정상이 아니다.
“너희 마족은 전쟁에서 그렇게 패배하고도 배운 게 전혀 없는 건가?”
오차드와 싸우고 난 다음부터 언제 또 마족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인류와 마족의 전쟁 기록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인류가 승리를 거둔 핵심이 무엇이었는지.
“크윽! 이 버러지 같은 게! 콜로서스 브레이크!”
그래도 역시 마족은 마족이다.
‘이건 또 무슨 위력이야.’
콜로서스 브레이크라는 마법은 아예 지진을 일으키고 있었다.
마그마가 치솟는 곳에서 아예 바닥이 쩍쩍 갈라져 휩쓸린 이들이 아래로 추락했다.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P2W 구조가 적용된 6티어 이상은 애초에 전략이니 전술이니 통용될 여지가 없었다.
이 정도면 혼자 천 명이 아니라 수천을 학살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니까.
그렇지만 그 수천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영웅 정보도 없는 일반 병력을 기준으로 할 경우다.
히히힝!
말의 거친 투레질과 함께 로크와 루시우스가 말릭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쏟아져 오는 마그마와 갈라진 대지를 뛰어넘고 기어이 접근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덕분에 마법 공격을 날리기 어려워졌지만 상관없다.
두 사람의 근력과 네임드 장비는 말릭의 주의를 분산시키기에 충분했고…….
콰콰콰!
탈론은 적과 뒤엉킨 아군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정확히 말릭만 노리는 신묘한 솜씨가 있었다.
푸확!
“커억!”
결국, 그러한 전투가 이어진 끝에 탈론의 화살이 기어이 말릭의 심장을 꿰뚫었다.
말이 심장이지 주변의 살점을 모두 파괴하고 사람 얼굴만 한 구멍을 내버렸다.
촤악!
그런 말릭을 향해 로크와 루시우스의 칼질이 연달아 이어졌다.
이미 오차드를 통해서 마족의 끈질긴 생명력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아예 다져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오! 오오오!”
말릭의 죽음에 그라시아 남작이 감탄하며 소리쳤다.
“이런! 이런 놀라운 일이! 저 강대한 마족을 이 정도 피해로 해치우다니!”
그러나 들뜬 그라시아 남작과 달리 나는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육체가 조각조각 났는데도 말릭의 존재감은 여전히 느껴졌다.
강대한 마나는 아직도 말릭의 의지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었다.
게다가 말릭은 마지막까지 그걸 보여주지 않았다.
오차드와 같은 마족 특유의 이질적인 마법을.
아니나 다를까.
쿠웅!
쿵쿵!
지진이 점차 거세지기 시작했다.
기뻐하던 이들도 이윽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당황하며 주변을 살폈다.
“뭐, 뭐지? 마족은 죽은 게 아닌가?”
“뭔가 이상한데?”
“일단 물러나라!”
아무래도 이 장소를 벗어나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 주변에 엄청난 마나가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앗! 파르티아 요새가 이상합니다!”
어느 기사의 외침에 따라 말릭의 뒤편에 있던 요새로 시선을 돌렸다.
파르티아 요새는 말릭과의 전투로 인해 처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무너지거나 그을리는 등 외관이 망가져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파르티아 요새의 외관 따위가 아니었다.
우드득!
기절초풍할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마치 웅크리고 있던 거대한 짐승이 몸을 일으키는 것처럼 파르티아 요새가 일어나고 있었다.
끼기긱!
부자연스럽게 얽혀진 요새의 건축물들이 짓이겨지는 마찰음을 내며 걸음을 디뎠다.
그래, 걸음이었다.
“요새가 움직여?”
상상조차 해볼 수 없던 광경이다.
마족이란 것들의 본래 능력일까.
가이스트란 놈들이 내려준 힘일까.
어느 쪽이라도 눈앞의 거대한 요새가 생물처럼 움직이는 광경이 주는 위압감 앞에서는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마족과의 전쟁에 관해 서술한 여러 귀족의 기록에서도 저런 광경은 본 적이 없다.
“크크크크!”
아마 얼굴이라고 추정되는 부분에서 덜컥 창문이 열리며 음침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쓰러트린 털복숭이 마족 말릭의 목소리였다.
“설마 방금 그게 내 전부라고 생각했다면 큰 착각이야. 이제부터가 진짜다.”
쿠구구!
아마 팔이라 생각되는 파르티아 요새의 첨탑 하나가 위로 솟구쳤다.
이에 그 아래에 있던 기사들이 다급하게 해당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저 길쭉한 첨탑의 길이는 사람이 달려서 도망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콰콰콰쾅!
첨탑이 바닥을 때리자 거센 풍압이 모래 먼지를 일으켰다.
잠시 후 모습이 드러난 첨탑이 내리쳐진 현장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래에 깔린 이들은 육신조차 온전치 못한 시뻘건 핏물로 변한 상태였다.
“저게 6티어라고?”
머리가 멍해졌다.
도무지 이길 수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압도적인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