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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영주님의 품격-90화 (90/250)

VVIP 영주님의 품격 90화

VVIP 영주님의 품격 90화

90화

* * *

황금십자회와의 만남은 남부와 중부의 경계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연합에 속한 영주들과 기사들을 이끌고 이동했고 황금십자회에서는 타이온 백작은 나오지 않았으나 그 대리인이 참가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네패스 백작 각하. 저는 황금십자회의 마법사이자 그라시아 남작가를 이끌고 있는 루첸 그라시아 남작입니다. 직접 나와 주셔서 영광입니다.”

그라시아라는 귀족은 내가 이제껏 본 어떤 귀족보다도 저자세로 나를 맞이했다.

타이온 백작이 직접 나서지 않고 대리인을 보낸 것과 달리 남부 연합의 맹주인 나는 직접 나타났기 때문이다.

격식으로 따지자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반발은 없었다.

이것 자체가 계획의 일환이었으니까.

“타이온 백작 각하께서 이 자리에 나오지 못하신 것에 대해 양해의 말을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내전의 상대였던 간악한 친왕실파 놈들이 보낸 자객으로 심신이 몹시 지치셔서…….”

“충분히 이해하네. 자객이라니, 그런 이들이 어찌 귀족이라고…….”

타이온 백작의 말이 핑계임은 안다.

내 휘하의 기사 중 타이온 백작의 암살에 나섰던 장본인인 다니엘이 있었으니.

당시 암살은 황금십자회에 막혀서 실패로 그쳤고 도리어 암살자들이 처참하게 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더구나 그건 상당히 과거의 이야기였다.

다니엘 이후로도 다른 암살자들이 보내졌을지도 모르나 타이온 백작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니엘은 자신이 속했던 암살단이 크레시안 왕국 최고였다고 자신했었으니까.

‘3티어면 최고 수준이라 자신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

카이로스 백작 휘하에 더 뛰어난 암살자였던 알렉스가 있었으나 그건 그쪽이 특이한 거였다.

1티어만 해도 기사급 전력인데 그런 기사들 수십을 상대할 수 있는 실력자가 뭐가 아쉬워서 암살자로 남을까.

물론 암살자라는 게 알려지면 곤란하지만 다니엘 정도만 되어도 암살자 티를 내지 않고 기사 행세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도 이렇게 몸소 나선 자리인 만큼 부디 좋은 이야기가 되었으면 하네.”

쉽게 넘어가는 척하면서 가볍게 압박을 주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타이온 백작 각하께서는 긍정적인 뜻을 표하셨습니다. 내전으로 혼란에 빠진 왕국을 구하기 위해 귀족이 나서는 건 당연하니까요.”

“그래. 게다가 우리는 같은 마법사이지 않은가?”

은근하게 마법사란 공통점을 강조하자 그라시아 남작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급하지 않다면 회담은 미루고 담소부터 나누지. 괜찮겠나?”

담소라는 말과 함께 뒤쪽으로 신호를 보내자 시종들이 끙끙거리며 만찬을 내왔다.

동원된 이들이 한둘이 아닌데도 테이블을 다 채우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요리였다.

요리사들이 준비된 식재를 보고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을 정도이니 가벼운 오찬으로는 지나친 수준이었다.

“남부의 영웅을 뵙는 자리입니다. 없는 시간도 만들어야지요. 게다가 이렇게까지 환대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왕국을 위하는 귀족으로서도, 진리를 추구하는 마법사로서도 마땅히 할 일이지. 오히려 부족한 거 같아서 미안해지는군. 내전 때문에 재정이 그리 넉넉하지 못해서.”

“아닙니다! 그야말로 훌륭한 만찬입니다.”

“후후. 그래도 남부에서 제일의 명주들을 준비해 왔으니까 술은 만족스러울 거야.”

다시 신호를 보내자 이번에는 보는 것만으로 비싼 몸값을 알 수 있을 화려한 병에 담긴 술들이 들어왔다.

얼마 전 알게 된 사실인데 남부 제일의 특산품이 바로 술이었다.

중부에 비해서도 그 맛이 월등하다고 직접 술을 준비했던 루카인 남작이 자신했었다.

“남부의 명주들은 중부에서도 언제나 탐내는 물건이지요. 참으로 귀한 대접이라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술잔이 오가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렇게 어느 정도 무르익어 갈 때쯤에 나는 그라시아 남작을 향해 떡밥을 던졌다.

“그대는 내가 왜 황금십자회가 아닌 마법사 협회로 갔는지 궁금하지 않나?”

“예?”

뜻밖의 질문에 그라시아 남작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의문이야 당연히 있었겠지만 자칫 예민해질 수도 있는 주제이기에 그라시아 남작의 입장에선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먼저 그 주제를 꺼낸 것이다.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네.”

한탄하듯 말하자 그라시아 남작이 고개를 기울였다.

“어쩔 수 없었다 하시면?”

“당시 내 영지의 상황은 정말 나빴으니까. 손을 잡을 세력은 마법사 협회밖에 없었지.”

내 설명에 그라시아 남작은 쉽게 수긍했다.

실제로 당시에는 마법사 협회와 손을 잡는 게 최선이었다.

“자네는 알 수 있나? 평민 마법사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도움을 요청해야 했던 내 기분을?”

“그저 불편했으리라 짐작만 할 따름입니다.”

“불편? 아니, 그건 그런 게 아니었네.”

손에 쥐고 있던 잔을 그대로 놓자 잔은 바닥에 부딪혀 박살 났다.

그에 그라시아 남작이 몸을 흠칫 떨었고 그와 함께 온 귀족들도 내 눈치를 살피기 바빠졌다.

“굴욕이었어. 가족들도 모두 죽은 마당에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온갖 굴욕을 감내해야 했지. 그중에서 가장 굴욕적이었던 게 뭔지 아나?”

그라시아 남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표정으로 최대한 이해해 보려고 한다는 티를 낼 뿐이었다.

나도 딱히 답을 기대하지는 않았기에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렇게 감내한 끝에 이 자리에 오르니까 그놈들 태도가 참 후안무치하게 변하더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라시아 남작이 눈을 빛냈다.

정황상 내가 말하는 그놈들이 마법사 협회라는 걸 짐작해 낸 것이다.

“협회에서는 나를 영웅으로 치켜세워 주었지. 하지만 진실과는 거리가 머네. 그들이 이름 한 번 빌려준 대가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요구해 왔는지 아나?”

난 내가 협회에 자발적으로 보냈던 온갖 선물들을 일일이 나열했다.

이건 실제로 보냈던 것들이기에 조사하면 바로 나올 것이다.

원래 거짓말을 할 때도 거짓보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쪽이 더 잘 먹힌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듣는 이에 따라서 다르게 들린다는 쪽으로.

“내가 그들에게 뭘 배운 게 있다고.”

플레턴에게 배운 비전 마법만 두 가지였다.

그러나 직접 겨뤄본 마법사들이 아니고서야 그 사실을 모른다.

몇 개의 비전을 알려줬다고 굳이 소문을 낸 것도 아니고.

“그러고 보니 네패스 백작 각하께서 협회에 오래 머무르셨던 거 같지는 않습니다.”

“정말 잠깐이었지. 기초적인 마법만 겨우 배웠네.”

“하지만 지금까지 네패스 백작 각하께서는 많은 전공을 세워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라시아 남작은 내 말에 의혹을 가졌다.

협회에서 배운 게 없는 마법사가 어떻게 지난 활약을 해왔느냐는 합리적인 의문이었다.

“그게 어떻게 내 공이겠나?”

그에 난 침통한 얼굴과 함께 죽어간 기사들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절박하고 처절했던 전투의 현장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들려주자 그라시아 남작은 다시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충성스러운 기사들의 희생으로 간신히 이뤄낸 일이었지. 내가 특별했던 게 아니야.”

“그러한 일들이 있었군요.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네패스 백작 각하께서는 분명 대단한 마법사이십니다. 제대로 배운 게 없이 독학으로 그러한 경지에 오르신 것 아닙니까?”

그라시아 남작은 나를 격려해 주는 한편 마법사 협회에 대한 욕을 꺼내기 시작했다.

자고로 황금십자회 소속의 마법사치고 협회에 불만이 없는 마법사는 없을 것이다.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무수한 마법사들이 기록해 낸 지식이 협회 본부에 잠들어 있으니까.

마법사라면 탐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마법사로서 스스로 갈고닦을 생각 없이 놀고먹으려던 귀족이라면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귀족이 황금십자회에서 좋은 입지를 갖지는 못했을 것이다.

‘영웅 정보도 확인했고.’

그라시아 남작은 2티어 마법사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노력을 했고 자신을 갈고닦아 온 셈이다.

3티어부터는 단순한 노력으로는 도달하기 힘든 재능의 영역이니까.

“협회는 내 명성을 통해서 많은 것들을 얻어내고 있지. 최근에 협회에 들어오는 마법사가 늘었다는 걸 알고 있나?”

“아, 소문을 들어본 거 같습니다.”

이건 과장이었다.

내전으로 살기가 어려워지니까 애매한 재능을 가진 이들도 어떻게든 협회에 신변을 보호받고자 지원자가 폭발적으로 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협회에 들어올 수 있는 마법사의 숫자가 눈에 띄게 늘어난 건 아니었다.

사실상 이전과 별 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외부의 시선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보일 수 있다.

“협회 놈들은 나를 아주 광대로 써먹고 있지. 비전 마법 하나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으면서. 내가 지금까지 이룬 건 모두 선조께서 남겨주신 가문의 이론 덕분인데!”

“하찮은 출신 때문에 그런지 참으로 비열한 것들입니다.”

“동감이야. 누군가는 약자가 선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지. 그들은 승냥이 떼와 다를 게 없어.”

이야기의 흐름이 본격적으로 협회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광경을 초조하게 지켜보는 이가 한 명 있었다.

“백작 각하. 그건 오해십니다!”

당황하면서 협회의 편을 들려고 애쓰는 늙은 마법사.

자크론의 영입 이후로 그 아래에서 두문불출했던 2티어 마법사 제이스였다.

“협회에서는 절대 백작 각하를 이용하려는 게 아닙니다.”

“닥쳐라!”

제이스가 협회를 변호하자 나는 그런 제이스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너희 협회 놈들은 간악하기 이를 데 없는 것들이다. 염치도 없이 내가 쌓은 명성을 이용하는 구더기 같은 것들이지.”

우당탕!

정말 흥분한 것처럼 요란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자 떠밀린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그러나 전혀 개의치 않고 분노로 눈이 뒤집힌 것처럼 제이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내 기사들의 피로 호의호식하는 네놈들을 내가 용서할 거 같으냐?”

“백작 각하!”

제이스의 멱살을 잡고 흔들자 소란을 들은 기사들이 들어왔다.

하지만 소란을 일으키는 인물이 다름 아닌 나였기에 기사들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당황했다.

“경들도 알 것이다! 이 협회 놈들이 죽은 경들의 전우를 양분 삼아서 기생하고 있다는 것을!”

기사들은 딱히 부정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긍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리로 나오시오.”

조금 시간이 흐른 뒤 기사들은 나를 진정시키며 제이스를 이 장소에서 빼갔다.

제이스는 마지막까지 애절하게 아니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끌려 나갔다.

‘훌륭한 연기라고 평가하기는 그런가?’

제이스에게는 미안하게도 그는 내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휘하의 마법사 중에서 딱히 연기에 능한 인재가 있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사전에 언질도 없이 이 난리를 피웠기 때문이다.

진실을 알고 있는 건 제이스를 데리고 나간 기사들뿐이다.

“추태를 보였군.”

“아닙니다! 저는 절실히 공감합니다. 협회 놈들은 귀족에 대한 열등감과 허영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도 황금십자회에 들어갈 수 있었다면 이런 꼴은 안 봤을 텐데.”

“안 될 거 없습니다! 백작 각하께서도 충분한 자격이 있으시니까요!”

내 중얼거림에 그라시아 남작이 눈을 반짝 빛냈다.

그가 내가 뿌린 떡밥을 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마법사 협회 소속 아닌가?”

“그깟 협회 나오면 그만 아닙니까?”

그라시아 남작은 나를 적극적으로 영입하려는 기미를 보였다.

“정말 가능한가?”

“물론입니다. 황금십자회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황금십자회에는 마법의 진리를 찾는 이들이 있는가?”

난 즉석에서 간단한 마법 몇 가지를 내보였다.

그라시아 남작의 수준으로 똑같이 따라 하는 게 가능한 정도의 난이도였다.

“물론입니다. 저도 다른 이들도 모두 마법의 수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그라시아 남작은 내 행동에 화답하듯이 마법을 펼쳐 보였다.

“정말 훌륭한 마법사로군.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살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마법을 익혔어. 숭고한 뜻 같은 건 없었지.”

“귀족이 자신의 가문을 위해서 노력하신 겁니다. 그 어떤 귀족도 그것을 숭고하지 않다 말하지 못할 겁니다.”

그렇게 처음 만났으면서 마치 수년은 알고 지낸 친우처럼 나와 그라시아 남작은 친분을 나누기 시작했다.

마법에 대한 지식을 교류하고 즉석에서 마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이후 동맹이 정식으로 체결되고 그라시아 남작이 떠나기 전 마법서들을 한 아름 싸서 그에게 주었다.

내게 잘 보이고자 귀족이나 상인들이 바친 것들이었다.

딱히 쓸모 있는 마법은 없었지만 황금십자회에 주기에는 적당했다.

“이, 이것은 마법서 아닙니까? 그것도 이렇게 많이?”

“황금십자회에 전하는 선물일세.”

“이리 귀한 것들을 정말 주시는 겁니까?”

“진정 올바르게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네.”

“물론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귀한 선물을 받은 그라시아 남작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중부로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 때 나는 황금십자회로부터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타이온 백작이 직접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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