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89화
VVIP 영주님의 품격 89화
89화
【 황금십자회 】
생각지 못한 보고에 황금십자회 멤버 모두가 깜짝 놀랐다.
차라리 북부 연합이라면 모를까 남부 연합에서 먼저 동맹 제의가 들어올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말이 확실한 건가? 남부 연합에서 우리에게 동맹 제의를 했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기사가 긍정하자 타이온 백작과 황금십자회 멤버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고 마땅히 짚이는 부분도 없었다.
그러나 한참 머리를 맞대자 곧 여러 추측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혹시 서부를 노리고 우리를 잠깐 붙잡아 두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남부 연합의 귀족들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우리 중부의 귀족들을 편입시키고 왕국 전체를 장악하려는 계획 아니겠습니까?”
부정적인 추측도, 긍정적인 추측도 있었다.
특히 한 귀족이 꺼낸 긍정적인 추측이 멤버들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러고 보면 그렇군. 남부 연합에 속한 귀족이라고 해봐야 서른이 안 되니까.”
남부 연합에서 영주 귀족의 숫자는 채 서른이 되지 못했다.
겨우 그 정도 수로는 남부와 동부를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제법 힘에 부칠 것이다.
그 영향인지 실제로 남부 연합의 귀족들은 영주를 대신해서 일할 행정가들을 과할 정도로 뽑고 있었다.
“중부는 다른 지역보다 넓은 땅. 그들만으로는 다스릴 수 없으리라는 계산을 내렸을 겁니다.”
의견을 제시한 멤버가 자신 있게 부연 설명을 해나갔다.
권력을 독점하는 것도 좋지만 사람인 이상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할 수는 없는 법이다.
반드시 권력자를 보좌하거나 대신해 줄 인력이 필요했다.
친척이나 측근들을 동원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라고 무한하지는 않을 터.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새로운 영주를 더 연합에 합류시켜야만 하는데 어중이떠중이를 받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상황이 급하더라도 귀족이란 최소한의 체면치레는 하는 족속이니까.
그러니 중앙의 귀족들인 자신들을 회유해서 부족한 숫자를 채우고 덤으로 중부를 장악하려는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 그의 추측이었다.
“그럴듯한 생각이군.”
“하지만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모든 귀족이 이에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한 멤버가 곧장 반대되는 의견을 내놨다.
“남부 연합에는 네패스 남작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백작이네.”
“자신들끼리 멋대로 올린 작위입니다.”
호칭을 지적받은 멤버는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흠. 그 문제는 지금 중요한 건 아니니 내버려 두고 그가 있는 게 어떻단 건가?”
“그자는 귀족임에도 우리 황금십자회가 아니라 마법사 협회에 들어간 자입니다.”
그 말에 멤버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이라고 마법사 협회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들이 쌓아둔 지식과 역사는 마법사라면 탐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아무리 그것들이 탐난다고 해도 평민이나 심하면 농노 출신도 껴 있는 곳에 귀족이 가입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귀족 출신 마법사들은 협회에 지원을 해주는 대가로 그들의 지식을 사려고 한 전적이 있었다.
아무리 귀족이 잘났더라도 상인과 거래를 하는 건 흔한 일이니까.
모든 영지가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이는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마법사 협회는 이런 귀족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법사 협회는 오직 협회 소속 마법사에게만 지식을 공유하며 독점하고 있습니다. 명백하게 우리 귀족들을 견제하는 것이지요.”
마법사 협회에서 선대가 남긴 비전 마법을 익히려면 원로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원로가 되는 조건 중에는 단순히 실적만이 아니라 협회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직접적으로 귀족 밑에 붙지 말라고 적은 건 아니지만 그게 귀족들에게 가지 말라는 의미인 건 모든 귀족이 다 알았다.
“우리들이 우호적으로 손을 내밀어도 모두 거절했던 협회이고, 네패스 남작은 그 협회에 속한 이입니다. 그런데 동맹을 제안하는 건 이상하지 않습니까?”
“다른 계략이 있다?”
“그런 게 없다고 해도 순서가 맞지 않다는 겁니다. 그가 협회의 마법사로서 협회가 저질러온 잘못들을 사과하는 게 우선 아니겠습니까?”
멤버들은 저마다 묘한 반응을 보였다.
체면으로 보자면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본인이 저지른 일도 아니고, 사실 마법사 협회의 행동도 이해할 수 있었다.
서로가 교류를 해봤자 인원도, 역사도 앞서는 마법사 협회가 일방적으로 지식을 내뱉어야 할 처지니까.
더구나 귀족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비등한 수준에 오를 경우 권력과 자본으로 마법사 협회를 찍어 누르는 게 가능했다.
실제로 마법사 협회가 교류를 받아들였다면 원로들을 포섭해서 지식만 빼먹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네패스 남작은 수상합니다. 애초에 어떻게 협회에 들어간 겁니까?”
의문은 계속 이어졌다.
귀족 중에 자존심 죽이고 협회에 머리를 숙여본 마법사가 없던 게 아니다.
역사적으로 몇몇 귀족은 황금십자회 대신 협회에 들어가려고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거절당했다.
귀족이기에 무작정 안 된다고 거부한 게 아니라 측정을 한 다음에 자질이 부족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거절했고, 귀족이 굴하지 않으면 형편없는 스승을 배정해 스스로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런 협회의 행동이 유일하게 달랐던 게 바로 아인이다.
들어가자마자 바로 협회 원로의 제자로 들인다는 실로 파격적인 결정.
여태껏 귀족들을 거부해 온 협회의 방침과는 맞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그만큼 자질이 대단해서가 아닌가?”
아인의 명성은 이미 크레시안 왕국에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남부에서 맹활약하는 과정도 그렇고 악명 높은 학살자 자크론을 쓰러트리고 동부에서는 무려 마족까지 토벌했다.
젊은 나이에 원로조차 쉽지 않은 일들을 연달아서 해냈으니 아인의 재능이 대단하리라는 건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다.
“아무리 대단해 봐야 나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문은 다릅니다.”
“그거야 당연히 과장된 것이겠지요. 어쩌면 협회에서 작정하고 퍼트린 걸지도 모릅니다.”
의혹을 제시한 멤버는 소문을 믿지 않았다.
보통 소문이란 건 이리저리 오가는 상인이나 용병 혹은 정보가 빠른 마법사 협회를 거쳐서 오가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전으로 인해서 용병들은 장기 고용되는 경우가 많아 이번에는 제외.
남는 건 상인과 마법사 협회뿐인데 그중에서 아인의 소문은 전적으로 마법사 협회를 통해서 퍼지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아인 본인부터가 협회 소속의 마법사니까 협회의 관심도가 남다른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십니까? 마족과의 전쟁에서도 활약했던 악명 높은 학살자를 그런 젊은 나이로 이겼다는 게? 제가 알기로 네패스 남작의 나이는 이제 20대입니다. 20살이라고요.”
크레시안 왕국에서 20살이라면 충분히 성인이었다.
이 자리에 자리한 귀족 중에는 그 나이에 자식을 본 경우도 더러 있었고.
그러나 이는 그저 성인이 되었다는 것이지 아직 20살밖에 안 된 나이로 이룰 수 있는 업적은 아니었다.
“마족은 아예 말할 것도 없습니다. 원로 마법사조차 때때로 목숨을 잃는 상대인데. 당장 전쟁에서 죽은 원로 마법사들이 몇입니까?”
“하지만 너무 터무니없는 소문이기에 오히려 신빙성이 있지 않은가?”
과장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지나쳤다.
더구나 아인의 소문은 과장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게 실제로 그로 인한 인과 관계가 명확했다.
네패스 남작가가 이웃 영지들을 집어삼키고, 남부 연합이 카이로스 백작가를 꺾고, 그 자크론은 아인에게 합류했다.
마족의 출현 같은 경우에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고서는 협회가 감히 조작할 수 없었고.
그 외에도 사소한 것으로 협회의 유망주였던 티아라라는 마법사가 겁 없이 덤볐다가 종군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같은 것도 들려왔다.
황금십자회 역시 협회의 소문에는 귀를 기울이기에 웬만한 정보는 다 입수할 수 있던 것이다.
“그만. 지금은 네패스 남작의 실력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려고 모인 게 아니네.”
타이온 백작은 엉뚱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를 바로잡았다.
지금 중요한 건 남부 연합의 동맹 제의를 받아들일지 말지였다.
“실력이나 진의가 의심스럽다면 직접 만나서 확인하면 될 일 아닌가?”
타이온 백작은 이것이 나쁘지 않은 기회로 보였다.
마냥 희망적인 예측을 할 생각은 없지만 남부 연합이 자신들을 받아들이는 게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친왕실파 귀족들이랑은 다르지.’
지금껏 해묵은 감정이 있던 친왕실파 귀족들과 달리 남부 연합은 마이어드 후작이라는 대영주를 주축으로 했던 세력이다.
최근 그 권력의 균형이 새롭게 떠오른 태양인 아인에게 넘어갔으나 같은 대영주파로서 동맹을 맺기에는 적절한 상대였다.
상대가 마법사 협회 소속이라고 해도 귀족 출신이라는 게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이를 기회로 삼아서 마법사 협회를 장악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맞는 말씀입니다.”
타이온 백작의 이야기에 멤버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단편적인 것들뿐이니 직접 만나보는 게 최선이라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남부 연합과 황금십자회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 * *
“지금쯤 생각이 복잡하겠지.”
타이온 백작으로부터 한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자는 대답이 돌아온 것에 미소가 지어졌다.
본래대로라면 남부 연합은 중부를 바로 침공했을 것이다.
중부의 타이온 백작과 휘하 귀족들이 대비하기 전에 속전속결로 중부를 함락시키는 게 목적이었고 이를 위해 작전을 수립했다.
하지만 위니스와의 만남 이후로 생각이 달라졌다.
마냥 별거 아니라고 배척하고 내치기에 황금십자회는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세력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백작 각하는 무서운 사람입니다.”
내가 새롭게 짠 계획을 들려주자 이를 모두 들은 게일 남작이 두려워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 하나만이 아니다.
이 자리에 모인 남부 연합의 영주들은 하나같이 뒤통수라도 한 대 맞은 얼굴로 나를 봤다.
“하, 하하! 아니, 백작 각하께서 멋진 계략을 짜냈는데 이 사람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가?”
루카인 남작이 그런 게일 남작에게 핀잔을 주면서 손을 싹싹 비볐다.
“황금십자회를 역으로 집어삼키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게 무섭지 않으면 뭐가 무서운 것이지?”
핀잔을 받은 게일 남작이 반발하자 루카인 남작은 과장된 행동으로 이를 받았다.
“어차피 다 이 크레시안 왕국의 것이 아닌가! 그럼 레일리 왕녀 저하의 것이고! 그 남편이신 네패스 백작 각하의 것이지!”
그러나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서라기에는 그 스스로도 놀라고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루카인 남작이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레일리 때문으로 보였다.
예전에 카이로스 백작과 맞서기 위해 처음 모였을 때 레일리에게 워낙 많은 실수를 저지른 그였다.
그런데 지금 내 모습에서 행여 내가 아직 조금이나마 감정이 남아 있다면 자신에게 어떤 보복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저러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아무런 낌새도 안 보여서 루카인 남작도 안심하는 기색이었는데 이번에 다시 밤잠을 설칠 정도의 충격을 준 모양이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악랄한 발상이었다.
황금십자회를 없앤다거나 그들을 무너트리는 게 아니라 그들이 나에게 접근할 것을 이용해서 내가 도리어 황금십자회를 집어삼키겠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황금십자회가 사실상 중부의 수뇌부 모임인 건 사실이지.’
마법사는 절대 흔한 재능이 아니다.
그러나 황금십자회라는 집단이 존속하는 건 타이온 백작이 귀족 출신 마법사들을 중부로 많이 끌어온 덕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친왕실파를 견제하고자 하는 다른 지역 대영주들의 지원도 섞여 있었다.
덕분에 타이온 백작 휘하의 가신 중에는 마법사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걸 통째로 빼앗으면 꽤 쓸모가 있을 거야.’
예행연습으로도 괜찮았다.
나는 마법사 협회도 노리고 있으니까.
협회를 장악하기 이전에 황금십자회를 그 예행연습의 상대로 먼저 시도해 보는 것이다.
성공한다면 좋고, 실패한다고 해도 좋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지가 어디 있나?”
“어허! 의심하지 말지어다! 이분이 바로 우리 남부 연합의 맹주이신 네패스 백작 각하신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나저나 루카인 남작의 행동이 조금씩 거슬리고 있었다.
다른 귀족도 그를 불편하게 여기는 중이고.
아무리 금칠을 해주어도 정도껏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아직 계획이 성공한 것도 아니고 이제 첫 단추를 꿰었을 뿐이다.
“정신 사나우니까 자리에 돌아가서 앉도록.”
“죄, 죄송합니다!”
루카인 남작은 넙죽 허리까지 숙인 뒤 기죽은 얼굴로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야 좀 편해졌다.
“어쨌든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생각보다 손쉽게 중부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맞습니다. 황금십자회를 얻는다는 게 중부를 얻는 것과 다를 게 없으니. 그러면 남는 건 친왕실파 잔당들이군요. 혹시 예정된 처분이 달라졌습니까?”
“딱히.”
친왕실파 귀족들은 황금십자회와 달리 딱히 써먹을 구석이 없었다.
“그럼 뭐, 그들은 예정대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응? 혹시 다른 견해가 있으십니까?”
“한번 얼굴은 봐야겠군.”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친왕실파 귀족 중에 그래도 나름 포섭할 만한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쓸모 있는 영웅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파벌을 만들지 못할 정도의 숫자라면 레일리의 존재를 알리더라도 오히려 포섭에 유용할 테고.
‘필요한 모든 걸 이용해야지.’
위니스를 만나고 관점이 달라졌다.
적이라고 해도 최대한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게 낫겠다는 쪽으로.
설령 상대가 저항한다고 해도 필요한 것들을 뽑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6티어 같은 말도 안 되는 걸 보면 이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