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86화
VVIP 영주님의 품격 86화
86화
상상도 못 했던 이야기였다.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과 별개로 나는 아직 위니스나 타르타로스에 대한 어떤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당장 내가 사용하고 있는 시스템의 원리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고.
그런데 심지어 타르타로스 같은 상식을 초월하는 힘을 가진 다른 조직이 나타났다니?
“하.”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절대군주란 목표는 나름 대단한 무게가 있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 대륙을 통일하는 자리가 절대 가벼울 리 없으니까.
그러나 위니스를 비롯해 타르타로스나 지금 언급된 가이스트란 조직은 대륙을 위에서 내려다볼 정도로 말도 안 되는 곳이었다.
“너 같은 존재들이 또 있다니. 이 말을 믿어야 돼?”
“내가 무슨 신이라도 되는 줄 알았어?”
“그건 아니지만…….”
위니스를 신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아주 대단한 존재라고는 생각했다.
위니스가 만약 별 볼 일 없는 하찮은 존재라면 그런 그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내 처지가 너무 한심해지니까.
“안심해. 다른 차원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범차원적인 세력은 극히 드물다고? 무한대에 가까운 차원에서도 손으로 꼽을 정도야.”
“그런 곳이 하나라도 있다는 시점에서 이미 아웃인데.”
인류는 외계인의 존재 유무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찾으려고 하는 외계인도 우리와 같은 고등한 지적 생명체가 아니라 생물의 흔적이라도 알아보려는 것에 불과하고.
그것만으로도 학계가 뒤집히고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런데 위니스와 타르타로스는?
아예 다른 차원의 존재이며 차원들을 상대로 장사를 한다는 뜻으로 추정되는 범차원 기업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야말로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아득한 격차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뭐, 햇병아리에게 세상 이야기는 너무 복잡하니까 넘어가자고. 넌 너대로 네 길을 가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런 소리를 듣고 그럴 수 있겠냐고.”
지구는 대체 얼마나 뒤처져 있는 걸까.
미개한 원시인이 된 기분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 지금까지 잠잠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타르타로스는 딱히 지구에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어.”
“나한테 나타난 건?”
“그건 다른 목적이 있었으니까. 너도 내심 짐작하고 있겠지만 심심해서 너를 시험해 보고 있는 건 아니라고.”
잠시 위니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가 나에게 뭘 원하는지, 나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려는 건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굳이 말하지 않는 건 설명해 줄 생각이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적어도 지금 나로서는 그걸 들을 자격이 없단 의미겠지.
“뭐. 이왕 온 김에 궁금한 것들을 설명해 주는 시간을 가지도록 할까? 짐작하듯이 대답해 주지 않는 질문도 있겠지만.”
“일단 가이스트부터.”
“가이스트는 또라이들이야.”
“또라이?”
“살육과 투쟁 그리고 이로 인한 혼란이 인류에 진보를 가져온다고 믿는 극단적인 전투광이라고 할 수 있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범차원적인 조직이라고 해서 어마어마한 기술력과 지성으로 뭉친 집단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또라이였다.
그런 놈들이 어떻게 멸망 안 하고 성장해서 범차원적인 세력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우주가 낳은 최고의 미스터리가 아닐까.
“내심 공감되는 게 없는 건 아니지만.”
“뭐?”
심지어 위니스는 거기에 나름 공감하는 모습을 보여 나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저딴 것에 공감을 할 수 있다니, 범차원적인 놈들은 죄다 미치광이만 있단 말인가?
“사상 자체에 완전히 수긍한다는 건 아니야. 열에서 아홉은 반대해. 다만 열에 하나로 투쟁이 성장의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믿을 뿐이야. 너도 그렇지 않아?”
위기가 성장을 이끌어낸다는 부분에는 공감한다.
그렇지만 성장을 위해서 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에는 공감할 수 없었다.
그건 위니스의 표현대로 너무 극단적이다.
“어쨌든 이 가이스트 놈들이 이 세계에 나타나 마족들과 접촉했던 모양이더라고.”
“접촉이라면 어떤 형태로?”
“그걸 설명하려면 이 세계와 우리가 했던 게임 절대군주에 대한 설명을 먼저 해줘야겠지. 넌 어떻게 게임과 똑같은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해?”
“둘 중 하나겠지. 게임을 기반으로 세계를 만들었거나 혹은 그 반대거나.”
게임과 똑같은 세계.
게이머로서는 나름 즐거울지 모르겠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는 말도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계의 진위 여부 자체를 두고 고민을 가져본 적도 있다.
과연 이 세계가 진짜일까?
혹시 내가 어떤 환상이나 최면을 경험하는 게 아닐까?
그렇지만 눈으로 직접 본 이들과 느꼈던 모든 감각들은 가짜라고 외면하기에는 너무나도 또렷했다.
내 감각 정도는 얼마든지 속일 수 있는 엄청난 기술이 있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꽤 정확하게 추론했네. 네 말대로야. 둘 중에는 후자지. 이 세계는 원래 이대로 존재했어. 모바일 게임 절대군주는 이 세계를 기반으로 미래에 일어날 법한 일들을 계산해서 만든 거지.”
“왜?”
위니스의 발언에 바로 의문이 들었다.
사실 난 전자의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어떤 초월적인 힘으로 세계 자체를 창조한다는 게 기겁할 만한 일이기는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도무지 그래야 할 당위성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굳이 실존하는 세계를 배경으로 게임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그러한 힘이 있는 존재들이 고작 게임을 만들어야 할까?
“딱히 대단한 이유가 있던 건 아니야. 우리 타르타로스에서는 그런 일을 꽤 많이 하고 있다고.”
“어째서?”
“내가 너에게 준 것들.”
위니스가 나를 가리켰다.
“아인 네패스의 육체. 네패스 가문. 그의 가문에 속한 이들. 이 모든 게 갑자기 주어졌다고 생각해? 아무런 위화감도 없이 가문 하나를 뚝딱 만든다고?”
“육체를 바꿨으니까 그냥 끼어든 건…….”
“아니야. 그건 정당한 계약에 의한 거였다고. 네패스 가문의 창립자인 초대 가주가 우리 타르타로스와 계약했거든.”
“계약?”
“그가 훗날 이루게 될 가문에 속하는 것들을 받는 대가로 그에게 약간의 힘을 줬지.”
역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로 돌연변이 같던 재능을 가진 마법사.
그게 다인 줄 알았다.
심지어 후손들에게 제대로 된 해명도 못 할 가문의 마법 이론을 보고 어쩔 수 없는 평민 출신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고.
그런데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초대 가주가 갑자기 대단한 마법사가 되었던 것은 타르타로스의 개입에 의한 것이었다.
“갑자기 가문의 비밀을 알아버렸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인 네패스의 몸을 빼앗는 건 너무했다고 생각하는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면 아인 네패스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을 것이다.
“아, 그 녀석은 이미 죽었어.”
“뭐?”
“식음을 전폐하고 방에 틀어박혀 울다가 죽었어. 몸이 약했던 녀석이라서. 그 시점에서 네패스 가문의 소유권이 온전히 우리 타르타로스에 넘어왔고 나는 녀석의 육신을 되살리고 네 영혼을 넣은 거야.”
빙의를 한 시점에서 영적인 힘이 작용했으리라고는 추측했지만 설마 그런 일들이 있었을 줄이야.
단순히 스케일이 크기만 한 게 아니라 비과학적인 부분도 상당했다.
“그럼 내 원래 몸은?”
“내가 잘 보관 중이야. 안심해, 아인 네패스의 몸처럼 다른 영혼을 집어넣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네가 이곳에서 죽거나 포기 선언을 한다면 원래 몸으로 돌아갈 수 있어.”
“돌아갈 수 있다고?”
“설마 내가 진짜 죽게 만들 줄 알았어? 그런 짓 했다가는 내 목도 같이 떨어진다고.”
위니스는 손날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러고는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이었다.
“넌 이곳에서 죽어도 아인 네패스로서 죽을 뿐이야. 신현우라는 인간은 지구로 무사히 돌아간다고.”
그런 위니스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었다.
죽지 않고 돌아갈 수 있다니?
이 사실을 알았다면 지금까지 받은 스트레스의 절반 이상은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목숨이 보장되지 않는 상품 같은 걸 판매할 리가 없잖아? 그런 짓을 하면 타르타로스의 평가가 나락에 처박힌다고.”
미리 설명해 주지 않은 시점에서 이미 나에게 타르타로스의 이미지는 바닥까지 추락했다.
“뭐, 내가 워낙 날치기로 계약을 진행해서 설명이 미흡하기는 했지.”
그래, 그 말대로 이 모든 건 다 위니스 때문이었다.
“계약 취소시켜. 이건 무효라고.”
“해지 신청 기간이 지나서 취소는 불가능해. 이용 약관에 나와 있다고.”
“그딴 거 못 봤거든?”
이용 약관 같은 건 본 적도 없다.
“보여줬어. 네가 술에 취해서 기억 못 하는 거야.”
“심신 미약 상태잖아!”
“타르타로스에서는 심신 미약이 인정되지 않아. 애초에 심신 미약에 걸릴 나약한 존재는 없거든.”
“난 지구인이야!”
“고객의 사정까지 하나하나 봐주다 보면 우주에서 어떻게 장사를 하겠어?”
그야말로 악마가 따로 없다.
타르타로스는 악덕 기업의 표본 그 자체였다.
“아무튼 절대군주란 게임을 만든 것도 이런 방식과 비슷해. 잘나가는 모바일 게임사의 사장 자녀. 지구에서 이세계 라이프를 즐기기에 적당하지?”
“그럼 설마 P2W를 넣은 것도!”
배신감에 절로 이가 갈렸다.
이 말대로라면 절대군주에 P2W 구조를 넣은 것도 타르타로스란 소리였으니까.
적어도 위니스가 그것만큼은 진심이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야.”
“응?”
“우리는 자본을 지원했지 운영은 계약자의 의향대로라고. 애초에 우리 타르타로스가 만들었으면 게임 타이틀로 절대군주라는 명칭은 못 썼겠지.”
“왜? 절대군주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
생각해 보니 위니스는 처음 만났을 때 게임을 하게 된 계기가 절대군주란 타이틀 때문이라고 한 적이 있다.
절대군주란 이름을 쓰는 사람을 안다고.
“우리 타르타로스의 군주님을 부르는 말이 절대군주야.”
“너희의 군주라고?”
“그래. 그런데 그런 영광스러운 이름을 멋대로 게임 타이틀에 붙이다니.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우리도 얼마나 당황했는데?”
위니스는 그 때문에 타르타로스가 한바탕 뒤집어졌다고 한숨까지 쉬었다.
“게다가 P2W로 게임까지 망쳐놨지. 그 회사 사장은 모를 거야. 그놈을 죽일지 말지를 두고 타르타로스에서 임원 회의가 열렸다는 사실을.”
어이가 없었다.
설마 그런 일이 벌어졌을 줄이야.
“참고로 난 죽이자는 쪽이었어.”
“고작 그런 걸로?”
“P2W 이전이라면 참을 수 있었는데 그건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 그런데 다른 임원들이 막는 바람에…….”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위니스의 모습에서 절대군주라는 존재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이 엿보였다.
그녀는 상당히 절대군주를 경애하는 모양이다.
“이야기가 잠깐 엉뚱한 방향으로 나갔네. 어쨌든 우리 타르타로스가 어떤 식으로 개입하는지 알았지?”
“대충은.”
타르타로스는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 계약자를 선정한다.
그 계약자에게 네패스 가문의 초대 가주처럼 힘을 주는 경우도 있고, 모바일 게임사의 사장처럼 자본을 대주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그 대가로 훗날 그로 인해서 이룬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을 가져간다.
‘아무리 그래도 시신까지 건드리다니.’
아인 네패스의 몸이 한 번 죽었던 거라는 사실에 섬뜩함이 느껴진다.
범차원 기업이라더니 지구의 보편적인 도덕과는 꽤 벗어난 느낌이었다.
“살아 있다면 괜찮지만 죽으면 그 몸은 너희 거라는 소리로군.”
“정답. 정확히는 남은 혈족이 없을 때야.”
“하지만 보통 혈족이 남지 않을 때라면 가문도 풍비박산 나서 건질 게 없을 텐데?”
특권 신분을 보장한다고 했던 것과 앞뒤가 맞지 않다.
가문이 몰락했다면 하층민 신분이 되어버리고 말 테니까.
“그건 조금 손을 써두지. 절대 망하지는 않도록. 어쨌든 특권 계층이라는 조건을 위해서는 귀족이어야 하니까.”
“그런 것치고 주변 상황이 더러웠는데.”
처음 네패스 가문의 상황은 끔찍할 정도로 좋지 않았다.
내가 아니었다면 분명 그대로 망했을 거다.
“우리 타르타로스의 고객이 너처럼 평범한 사람인 경우는 드물어. 넌 내가 따로 목적을 위해서 선정한 것일 뿐 보통은 하층민으로 던져두어도 초반만 살짝 껄끄럽지 금방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는 이들이라고?”
고객인 내가 너무 형편없는 수준이라서 그렇게 느껴졌을 뿐이라는 소리였다.
억울하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솔직히 당장 내가 처음 빙의되었던 시점으로 가더라도 그때와는 양상이 전혀 달라질 테니까.
굳이 번거롭고 귀찮은 전략이 아니라 순전히 무력만으로 이웃 영지들을 모두 무릎 꿇릴 자신이 있었다.
“그럼 가이스트는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는 거야?”
이야기를 되돌려 가이스트에 대한 화제로 돌아왔다.
앞선 이야기들은 결국 가이스트를 설명하기 위한 부연 설명에 불과했으니까.
“놈들도 힘을 주는 건 같아. 정확히는 계약자 쪽에서 원하는 게 보통 무력이나 재력 둘 중 하나지.”
“그럼 놈들이 받아가는 건?”
“그 대가가 우리 타르타로스와 가이스트가 다른 점이지.”
따악!
위니스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서 지도가 나타났다.
위니스는 그 지도를 놓고 나를 봤고 난 지도를 통해서 놈들이 받는 게 뭔지를 알 수 있었다.
“대륙 전도.”
지도에는 이 세계의 모든 국가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 외에 특별한 표시는 없었다.
보물 지도에 흔하게 있는 것도, 일반적으로 지도에 쓰이는 기호도 없다.
즉 이 대륙 자체가 놈들이 받기로 약속한 것이라는 의미다.
“마족에게 힘을 줘서 세계를 정복한다. 그 대가로 마족이 정복한 세계를 가이스트가 받아간다.”
위니스가 내 추측을 확신으로 만들어주었다.
“말도 안 돼!”
그에 난 비명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타르타로스도 심각했지만 가이스트란 놈들은 한술 더 뜨고 있었다.
적어도 타르타로스는 계약자가 이룬 것만 받기로 했다.
후손인 아인 네패스가 육체를 뺏기기는 했지만 그것은 사후의 일이다.
반면에 가이스트는 세계에 대한 소유권이 없는 마족들을 통해서 이 세계를 지배하려 하고 있었다.
원주민 한 명과 계약해서 행성의 지배권을 넘겨받겠다는 불합리한 계약이다.
“이게 가이스트의 방식이야. 당연히 억지고 차원법으로도 인정되지 않지. 하지만 놈들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아. 덕분에 많은 범차원적 세력은 가이스트와 적대 관계지.”
왜 또라이라고 하는지 이제 알겠다.
계약은 그들에게 있어서 핑계에 불과했다.
“그럼 타르타로스에서도 개입하는 건가?”
“바깥에서는. 하지만 아르카디아에서 일어나는 일에 직접 개입하거나 추가적인 개입을 하는 건 차원법으로 금지야.”
“그럼 어떻게 하라고?”
마족들은 강하다.
그런데 그런 마족들이 타르타로스처럼 무시무시한 세력과 결탁까지 했다.
놈들이 지니고 있는 힘은 분명 비정상적일 정도로 강력할 것이다.
내 물음에 위니스는 빙그레 웃었다.
“무슨 걱정이야? 마침 우리 상품을 통해 정당한 절차로 들어온 네가 있는데.”
“뭐?”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네가 직접 가이스트와 손잡은 마족들을 처치해서 놈들을 막아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