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85화
VVIP 영주님의 품격 85화
85화
【 재회 】
중부는 본디 왕족들과 그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친왕실파 귀족들의 본거지였다.
중부의 인구나 영토는 다른 지역과 비할 바가 아니었으며, 풍부한 식량과 자원까지 갖추어 왕국 내에서 가장 부유한 땅이라 할 수 있었다.
영주들이 내전에 필요한 자원을 수입해 오는 장소도 대부분 중부였기에 내전 기간에도 중부에는 많은 자금과 물류가 오갔다.
그러나 이러한 중부의 풍요로움이 곧 한 사람의 손에 떨어지게 생겼다.
“그게 타이온 백작입니다.”
“흐음.”
중부 원정을 앞두고 게일 남작이 모은 중부의 정보를 모조리 확인했다.
중부의 유일한 대영주이며 친왕실파와 오랜 정쟁을 해왔던 대영주파의 핵심.
친왕실파의 본거지에서 살아남아 기어이 중부 내전을 평정한 것을 볼 때 절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타이온 백작이 친왕실파 귀족들을 이길 수 있던 비결은 그가 이끄는 마법사 모임에 있습니다.”
“황혼십자회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타이온 백작은 분명 호기를 잡고 있었다.
피의 연회를 통해 왕족들이 모두 죽고 친왕실파 귀족들도 혼란에 빠져 있던 상황이었으니.
하지만 그것만으로 친왕실파의 텃밭이라고 할 수 있는 중부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다.
타이온 백작에게는 나름의 비장의 수가 있었고 그게 바로 귀족 출신 마법사들의 모임인 황혼십자회였다.
‘마법사 협회에 비견될 조직은 아니지만.’
마법사 협회는 역사도, 인원도, 축적하고 있는 지식의 양과 쌓아온 업적도 모두 월등하다.
거기에 비하자면 황혼십자회라는 조직은 잘 쳐줘도 고작 지부 하나 수준.
그러나 중부에 한정해서 보자면 지부 하나 규모로도 충분히 뛰어난 전력이었다.
“황혼십자회의 전력은 마법사 협회에 미치지 않으나 그들은 중립을 따르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타이온 백작을 따르는 하수인들이지요.”
“모두 귀족 출신일 텐데 굳이 타이온 백작을 따르는 이유가 있나?”
귀족들은 딱히 아쉬울 게 없다.
힘들게 마법을 배워야 할 이유도 없고, 남의 아래에 들어갈 이유도 없다.
물론 귀족은 귀족 나름대로의 출세를 원하기 마련이지만 대영주는 다른 지역에도 몇 명은 더 있었다.
중부에서 친왕실파 귀족들과 다투기 바빴던 타이온 백작을 굳이 따를 까닭이 없는 것이다.
“타이온 백작이 귀족들의 중심이 된 것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습니다. 혈통으로 보자면 타국에서 피난을 왔던 왕족의 후손이며, 귀족치고 드문 솜씨 좋은 마법사에, 언변이 유려하여 친왕실파를 잘 견제했으며…….”
게일 남작은 귀족 출신 마법사들이 타이온 백작을 따르는 이유를 줄줄이 내놓았다.
혈통, 능력, 인망 등등 요약하자면 타이온 백작이 아주 잘난 인물이란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유명했다고 들었습니다.”
“카이로스 백작처럼 말인가?”
“망나니가 되기 전이라면 비슷합니다.”
마법사이며 언변이 좋다는 등 다소 차이점이 있었지만 분야만 다를 뿐 영웅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남부 연합과 중부의 전투에 호사가들의 시선과 관심이 모여들었다.
마법사 협회의 천재 마법사로 추앙받는 나와 황혼십자회의 수장인 타이온 백작의 대립이라는 구도가 나왔기 때문이다.
아인 네패스가 태생부터 귀족이라는 걸 생각하면 황당한 일이지만.
‘타이온 백작을 쓰러트리면 생각보다 얻을 게 많겠군.’
중부의 풍요로움도 그렇지만 마법사 협회를 장악할 때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미 마족 오차드를 토벌한 것으로 내 명성은 국경을 넘어 타국에까지 퍼지고 있었지만, 명성이 더욱 커져서 나쁠 건 없으니까.
황혼십자회는 마법사 협회와 사이도 나쁘니 상대로 제격이었다.
더구나 협회 본부가 있는 중부의 점령 또한 협회 장악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고.
“그럼 타이온 백작의 세력인 황혼십자회를 주의하는 게 좋겠군.”
“그 외에도 신경 쓰셔야 할 게 더 있습니다.”
“어떤 거지?”
“친왕실파 귀족의 잔당들입니다.”
타이온 백작은 중부 내전의 승자로서 자신과 맞섰던 친왕실파 귀족들을 무참히 짓밟았다.
이전부터 사이가 워낙 나빴기에 자신에게 맞선 귀족 당사자뿐 아니라 그 혈육을 모조리 죽일 정도로.
하지만 친왕실파 귀족들이 모두 망한 건 아니었다.
전황은 완전히 기울었지만 잔당들이 남은 전력을 모아 어느 요새에서 항전하는 상태였다.
“병력의 수는 얼마 되지 않으나 면면이 대단한 이들입니다. 나중에 골치 아파질 수도 있습니다.”
게일 남작이 말하는 골치란 레일리에게 이들이 빌붙을 가능성이었다.
게일 남작은 내 영입 제한을 거부하고 레일리의 편에 서기로 했지만 그게 친왕실파 귀족이 되겠단 의미는 아니었다.
남부 연합이 순항할 수 있는 건 연합에 속한 영주들이 모두 한마음 한뜻이기 때문이니까.
그러나 친왕실파 귀족들이 이 자리에 들어온다면 지금의 단결력이 무너질지도 몰랐다.
‘확실히 단결이 안 되는 조직은 위험하지.’
당장 내가 이끄는 네패스 백작가만 해도 유지되는 것 자체가 특이한 상황이었다.
상대 세력을 빠른 시일에 흡수하는 건 원래 부작용이 매우 큰 방식이니까.
그런데도 별다른 잡음이 나오지 않는 건 전적으로 내 영향이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
기사조차 어찌할 수 없는 내전의 패배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내가 지워주고 있으니까.
이외에도 불필요한 약탈을 하지 않아 원한을 만들지 않고, 풍족하게 챙겨주어 불만의 여지를 없애는 등 나는 이 불안정한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해왔다.
하지만 여기에도 한계는 있었다.
내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문제.
‘죽음 이후까지 대비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만…….’
아인의 부모나 형들이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듯이 나도 딱히 가문을 위해 뭔가를 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었다.
어차피 내가 죽으면 다 끝이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레일리와 혼인을 앞둔 상황에서는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네패스 백작 각하, 듣고 계십니까?”
“응? 아, 미안하군.”
잠시 생각이 엉뚱한 곳으로 새어버렸다.
지금 같은 생각은 속으로는 할지언정 바깥으로 내보여선 안 될 것이었다.
난 남부 연합의 수장이며 연합에 속한 모든 이들이 믿고 따르는 영웅이니까.
패배나 죽음을 고려하는 모습을 보이면 믿음이 흔들리게 된다.
“아무래도 피로가 누적되신 거 같습니다. 어차피 원정 준비에는 아직 시일이 필요하니 그동안은 편히 쉬십시오.”
“그래야겠어.”
딱히 피로했던 건 아니지만 잠자코 받아들였다.
게일 남작도 내가 진심으로 피로해서 딴생각을 했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이유는 모르나 집중하지 못하고 있으니 대화를 마쳤을 뿐.
“숙소로 돌아가십니까?”
방을 나서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따라붙었다.
대부분은 안면만 겨우 아는 얼굴로 1~2티어에 불과했지만 4티어 영웅인 탈론이 껴 있었다.
“그래. 가서 좀 쉬어야겠군.”
“모시겠습니다.”
나름 기사 생활에 익숙해져 가는지 탈론이 제법 절도 있는 모습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다른 기사들도 탈론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볼 요량인지 경력이 제일 짧은 탈론에게 선두를 맡긴 채 얌전히 뒤를 따랐다.
그렇게 나에게 배정된 숙소에 도착했을 때였다.
“이제 오는 거야?”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숙소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리 아래까지 흘러내리는 곱슬곱슬한 금빛의 머릿결과 선명하고 푸른 눈동자, 무엇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예술품과도 같은 수려함.
검은 제복에 붉은 실로 아로새겨진 타르타로스 글자까지.
“위니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리라 생각은 했지만 절대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상대였다.
그렇기에 그녀를 향한 무수한 의문들을 뒤로한 채 불안함이 먼저 들었다.
‘왜 벌써 나타났지?’
마지막 기억이 술에 취한 상태라서 흐릿한 편이기는 하지만 지금껏 위니스의 목적에 대해서는 많이 고민하고 나름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그녀는 이곳에서 나를 시험하고 있었다.
그 시험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나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게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내가 시험에 훌륭히 통과했을 경우의 이야기겠지만.
‘아직 난 그녀의 시험을 끝마치지 못했어.’
끝은커녕 아직 절반에도 와 있지 않았다.
위니스가 내걸었던 조건은 계약서에 나와 있는 대륙을 통일하고 절대군주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아직 크레시안 왕국을 통일하는 것조차 해내지 못한 상태다.
그런데 이리 빨리 위니스가 나타난 건 내 행적에 어떤 불만을 가져 경고하러 왔거나 가망이 없다고 여겨 실패로 봤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다소 과도한 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시험에 주최자가 개입하는 상황 자체가 비정상적이기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그녀와 나의 관계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한 고하가 있었으니까.
“오랜만이지?”
“네가 여긴 무슨 일이지?”
“짐작 가는 거 없어?”
위니스는 도리어 나에게 되물었다.
역으로 질문을 받은 입장이 되자 온갖 것들이 떠올랐다.
그들 중 위니스가 정확히 문제로 삼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같이 불안했다.
“후후. 설명은 차근차근 해줄 테니까 자리부터 마련해 줄래?”
위니스는 이런 내 불안과 달리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 기사들을 향해 축객령을 내렸고 기사들은 내 명령을 기다렸다.
남부 연합의 맹주인 나를 상대로 너무나도 편안하게 대하는 위니스의 행동에 놀란 모습으로.
실제로 위니스의 행동은 파격적이다 못해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코 평범한 신분으로 보이지 않는 위니스의 자태로 인해 누구도 무례를 지적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 물러나라. 그리고 시종을 시켜 차라도 내오도록.”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물러나고 마지못해 위니스를 숙소 안으로 안내했다.
안내라고 해도 문을 열어주고 자리를 권하는 정도의 간단한 일이었지만.
“이쪽으로 앉아라.”
“흠. 사람을 대하는 게 꽤 익숙해졌네?”
위니스는 안내된 자리에 앉으며 묘한 감상을 꺼냈다.
사람을 대하는 게 익숙해졌다니,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건가?
그러나 생각해 보면 위니스 앞에서 내가 보여줬던 행동은 추태에 가까운 거였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를 퍼마시며 그대로 만취했으니.
무리해서 술을 마시던 것을 위니스도 알아차렸던 모양이다.
“이제 겉모습에 휘둘리는 거 같지도 않고.”
“어떤 고약한 여자 때문에 고생을 했거든.”
너 때문이라는 걸 우회적으로 표현했지만 위니스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교훈을 준 걸 보면 좋은 여자였나 봐?”
참으로 뻔뻔하게 대꾸했으니.
사실 위니스에게 그리 큰 불만은 없었다.
내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처한 건 사실이고 처음에는 그 때문에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자리가 나를 증명할 수 있으며 내 욕망을 실현하기에 최적이라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감사함을 느끼기도 한다.
군대에서조차 실전 경험이 있는 지휘관이 없는 게 내가 있던 대한민국의 현실이니까.
위니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국 게임 속 내 모습에 만족한 채 살아야 했을 것이다.
“뭐, 재회의 감상을 나누는 건 이쯤 할까? 꽤 중요한 문제가 있어서 온 거니까.”
위니스의 말에 숨이 턱 막혀왔다.
그녀의 입에서 나에 대한 선고가 내려진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기는 한 걸까?
예전에 평범한 사람이었던 시절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조금 알 거 같다.
위니스는 절대 범상한 인간이 아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힘이 그녀의 안에 있다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으니까.
‘어느 정도인지 보이지도 않아.’
문제는 그 힘의 크기와 깊이.
내 수준으로는 감히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왜 내가 긴장한다고 생각하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내 기척을 숨기는 건 쉬운 일이지. 네가 내 힘을 느끼는 건 딱히 네가 성장해서 그런 게 아니야. 내가 느낄 수 있도록 일부러 노출하고 있는 덕분이지.”
그 말로 남아 있던 자존심마저 무너졌다.
물론 내가 가진 힘 자체는 위니스가 준 시스템에 기반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이 힘을 키워온 것은 나였다.
마법을 익히고 경험을 쌓으며 처음 시작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으로 강해졌다.
그런데 지난 내 노력을 위니스는 모두 아무 의미도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녀와 나의 격차가 그 정도란 의미다.
“안심해. 너는 충분히 합격점이야. 미래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나름 자신감을 가져도 좋다고?”
“그럼 대체 왜 나타난 거지?”
합격점이라는 말에도 안심할 수 없었다.
정말로 내 행동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면 위니스가 나타날 이유가 없으니까.
“네 문제가 아니라 외부에 문제가 생겼거든.”
“외부 문제?”
“마족.”
위니스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나는 게 보였다.
그녀의 입은 불쾌함을 드러내듯이 입꼬리를 내렸다.
“원래라면 아직 나타나지 말았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이르게 나타났잖아?”
“그거라면 벌써 몇 달 전 일인데.”
오차드의 출현은 확실히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라닌 후작가를 점령한 이후에 동부를 샅샅이 뒤져봤지만, 마족과 관련한 어떤 것도 알 수 없었으니까.
나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마법사 협회는 오차드의 흔적을 뒤쫓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럴듯한 단서를 찾았다는 정보는 들려오지 않았다.
“좀 늦기는 했지.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배후를 알아봐야 했으니까. 원래라면 대륙을 통일할 때까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정도만 체크할 생각이었는데…….”
위니스가 갑자기 나를 향해 무언가를 휙 던졌다.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아 확인하니 가이스트라는 단어가 적힌 엠블럼이었다.
“가이스트?”
“범차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단체가 우리 타르타로스만은 아니야.”
“그 말은 설마?”
“그래. 내가 네게 그랬듯이 마족들에게 개입한 외부 세력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