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81화
VVIP 영주님의 품격 81화
81화
【 마이어드 후작가의 후계자 】
“악화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나?”
“대외적인 활동이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레일리 왕녀 저하께 후계자 자리를 넘겨야 할 거 같습니다.”
게일 남작은 바로 레일리 왕녀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으나 지금은 좋은 시기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후계자를 알리지 않고 내버려 두면 혼란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맹주 자리는 내가 이어받는다고 해도 그게 마이어드 후작가를 수습할 명분은 안 될 텐데.”
레일리 왕녀의 존재를 공표할 형편이 되면 그대로 레일리 왕녀가 받으면 그만이다.
이후 다른 영주들처럼 나를 맹주로 받들며 따라오면 되니까.
하지만 레일리 왕녀가 정식으로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는 현재로선 마이어드 후작가를 수습할 사람이 없었다.
“그렇지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가신들에게만이라도 왕녀 저하의 존재를 알려서 협조를 받는 건 어렵겠나?”
“아래에서 반발할 것입니다.”
후계자가 공표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신들이 후작가를 운영한다면 남들이 봤을 땐 그들이 후작가를 나눠 먹으려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당연히 기사들이나 마법사 혹은 행정가 같은 특정 세력의 반발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그 이상으로 말하면 비밀이 새어 나갈 테고.”
지금까지 레일리 왕녀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영원한 비밀은 없다.
비밀을 아는 사람을 더 늘리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임시 영주를 들이는 건? 아니, 안 되겠군.”
마이어드 후작의 친척이라도 한 명 붙잡아서 허수아비로 세울까 고려해 봤지만 애초에 그럴 사람이 있었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 남은 답은 하나밖에 없군.”
왕녀란 신분을 드러내는 무리를 해서라도 레일리 왕녀를 후계자로 앉혀야 했다.
마이어드 후작의 숨이 끊어지기 전에 후계자가 되어야 레일리 왕녀가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분명 문제가 일어날 텐데.”
“마이어드 후작 각하의 상태가 나쁘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 아닌가?”
“그건 그렇지요. 그분의 건강 상태가 가장 중요하니.”
게일 남작의 말대로였다.
이번 일은 마이어드 후작이 얼마나 살 수 있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참. 작위는 어떻게 내리실지 결정하셨습니까?”
게일 남작의 물음에 난 미리 준비한 명단을 일러주었다.
처음에는 잠자코 듣던 게일 남작은 내가 호명하는 이름이 늘어날수록 표정이 굳어졌다.
“그렇게나 많은 작위를 내리시겠단 말씀입니까?”
“그러지 못할 이유라도 있나?”
“아니, 물론 다 네패스 자작님의 영지를 나눠주는 것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동부에서 얻은 것들을 모조리 나눠주겠다는 건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내 행동을 곱씹던 게일 남작의 눈빛이 변했다.
“자작님께서는 혹시…….”
그도 절대 네일에 뒤처지지 않는 눈치가 있었으니까.
더구나 게일 남작은 외교형 영웅이었다.
이런 부분에서는 내정형 영웅보다 훨씬 눈치가 빠를 수밖에 없다.
“설마 이 크레시안 왕국 너머를 보고 계십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내 대답에 게일 남작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떨렸다.
네일도 그랬지만 이 혼란스러운 내전에서 이후를 바라보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당장 앞가림조차 힘든 시기이니까.
“너무 위험한 생각입니다. 지금껏 입은 피해를 복구하는 데만 한 세대는 족히 걸릴 텐데 전쟁을 더 이어나갈 여력이 될 리가 없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 나라는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겁니다.”
“이대로라면 그렇겠지.”
게일 남작의 말대로 지금으로서는 감당해야 할 위험이 너무나도 컸다.
그럴 만한 충분한 저력이 있지도 않았고.
내전이라는 건 결국 제 살 깎아 먹기에 불과하기에 왕국이 가진 힘은 계속 줄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상황은 타국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그리고 나에게는 게임을 통해 얻은 남들에게는 없는 정보가 있었다.
“하지만 주변 국가들은 우리가 손대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지게 될 거야.”
“스스로 무너진다고요?”
게일 남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내가 모종의 수단을 취했는지 단순히 정보만 가지고 있는 건지 판단할 근거조차 없는 상황이니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설명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이건 아주 중요한 기밀이네. 대가 없이 내줄 만한 정보가 아니지.”
“대가라고 하신다면?”
의아해하는 게일 남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게일 남작. 내 사람이 될 생각 없나?”
한순간 게일 남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황할 만도 했다.
마이어드 후작은 레일리 왕녀를 후계자로 정했고 그녀는 나와 혼인을 앞두고 있었다.
더구나 레일리 왕녀는 스스로 나에게 고개를 숙였기에 혼인 이후 이 남부 연합의 군주는 내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이미 내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는 상태지만…….
‘꼭 그렇지는 않지.’
다른 영주들이라면 그런 식으로 대충 넘어가도 상관없지만, 게일 남작은 달랐다.
그는 확실하게 내 아래로 두고 싶은 인재였으니까.
“당황스럽습니다. 저는 어차피 남부 연합의 일원이고 마이어드 후작가를 따릅니다.”
“하지만 그게 나를 따르는 건 아니지.”
이전에 내가 레일리 왕녀를 배신할 계획을 고민할 때 가장 거슬렸던 건 마이어드 후작도, 바이든 자작도 아니었다.
바로 나의 행정관 베르타였지.
그때 깨달았다.
충성의 대상은 명확해야만 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과 저울질을 할 여지 같은 건 남기고 싶지 않았다.
“혹시 다른 영주들에게도 같은 제안을 하실 겁니까?”
게일 남작의 표정에 불안함이 엿보였다.
혹시 내가 레일리 왕녀의 수하가 될 사람들을 빼내 가려는 건 아닐지 염려하는 듯했다.
“걱정할 필요 없네. 그녀를 불쾌하게 만들지도 모르는 제안을 할 정도로 가치 있던 상대는 자네밖에 없으니까.”
레일리 왕녀로서는 충분히 불쾌하고 한편으로는 내가 또 배신을 고려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수도 있다.
그걸 감수하고 제안을 건넬 만한 상대는 게일 남작뿐이었다.
“우선 제안은 감사합니다.”
고민하던 게일 남작이 겨우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절 높이 평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하지만 전 마이어드 후작가의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다.”
게일 남작은 즉석에서 내 제안을 거부했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게일 남작이 내 사람이 될 생각이 없다는 건 확실히 알았으니까.
베르타처럼 의심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자네의 뜻을 존중하네.”
* * *
이번 남부 연합의 행사는 크게 1부와 2부 둘로 나누어져 있었다.
1부 행사는 레일리 왕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고위층만 참석하는 자리였다.
반면 2부 행사는 규모를 늘리는 대신 그녀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도 참석했다.
우선 1부 행사의 진행을 맡은 게일 남작이 앞으로 나섰다.
“먼저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마이어드 후작 각하께서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해 사과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마이어드 후작의 불참 소식이 먼저 전해졌다.
첫 소식이 좋지 않은 소식이었기에 영주들의 얼굴에 긴장이 감돌았다.
마이어드 후작의 빈자리에 따라서 연합의 권력이 옮겨질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부터 예정된 일이지만 실제로 이행되는 건 의미가 남달랐다.
“또 마이어드 후작 각하께서는 지금껏 맡고 계셨던 남부 연합의 맹주 자리에서 내려오기로 하셨습니다.”
게일 남작의 설명에 영주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쏠렸다.
긴장과 안도.
의심과 기대.
영주들의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오는 거 같았다.
“이에 따라서 부맹주인 네패스 자작님께서 남부 연합의 맹주가 되실 겁니다. 혹시 이에 반대하는 분이 계십니까?”
잠시 적막이 찾아왔다.
이 자리에서 대범하게 목소리를 내는 영주가 있지 않을까 내심 흥미가 들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 정당한 절차에 따라 네패스 자작님을 맹주로 추대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내가 남부의 연합의 맹주가 되었다.
그러나 남부에는 나와 같은 자작의 작위를 가진 귀족이 여럿 있었다.
맹주라고 해도 동등한 작위를 가지고 있어서야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에게는 이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다음으로 이번 동부의 반란 토벌에 대해 레일리 왕녀 저하께서 직접 치하를 해주시겠습니다.”
레일리 왕녀.
유일하게 살아남은 왕가의 핏줄.
그녀의 존재로 인해 우리가 동부의 내전에 끼어든 일은 왕가의 명령에 따른 정당한 토벌이 되었다.
물론 그녀의 존재가 공표된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부적으로는 그렇게 포장되었다.
번거로운 일이지만 귀족들은 이를 환영했다.
우리는 불손한 반역자들을 정당한 왕명에 의해 토벌한 충신이 되는 것이니까.
훗날 왕국을 평정했을 때 역사책에 충신으로 이름을 새길 수 있을 것이다.
“네패스 자작. 왕실의 충성스러운 신하인 그대의 활약을 치하하며 그대에게 백작으로의 승작을 허락합니다. 이제부터 그대는 네패스 백작으로…….”
레일리 왕녀는 나에게 백작의 작위를 내렸다.
후작이나 공작 같은 더 높은 작위가 남아 있지만, 굳이 한꺼번에 작위를 올리지는 않았다.
마이어드 후작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하고, 다른 지역의 눈치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뭐든지 명분을 내줘서 좋을 건 없으니까.
“그럼 다음으로는 내가 진행하지.”
이제 내 차례였다.
레일리 왕녀 덕분에 백작이 된 뒤 연합의 맹주로서 논공행상에 나섰다.
우선 나와 함께 동부 침공에 나섰던 영주들을 먼저 포상했다.
직접 병력과 물자를 대가며 싸웠던 그들은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물론 남부에 남아 있던 이들에게도 적당한 상을 내렸다.
영주들은 모두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내가 내 몫을 적게 책정하여 그들의 몫을 늘려줬기 때문이다.
“그럼 1부는 여기서 마치고 2부를 위해서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1부 행사는 여기서 끝을 맺었다.
레일리 왕녀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서 일단 영주들만 모여서 자리를 가졌지만, 공식적인 남부 연합의 일정마저 이렇게 진행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곧 넓은 곳으로 장소를 옮겨 2부의 행사를 이어갔다.
“이번에 가신단을 구성하며 새로 작위를 내리려고 한다.”
2부 행사는 내 가신단 구성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몇 개의 작위를 내릴지에 대해서 주변의 추측은 적으면 2개, 많으면 3개였다.
내 후한 성정을 고려해서 그 이상을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번에 내가 동부에서 내 몫을 적게 책정한 탓에 그건 불가능해졌으리라고 의견이 모인 상태였다.
그렇기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예정자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소란이 일어났다.
그들의 예상을 벗어나 자그마치 9명을 선정했기 때문이다.
“9명? 9명에게 작위를 내린다고?”
“설마. 준남작의 자리가 대부분이겠지.”
“그, 그런 건가?”
영주들이 당황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이들에게 모두 계승 작위를 내릴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아무렴 나라도 영주 귀족의 작위를 9개나 뿌릴 수는 없었으니까.
중부를 손에 넣기 위해 이번 동부에서의 성과를 많이 양보한 상황이니.
그래서 내가 준비할 수 있던 계승 가능한 작위는 5개뿐이었다.
“자크론.”
“나를?”
그 첫 부름의 대상자가 된 인물은 자크론이었다.
별도의 언질조차 없었기에 자크론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그저 기사들의 호출을 받아 나온 상태였다.
당연히 당황하며 엉거주춤하게 내 앞에 섰다.
“그대가 마족의 토벌에 지대한 공헌을 한 점을 높이 산다.”
이 자리에서 내 지위는 남부 연합의 맹주였기에 스승인 자크론을 상대로도 말을 높이지 않았다.
“그대에게 자작의 작위를 내린다.”
작위를 내리며 서약을 진행할 때 자크론이 작게 목소리를 내었다.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그랬느냐?”
“깜짝 선물입니다.”
“내가 뭔 귀족이냐. 그것도 이 나이에.”
“영지는 대리인에게 시켜서 관리하면 되고 스승님께서는 마법사들의 본보기만 되어주시면 됩니다.”
자크론에게 자작의 작위를 내린 것에는 계산이 있었다.
내가 마법사들을 우대한다는 걸 다른 마법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렇기에 자크론은 원치 않더라도 높은 작위를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어차피 자크론이 영지를 관리하지 않을 성격이라는 걸 알았다.
가족과도 연락을 끊고 사니까 결국 자크론에게 내준 건 다시 고스란히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영악한 놈.”
내 속셈을 알아차린 자크론이 혀를 찼다.
“로크.”
기사 중에는 로크를 먼저 불렀다.
기사단장으로서 그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였다.
“나의 영광스러운 첫 번째 검에게 자작의 작위와 봉토를 내리겠다.”
작위까지 들은 로크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후 릴리아나, 루시우스, 다니엘이 차례대로 올라와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다음으로는 준남작의 자리였다.
“티아라.”
나는 티아라를 호명했다.
티아라는 멍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내기로 1년만 종군하기로 했던 그녀는 당연히 자신이 무언가를 받을 일은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만일 무언가를 받더라도 재물이라면 모를까 작위는 가망이 없다고 봤을 터.
그렇지만 나는 그녀에게 굳이 작위를 내리기로 했다.
이유는 자크론과 같았다.
마법사 협회를 손에 넣기 위해서 마법사들에게 작위를 뿌리는 것이다.
“저, 저, 저요?”
“그대에게는 준남작의 작위를 내린다.”
그래도 티아라에게는 계승 작위를 내리진 않았다.
그만한 공적이 없었으니까.
마족과의 전투에 끼지도 않았고 어차피 떠날 사람이다.
붙잡을 생각은 얼마든지 있지만, 그녀의 소속은 여전히 마법사 협회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래서 준남작의 자리를 줬다.
“루안.”
다음 순서는 루안이었다.
“장비의 품질을 크게 향상하여 휘하 군대의 전력을 높인 공적을 인정하여 준남작의 작위를 내린다.”
사실 루안의 경우에는 마음 같아선 자작 작위를 주고 싶었다.
그러나 루안이 영지를 반길 성향도 아니고 대장간에 틀어박혀 있으니 영지를 관리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준남작에 앉혔다.
“다른 장인들에게도 합당한 보상을 내리도록 하지.”
다음으로 나는 네일을 불렀다.
이미 준남작 자리가 약속되어 있던 그는 지금까지의 이들 중 유일하게 당황하지 않고 작위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8명에게 작위를 내리고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을 보았다.
당황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기대하지 말라고 해놓고 이렇게 데려왔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라이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