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79화
VVIP 영주님의 품격 79화
7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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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무를 마친 마법사 협회가 자리를 떠나고도 다소 시간이 흐른 뒤에야 군대를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예상대로 라닌 후작가는 사실상 빈집과 마찬가지였다.
소수의 병력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감히 맞설 생각을 하지 못하고 항복하기 바빴다.
그렇게 동부에서 마지막으로 저항하던 라닌 후작가가 함락되며 동부 원정이 끝을 맞이했다.
“모두 건배합시다!”
원정을 끝맺은 그날 바로 라닌 후작가의 성에서 작은 연회가 열렸다.
승리 자체에 대한 축하뿐 아니라 동부에서 거듭된 전투로 누적된 피로를 풀기 위한 연회였다.
난 그곳에서 영주들과 어울리는 대신 고생했던 이들을 챙겨주기로 했다.
“여기 있었군.”
하인의 안내를 받아 기사들이 모여 있는 연회장을 찾았다.
라닌 후작가에서 가장 넓은 홀이었는데 기사의 수가 수백에 이르기에 영주들을 밀어내고 그들이 제일 큰 곳을 차지한 상태였다.
내가 적극적으로 설득했기에 영주들도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
충성스러운 기사들을 위해 이 정도 관용을 베푸는 일은 드문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생각지 못한 문제가 생겼다.
우당탕!
내가 등장하기 무섭게 기사들이 당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즐거웠던 연회 분위기가 한순간에 멈추고 모두 긴장한 눈으로 나를 주시했다.
마치 장군의 방문에 작은 지적이라도 받을까 긴장하고 있는 신병들의 모습 같았다.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거지?”
“아무래도 영주님의 실력을 목격한 영향 같습니다.”
로크가 곁에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지금까지 남부 연합에서 내 활약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더구나 이번에는 무려 마족을 물리쳤다.
악명 높은 학살자 자크론도 이름값이 낮지는 않으나 마족에 비견될 수는 없다.
실제로 전투의 수준도 더욱 높았다.
그 자크론이 내 편에 섰고 거기에 실력 있는 기사들까지 합세했으니까.
“다들 자리에 앉아서 계속 즐기도록.”
기사들을 도로 앉히고 연회장을 둘러봤다.
휘하의 기사 전부가 이 자리에 있는 건 아니었다.
인류가 피의 연회를 겪은 지 아직 1년 정도밖에 흐르지 않은 시점이었으니까.
그 사건의 영향으로 연회 때 방비를 허술히 하는 건 금기나 마찬가지가 되었기에 절반 정도의 인원은 남아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마법사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들도 절반 정도는 연회에 참가하지 않은 채 눈에 불을 켜고 경계에 나섰다.
“이번 동부 원정에서 경들이 세운 공이 무척 크다. 우리 남부 연합은 경들의 충성과 노고를 절대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 모두 포상을 기대하도록.”
그래서 이 자리에 있는 인원들에게만이라도 격려를 시작했다.
그런데 내 말에 한쪽에서 과도한 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느 남작의 기사들인데 저 열렬한 반응을 봐서 평소 남작이 잘 챙겨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연합에 들어온 이상 이젠 달라져야 했다.
조직이라는 건 수장의 성향에 맞춰서 움직여야 하니까.
내가 크게 베풀었는데 다른 영주들이 인색하게 굴 수는 없다.
같은 연합인데 대우가 다르다고 기사들이 불만을 품으면 괜한 불화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은근히 압박을 주기도 할 거다.
‘소문을 내라고도 해뒀고.’
몇몇 기사들에게 내가 얼마나 그들에게 좋은 포상을 주는지 다른 영주의 기사들에게 선전하라고 지시해 뒀다.
다른 영주가 불만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맞춰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카이로스 백작가 때와 달리 이곳 동부 원정에서 얻은 것들을 분배해 줄 사람은 나니까.
‘딱히 영주들을 괴롭힐 생각은 없지만…….’
이는 남부 연합 내에서 내 영향력을 넓히는 데 필요한 작업이었다.
인색하던 영주가 갑자기 재물을 풀면 분명 내 입김이 작용했으리라는 걸 알아차릴 테니까.
타 영주의 기사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영주들이 내 눈치를 보는 일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이에 반대하고 나에게 반발하는 영주가 나온다면…….
‘설마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내 행동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한 영주라면 치워버려야 했다.
능력에 따른 우대는 기사만이 아니라 영주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테니까.
레일리 왕녀도 이를 위해서 손해를 본 영주들을 챙겨주기로 했던 것이다.
“작위도 내려주십니까?”
슬슬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불쑥 튀어나오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작위.
기사라고 해서 쉽게 입에 담을 만한 질문은 아니었다.
지금 말하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가진 기사 작위가 아니라 제대로 된 귀족의 작위를 말하는 것일 테니까.
물론 일전에 영주들이 나를 떠본 적이 있지만 그건 그들이 이미 작위를 가진 영주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사의 입에서 작위를 달란 말이 나오는 건 아무리 좋은 분위기에서라도 쉽게 할 말이 아니다.
당연히 이런 말을 함부로 꺼낼 인물은 정해져 있었다.
“라이언 경.”
역시나 파격적인 나의 기사 라이언이었다.
라이언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무척 크다.
빅터가 물러나도록 설득해 준 것도 그렇고 용병 출신 기사들을 융화시키는 데도 라이언은 큰 힘을 발휘했다.
같은 용병 출신인 로크는 기사단장의 입장으로서 공정해야 하니까 그런 부분은 라이언의 전담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대답해 줄 마음은 없었다.
“경은 절대 아닐 테니 기대하지 말도록.”
“컥!”
내가 단칼에 잘라버리자 라이언이 과장되게 충격받은 시늉을 보였다.
알고 있었다.
라이언이 진심으로 자신이 작위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물은 건 아닐 거라는걸.
라이언은 단지 자신이 총대를 메고 다른 이가 궁금한 걸 대신 물어봐 줬을 뿐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옆에서 나를 간절히 바라보는 로크였다.
로크에게는 이제 성장의 여지가 없었다.
하다못해 빅터에게는 젊음이라는 가능성이나마 있으나 그는 아니다.
더구나 자신을 대체할 인재인 루시우스가 등장했다.
난 정에 휘둘리지 않고 가차 없이 로크를 쳐낼 수 있었고 이제 로크가 기대할 수 있는 건 작위를 받고 가신이 되는 길이 유일했다.
“난 무언가를 베푸는 것으로 경들을 실망하게 한 적이 없다. 그렇지 않나?”
서운함을 느끼지 않게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는 긍정적인 대답을 주자 로크의 표정이 밝아졌다.
라이언도 어느새 몸을 바로 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아무렴 우리 영주님이 어떤 분이신데.”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마음 편히 쉬도록.”
연회장을 떠나기 전에 로크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며 은근한 시선을 주었다.
공식적으로 누구에게 어떤 작위를 내린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모두 이해했을 것이다.
내가 로크에게 작위를 주기로 결정했다고.
‘어차피 아낄 이유도 없고.’
땅에 욕심을 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대륙을 통일하는 게 목표인데 땅이 부족할 리가 없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인재가 부족해서 골머리를 썩이게 될 것이다.
드넓은 영토를 믿을 만한 사람들로 채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작위쯤은 얼마든지 내주지.’
하지만 그것이 아무 조건도 없이 마구 퍼주겠다는 소리는 아니다.
라이언이 나에게 배운 게 바로 공짜가 없다는 진리 아니던가?
작위를 내려줄 이들은 평생 부려먹을 의향이 있었다.
‘다음으로 병사들도 한번 둘러볼까.’
기사들의 연회장을 나온 다음에는 병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인 네패스가 되면서 생긴 습관 중 하나가 병영을 돌며 새 영웅을 발굴해 내는 것이었다.
성과는 시원찮을 때가 대부분이지만 이번 원정에는 젊은 병사들이 많이 출전한 상태였다.
짧은 싸움이었지만 영웅으로 판정될 만한 성장을 이뤄냈을 가능성이 있기에 한번 둘러볼 필요가 있었다.
당연하지만 내가 방문하자 병사들은 기사들보다도 열렬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영주인 나와 가까이 한 경험이 없는 젊은 병사들은 특히 더 놀랐다.
게다가 빼먹을 수 없는 일일 퀘스트를 같이 진행하기까지 했으니.
새하얗게 질린 병사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오늘처럼 계속 불쑥 쳐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급 부대를 방문하는 지휘관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 * *
“플레턴!”
마법사 협회 본부로 돌아간 벨로스는 곧장 플레턴을 찾았다.
평소에는 남부 협회에서 지내는 플레턴이지만 마족의 출현으로 원로 전원이 본부에 소집된 상태였다.
“아직 귀 안 먹었으니까 작게 불러라.”
“이 가증스러운!”
플레턴이 태연히 대답하자 벨로스는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
“내가 무엇을 했다고?”
“이번 마족의 이야기는 당연히 들었겠지!”
원로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동부에서 갑자기 나타난 마족.
오차드라는 이름은 몰랐으나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마족에 대해서는 협회에 제법 정보가 알려진 상태였다.
원로 중 한 명을 죽인 전적도 있었기에 협회에서 가장 위험시하던 마족 중 하나였는데 다행히 성공적으로 토벌되었다.
그것도 협회는 단 하나의 손실도 입지 않은 이상적인 결과로.
동부 협회의 순간 이동 마법으로 보주가 소모된 건 뼈아프지만 마족 토벌의 대가로는 충분히 싼 편이었다.
“내 제자가 잘 활약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플레턴은 어깨를 으쓱였다.
갑자기 마족이 나타난 것에는 당혹스러웠지만 그 결과는 그야말로 최상이었다.
심지어 협회의 지원 없이 마족을 토벌했다.
자크론이 함께 있었다지만 놀라운 성과였다.
‘애초에 자크론이 얌전히 잘 따르는 것부터 뜻밖이지만.’
아인이 자크론을 영입한 것에는 플레턴조차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크론이 누구던가?
왕국에서 최악이라 평가받는 잔혹한 손속과 무수한 인명을 살상한 전과가 있는 마법사다.
그것이 설령 전장에서 적들을 해친 것이라 할지라도 같은 편마저 두려움에 떨어 영웅이 아니라 학살자라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자크론은 그러한 자신의 악명마저 즐기면서 광기를 여실히 드러냈었다.
“그 제자 놈!”
벨로스가 플레턴 앞의 탁자를 내리쳤다.
“자크론이 함께 있었다고는 하지만 고위험군에 속하는 마족을 협회의 도움도 없이 해치웠다!”
“잘했군.”
플레턴은 아인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손뼉을 쳐줬을 것이다.
“웃기지 마라! 어째서 그 정도로 제자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걸 알려주지 않았지? 아니, 애초에 왜 협회에 들인 거냐?”
벨로스는 태연자약한 플레턴의 태도에 치를 떨었다.
처음에는 플레턴이 제자를 이용해 자신의 영향력을 키워 협회장의 자리를 노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인이 마족을 상대하는 모습을 보고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플레턴은 스스로 협회장의 자리에 서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제자를 협회장의 자리에 앉힐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넌 네 제자에게 이 협회를 고스란히 바칠 생각이냐?”
뛰어난 마법사가 협회 소속이라는 건 좋다.
그러나 상대는 귀족이었고 그중에서도 영주였다.
게다가 이제는 남부와 동부 두 지역을 평정한 대영주가 될 몸.
왕실이 무너진 지금 크레시안 왕국 제일의 권력자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이가 협회 소속이자 원로의 제자라는 신분으로 협회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협회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도 이미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고.
이전 협회 제일의 기재였던 티아라가 아인의 밑에서 종군하게 되었고 외부에 나가 있던 협회의 마법사들도 아인의 그늘로 들어가고 있었다.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인 행동이라 한들 협회가 조금씩 흡수되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녀석은 위험하다. 실력만이 아니라 야망을 갖고 있어! 분명 협회를 집어삼키려 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녀석을 제명해야 해.”
협회에서 나가라며 대놓고 면박을 주는 자신에게 물러섬 없이 맞서던 아인의 모습에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평민에게 그런 대접을 받고도 자존심을 세우지 않는다는 건 자존심이 없거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야망을 가졌다는 소리니까.
아인의 경우에는 후자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명분으로 내 제자를 제명한다는 거지?”
플레턴의 물음에 벨로스는 말문이 막혔다.
아인은 놀라운 활약을 거듭하면서 마법사 협회의 위상도 덩달아 높여주고 있었다.
직접 마법사 협회가 뭔가를 한 건 아니지만 플레턴의 제자라는 위치만으로도 충분했다.
더구나 아인은 협회의 마법사들을 좋은 조건으로 대우해 주면서 여러 도움을 주고 있었다.
협회가 중립을 표방한다지만 외부의 지원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상인들이나 귀족들이 주는 기부금이나 지원금이야말로 협회의 주요 수입원이라 말할 수 있었다.
“벨로스. 말을 가려서 하는 게 좋겠구나. 원로답게 말이다.”
“하, 다른 원로들께선 플레턴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마법사 협회를 귀족에게 넘겨주게 될지도 모르는데?”
가진 것 없는 이들은 마법사 협회가 대단한 권력자 집단인 것처럼 생각하고는 했다.
실제로 농노나 평민에게 마법사 협회는 신분 상승의 지름길이 맞기도 하고.
하지만 결국 신분이 낮은 이들만 모인다는 태생적인 한계로 인해 마법사 협회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바로 중립을 유지하지 않으면 귀족의 눈 밖에 나서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취약함.
협회가 중립을 표방한 건 절대 대의를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인은 협회의 일원이자 플레턴의 제자라는 명분으로 이런 협회를 위협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선배님들께서 대대로 지켜온 규율을 우리가 깨겠다는 건 아니시겠지요?”
벨로스는 원로들의 동의를 구했다.
아무리 플레턴이 감싸고 마땅한 명분이 없더라도 협회를 운영하는 건 결국 원로 회의였다.
다수의 원로가 자신에게 찬동한다면 충분히 아인을 견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말은 맞네. 애초에 영주나 되는 고위 귀족을 협회에 들인 것부터 문제가 있어.”
그런 벨로스의 뜻에 몇몇 영주들이 찬동하고 나섰다.
그러나 모든 원로가 벨로스의 편을 들어준 것은 아니었다.
“귀족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규율 같은 건 없었네.”
어떤 원로는 지금의 상황을 오히려 반기고 있었다.
태생적인 문제로 인해서 마법사 협회가 가진 힘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
그래서 카이로스 백작이 마법사들의 가족을 인질로 잡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 사건은 마법사 협회가 대영주들에게 얼마나 우습게 보이는지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우리 협회가 대영주들의 눈치를 언제까지 봐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