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74화
VVIP 영주님의 품격 74화
74화
로크가 라이언을 손봐 주는 동안 나는 어쩔 수 없이 다른 화제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애썼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갔는데 그중에 영주들이 관심을 보인 건 내 가신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가신단은 어떻게 편성할 것인지 생각해 둔 바가 있습니까?”
당장 세력만 해도 대영주로는 부족함이 없지만 그렇다고 멋대로 작위를 올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동부까지 점령한다면 더는 내가 대영주를 자청하는 걸 누구도 뭐라 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대영주가 되면 필연적으로 드넓은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서 가신들을 편성할 필요가 있었다.
‘직책이야 다들 있지만, 아직 작위는 없지.’
일반적으로 영주에게 존재하는 가신이란 건 가문에서 한자리를 차지한 자들을 말했다.
기사단장이라거나 마법사들의 우두머리, 행정관과 집사 등등.
이들은 하급 귀족이거나 그에 준하는 신분을 가진 이들로서 평민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권층이었다.
하지만 대영주의 수준은 그보다 높다.
대영주의 가신들은 작위를 가지고 있는 제대로 된 귀족으로 구성되는 게 보통이니까.
즉, 내가 대영주가 된다면 가신들도 작위를 가진 진짜배기 귀족이 되어야 한단 소리였다.
쫑긋.
어느새 라이언은 나와 가까운 곳에서 귀를 활짝 열고 있었다.
라이언을 혼내던 로크도 언제 왔는지 아닌 척 귀를 열어두고 있었다.
아니,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근처에 있는 내 휘하의 기사들 모두가 눈을 반짝이며 부담스럽게 날 응시했다.
“음. 벌써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 이른 거 같군. 라닌 후작가까지 점령한 이후에 합당한 전공에 맞춰서 보상을 주는 게 올바른 일이겠지.”
시선을 모면하기 위해서 부정적인 대답을 꺼내자 라이언에게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군요. 하긴 가신을 정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영주들은 내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작위를 몇 개나 내릴지는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다 한 영주가 작위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자 아까보다 더 강렬한 눈빛들이 날아들었다.
작위를 받을 정도의 후보는 많지 않았으나 측근이라 부를 만한 이들은 분명 있었다.
“적어도 둘이나 셋은 내려야겠지요?”
“네패스 자작님이라면 더 내려도 될 거 같기도 한데…….”
영주들은 그렇게 말하면서 은근한 눈길로 내 측근들을 살피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까 나에 대한 명성이야 계속 퍼졌지만 내 휘하의 기사들에 대한 명성은 많이 퍼지지 못했다.
마법사인 내 활약이 유독 강렬하기에 상대적으로 같이 고생한 기사들이 묻히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로스 백작가 때에는 아예 손 놓고 구경만 하기도 했고.
‘내 측근들이 궁금했던 거군.’
내리는 작위의 숫자로 최측근이 몇 명이고 누구인지를 얼추 파악할 수 있다.
영주들이 굳이 이렇게 작위 이야기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딱히 작위에 제한을 둘 생각은 없네.”
“그 말씀은?”
“가능하면 많은 작위를 내리고 싶은데.”
이건 공적을 다투게 하려는 빈말이 아니었다.
절대군주의 조건은 대륙을 통일하는 것.
크레시안 왕국이라는 한정된 배경을 벗어나야 하는데 작위 몇 개에 연연할 필요는 없었다.
충분히 능력 있는 영웅이라면 얼마든지 작위를 내려줄 것이다.
“과연 배포가 남다르십니다.”
“뭐, 이건 라닌 후작가를 점령한 다음에나 가능한 이야기니까. 그런 일이 일어날지는 나도 확신하지 못하겠군.”
“하하, 무엇이 걱정이십니까? 이미 라닌 후작가는 네패스 자작님께서 큰 피해를 입혀놨는걸요.”
영주들은 아무런 근심이 느껴지지 않는 환한 얼굴로 승리를 자신했다.
실제로 객관적으로 봤을 때 라닌 후작가는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음?”
그런데 라닌 후작가에 가까워지자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라닌 후작가의 깃발을 단 군대가 우리를 향해 마주 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나와 영주들은 모두 당황했다.
이곳은 평지라 방어를 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으니까.
“지친 군대를 기습할 생각인가?”
“그러기에는 너무 느리군.”
상대보다 우리 쪽의 피로가 큰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동부 침공 내내 거듭된 전투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사기는 충분히 높았다.
짧은 시간 사이에 동부의 대부분을 장악했으며 승리가 눈앞에 있었으니까.
더구나 기습을 하려면 야간에 하거나 매복을 해서 상대가 대응할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적은 정면에서 나타났다.
충분히 대응할 여지를 준 것이다.
“방어도, 기습도 아니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온 것이지? 혹시 항복하려는 건가?”
한 영주가 기대를 품었다.
확실히 승산이 없는 싸움에 항복을 선택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가 대영주들을 모두 죽였다는 걸 라닌 후작이 모를 리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굳이 항복하려고 할까?
이런 의문에 답해주듯 적들이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허?”
그건 명백한 공격용 진형이었다.
모두 어이가 없어서 반응이 늦었다.
싸울 생각이라면 성벽을 끼고 버티는 게 수십, 수백 배는 나으니까.
구태여 자신들에게 불리한 장소까지 나와서 싸우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짓을 하는 거지?”
“혹시 라닌 후작이 실성하기라도 한 건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우리도 대응에 나섰다.
“굳이 피해를 늘릴 필요는 없지. 들어오는 적들을 받아치는 쪽이 나아.”
“아니, 오히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줘야 적들이 와해되면서 피해가 줄어들 것이오.”
영주들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똑같이 공격에 나서서 힘으로 상대를 부수거나 아니면 들어오는 적들을 끌어들여서 잡아먹거나.
어느 쪽이라도 일리가 있었다.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지랄하고들 있네.”
그런데 명령을 내리기 전 갑자기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자크론이었다.
“헉!”
자크론을 본 영주들은 당황하며 물러났다.
카이로스 백작의 휘하에서 자크론이 수백을 불사르던 광경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군이 되었다지만 자크론과 가까이하려는 영주는 아무도 없었다.
자크론 역시 영주들과 친해지려 하지는 않았었고.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그런 자크론이 갑자기 앞으로 나왔다.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당장 군대를 모두 후퇴시켜라.”
“네?”
자크론은 느닷없이 군대를 물리라는 말을 꺼냈다.
전술적으로 말도 안 되는 선택이었다.
공격을 앞둔 적에게 등을 보이면 일방적으로 학살당할 테니까.
상대가 우리보다 강하다면 모를까 약할 때 선보일 전술은 아니었다.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까 빨리.”
자크론의 시선이 나를 꿰뚫을 것처럼 예리하게 빛났다.
절대 장난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로크 경. 후퇴 명령을 내려라.”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크론이 이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나는 곧장 로크에게 후퇴를 명령했다.
“그게 무슨? 지금 저 말을 들을 셈입니까?”
그런 내 행동에 영주들이 당황했다.
“이것들도 치워라. 잔챙이들은 도움이 안 된다.”
자크론은 반발하는 영주들을 가리켰다.
잔챙이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
그제야 나는 자크론의 눈동자에 긴장감이 스친 걸 알 수 있었다.
악명 높은 자크론이 이렇게 행동할 정도의 무언가가 상대측에 있는 것이다.
“연합의 부맹주로서 명령하지. 모든 영주들은 후방으로 군대를 물리고 이 장소를 벗어나도록.”
“네패스 자작, 지금 진심이오?”
영주 중에서는 발언권이 가장 강한 바이든 자작이 나의 의사를 확인했다.
“실없는 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니까.”
내 대답을 영주들은 납득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크론이 눈을 부라리고 내가 권위를 내세우자 모두 물러나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부맹주의 이름을 썼지만 그들도 나도 알고 있다.
진짜 남부 연합의 수장이 누구인지를.
“기사들까지 다 물려야 합니까?”
영주들이 빠지고 어느새 곁에는 내 기사들만 남게 되었다.
“네가 전력으로 싸울 때 발목 잡지 않을 놈들만 남겨봐라.”
5티어 마법사인 내가 전력으로 싸울 때 발목을 잡지 않을 수준이라.
그 정도 기사는 아무리 나라도 몇 명 없었다.
“로크 경, 릴리아나 경, 루시우스 경, 다니엘 경.”
3티어 전투형 영웅 네 명.
이 네 명만이 여파에 휘말려서 비명횡사하지 않을 최소한의 수준이었다.
“영주님. 저희도 남겠습니다.”
“맞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영주님만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지명되지 못한 기사들이 당황하며 남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라이언 경.”
“알겠습니다.”
그에 난 라이언을 불렀고 라이언을 눈치 빠르게 다른 기사들을 붙들었다.
“명령이잖냐. 기사는 명령에 따라야지?”
“이 손 치워라! 저게 무슨 말인지 그대는 이해가 안 되는 건가? 영주님께서 위험을 감수하시겠단…….”
“우리가 너무 약해서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거잖아?”
라이언이 냉혹하게 현실을 지적했다.
생각해 보면 2티어 영웅이었던 라이언이야말로 이 상황이 가장 내키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도미닉 남작가와 싸울 때는 라이언이 최고 실력자였으니까.
네패스 남작가의 기사들조차 라이언을 정면으로는 이기지 못해 장비의 힘을 빌려야 했다.
하지만 이제 라이언은 나와 같은 전장에 세울 수도 없는 수준이 되었다.
라이언이 약해진 게 아니다.
내 성장이 그만큼 비약적이었다.
“억울하면 강해졌어야지. 적어도 저 4명 수준으로는.”
라이언의 시선이 기사들을 훑었다.
그 시선이 지나간 곳에는 빅터와 터너도 있었다.
“전시 상황에서 명령 불복종은 즉결 처분이다. 용병이나 기사나 예외는 없다고 안다만?”
라이언이 단검까지 꺼내 들자 기사들이 마지못해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딱 한 기사만큼은 제자리에 남아 있었다.
빅터였다.
라이언이 빅터를 설득하려 했으나 빅터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고는 입술을 짓씹으며 나를 보았다.
“빅터 경.”
“이번만입니다.”
피를 토해내듯 괴로움이 담긴 음성이었다.
“이번만 물러나겠습니다. 다음에는 반드시 강해질 테니까. 그러니까…….”
난 잠시 눈을 감았다.
라이언은 돈으로 고용한 용병이었다.
로크와 릴리아나에게는 능력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었다.
그들은 모두 나에게 무언가를 받음으로써 충성을 바치게 됐다.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로 서운할 게 없는 이상적인 군신 관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빅터는 달랐다.
기억 상실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듣고 따라줬으며 모진 성격이 못 됨에도 더 많은 피를 원하는 나를 따라와 주고 있었다.
그리고 도움이 되지 못하는 걸 괴로워한다.
나는 그런 빅터에게 제법 많은 재물을 내려줬지만 빅터는 그것들에 흥미가 없었다.
오직 빅터만이 조건 없이 충성을 바쳤다.
“경을 믿는다.”
난 빅터를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심지어 내 비밀의 일부를 알아낸 로크나 릴리아나보다도 훨씬 신뢰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영웅 정보]
이름 : 빅터
국적 : 크레시안 왕국
소속 : 네패스 자작가
유형 : 전투형
등급 : 2티어
칭호 : 숙련된 기사
스킬 : 검술(2), 지휘(1), 기마(1), 격투(1)
빅터는 유일하게 나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고 자신의 등급을 올린 영웅이었으니까.
“다음에는 내 옆에 서라.”
“와아. 혹시 그쪽 취향이라도…….”
갑자기 헛소리하려는 라이언은 마나 블래스트로 치워버렸다.
그리고 빅터가 다른 기사들을 따라 물러난 뒤 나는 자크론을 돌아봤다.
“이제 설명 좀 해주십시오.”
“마족이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자크론이 이 정도로 반응할 만한 상대가 달리 생각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건 너무 갑작스럽고 또 이른 만남이었다.
“어떻게 아십니까?”
“마족 놈들과 하도 싸우다 보니 놈들이 근처에 있으면 아주 불쾌한 기분이 든다.”
“감이란 말씀입니까?”
“근거 없는 감이랑은 다르다. 이건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거니까.”
자크론은 완전히 확신하고 있었다.
“강합니까?”
“전쟁에서 살아남은 것들은 하나같이 괴물들뿐이지.”
“하지만 결국 마족은 졌지 않습니까?”
이 자리에 모인 남부 연합의 군대가 6천이다.
마족이 나와 동급의 마법사 혹은 그 이상이라고 해도 절대 이만한 수는 감당하지 못한다.
“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저놈은 예외다.”
자크론의 시선이 라닌 후작가의 군대를 향했다.
시커먼 무언가가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집중해서 보고 나서야 그것이 뭔지 알 수 있었다.
“그림자?”
라닌 후작가의 군대는 바닥에서 솟아난 그림자에 지배당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