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73화
VVIP 영주님의 품격 73화
73화
“너, 너!”
라닌 후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족.
비록 인류에게 패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지만, 세상에 그만큼 두려운 존재는 없었다.
인류가 마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은 훨씬 많은 머릿수와 전략을 내세운 덕분이었으니까.
순수한 힘의 관점에서 마족은 지상 최강의 종족이었다.
특히 마족과의 전쟁에 나서봤던 이들은 마족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잔혹하고 오만한 성정은 동족조차도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끔찍했으니까.
“네가 감히 내 성에 마족을 들였단 말이냐!”
전쟁에서 패한 것으로 몰락했다고 알려졌지만 살아남은 소수의 마족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마족은 마땅히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했다.
인류의 추격을 뿌리치고 달아난 마족들의 강함은 하나같이 상식을 초월해 있었기에.
“마족이면 어떻고 악마면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저 남부의 군대를 물리쳐줄 누군가 아닙니까?”
길모어는 라닌 후작의 호통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라닌 후작은 치를 떨었다.
“이 주제도 모르는 놈아! 마족이 네놈의 뜻에 순순히 따라주는 족속인 줄 아느냐? 그놈들은 제 놈들끼리도 제대로 힘을 합치지 못했다.”
“예전에는 그랬지요.”
라닌 후작의 외침에 길모어는 태연히 대꾸했다.
“그러나 마족은 바보가 아닙니다. 통한의 패배 이후로 그들도 머리라는 걸 쓰게 되었죠. 그래서 저와 친구가 될 수 있던 겁니다.”
길모어의 뒤에 나타난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그러나 그저 의복으로 겉모습만 조금 흉내 냈을 뿐, 새빨간 눈과 불길하기 이를 데 없는 푸른 피부는 아무리 봐도 인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사들은 뭘 하고 있는 것이냐! 당장 저 빌어먹을 마족과 변절자 놈을 처단해라!”
라닌 후작은 즉각 마족과 길모어를 죽일 것을 명령했다.
이에 기사들이 마족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어리석은.”
길모어는 달려드는 기사들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이윽고 기사들의 검이 길모어의 목에 짓쳐들어왔을 때 뒤에 서 있던 마족이 움직였다.
스팟!
“어?”
검을 내지르던 기사는 갑자기 시야가 아래로 푹 꺼지는 것에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에 목이 떨어진 기사들은 순식간에 시신이 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허억!”
겁먹은 가신 한 사람이 그 광경에 나자빠졌다.
신체적으로 인간보다 나은 마족이 많기는 하나 결국 핵심은 마법이었다.
그런데 저 마족은 순수한 신체 능력만으로 기사들을 죽여버렸다.
라닌 후작도 그 사실을 깨닫고 주춤거렸다.
강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강함이었다.
“보셨습니까? 이게 제 친구의 힘입니다.”
“어리석은 놈이! 저 힘이 네놈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쥐뿔도 없는 네놈이?”
길모어는 검술로는 견습 기사의 수준에 불과했고 마법은 아예 익히지 못한 몸이었다.
작위를 받은 기사들조차 단숨에 죽이는 마족을 길모어가 다룬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었다.
물론 길모어도 이 사실을 알았다.
“마족의 존재가 알려지면 모든 영주가 연합해서라도 죽이려고 하겠지요. 죽고 싶지 않다면 협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걸 이 친구도 잘 압니다.”
길모어가 믿는 것은 다른 영주들에게 발각되면 토벌될 거라는 마족의 두려움이었다.
그에 라닌 후작은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제 절 믿어주시지요. 제가 남부 연합을 막고 이 영지를 구해내겠습니다.”
길모어는 가신들 앞에서 당당히 선언했다.
가신들은 그에 반발하려다 목이 떨어져 죽어 있는 기사들의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괜히 뻥긋하는 순간 자신들 역시 기사들과 같은 처지가 될 것 같았다.
가신들의 침묵에 길모어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라닌 후작을 돌아보았다.
“가신들은 반대하지 않는군요. 이제 후작 각하의 선택만이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대로 예정된 파멸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니면 한번 저에게 걸어보시겠습니까?”
길모어의 물음에 라닌 후작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마족과 손을 잡는다는 건 당장 위기를 벗어나더라도 훗날 공적이 되어 멸문당할 사안이었다.
“천한 피는 어쩔 수가 없구나.”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라닌 후작의 입에서 나온 모욕적인 언사에 길모어의 눈이 뒤집어졌다.
사생아라는 이유로 평생 아들 취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산 그였다.
그런데 심지어 다른 사람도 아닌 라닌 후작의 입에서 천한 피란 말까지 들을 줄이야.
“멍청한 짓 마라. 내가 고작 두려움 때문에 마족과 손을 잡을 거 같으냐? 그딴 짓을 하고 뒷일이 감당될 거 같으냔 말이다!”
내전의 특성상 패배한 영주는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는 영주와 그 후계자에게만 한정된 이야기.
적들도 피에 굶주린 게 아닌 이상 부인이나 여식들 그리고 일가친척까지 죽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족과 손을 잡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라닌 후작 자신의 목으로는 한참 부족해서 그와 혈연인 모든 이들과 가문에 몸담아서 일하던 모든 이들을 빠짐없이 죽이게 될 것이다.
“네깟 놈은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
푹!
라닌 후작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새 다가온 길모어가 죽은 기사가 흘린 검으로 라닌 후작을 찔렀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늙은이가.”
마지막까지 부정당한 길모어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평생을 없는 자식 취급하더니 마지막마저 자신을 부정한 무정한 아비였다.
“후작 각하!”
“마족을 불러들여 가문의 기사를 해치고 제 아버지까지 죽이다니! 이런 패륜이 어디 있단 말인가?”
“입 닥쳐!”
길모어는 소리치는 가신들을 향해 검을 내던졌다.
가신들은 날아드는 검에 기겁했지만, 다행히 누구도 맞지 않았다.
“역겨운 노친네들. 한 마디만 더 떠들면 끔찍하게 죽여주지.”
길모어의 으르렁거림에 한순간 가신들의 말문이 막혔다.
라닌 후작 본인이 길모어를 아들로 대우해 주지 않는데 가신들이라고 길모어를 대우해 줬을 리 없었다.
더구나 이미 라닌 후작까지 죽인 마당에 가신들의 목은 언제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가신들을 침묵시킨 길모어는 죽은 라닌 후작의 시신에서 가문의 인장을 꺼냈다.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이 인장은 오직 영주만이 사용할 수 있는 권위의 상징이었다.
“길모어.”
그때 지금껏 침묵하고 있던 마족이 길모어를 불렀다.
“저것들은 죽이지 않아도 되는 건가?”
마족은 진득한 살의를 내뿜으며 가신들을 가리켰다.
“허억!”
그 스산한 목소리에 가신들은 또다시 놀라며 주춤거렸다.
“당장은.”
마족의 물음에 길모어는 고개를 내저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말대로 모두 죽이고 싶었지만 그러면 도리어 자신이 곤란해질 처지였다.
“군사들을 모으려면 저것들이 필요해.”
“그런가. 만약 거부한다면?”
“그땐 다 죽여버려. 뭐, 아버지가 죽어도 겁먹어서 나서지 않는 이들이 그럴 리야 없겠지만.”
길모어는 가신들을 조롱하며 라닌 후작의 의자에 앉았다.
그가 평생을 꿈꿔 왔던 자리였다.
“이제부터는 내가 라닌 후작가를 이끌 것이다.”
* * *
주력을 잃은 라닌 후작가가 주춤하는 동안 난 라닌 후작가의 후방을 빠져나와 본대와 합류했다.
이제 우리 남부 연합의 군대를 가로막을 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바이든 자작과 다른 영주들도 승리를 거두며 동부의 절반이 넘는 영토가 우리에게 넘어왔다.
병력의 소모가 많은 것도 아니었기에 동부 침공에 나섰던 영주들 모두 만족하고 있었다.
“이제 라닌 후작가만 접수하면 끝나겠군요.”
어느 남부 영주가 들뜬 얼굴로 말했다.
“일이 잘 풀려서 정말 다행입니다. 물론 이 모든 건 다 네패스 자작님의 공이지요.”
“맞습니다. 정말 대단한 활약이셨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나에 대한 아부가 나오더니 다른 영주들도 앞다투며 나를 금칠하기 시작했다.
난 그들의 아부를 적당히 받아주었다.
부맹주로서든 차기 맹주로서든 남부 연합의 영주들과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이들은 절대군주를 목표로 하는 나에게 있어 꼭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세상에 나 혼자 잘났다고 나라를 운영한다거나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그래도 피곤하기는 하네.’
전투만 신경 써도 지치는데 영주들의 비위까지 맞춰주자니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이제 라닌 후작가만 제거하면 당분간은 긴 휴식이 주어질 것이다.
하나의 지역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건 소화에도 긴 시간을 쓸 수밖에 없는 일이니.
본거지인 남부를 안정화시킨 것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할 일이 많았다.
“그런데 네패스 자작님.”
그때 한 영주가 은근한 목소리를 내었다.
“괜찮은 여식을 하나 알고 있는데 그 녀석이 자작님 같은 영웅을 꼭 만나 뵙고 싶다 성화입니다.”
그 영주의 제안에 순간적으로 표정이 잘 관리되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에 남부에서 레일리 왕녀와 약혼을 하고 왔는데 갑자기 여자를 소개해 주다니?
물론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귀족이 첩을 두는 건 매우 흔한 일이었고 사생아도 넘쳐나는 판국이니까.
하지만 아직까지 이 세계의 기준에 익숙해지지 못한 입장에서는 많이 당혹스러웠다.
“어찌 왕녀 저하를 두고…….”
“자작님은 젊지 않습니까? 쉽게 손댈 수 없는 왕녀 저하 대신에 편한 상대를 두는 게 자작님께도 좋을 겁니다.”
정말로 난감한 꼬드김이었다.
나에게 성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곳에 정신을 팔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완강하게 거부하기에는 상대가 서운함을 느낄지도 모르고.
“지금 그게 무슨 말인가!”
그때 바이든 자작이 쌍심지를 켠 채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영주와 나누는 대화가 그에게까지 들렸던 모양이다.
“왕녀 저하를 두고 지금 다른 여자를 들이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성난 바이든 자작이 영주를 쏘아붙였다.
그에 영주는 진심으로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바이든 자작님, 왜 이러십니까?”
“왜? 그걸 몰라서 묻는가?”
“제가 부인을 들이라고 했습니까? 첩은 귀족이라면 으레 들이는 법 아닙니까? 게다가 네패스 자작님은 한참 젊고 왕성할 때인데.”
“이자가 정말!”
바이든 자작은 아예 주먹이라도 휘두를 낌새였다.
난 서둘러 바이든 자작을 말렸다.
“그만하지. 바이든 자작.”
“네패스 자작, 설마 왕녀 저하를 두고 첩에 관심을 가지는 건…….”
“내가 첩을 들이더라도 그게 그대가 참견할 수 있는 문제인가?”
바이든 자작은 대꾸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랬다.
더구나 그 상대가 바이든 자작이라면 더욱 그렇다.
마이어드 후작가와의 관계를 위해 후작 본인에게 제 딸을 첩으로 내준 사람이 아니던가?
지금 이 영주가 하는 행동은 과거 바이든 자작의 행적과 하등 다를 게 없었다.
잘나가는 대영주의 뒷배를 얻기 위해서 첩을 보내는 것이니까.
“내 장인 행세라도 하고 싶은 건가?”
“아니오. 내가 실수했군.”
“첩 같은 건 전혀 생각 없으니까 괜한 짓 마시오.”
바이든 자작이 물러섰지만 이미 분위기는 서먹해진 상태였다.
다른 영주들이 서둘러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 애를 썼지만 한 번 가라앉은 분위기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곤란한데.’
서먹한 관계의 사람들이 등을 맞대고 제대로 싸우기를 바라는 건 무리인 일.
무언가 수를 내야 했다.
급하게 주변을 살피는데 마침 눈에 들어오는 상대가 한 명 있었다.
‘분위기를 푸는 데 제격일 거 같기는 한데.’
문제는 역효과가 날지도 모른다는 것.
상대의 신분은 영주들보다 한참 낮은 일개 기사에 불과했으며 심지어 신분은 그보다 더 아래였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로크 경. 라이언 경 좀 불러오게.”
“라이언 말씀입니까?”
로크에게 라이언을 데려오라고 하자 로크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라이언으로 분위기를 푸실 생각이라면 관두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 녀석이라면 미친 짓으로 영주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다른 방도가 있나?”
“끙. 알겠습니다.”
로크는 불안함을 숨기지 못한 채 라이언을 호출했다.
그리고 얼마 뒤 로크에게 사정을 전해 들은 라이언이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영주님들이 다퉜다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무언가 좋은 생각 있나?”
“사내들 친해지는 방법이야 단순하지요.”
“설마 술을 먹자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전투가 코앞인데 음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음주 운전도 나쁜데 음주 전투라니.
비명횡사하기 딱 좋지 않은가.
“아닙니다. 지금 상황에 술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웬일로 라이언이 제대로 된 말을 꺼냈다.
“그럼?”
“여자 이야기를 해야지요. 첩 엉덩이라도 주무른 이야기를 하면 다 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라이언이 어딘가 음흉한 손짓을 내보였다.
“로크 경.”
“죄송합니다. 거기까지는 설명을 못 했습니다.”
기대한 내가 병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