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72화
VVIP 영주님의 품격 72화
72화
* * *
아인이 자크론을 제압한 이후로 마법사 협회의 시선은 줄곧 아인을 향해 있었다.
내전에서 가장 주목받는 남부 연합의 부맹주.
남부에서는 젊은 영웅이라 불리며 인정받는 천재 마법사.
그런 아인이 연합의 다른 영주들과 함께 동부를 침공했을 때 동부 마법사 협회의 관심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동부 마법사 협회는 남부에서 보내준 것 말고는 아인에 대해 제대로 된 정보를 단 하나도 얻지 못했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언제 왔는지도 모를 남부 연합 군대의 일방적인 살육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동부의 대영주들은 대항은커녕 뭐가 뭔지도 모른 채 허무하게 무너지는 추태를 거듭했다.
‘터무니없다. 도대체 어떻게 이동한 거지?’
남부 연합의 군대는 정말 신출귀몰하게 움직였다.
어떻게 수천에 달하는 대군이 그리 쉽게 동부로 진군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한 번도 아니고 동부에 침공할 때와 라닌 후작가의 후방으로 들어갈 때 두 번이나 그런 광경을 보였다.
그리고 연달아 별동대로 토벌을 위해 나선 라닌 후작가의 군대를 역으로 궤멸시켰다는 사실에 동부 마법사 협회는 경악했다.
지금껏 지켜봐 왔던 대영주들의 힘이 마치 모래성이라도 되는 양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이미 승패가 갈렸다.’
데커드 백작령은 구심점을 잃은 채 점령당하고 있었다.
퍼렌 백작가도 남부 연합의 맹공에 맥을 못 추고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좀 버티지 않을까 싶던 라닌 후작가마저 고작 별동대에게 어처구니없는 참패를 당했을 뿐이다.
‘우리 동부가 이렇게 약했단 말인가?’
동부 마법사 협회의 지부장을 맡고 있는 라울은 갑자기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딱히 동부의 대영주들을 응원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같은 지역의 입장에서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지부장님.”
“무슨 일이냐?”
“벨로스 원로님께서 오셨습니다.”
“원로님께서?”
협회의 원로인 벨로스는 남부 연합이 동부를 침공하는 게 확인된 시점부터 동부 협회에 눌러앉은 상태였다.
자세한 이유까지는 모르나 그가 남부 연합을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네패스 자작의 스승이라는 플레턴 원로님이라면 모를까 왜 벨로스 원로님께서 남부 연합에 관심을 가지시는 거지?’
플레턴과 벨로스의 관계를 모르는 라울은 벨로스의 행동에 의문을 가졌다.
플레턴이라면 스승으로서 관심을 가져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벨로스는 완전히 남이었다.
그렇다고 밑에서 종군하고 있는 티아라의 스승인 것도 아니었고.
“안으로 모셔라. 차도 준비하고.”
이유야 어쨌든 원로의 방문이었다.
라울은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고 벨로스를 맞이했다.
“지부장.”
“어서 오십시오, 원로님.”
벨로스가 집무실로 들어오자 라울은 곧장 허리를 숙였다.
원로를 상대로 깍듯하게 대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벨로스를 상대로는 좀 더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답지 않은 그의 건장한 체격은 상당한 위압감을 주기 때문이다.
“새 소식이 들어왔다고 들었다.”
벨로스는 라울의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은 채 용건부터 꺼냈다.
그러나 라울은 이런 벨로스의 행동에 어떠한 내색조차 없이 익숙하게 자신이 보던 보고서를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흠.”
벨로스는 차분하게 보고서를 살폈다.
한동안 종이 넘어가는 소리만 들리길 얼마쯤 지났을까.
중간 부분에서 벨로스의 눈썹이 씰룩였다.
“지부장, 이 보고서의 내용이 맞는 건가?”
“물론입니다. 교차 검증도 이미 완료했습니다.”
라울의 긍정에 벨로스는 할 말을 잃었다.
남부 연합이 동부를 침공하고 이제 겨우 보름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미 동부의 대영주들은 남부 연합에 의해 죄다 박살이 나서 무너져버린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전은 아직도 지지부진했다.
그나마 진척을 보인 곳이 있다면 중부의 세력이 기울어진 것이 전부였다.
친왕실파 귀족들이 패배할 가능성이 크다는 쪽으로.
그런데 그사이 남부는 일대를 평정하더니 이제는 동부까지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네패스 자작의 마법 실력이 대단하다고 합니다. 아래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동부에서 이름 높은 기사 두 사람을 혼자 해치웠습니다.”
라울은 남부 연합의 맹진에 대한 원인으로 아인을 짚었다.
자크론을 쓰러트린 것도 대단하지만 자크론과의 싸움은 마법사 대 마법사의 싸움이었다.
반면 이번 동부에서 아인은 이름 있는 기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 부분은 눈여겨볼 만했다.
마법사가 기사를 상대로 우세를 점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사례였으니까.
“기사를?”
“그렇습니다. 그 자크론을 이겼다는 게 이제야 좀 믿어지는 거 같습니다.”
협회에서는 일찌감치 아인이 자크론을 이겼다는 걸 파악했다.
당시 현장 근처에 있던 원로들이 확인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숱한 원로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막상 이를 진실로 받아들인 마법사는 많지 않았다.
너무나도 터무니없었기 때문이다.
아인은 협회에 이름을 올리고 아직 1년도 되지 않았으며, 그전까지는 그럴듯한 스승조차 없었다.
협회에 들어오면서는 플레턴의 제자가 되었지만, 밑에서 가르침을 받은 시간은 무척 짧았다.
아무리 비전 마법을 가르쳤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반대로 비전 마법 외에는 기초적인 마법도 제대로 전수받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시선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원로와 같은 배분인 자크론이 아인에게 패배했다는 걸 어떻게 그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당연히 이를 실력으로 보는 마법사는 드물 수밖에 없었다.
마나가 바닥난 자크론을 꺾은 정도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협회에서 원로란 그런 위치였으니까.
원로와 대등하다고 평가받는 자크론 역시 그만큼 인정받았기에 아인의 승리에 의문이 남은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기사들을 정면에서 꺾어버린 마법사.
어중이떠중이 기사도 아니고 동부에서 이름 높은 라닌 후작가의 기사들이었다.
원로 중에서도 이처럼 이름난 기사를 상대로 승리를 자신할 수 있는 이가 몇 되지 않을 테니 이제 누구도 아인의 실력을 의심하지 못했다.
“물론 마법 실력이 전부는 아닌 거 같습니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동부의 군대는 신출귀몰합니다.”
이렇듯 아인의 활약도 인상적이지만 그렇다고 남부 연합에서 아인만 주목받는 건 아니었다.
버텐의 매라는 용병들의 매복을 뚫고 출구에 있는 성채까지 단숨에 점령해 동부 침공의 교두보로 삼은 신속함.
라닌 후작가의 경계를 뚫고 유유자적하게 후방으로 들어가서 그를 농락하던 은밀함.
그 어떤 것도 가볍게 볼 수 없는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솔직히 직접 찾아가서 어떻게 했냐고 묻고 싶을 정도다.’
라울은 마구 샘솟는 이 의문을 풀 방법이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확실히. 힘자랑만 할 줄 아는 녀석은 아닌 모양이군.”
벨로스는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증오해 마지않는 사형 플레턴은 협회를 위태롭게 만드는 행동을 저지르고 있었다.
추후 왕국을 주름잡을지도 모르는 귀족을 제자로 거둔 것.
여기까지만 해도 만만치 않은데 심지어 플레턴은 자신의 비전 마법까지 넘겨준 상태였다.
플레턴이 처음 아인을 제자로 받아들인 시점을 생각해 보면 후계자로 삼기에는 너무나도 이른 시점이었다.
사실상 제자로 들일 때부터 이미 후계자로 낙점했다고 봐야 했다.
‘이런 녀석을 단지 마족과 싸우기 위해서 들였다고? 절대 거짓말이다.’
그렇기에 플레턴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물론 마족들이 무서운 존재라는 건 벨로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마족은 태생부터 마법을 타고나는 특별한 종족이었으니까.
개체마다 강하고 약하고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마족은 마법을 쓸 줄 알았다.
그리고 그중에는 타고난 재능을 갈고닦아 인간 마법사는 닿을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한 괴물 같은 마족도 존재했다.
하지만 그러한 마족도 결국에는 패배하지 않았던가?
비록 일부의 마족들이 살아남았다고 한들 그들이 위협이 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벨로스가 생각하기에 마족에 대한 경계는 말 그대로 경계하는 정도면 충분했던 것이다.
그를 대비하기 위해서 재능 좀 있다고 귀족을 제자로 둔다거나 비전 마법을 가르쳐 후계자로 삼는다는 건 과해도 너무 과한 행동이었다.
‘마족은 분명 강하지만 녀석들의 약점은 명확하니까.’
선천적으로 마법을 타고나고 이를 단련하기에 마족은 아주 강했다.
그러나 이 선천적인 강함 때문에 마족은 후천적인 강함을 경시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들에게는 전략 전술의 개념이 부족했고, 지휘 체계가 엉망이었으며, 단합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인간들이 머리를 싸매며 전략을 입안하고 훈련을 거듭한 것을 마족은 그저 정면에서 부수려고 들었다.
그런데도 인류를 고전케 한 점에서 마족의 무서움을 알 수는 있으나 결국 그게 마족의 한계였다.
벨로스는 그 이상의 마족을 생각하지 못했다.
태생적으로 너무나도 강한 존재가 가지는 어쩌지 못하는 약점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강인한 마족은 하나같이 오만했지. 그러니까 자신의 약점을 절대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벨로스의 몸에는 많은 흉터가 있었다.
원로가 되기 전 마족과의 전쟁에서 입은 상처였다.
본래라면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부상.
그러나 승자는 벨로스였다.
상대 마족이 마무리를 짓지 않고 여유를 부리는 우를 범하였고 그 틈을 노려서 따낸 승리였다.
벨로스는 자신의 이 경험이야말로 마족의 한계를 증명해 주는 좋은 사례라 여겼다.
‘역시 플레턴이 노리는 건 마법사 협회를 제 손아귀에 넣는 거겠지.’
벨로스가 보기에 플레턴은 상당히 큰 야망을 가진 마법사였다.
이상할 것도 없었다.
마법사 협회의 2인자에 가까운 위치로까지 올라갔는데 어찌 야망이 없겠는가?
1인자가 자신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면 또 모를까 협회장의 자리는 공석이었다.
수백 년 협회의 역사에서 그 자리가 채워진 전례조차 딱 한 번뿐이었고.
‘그렇게는 안 된다.’
애초에 협회장의 자리가 채워진 것 자체가 마족과의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
비록 아주 잠깐이었을 뿐 그 자리의 주인은 마족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벨로스는 이를 잘되었다고 여겼다.
원래 비었어야 할 자리가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어쩌다 채워진 것일 뿐.
협회의 균형과 발전을 위해서 협회장의 자리는 비어 있는 게 옳았다.
* * *
라닌 후작가의 분위기는 침통함 그 자체였다.
기껏 전방의 경계가 허술해지는 위험을 감수하고서 불러들인 병력이 고작 한 줌 정도의 적에게 참패했기 때문이다.
정예 기사단과 마법사들이 패배하자 남은 병사들은 겁을 먹고 그대로 달아나 와해되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 그나마 버텨주던 퍼렌 백작가마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도움을 요청할 상대조차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이제 라닌 후작이 할 수 있는 일은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유일했다.
“어찌 동부의 대영주인 내가 이런 처지가 될 수 있는가? 모두가 나를 비웃는다!”
대영주답게 결연히 최후를 맞이하려고 해도 그에게는 지켜야 할 명예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경계를 똑바로 하지 못해 후방으로 적들이 침투했고 그들은 라닌 후작의 명예를 시궁창까지 떨어뜨렸다.
그리고 이를 응징하기 위해서 나섰던 군대를 무참히 쓰러트리며 쐐기를 박았다.
훗날 라닌 후작의 이름은 남부 연합의 승리를 꾸며주는 무능한 영주로 남게 되리라.
“그런데 가신들 중 그 누구도 용기 있게 나서지 않는구나.”
라닌 후작의 말에 가신들은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들도 용기를 내고 싶었으나, 그러기에 상대는 너무나도 강했다.
라닌 후작가만이 아니라 동부의 모든 대영주들이 순식간에 무너졌을 정도로.
이제 와서 남아 있는 병력으로 남부 연합과 맞서겠다는 건 용기가 아니라 만용일 수밖에 없었다.
“정녕 나를 위해 나서줄 가신이 단 한 명도 없단 말인가?”
라닌 후작이 한탄하듯 소리치던 순간이었다.
“제가 나서겠습니다.”
불현듯 누군가가 손을 들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기다리던 상황임에도 라닌 후작은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동부에서 이름을 떨치던 그의 기사들조차 적의 상대가 되지 못했는데 지금 나선 상대는 절대 그들보다 낫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길모어, 네가 나서봐야 뭐가 달라지겠느냐?”
길모어는 그의 사생아였다.
그러나 장성한 아들이 많은 라닌 후작에게 있어 길모어는 한때의 실수를 증명하는 오점에 지나지 않았다.
“저는 무리지만 제 친구라면 가능합니다.”
“친구?”
길모어의 말과 함께 그의 뒤편에서 검은 그림자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 이건!”
라닌 후작은 두 눈을 부릅뜬 채 길모어의 뒤에 현현한 그림자를 응시했다.
그저 멀리서 봤음에도 그 두려움에 오금이 저렸던 존재.
인류가 최초로 단합하게 만든 괴물.
마족이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