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71화
VVIP 영주님의 품격 71화
71화
【 마족과 영웅 】
도발의 효과는 정말이지 끝내줬다.
지금껏 라닌 후작이 우리를 잡기 위해서 한 노력이라고는 추격대를 보내거나 마을에 매복하는 게 전부였다.
이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대처라 볼 수 있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전방의 경계가 제대로 이루어질까 의문이 들 정도로 많은 병력을 빼내서 우리를 포위하기 시작했으니까.
“적들이 오고 있습니다.”
로크의 말대로 능선 너머로부터 라닌 후작가의 병력이 새까맣게 몰려오는 게 보였다.
그렇다고 적들이 크게 손해 보는 짓을 하는 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나와 기사, 마법사들을 모두 잡을 수만 있다면 분명 이득이었다.
그런데도 지금껏 소극적으로 대처한 것은 마을 몇 곳을 약탈당하는 게 전방이 뚫릴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판단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한 번 떨어진 명성과 체면은 다시 세울 수 없으니까.
설령 라닌 후작이 남부 연합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이전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를 수군거리고 비웃는 이들이 산더미일 테니까.
이는 비단 그의 영지민들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귀족들 역시 포함되는 사항이었다.
라닌 후작의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이를 만회하려면 우리를 모두 소탕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거의 1천 정도는 동원된 거 같습니다.”
기동력이 빠른 우리를 포위하려면 넓은 범위에서 포위망을 형성해야 했다.
그만큼 동원되는 병력도 많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병사들로만 포위망을 만들면 기사와 마법사로 이루어진 우리에게 돌파당할 가능성이 크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라닌 후작 역시 비슷한 수준의 기사와 마법사를 동원해야 했다.
이는 사실상 적의 주력이 총동원된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일단 기다려라.”
우리는 포위망이 제대로 갖춰질 수 있도록 적당한 위치를 잡으며 적의 접근을 기다렸다.
혹시나 적이 포위망만 유지한 채 말려 죽이는 상황은 고려하지 않았다.
전방이 비어 있는 라닌 후작의 입장에서 시간을 오래 끌어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라닌 후작의 숨통을 조르게 될 것이다.
“목표 지점까지 거의 다 왔습니다.”
“카운트 시작해.”
“앞으로 10초. 9! 8!”
적들이 예정된 장소를 지나기 시작하자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그에 맞춰 마법사들이 일제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화륵! 화르륵!
마법사들의 앞으로 커다란 불길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3, 2, 1, 제로.”
그리고 카운트다운이 끝나자 곧장 적들을 향해 화염이 쏘아졌다.
적들은 태연했다.
마찬가지로 마법사들을 동원해서 막아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마나 실드가 펼쳐져 대다수의 공격을 막아냈다.
나나 자크론은 공격에 가담하지 않아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완벽하게 막지는 못했고 몇 개의 불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될 수 있었다.
퍼퍼퍼퍼펑!
폭음과 함께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
그 불길은 삽시간에 덩치를 수백 배로 키우며 넘실거렸다.
라닌 후작가의 병력이 디디고 섰던 길에 다수의 화약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뭐 하러 마법사들을 동행했겠냐고.’
후방에 침투하여 신속한 기동전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내가 무엇 하러 마법사들을 데려왔을까.
정 마법이 필요한 상황이라도 5티어 마법사인 내가 대부분 대처할 수 있는데.
게다가 적들이 무사히 포위망을 칠 수 있도록 행동반경을 넓히지 않았다.
이 모든 이유는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크아악!”
“사람 살려!”
불에 휩싸인 적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거대한 폭음에 쓰러지고 아군에게 깔리고.
엉망진창으로 무너져 갔지만, 전쟁에서 적에게 동정을 가져선 안 된다.
당연히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돌격!”
로크의 외침과 함께 기사들이 일제히 돌격을 개시했다.
원래대로라면 마법사가 요격을 하거나 기사가 나와서 상대했겠지만, 혼란에 빠진 라닌 후작가의 군대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200명도 되지 않는 내 병력이 1천에 달하는 적들을 학살하기 시작한 것이다.
‘포위망을 만든 게 실수지.’
말이 좋아서 1천이지 측면과 후방에 있는 대다수의 병력은 멀뚱멀뚱 포위망을 좁히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핵심은 정면에서 접근해 오던 기사와 마법사로 이루어진 정예들.
그 정예가 화약에 당해서 한꺼번에 휩쓸린 시점에서 이미 승패는 갈린 것과 다름없었다.
“고, 공격해라!”
그래도 지휘관 중 멀쩡한 이가 없는 건 아니었다.
기사들이 모두 돌격해 마법사만 남게 된 우리를 노리고 포위망을 만든 병사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연히 대비가 되어 있었다.
“파이어 월!”
자크론이 공격에 나서지 않은 건 마지막에 남게 되는 마법사를 보호하기 위해서였으니까.
넓게 화염의 벽을 두르고 실드를 펼치며 방어 태세를 취하자 달려들던 병사들이 주춤거렸다.
기사라면 웅크리고 있는 마법사를 죽일 수 있겠지만 보통의 병사들로는 어림도 없었다.
대량 학살에 능한 마법사는 병사의 천적이었으니까.
“이놈들!”
그래도 몇몇 기사들이 나서기는 했다.
그들은 승산이 없는 본대를 돕는 대신에 마법사들을 상대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마침내 내 차례였다.
“잘해 봐라.”
자크론은 내 앞의 화염만 거둬내서 통로를 만들어주었다.
내가 그 길을 따라 앞으로 나서자 당연히 달려들던 기사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네패스 자작이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말까지 타고 달려드는 기사가 여럿.
나는 프레드란 기사에게 죽을 위기에 놓였던 때를 떠올렸다.
지금의 상황은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직 내가 성장했다는 것 빼고는.
“마나 블래스트!”
콰콰콰쾅!
우선 적들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서 말부터 공격했다.
보이지 않는 공격에 말들이 고꾸라졌지만, 그것만으로 기사들을 제압할 수는 없었다.
금방 몸을 일으켜 두 발로 달려들었으니까.
재빨리 영웅 정보를 확인해 몰려오는 기사들의 수준을 확인했다.
그리고 나에게 위협적인 고티어의 영웅과 상대적으로 위협도가 떨어지는 저티어 영웅을 구별해 냈다.
‘고티어는 둘.’
3티어 영웅이 두 명이었고 나머지는 2티어 이하였다.
우선 3티어 영웅들의 발부터 묶었다.
고티어 영웅을 죽이는 건 지금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어느 정도 대미지를 주면서 움직임을 막을 수는 있었다.
그사이에 이번에는 넓은 범위의 마법을 사용해서 저티어 영웅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렸다.
“마나 블래스트, 윈드 불릿, 파이어 스톰.”
콰콰쾅!
반경 수십 미터를 초토화시키는 위력에 저티어 영웅들은 죽거나 빈사 상태에 빠졌다.
“무슨 마나가!”
그 광경에 고티어 영웅이었던 기사가 경악에 차서 소리쳤다.
이 잠깐 사이에 쓴 마나만으로 이미 원로급에 가까운 마나를 소모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난 마법 한 번에 담을 수 있는 최대한의 마나를 퍼붓고 있었다.
‘괜히 기사들을 다 내보낸 게 아니지.’
왜 자크론이 연합군과 싸울 때 적진 한복판에서 모습을 드러냈는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군이 휘말리게 하지 않으려면 마법사가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앞에 나서야 했다.
“잔챙이는 처리했고…….”
이제 다음으로 할 일은 3티어 둘을 처리하는 것뿐이다.
내가 마법을 준비하자 남은 기사들이 주춤거렸다.
마법사를 상대로 거리를 좁혀야 한다는 그 당연한 선택을 피할 정도로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일단 권유를 해보지. 항복할 생각 있나?”
난 그런 기사들을 향해 항복을 권유했다.
어쨌든 3티어 기사니까.
아무리 세력이 커졌어도 놓치기에는 아까운 인재였다.
루시우스나 다니엘처럼 젊은 기사는 아니지만, 충분히 제 몫을 할 수는 있으니까.
“웃기지 마라!”
하지만 기껏 권유한 게 무색하게도 이번에는 행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두 기사는 오히려 두려움을 무릅쓰고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도 두 번의 권유는 하지 않았다.
* * *
꿀꺽.
티아라는 긴장으로 고여 있던 침을 삼켰다.
그녀뿐만 아니라 자크론의 보호 아래에 있던 마법사들 모두가 눈앞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광경에 입을 열지 못했다.
분명 몇 배는 되는 병력으로 아군을 포위한 적들.
물론 화약을 매설하고 적을 끌어들였다지만 그것만으로 이런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건 전투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으니까.
‘대체 뭐가 이렇게 강하지?’
티아라는 아인과 직접 겨뤘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아인에게 허무하게 패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아인의 실력을 자신보다 높게 평가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패인은 삼중 마법을 다루지 못한다는 것.
딱 그 정도라고 생각했으니까.
아인의 마나량이 상당하다는 건 알아차렸지만 그것도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저 아인이 익힌 마법이 그러한 특색을 지녔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아인과 싸울 때 티아라는 전력을 내지 못했다.
그녀가 가진 비전 마법인 블리자드는 넓은 범위를 혹한으로 뒤덮는 살상 마법으로 상대를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쓸 수 없으니까.
그러니 정말 죽일 각오로 한다면 승패는 몰라도 아인에게 치명상을 주는 것 정도는 가능하리라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지금 눈앞에서 아인이 보여주고 있는 무지막지한 화력은 그녀의 혹한을 불태워버릴 정도로 엄청난 수준이었다.
‘마법사가 기사를, 그것도 여러 명을 정면에서 찍어 누른다고?’
당연한 상식을 부정하는 상황.
혼란스러워하던 티아라는 문득 자크론에게 눈길이 갔다.
그런 상식을 부정하기 위해서 힘을 기른 마법사가 바로 자크론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크흐흐.”
자크론은 이 충격적인 광경 앞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진짜 걸작이구나. 삼중 마법도, 내 불 마법들도 배운 지 몇 주나 지났다고 벌써 나를 뛰어넘었군.”
이 모든 게 불과 몇 주 만에 이루어진 성취란 이야기에 티아라는 말문이 막혔다.
하나의 마법을 배우고 능숙하게 쓰기 위해서는 적어도 몇 달의 수련이 필요했다.
물론 천재라고 일컬어지는 마법사들은 그 기간을 몇 주 이내로 단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인은 하나도 아니고 여러 마법을 그렇게 쓰고 있었다.
절대 이렇게 단시일에 가능한 게 아니었다.
‘나 같은 게 정말 천재가 맞을까?’
티아라는 처음으로 자신의 재능에 의구심이 들었다.
지금까지 마법사 협회에서 뛰어난 재능으로 주목받아 왔지만, 아인 앞에서는 새 발의 피였다.
그녀 역시 어느 원로의 제자로서 훗날 마족과의 싸움을 대비하기 위해 힘을 키우고 있었지만 이미 아인과의 격차는 비교가 불가능했다.
심지어 그 격차마저 따라잡기는커녕 한없이 벌어질 거 같았다.
‘이미 원로 수준.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는데?’
당장 자신의 스승과 아인이 붙는다고 해도 스승의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오히려 패배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여겨졌고.
실제로 원로의 배분인 자크론도 아인에게 패배해서 이곳에 있었으니까.
그래도 지금까지는 자크론이 마나를 많이 써서 어쩔 수 없이 패했다고 여겼지만, 이젠 아니었다.
자크론의 입에서 아인이 자신을 뛰어넘었다는 말이 나왔으니까.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마법사가 자신보다 위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 어지간해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크론처럼 프라이드가 높은 마법사는 더욱.
‘이 나라에 네패스 자작 수준의 마법사가 있기는 한가?’
이미 크레시안 왕국 전역을 통틀어서 제일의 마법사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나마 아인과 비견될 만한 마법사를 찾아보자면 그의 스승인 플레턴이나 혹은 한 사람 정도만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대를 떠올린 순간 티아라는 아인의 터무니없음을 다시금 깨닫고 말았다.
플레턴은 마족과의 전쟁에서 크게 이름을 떨쳤고 협회에서도 집행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원로였다.
협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최고 수준의 마법사란 말이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그런 플레턴 이상으로 추앙받는 영웅.
협회에 몸을 담고 있는 마법사라면 모두가 존경하는 위대한 마법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