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70화
VVIP 영주님의 품격 70화
70화
* * *
동부의 대영주는 모두 셋이었다.
데커드 백작과 퍼렌 백작 그리고 라닌 후작.
이들은 동부 내에서 각각 남쪽, 중앙, 북쪽의 영토를 지배하고 있었다.
세 대영주들의 싸움에서 우세를 점한 인물은 데커드 백작이었다.
라닌 후작과 퍼렌 백작이 먼저 충돌하도록 유도하였으며, 약화된 퍼렌 백작의 세력을 이번에 거의 집어삼킬 뻔했다.
만약 우리 남부의 군대가 오지 않았다면 그가 퍼렌 백작가를 흡수한 뒤 라닌 후작가와 일전을 치러 동부를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력한 승자였던 데커드 백작은 우리 남부의 기습에 목이 떨어졌다.
퍼렌 백작은 이미 세력이 크게 패퇴해서 저항할 여력이 크지 않았고.
이에 따라서 내 다음 목표는 자연스럽게 라닌 후작이 되었다.
“우리는 후방으로 들어간다.”
퍼렌 백작가를 마무리하는 일은 바이든 자작이 맡아서 진행할 것이다.
그동안 우리의 목표는 라닌 후작의 주의를 돌리는 것이었다.
퍼렌 백작이 무너지기 전에 라닌 후작이 퍼렌 백작을 도우러 나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 싸운다고요?”
내 명령에 티아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성채를 점령하고 우리는 불편하게 쪽잠을 잤다가 다시 전선에 나선 상황이었다.
그런데 내가 휴식을 주지 않으니 기겁할 수밖에.
기사들조차 어느 정도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데 마법사인 그녀는 이미 한계에 가까웠다.
“안심해라. 당분간 전투는 없을 테니까.”
나도 이미 기사나 마법사들의 체력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후방으로 들어가겠다는 전략을 짠 것은 아무런 소모 없이 적의 주의를 돌릴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쓰읍. 저 말을 듣고 피를 봤었는데…….”
내 이야기에 라이언이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그러고 보니 첫 내전에서 싸우지 않겠다고 말한 다음에 도미닉 남작가와 싸운 이력이 있었다.
“전투는 없다니까?”
나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라이언의 시선을 거두어내고 바이든 자작을 보았다.
내가 짜낸 전략을 모두 읽은 바이든 자작이 혀를 내둘렀다.
“경계를 피해 강 속으로 이동한다고? 이게 가능하오?”
“이미 직접 검증해 봤어.”
대답을 들은 바이든 자작이 질린 시선을 보냈다.
그가 생각한 검증의 방법이 내가 실제로 했던 검증과 달라서 나오는 반응이었다.
나는 게임에서 써먹은 전략이 여기서도 통용되는지를 확인했을 뿐이지만 바이든 자작은 내가 무식하게 직접 실험을 했다고 여길 테니까.
“그럼 남겨지는 병사들은 어떻게 할 계획이오?”
“문제가 있나? 보급로 확보와 데커드 백작령의 점령에 나서면 그만이지.”
“지휘는 누가 맡소?”
후방을 교란해서 시선을 끄는 건 별동대로 해야 할 일이었다.
당연히 본대가 비게 되고 이에 따라 지휘관의 존재가 필수 불가결했다.
바이든 자작이 내 군대를 지휘할 수는 없으니까.
“경험 많은 기사에게 맡겼지.”
그렇게 대답하며 방금 지목된 경험 많은 기사를 보았다.
터너 경이었다.
임시로나마 가문의 기사단장까지 맡았고 작은 마을을 하사받는 등 터너는 나에게 많은 존중을 받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출중한 기사들이 워낙 많아져서 변변한 활약은 없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는 요긴하게 쓰일 수 있었다.
대단한 실력이 필요한 일이 아니고 어느 정도의 경험과 확실한 신뢰가 있으면 충분하니까.
터너는 이 조건에 누구보다 부합하는 기사였다.
“말 안 해도 알 테지만 적의 후방으로 들어가는 건 위험한 일이오. 부디 조심하시오.”
“바이든 자작도 무탈하기를 바라지.”
인사를 마친 뒤 나는 기사와 마법사들을 데리고 본대에서 떨어졌다.
라닌 후작령의 후방까지 이어진 강줄기를 목표로 한 이동이었다.
* * *
바이든 자작 및 본대와 떨어져 후방으로 침투한 지 오늘로 열흘째였다.
사전에 바이든 자작에게 말했던 대로 나는 기사단을 주축으로 한 빠른 기동력을 살려서 라닌 후작가의 후방을 유린하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경계가 빼곡한 전방에 비해서 후방에는 별다른 병력이 없었다.
젊은이들이 징집되어 마을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노인과 아이, 그리고 여성들이 전부였으니까.
덕분에 우리가 나타나자 마을 사람들은 저항도 하지 않은 채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우리도 딱히 저항하지 않는 이들에게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딱 한 사람을 제외하고.
“우리에 대한 소문은 들었겠지?”
라이언에 의해 목에 칼날이 겨누어진 촌장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이미 이렇게 준비해 뒀습니다!”
촌장은 작은 창고에 쌓인 식량을 가리켰다.
당연하지만 열흘이나 후방을 휘젓고 다니는데 후방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우리의 존재를 모를 리 없었다.
만약 우리가 무차별적인 학살을 벌이고 다녔다면 목격자가 나오는 데 시간이 걸렸을지 모르나 열흘 동안 우리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내가 전투가 없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후방에 들어온 우리는 저항할 여력이 없는 마을을 약탈할 뿐이었으니까.
그 약탈의 강도 역시 아주 미미했다.
적의 후방으로 들어오면서 끊긴 보급을 채워줄 물자만 챙길 뿐이니까.
생필품 약간과 식량과 식수.
그마저도 최소한으로 챙겼다.
너무 과하게 약탈하면 오히려 기동력이 떨어질 테고 민심에도 악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다 우리가 점령해야 할 곳인데.’
우리 목표는 동부를 점령하는 것이지 약탈하고 내빼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약하게 약탈을 하면 라닌 후작의 주의를 끈다는 목적이 틀어질 가능성도 있었기에 별도의 행동을 더 요구했다.
“서명해라.”
라이언이 미리 준비해 둔 서약서를 꺼내자 촌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서약서에는 라닌 후작가가 아니라 남부 연합을 따르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것을 촌장의 이름으로 서명하게 되면 이는 곧 라닌 후작에 대한 반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거부권은 없었다.
눈앞에 무장한 기사만 백이 넘으니까.
젊은 사람도 얼마 없는 마을에서 저항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결심을 굳힌 촌장이 조심스럽게 이름을 적었다.
“다 됐습니다.”
“수고했어, 촌장. 다음에는 웃으면서 볼 수 있도록 하자고.”
라이언은 서명이 끝난 서약서를 챙기며 촌장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나 식량을 내줄 때와 달리 서약서를 내준 촌장의 표정은 쉬이 펴지지 않았다.
라닌 후작가의 보복을 우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로 인해 대답이 늦어지자 라이언이 눈을 부라렸다.
“웃으면서 보기 싫어? 험악하게 보고 싶은 거야?”
“아닙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이언이 단검을 매만지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촌장이 넙죽 엎드렸다.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악랄하게 촌장을 괴롭힌 라이언은 나에게로 서약서를 전달해 주었다.
서약서를 받아 든 다음에는 촌장의 서명이 제대로 적혀 있는지를 확인했다.
다른 마을을 습격했을 때 주변 마을 촌장의 이름을 모두 들은 터라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들었던 이름하고 다른 거 같은데?”
열흘 동안 피를 보지 않아서 그런가.
혹시나 했던 잔머리를 굴리는 촌장이 기어이 나오고 말았다.
미리 가져가라고 식량을 준비했을 때부터 어쩐지 이럴 거 같았다.
그래도 식량에 독을 타거나 하는 미친 짓은 아니었지만, 이름을 다르게 쓰는 정도는 들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어이, 촌장. 웃으면서 보자고 했잖아?”
내 이야기를 들은 라이언이 험악하게 인상을 쓰자 촌장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아, 아닙니다! 진짜 제 이름이 맞습니다!”
“촌장 이름은 아놀드라고 들었는데? 여기에는 테스라고 적혀 있군.”
촌장이 발뺌하자 서약서에 적힌 서명이 다른 것을 지적했다.
그러나 촌장은 버벅거림 없이 서둘러 대답했다.
“아놀드는 이전 촌장입니다! 몇 주 전에 죽어서 지금은 제가 촌장을 맡고 있습니다!”
이 말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곳 주민이 아닌 우리가 진실을 확인하려면 피를 볼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그렇게까지 행하기에는 꺼림칙했다.
결국 거짓말일 경우에는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협박을 남긴 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뭐, 가짜라도 하나 정도는 상관없기도 하고.’
어차피 서명을 받는 건 어디까지나 라닌 후작을 도발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후방에 들어온 우리를 무시한다면 그에 대한 주민들의 신뢰에 금이 가고 말 것이다.
이미 전방이 뚫려서 후방에 적이 침투한 것만으로 욕을 먹을 일인데.
그 적들이 약탈하고 심지어 충성 서약까지 받아가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라닌 후작의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그럼 다음에 또 보자고.”
라이언은 마지막까지 촌장에게 경고를 남겼고 우리는 그대로 마을을 벗어났다.
목적지는 가까운 마법사 협회의 통신 거점이었다.
통신 거점은 마법사 한두 명이 숙식하며 지내는 곳이라 일반적인 가정집보다 좁은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라이언하고만 동행하기로 결정했다.
“이리 오너라!”
“으헉!”
선두에 선 라이언은 문을 부술 것처럼 요란하게 걷어차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두 명의 마법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깥에 깔린 기사들의 모습에 당황하다가 라이언의 등장에 기겁하며 벽에 붙었다.
“여, 여기에는 왜?”
“통신 거점에 뭐 하러 왔겠냐? 전달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오는 거지.”
라이언의 대답에 마법사들은 벌벌 떨며 서로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다 이내 한 사람이 눈을 질끈 감은 채 소리쳤다.
“아군에 소식을 전달해 달라는 거라면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그건 협회의 방침에 어긋납니다!”
자신의 목숨을 건 용기 있는 외침이었다.
하지만 아무 쓸모가 없는 용기였다.
내가 이야기를 전달할 상대는 아군이 아니라 적군이었으니까.
“누가 아군에 소식을 전해달래?”
“네?”
“라닌 후작에게 전해라.”
촌장들의 서명을 받은 서약서를 꺼내자 마법사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제야 내가 무엇 때문에 거점을 방문했는지 깨달은 것이다.
“이 주변 일대는 이제부터 우리 남부 연합의 영지라고.”
* * *
“큰일 났습니다!”
라닌 후작은 다급한 얼굴로 들이닥친 마법사를 쏘아보았다.
요즘 들어서 들어오는 보고에 좋은 소식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퍼렌 백작과 싸울 땐 지지부진한 소모전만 지속했었고 그 퍼렌 백작의 영토는 데커드 백작에게 빼앗기게 생겼었다.
이것만으로도 큰일인데 느닷없이 남부 연합이라는 더 큰 적이 나타나서 데커드 백작을 죽이고 동부를 빠르게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렇듯 비장하게 일전을 준비해도 부족한 상황에 심지어 후방이 뚫려 적의 별동대가 들이닥치기까지.
끔찍한 보고가 연달아서 이어지고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지? 퍼렌 백작이 패배해서 목이라도 베였다는 소식인가?”
라닌 후작은 자포자기한 얼굴로 물었다.
남부 연합의 침공 사실을 알게 된 뒤 퍼렌 백작을 도우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후방에 침투한 적 때문이었다.
기사와 마법사로만 이루어진 정예는 병사들로는 막을 수 없었기에 전방에 있던 기사와 마법사를 후방으로 불러들여야만 했다.
만약 이를 무시하고 진격을 개시했다면 적 별동대는 라닌 후작 자신을 잡기 위해 움직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라닌 후작이 겁을 먹고 숨어 있기만 한 건 아니었다.
후방으로 돌아온 병력을 모아 어떻게든 침투한 적 별동대를 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적은 너무 신속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최소한의 무장과 식량만 챙긴 상태로 이동하고 있었기에 중무장한 병력으로는 뒤를 쫓을 수 없었다.
이에 마을에서 매복하는 전략을 세웠지만, 상대는 어떻게 알았는지 매복한 마을은 귀신같이 피해가고 있었다.
덕분에 라닌 후작의 체면은 상당히 손상되었다.
자신의 영지에서 적들이 활보하는데 전혀 손도 쓰지 못하는 무능한 영주가 되었으니까.
“아닙니다. 후방에 들어온 적들이 협회를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음?”
협회를 통해 전달되었다는 말에 라닌 후작은 당황했다.
동부 협회라고 해서 남부와 방침이 다르지 않았다.
당연히 중립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협회가 움직인 것이다.
“적들이 약탈했던 마을의 촌장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은 모양입니다.”
“뭐라고?”
라닌 후작은 당황했다.
충성 서약이라니?
영주인 자신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어떻게 영지민들이 충성 서약을 한단 말인가?
애초에 그럴 권리 자체가 없는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당연히 상대도 귀족인 이상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강제로 서약을 시켰다면 그 목적은 하나뿐이었다.
라닌 후작 자신이 가진 영주로서의 권위를 시궁창에 처박기 위해서.
상대는 자신을 철저하게 조롱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