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69화
VVIP 영주님의 품격 69화
69화
* * *
두두두!
거친 말발굽 소리가 평원을 울렸다.
말 위에서 창을 내세운 기사들은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적들을 보며 몸을 긴장시켰다.
기사들의 싸움이 결판나는 건 그야말로 일순간의 충돌이면 충분했다.
콰앙!
몸에 걸친 철갑과 말의 기동력을 합한 엄청난 충격에 기사들은 비명을 내질렀다.
이 경우 어정쩡하게 사는 쪽이 오히려 불운이었다.
차라리 즉사한 이들은 고통이라도 짧았을 테지만 부상을 입고도 살아남은 이들은 서서히 죽어가야만 했으니.
그리고 그마저 결코 평온하지 않은 죽음이었다.
히히힝!
말의 거친 투레질과 함께 발굽이 낙마한 이들을 짓뭉갰다.
철갑은 장식이 아니기에 한두 번의 충격은 버틸 수 있었으나 그들을 짓밟는 말의 숫자는 견딜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더구나 낙마의 충격으로 이미 뼈가 부러진 이들은 변변한 저항조차 불가능했다.
“선회하라!”
하지만 충돌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충돌에서 살아남은 기사들은 선회와 함께 다시 대열을 갖추어 이차 충돌을 시작했다.
이미 첫 충돌의 결과에서 승리를 확신한 이들은 용맹하게, 패배를 직감한 이들은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맞섰다.
“하하하!”
그때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승리를 자신한 데커드 백작가의 기사가 내지르는 웃음소리였다.
“누가 감히 나에게 맞서겠느냐!”
그는 철퇴를 휘두르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적들을 모조리 해치웠다.
세 명의 기사가 그에게 달려들었으나 모두 고혼이 될 뿐이었다.
“이럴 수가!”
동료들의 무력한 죽음 앞에 상대 가문의 기사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혼자서 셋을 죽이고도 전혀 지친 기색도 보이지 않는 괴력은 같은 기사가 봐도 악몽 같았다.
“사람이 어떻게 저리 강할 수 있단 말인가!”
“저놈은 괴물이다!”
두려움이 퍼지자 전투는 학살로 변했다.
기사들은 더 이상 용맹을 발휘하지 못했고 명예롭지도 않았다.
그들은 고삐를 돌린 채 제 목숨이라도 건지기 위해 달아났다.
“푸하하하!”
그런 적들의 모습에 철퇴를 휘두르던 기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찌 기사란 이들이 적에게 겁을 먹고 도망을 칠 수 있단 말인가?
창피도 이런 창피가 없었다.
“겁쟁이들! 나라면 적이 아무리 강해도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상대를 한껏 비웃어준 그는 돌아가는 전황을 살폈다.
선두를 맡은 그의 활약에 아군은 사기가 크게 올라 적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거 또 공을 세워버렸군.”
오늘도 또 주군의 치하와 함께 뭇 기사들의 질투를 사게 생겼다.
자신만 공을 세우고 있으니 다른 기사들의 눈길이 워낙 사나워 자제했어야 하는데 그의 실수였다.
“에틴 경!”
“응?”
그때 한 기사가 헐레벌떡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퇴, 퇴각해야 하오!”
“하아?”
갑작스러운 퇴각 소식에 에틴은 어이가 없었다.
이건 눈이 제대로 박혔다면 나올 수 없는 명령이었다.
이미 적들의 선봉을 꺾었고 휘하 부대도 적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만 있어도 승리가 굴러들어 올 텐데 갑자기 퇴각이라니?
“무슨 미친 소리인가? 퇴각이라니? 적들이 달아나는 게 안 보이는 건가?”
어디에 매복이라도 있다면 또 모를까 이곳은 매복할 장소가 없는 지형이었다.
“퇴각이 맞소! 적들이 후방을 공격하고 있단 말이오!”
“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후방이 공격받는다는 말에 에틴은 기겁했다.
사전에 알려진 적의 정보는 분명했다.
현재 전장에 적들은 지닌 전력을 몽땅 끌고 나온 상태였다.
당연히 후방이 공격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남부의 군대가 나타났소!”
“무슨! 남부의 군대가 어떻게?”
남부의 군대란 말에 에틴은 기겁했다.
그도 남부의 소식은 알고 있었다.
내전의 첫 시작은 동부였지만 의외로 가장 빨리 결판이 난 곳이 남부였다.
대영주이자 에틴이 내심 겨뤄볼 만한 상대라 여기던 카이로스 백작이 죽었고 마이어드 후작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이 승리를 거뒀었다.
하지만 당연히 동부의 대영주들도 이를 알고 경계하고 있었다.
만약 남부에서 군대가 움직이는 낌새가 보였다면 당연히 이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런데 적들이 후방에 나타날 동안 이를 모르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 남부의 군대가 움직였다는 보고는 들어온 게 없는데!”
낌새가 심상치 않기는 했다.
그래서 현재 동부의 대영주들도 애가 탄 것이었다.
남부가 다른 곳을 노린다면 좋겠지만 그럴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해서 동부의 대영주들은 빠르게 승부를 보기로 하고 서로 부딪쳤다.
그런데 그 결판이 나기도 전에 남부의 군대가 이미 동부에 도착했다니?
“진짜란 말이오! 주군께서 위험하오!”
“제기랄!”
상황은 이해되지 않았으나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동료 기사의 절박한 말에 에틴은 급하게 기수를 돌렸다.
그리고 곧 에틴은 그 말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화르르륵!
“이럴 수가…….”
후방에 있던 아군 진영이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가 충성을 바치는 데커드 백작도 남부의 병력들에게 포위당해 위험에 처한 상태였다.
“이 자식들이 감히!”
에틴은 철퇴를 굳게 움켜쥐고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이 전황을 뒤집지는 못해도 데커드 백작만큼은 구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척!
에틴이 접근하자 남부의 기사 한 명이 그를 가로막았다.
덩치도 작은 게 얼굴도 여자처럼 곱상해 별 볼 일 없는 기사 같았다.
에틴은 상대를 한 방에 죽이기 위해 철퇴를 휘둘렸다.
파악!
“커억!”
그러나 당한 건 상대가 아니라 에틴 자신이었다.
놀랍게도 상대 기사는 풀 플레이트 헬멧 아래에 작게 뚫린 구멍을 노리고 정확하게 검을 꽂아 넣었다.
그 칼날은 에틴의 눈을 꿰뚫었을 뿐 아니라 뇌까지 찔러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풀썩!
용맹하게 달려들던 에틴이 단 일검에 목숨을 잃자 뒤를 따르려던 기사들이 주춤했다.
에틴은 다소 재수 없기는 해도 실력만큼은 확실했던 이였다.
기사단장조차 에틴보다는 한 수 아래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그런 에틴이 단 일격에 당하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아무리 앞선 전투로 지쳤다거나 상대를 얕보았다는 식의 변명을 하려고 해도 이 패배는 너무 충격적이었다.
정식 작위를 못 받은 견습 기사도 어지간해선 일검에 당하지 않으니까.
더구나 상대는 전신을 무장한 에틴의 투구에 있는 빈 공간을 정확하게 노렸다.
말 위에서 움직이는 상대의 빈틈을 정확히 노리는 그 솜씨는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화르륵!
“헉! 위험해!”
그러나 놀라고 있을 틈은 없었다.
한데 모인 기사들을 향해 마법사들이 준비한 것으로 보이는 화염이 날아들었다.
기사들은 급하게 기수를 돌렸지만, 한발 늦은 상태였다.
콰콰쾅!
화끈한 열기가 일대를 뒤덮고 불이 붙은 말들이 미친 듯이 날뛰며 기사들을 튕겨냈다.
낙마한 이들은 그 충격과 옮겨붙은 불에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맙소사.”
위기에 처해 있던 데커드 백작은 자신을 구원하러 왔던 기사들이 맥없이 당하는 광경에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내 기사들이 이리 쉽게 당하다니! 남부 놈들은 죄다 괴물이라도 되는 것인가?”
애초에 남부의 병력이 이 자리에 있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동부의 대영주들은 남부의 빠른 안정을 경계하고 그들이 넘어올 만한 곳에 눈을 깔아뒀으니.
그러나 남부는 이러한 조치를 비웃듯이 흔적도 없이 뒤를 붙잡았다.
게다가 이 압도적인 무력.
동부의 패권을 눈앞에 뒀던 그의 정예 기사단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패했다.
자신이 자랑하던 최강의 기사 에틴은 단 일검에 죽었고 그의 기사단도 마법 몇 번에 사라지고 말았다.
스르릉.
놀라고 있을 틈도 없었다.
데커드 백작은 자신을 포위한 남부의 대군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를 지켜줄 이가 모두 죽고 홀로 남게 된 것이다.
“항복하겠소.”
데커드 백작은 서둘러서 항복했다.
이대로라면 자신의 목숨조차 보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남부에서 온 이들은 항복 선언에도 검을 거두지 않았다.
자신의 목을 노린 채 서서히 높이 치켜드는 검을 보고 데커드 백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이들은 애초에 항복을 받아줄 생각이 없던 것이다.
“안 돼! 그만둬라! 나는 귀족이다! 이 동부의 대영주 가문…….”
푸확!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이 몸과 떨어졌다.
남부의 군대는 그야말로 악몽 같은 힘으로 동부의 군대를 짓밟았다.
* * *
“이거 참.”
바이든 자작은 전황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직접 카이로스 백작가의 위용을 봤기에 그를 능가하는 힘을 생각하지 못했던 바이든 자작이었다.
하지만 아인은 그 이상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제일 경악스러운 건 남부의 군대를 들키지 않고 동부로 이동시킨 것이었다.
실질적으로 가장 어려울 것이라고 여겨진 부분이기도 했는데 아인은 이를 쉽게 성공시켰다.
‘감시자들을 그렇게 쉽게 무력화시킬 줄이야.’
사냥꾼들은 숲의 길에 밝은 이들로서 사실상 숲을 제집 드나들듯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아인과 소수의 별동대에게 별다른 힘도 쓰지 못한 채 몰살당했다.
덕분에 남부의 군대는 은밀하게 동부에 들어왔다.
‘게다가 성채까지 순식간에 함락시켰다.’
은밀함만 갖춘 것도 아니었다.
성벽을 한 방에 무너트리는 엄청난 파괴력의 마법으로 공성 병기 없는 공성전을 수행했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도 자신들의 움직임이 드러나지 않게 마법사를 제압했고, 심지어 마법사로부터 정보를 캐내는 데 성공했다.
이 모든 활약 덕분에 동부의 대영주들이 충돌할 때 그 뒤를 노릴 수 있었던 것이다.
바이든 자작은 이제야 왜 왕가의 전력까지 갖췄던 자신과 레일리 왕녀가 아인에게 뒤처질 수밖에 없었던 건지를 이해했다.
‘설마 이 정도까지 해낼 줄이야. 정말로 터무니없는 자로군. 네패스 자작.’
어리다고 얕보지는 않았다.
이미 아인을 얕보는 마음은 옛적에 사라진 지 오래였으니.
그러나 젊은 영웅이라 칭송받는 아인이라도 과연 남부 연합의 맹주에 어울릴지는 의문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활약에서 바이든 자작은 그러한 의문을 떨쳐낼 수 있었다.
이 전투의 성과를 보고한다면 남부에 남아 있는 영주들도 같은 판단을 내릴 것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아인을 따르는 게 아니라 그것이 정답이기에 아인을 따르는 것이라고.
“네패스 자작, 승리를 축하하네. 놀라운 활약이었어.”
바이든 자작은 최대한 밝게 웃으며 아인에게 다가갔다.
레일리 왕녀와의 혼인식에 대한 태도를 문제 삼아 한 번 부딪쳤지만 나쁜 감정을 남겨서 좋을 게 없었다.
아무리 자신 역시 남부에서 힘 좀 쓰는 영주라고 해도 아인에게 닿을 수는 없었으니까.
‘점령한 동부의 영지 대부분이 그의 소유가 될 테니까.’
깃발은 연합의 이름으로 꽂히겠지만 어차피 누군가에게 양도해야 할 곳이었다.
여기에는 남부에 남은 귀족들보다는 동부에서 직접 싸운 귀족들의 공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귀족들 중에서 아인은 이미 제일이라고 칭해도 될 만큼의 활약을 한 상태였다.
대영주인 마이어드 후작조차 없는 상황에서 아인이 동부를 집어삼키는 데 이견을 제시할 영주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저 콩고물이라도 받기 위해서 아인에게 잘 보이려고 할 뿐.
“그래서 말인데 오늘 밤은 축배라도…….”
“그건 거절하도록 하지. 바이든 자작.”
바이든 자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인이 부정적인 대답을 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전투를 끝낸 아인 휘하의 기사단의 행동 때문이었다.
그들은 최대한 가볍게 무장을 챙긴 채 아인의 곁으로 다시 모여들었다.
사전에 어떤 지시를 받기라도 한 것처럼.
“오늘 밤은 적 후방으로 침투해야 하거든.”
“무슨?”
“다음 전략이다.”
아인은 양피지 한 장을 툭 던져줬다.
바이든 자작은 그것을 받아 내용을 읽고는 당황했다.
“이런 건 논의한 적이 없지 않은가?”
“전장의 상황이 이렇게 잘 풀릴 줄은 나도 몰랐으니까. 그렇다고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아인의 대답에 바이든 자작은 말문이 막혔다.
아인은 이 승리에 전혀 만족하지 않고 있었다.
정말로 동부를 다 집어삼킬 때까지 멈출 생각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아인은 이미 크레시안 왕국 전역을 넘보고 있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