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67화
VVIP 영주님의 품격 67화
67화
* * *
“지금 이곳에 두 명의 젊은 남녀가 서 있습니다.”
레일리 왕녀와의 약혼식이 시작되었다.
남부 연합의 영주 전원과 약혼식 진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만이 참석한 자리였다.
그리고 시간 역시 매우 짧았다.
물론 정식 혼인이 아닌 약혼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할 테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짧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주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애초에 규모를 크게 늘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레일리 왕녀의 존재는 비밀이었고,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현재 다른 지역의 영주를 초대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남부 연합의 영주 전원이 참석한 것만으로도 사실 연합에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셈이었다.
“부디 신께서 두 사람의 앞을 밝게 비춰주시기를 바랍니다.”
예물 교환과 몇 가지 의식을 마친 뒤 신관의 축사가 이어졌다.
이후 영주들이 가볍게 덕담을 건네는 것이 약혼식의 마무리였다.
그렇다고 약혼식 이후로 둘만의 시간을 보내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약혼식이 끝나자마자 나는 불편한 예복 대신에 루안이 만들어준 성천의 레비아탄을 착용했다.
그리고 나의 곁에는 무장한 기사들이 집합했다.
하루조차 온전히 사용하지 않은 채 바로 다음 일을 하러 떠나려는 것이다.
“모두 준비는 되었겠지?”
“물론입니다.”
이번 임무에 참가하는 기사의 숫자는 스물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그저 숫자로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전원 2티어 이상.’
내가 보유하고 있는 최고의 기사들.
그 전부가 이번에 투입되기로 되어 있었다.
또 마법사들도 2명이 합류했다.
그중 한 명은 자크론이었다.
“내가 이런 일에도 나서야 하는 것이냐?”
“제자를 위해서 힘 좀 써주시지요.”
우리의 목적은 남부와 동부의 경계에 있는 숲에 들어가 버텐의 매라는 부대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성공적인 동부 침략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기에 정예 중의 정예를 쓰는 게 당연했다.
“하, 은밀한 일은 내 취향이 아니란 말이다.”
자크론이 툴툴거리는 이유가 있었다.
이번 임무에서 우리는 숨어 있는 적을 제거해야 했다.
당연히 위치가 드러날 만한 행동은 할 수 없었는데 자크론의 특기는 불 속성 마법이었다.
숲에 불을 지르게 될 경우 들키는 게 당연하니 불 속성 마법의 사용은 완전히 금지된 상태였다.
이뿐만 아니라 다른 마법 역시 감지될 위험이 있는 상황에서는 쓸 수 없었다.
“네패스 자작.”
열심히 자크론을 달래서 출발하려는데 레일리 왕녀가 나를 불렀다.
그녀 역시 예복이 아니라 평상시의 복장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당신이 강하단 건 알지만 부디 무사할 수 있도록 행운을 빌게요.”
“아, 감사합니다.”
형식적인 행동이든 진심이든 그녀의 배웅은 나쁘지 않았다.
약혼식이 날치기로 진행되었다는 이유로 아랫사람들 사이에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질지도 모르니까.
진실을 아는 영주들이야 그런 걸 신경 쓰지 않겠지만 기사들은 동요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이런 그녀의 행동은 나에게 꽤 긍정적이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레일리 왕녀에게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리는데 갑자기 라이언이 나를 가로막았다.
그리고 무언가 강렬한 열망이 느껴지는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영주님, 그게 전부입니까?”
라이언은 마치 호소하듯이 물었다.
정말 이게 최선이냐고.
그러나 나는 라이언이 도대체 뭘 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이지?”
“왜,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전장으로 떠나기 전에 연인이 안심할 수 있도록 해줘야지요.”
“그러니 뭘?”
“찐한 포옹과 입맞춤! 정석 아닙니까?”
라이언이 엄지를 들어 올렸다.
“사실 제대로 하려면 침대로 가서 밤새도록 찐하게 보내야 하는데 시간도 그렇고 허리에 무리가 갈지도 모르니 지금은 아쉬워도 그 정도가 최선…….”
“로크 경.”
“조지겠습니다.”
아까운 전력 하나를 잃었다.
임무에 나서기도 전에 손실이 일어난 건 유감스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상대가 라이언인 것을.
“그럼 출발하지.”
성을 떠나는 동안 난 주변의 분위기를 확인했다.
어쨌든 약혼식이 치러진 건 사실이었고 그에 따라서 병사들에게 술과 고기가 내려졌다.
그러나 술은 극히 적은 양에 불과했다.
우리가 떠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바로 진격할 것이기에 그저 목을 축일 정도로만 나눠주었으니까.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병사들은 술로 피로를 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젊은 병사들의 모습이 계속 눈에 걸렸다.
* * *
버텐의 매는 오우거를 잡았다는 전설적인 사냥꾼 버텐을 동경하는 사냥꾼들의 모임이었다.
하지만 마족과의 전쟁으로 동부의 치안이 불안정해지자 상황이 변했다.
숲에 익숙한 도적을 물리치기 위해서 사냥꾼들이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솜씨 좋은 사냥꾼이 많았던 버텐의 매는 동부에서 가장 주목받는 집단이 되었다.
이에 일확천금의 꿈을 꾸게 된 버텐의 매는 용병 집단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마족과의 전쟁이 끝나고 전쟁에 나갔던 군사들이 돌아오자 애써 키워놓은 입지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잘 훈련되었을 뿐 아니라 무장 상태도 좋은 군대는 도적 따위가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내전이 일어나면서 버텐의 매에게도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그들은 동부의 대영주인 데커드 백작에게 고용되어 내전에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잠깐에 불과했다.
소규모 영주들이 사라지고 대영주들만이 남게 되자 버텐의 매가 활약할 기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수천의 군대가 드넓은 전장에서 맞붙을 때 사냥꾼인 그들은 별다른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이에 데커드 백작은 버텐의 매에게 남부의 군대를 감시하라는 의뢰를 내주었다.
버텐의 매는 이 의뢰가 달갑지 않았다.
나타날지도 모르는 적들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지루한 의뢰일 뿐 아니라 이전보다 보수가 매우 짰기 때문이다.
“흐아암.”
풀벌레 소리만이 간간이 들리는 고요한 숲속에서 젊은 사냥꾼은 늘어지게 하품을 내뱉었다.
“남부 놈들 때문에 이게 뭔 고생인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지루한 의뢰에 대한 불만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버텐의 매는 이 상황을 최대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적어도 당장 그들의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았고 보수가 짜기는 해도 돈이 들어오고는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당히 놀고먹으며 한 몫 챙기려고 했으나 남부에서 연합이 결성되며 일이 틀어졌다.
결성된 남부 연합은 빠르게 남부를 안정화하고 대규모 군대를 결집했다.
그들이 군대를 모은 오래된 성은 중부로도, 동부로도 갈 수 있는 장소였기에 버텐의 매는 신경이 곤두섰다.
이에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숲에서의 근무가 시작된 것이다.
“뭘. 이게 원래 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좋은 기회 아니냐?”
은신지에 몸을 숨긴 선배 사냥꾼은 후배의 투정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용병 집단으로 바뀐 버텐의 매에서 거금을 손에 쥔 적이 있었다.
수년 동안 사냥꾼으로 벌어온 금액과 비슷한 수준의 돈을 용병으로 활약한 몇 달 만에 벌었을 때의 희열.
이제 하찮은 짐승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만약 놈들이 우리에게 와주기만 한다면 데커드 백작이 우리에게 약속한 금액이 얼마인데.”
데커드 백작은 어리석지 않았다.
그는 돈을 짜게 주면 버텐의 매가 감시를 소홀히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포상금을 내걸었다.
덕분에 선배 사냥꾼은 지금 상황을 무척이나 반기고 있었다.
이번 일은 일개 도적을 잡는 것과는 무게가 달랐으니까.
남부의 침공을 확인하고 그들을 일차로 저지하는 역할.
거기에 약속된 포상금은 남은 인생에서 돈 걱정을 완전히 지워줄 게 분명했다.
“에이. 설마 동부로 오겠습니까? 원래 이런 건 약한 세력부터 공격하기 마련입니다. 무조건 중부로 갈 겁니다.”
젊은 사냥꾼은 남부 연합의 목표가 중부라고 믿고 있었다.
그럴 만한 근거가 있었다.
중부의 세력이 동부보다 월등히 약하기 때문이다.
중부의 주축은 지금은 힘을 못 쓰는 친왕실파 귀족이었고 그들은 중부의 대영주 타이온 백작과 맞서느라 다른 지역을 경계할 여력이 없었다.
반면 자신들 동부는 대영주들의 싸움과 별개로 이렇듯 남부를 제대로 경계하고 있었다.
남부 연합이 바보가 아니라면 손쉬운 먹잇감을 앞에 두고 자신들을 노리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놈들이 우리 동부로 오면 제가 선배님께 50라페를 드리겠습니다.”
젊은 사냥꾼이 내기까지 걸자 선배 사냥꾼은 인상을 썼다.
그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적들이 와주기를 바랐지만, 확실히 중부를 노리는 게 더 나아 보였기 때문이다.
“제발 우리한테 와줬으면 좋겠는데.”
선배 사냥꾼의 중얼거림에 젊은 사냥꾼이 피식 웃었다.
“흐흐. 그럴 리 없다니까요?”
그리고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피잇!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번쩍였다.
젊은 사냥꾼은 몸에서 느껴지는 화끈거리는 통증에 당황했다.
“어?”
갑자기 자신의 코앞에 나타난 시커먼 옷을 뒤집어쓴 누군가.
상대의 손에는 검이 쥐어져 있었고 그 검에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뒤늦게 젊은 사냥꾼은 자신이 상대에게 베였음을 인지했다.
상황은 선배 사냥꾼 역시 다르지 않았다.
푸푸푹!
세 자루나 되는 칼날이 그의 급소를 파고들었다.
선배 사냥꾼은 그 통증에 눈을 부릅떴다.
아까까지만 해도 들려오던 풀벌레 소리가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그런데 후배랑 이야기를 나눈다고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서걱!
단말마를 남길 새도 없었다.
습격자들은 순식간에 두 명의 사냥꾼을 도륙했다.
“기껏 은신해 놓고 잡담이나 나누고 있다니.”
로크는 자신의 발치에 놓인 사냥꾼들의 시신을 보며 혀를 찼다.
노련한 용병이었던 경험 덕에 로크는 사냥꾼들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어두운 밤과 숲이라는 지형.
밤눈이 밝은 사냥꾼들에게 전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사냥꾼들은 자신들의 장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어설픈 행동은 숙련된 사냥꾼이 아니라 경험 없는 용병의 것이었다.
“사냥꾼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었군.”
“덕분에 우리는 무사하니 된 거 아닙니까?”
라이언이 너스레를 떨었다.
확실히 이들이 제대로 된 사냥꾼이 아닌 덜떨어진 용병이 된 덕분에 일이 쉬워졌다.
기껏 함정도 설치해 놓고는 관리를 제대로 안 했는지 망가졌거나 위치가 드러난 상태였다.
덕분에 기사들은 함정을 피해서 적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렇기야 하지. 그나저나…….”
로크는 자신과 함께 나선 기사들을 돌아봤다.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함정을 피해서 접근해야 하기에 기사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자들이 나선 상태였다.
젊은 사냥꾼을 벤 것은 릴리아나였고 그녀의 실력이야 말할 필요가 없었다.
라이언 역시 노련한 용병 출신으로 언제나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
그러나 다른 두 사람.
이들은 이번에 새롭게 아인의 휘하에 들어온 기사들로 정확한 실력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보여준 모습으로 봐서 절대 라이언의 아래가 아니었다.
‘내 위치도 슬슬 위험한 건가?’
치고 올라오는 릴리아나는 그래도 명확한 약점이 있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검술 실력만 출중할 뿐 지휘나 전술까지 뛰어나지는 않았으니까.
기사단을 휘어잡을 카리스마가 부족해서 설령 자신보다 강해지더라도 기사단장이 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이 둘은 실력도 출중하면서 젊고, 그러면서도 노련한 모습을 풍겼다.
로크는 만일 이 둘이 자신보다 유능하다고 판단되면 자신의 기사단장 자리를 내줘야 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용병 출신인 자신이 아인에게 중용된 이유 역시 오직 실력 덕분이었으니까.
‘솔직히 마냥 기쁘지만은 않네.’
실력 좋은 기사가 늘어나는 건 아인에게 있어서는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로크 자신은 기뻐할 수 없었다.
기사단장이 되어 100명도 넘는 기사들을 호령하는 이 자리를 영영 잃을 것만 같았으니까.
‘영원히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고는 알았지만, 이토록 빨리 꿈에서 깨어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인의 아래에서 종군한 세월이 아직 1년도 되지 못했다.
로크는 새삼 아인의 성장이 무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