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66화
VVIP 영주님의 품격 66화
66화
【 동부 원정 】
남부 연합의 영주들이 다시 집결했다.
동부 경계와 인접한 낡은 성을 집결지로 삼은 영주들은 총합 6천의 군대를 준비시켰다.
내가 이끌고 온 병력이 절반을 차지했고 나머지 절반을 바이든 자작과 중소 영주들이 채웠다.
단 마이어드 후작을 비롯해 일부 영주들은 최소한의 호위만 동행했을 뿐 군대를 데려오지 않았다.
그들의 역할은 동부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남부를 지키는 것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즉 이 자리에 모인 6천은 남부 연합의 전력이 아니라 다소의 여력을 남겨둔 군세였다.
“이 정도라면 남은 병력을 합쳐 거의 1만은 되겠군.”
“카이로스 백작가가 무너졌는데도 이만한 규모가 나올 줄은 몰랐소.”
생각보다 많은 병력에 영주들은 반색했다.
나도 솔직히 이만한 규모가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내전이 빨리 끝난 영향인지, 죽음보다는 항복을 선택한 이가 많았는지.
하지만 어떤 이유가 있었든 이들이 남부의 마지막 병력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이제 아무리 쥐어짜려고 해도 남부에서 더 이상의 병력은 보충될 수 없었으니까.
‘실제로 연령대도 많이 내려갔어.’
병영을 가로지를 때 아인의 몸과 동갑이거나 그보다 앳되어 보이는 외모를 가진 이들을 상당수 찾아볼 수 있었다.
갓 성인이 되었거나 성인이 되지도 않았으면서 군대에 들어온 신병들.
아마 내전으로 인해 먹고 살길이 없거나 영주들의 선전에 눈이 멀어 입대했을 것이다.
‘대부분은 금방 죽고 말겠지.’
그들에게는 안된 이야기지만 영주들은 신병을 아껴줄 생각이 없을 것이다.
미숙한 신병보다야 숙련된 병사의 가치가 훨씬 크니까.
그렇기에 신병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건 전투에 나설 영주들의 재량뿐이었다.
‘어깨가 무거운데.’
연합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나와 내 휘하의 병력만 챙기면 되었으나 연합 이후로는 그 부담이 더 커지고 말았다.
공식적으로도 부맹주이고 실질적으로 남부를 이끌 사람은 나였으니까.
“네패스 자작.”
한참 긴장하고 있는데 바이든 자작이 나를 불렀다.
공식적인 내 지위는 부맹주였고 같은 자작의 작위를 가진 바이든 자작은 여전히 나에게 말을 높이지 않았다.
나도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괜히 바이든 자작이 나에게 고개를 숙이거나 말을 높이는 게 남들에게는 더 이상하게 보일 테니까.
“약혼식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는가?”
“그럭저럭.”
질문에 대답하는 내 기분은 심드렁해졌다.
열심히 예물을 준비했지만, 이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내 관심사는 오직 동부뿐이었다.
어차피 약소하게 치러지는 약혼식이었고 레일리 왕녀에 대한 배려보다는 1명이라도 병사를 더 살릴 전략이 중요하니까.
게다가 이는 남부 연합 전체의 목숨이 걸린 일인데 바이든 자작은 레일리 왕녀 개인의 혼사가 더 궁금했던 모양이다.
‘설마 여기서 약혼식에 관해 물어볼 줄은 몰랐는데.’
대영주파 귀족이었음에도 바이든 자작은 레일리 왕녀를 굉장히 신경 쓰고 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나 싶을 정도로.
“그 무슨! 아무리 간소하게 치러질 약혼식이라도 일국의 왕녀 저하와 하는 건데…….”
마치 자신이 왕녀의 아버지라도 되는 양 바이든 자작이 팔짝 뛰며 화를 냈다.
그런 바이든 자작을 어이없이 바라보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들 다 떠나보내고 많이 적적했던 모양이군.”
그냥 찔러본 말이었는데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바이든 자작이 몸을 떨었다.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정말 이거였군.’
바이든 자작은 자식들이 제법 많은 유복한 가정을 꾸렸으나 지금은 혼자였다.
각자 혼처를 찾아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이든 자작은 레일리 왕녀에게 과할 정도로 신경을 써온 것이다.
‘이래서 마이어드 후작이 바이든 자작에게 레일리 왕녀를 맡겼던 건가?’
마이어드 후작이 레일리 왕녀를 여러 귀족 중 바이든 자작에게 보낸 이유도 알 거 같았다.
외모를 숨기기에도 좋지만 이렇게 신뢰할 만한 이유가 따로 있던 것이다.
“바이든 자작. 왕녀 저하는 그대의 아이가 아니야. 그리고 이제는 내 약혼녀지. 남의 약혼녀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 어떤 형태로든 불쾌하군.”
하지만 그게 내가 바이든 자작을 배려해 줘야 할 사정은 아니었다.
이전까지라면 몰라도 이제부터 레일리 왕녀는 나의 사람이 되니까.
마이어드 후작만 신경 써도 쉽지 않은데 바이든 자작이 장인어른 행세하는 것까지 두고 볼 수는 없다.
“크흠!”
차가운 말에 바이든 자작은 불쾌하게 반응했으나 반박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바이든 자작을 내쫓은 다음에야 나는 원래 만나고 싶던 마이어드 후작을 찾을 수 있었다.
마이어드 후작은 게일 남작을 비롯해 몇몇 영주들과 함께 지도를 확인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인데도 괜히 안심이 되었다.
마이어드 후작이 바이든 자작처럼 레일리 왕녀를 신경 쓰고 있었다면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답답했을 것이다.
“후작 각하께 인사드립니다.”
“왔는가. 이리로 앉지.”
영주들은 마이어드 후작의 곁에 내 자리를 비워주었다.
부맹주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형식적으로 감사를 표하고 자리에 앉았다.
넓은 테이블 위에 펼쳐진 지도에는 남부와 동부의 경계가 그려져 있었다.
“일이 꽤 곤란하게 됐네.”
지도를 살피던 마이어드 후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쁜 조짐이었다.
“곤란하게 됐다니요?”
“이곳.”
영문을 묻자 마이어드 후작은 지도의 정중앙에 그려진 숲을 가리켰다.
동부와 남부의 경계 면적 대다수를 차지하는 거대한 숲이었다.
“동부의 대영주들이 서로 싸우느라 여념이 없을 줄 알았는데 경계를 삼엄하게 배치했다더군.”
본래라면 저 숲은 그저 동부와 남부의 경계일 뿐,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껏해야 숲의 동부 출구 쪽에 작은 성채가 있는 게 전부.
그런데 여기에 변수가 생긴 것이다.
“우리가 숲을 이용하려고 한다면 움직임이 바로 발각될 테지.”
남부 연합의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빨리 파악하기 위한 행동으로 보였다.
우리로서는 확실히 곤란했다.
대규모 군대가 숲을 통과하려면 시간이 지연될 수밖에 없으니까.
그 과정에서 들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숲을 이용하지 않는 것도 힘든 게 경계의 대부분을 숲이 차지했고 그나마 뚫린 곳은 개활지였다.
감시병이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의 이동이 바로 동부에 알려질 것이다.
수천이나 되는 군대의 움직임은 숨기고자 해서 숨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확실히 들키면 곤란하겠군요.”
우리의 움직임이 확인되는 순간 동부의 대영주들은 싸움을 멈추고 연합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면 남부와 동부의 전면전으로 상황이 변하여 최대한 신속하고 적은 피해로 동부를 점령하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
“숲을 이용하지 않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다른 곳으로 돌아가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리고 숲이라고 하지만 이곳은 군대가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큰길이 나 있었다.
역사적으로도 군대가 자주 통과했던 숲이었고.
“그러니 우리는 숲에 있는 대영주들의 눈을 막아야 합니다.”
“그 방법이 문제 아닌가?”
내 뜻을 이해한 마이어드 후작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숨어서 감시하고 있을 적들을 보고를 올리기 전에 제압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제가 하겠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직접 가서 숲에 있는 동부 대영주들의 눈을 제거하겠습니다.”
“그게 가능한가?”
“저라면 가능합니다.”
근거 없는 확신이 아니었다.
다른 영주라면 절대 불가능하지만, 나에게는 숨어 있는 감시자들을 찾아낼 방법이 있었다.
“혹시 증명해 줄 수 있나?”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보여주게.”
마이어드 후작의 요청에 따라 내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 기사 5명을 불러냈다.
그들은 이유도 모른 채 명령에 따라서 아무 막사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
잠깐 시선을 돌리고 있던 난 모두 숨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주변을 돌아가며 손짓했다.
“여기, 여기, 여기, 그리고 저곳에는 2명이 같이 숨었습니다.”
총 4곳을 지목하자 영주들의 입이 벌어졌다.
기사들이 어느 막사에 들어가는지 눈으로 확인하지도 않은 내가 그들의 위치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한 게 아니라 막사 바깥에서 다 찾아냈다.
“내부를 살펴보지도 않고 어떻게?”
“협회의 마법사들이 가진 마법입니다.”
이는 일전에 자크론이 말한 문서를 찾는 마법의 응용이었다.
그 마법은 특정한 글자나 단어를 가진 문서를 불러내는 마법이었다.
마법사의 역량에 따라 범위에 제한이 있지만 난잡한 문서 더미나 서고에서는 확실하게 원하는 책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를 응용했다.
“특정 문양이나 상징이 있는 복장을 하고 있다면 찾지 못할 이유가 없지요.”
5명의 기사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모두 같은 가문 출신의 기사로서 같은 문장을 갑옷 한쪽에 새겨뒀다는 것.
난 그 문장을 찾아내기 위해 탐지 마법을 사용했고 5개의 흔적이 나온 걸 감지했다.
“게일 남작, 그대라면 숲에 있는 자들의 소속을 알겠지?”
“물론입니다. 그들은 버텐의 매라고 불리는 감시자 부대입니다. 상징으로 이런 문양을 갖고 있지요.”
게일 남작은 바로 동부에 숨어 있는 이들이 지닌 문양을 그려냈다.
“그런데 네패스 자작님. 저도 이런 마법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사람을 찾는 데 쓰는 건 불가능하다고 들었습니다만…….”
게일 남작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확실히 이런 형태의 응용을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이건 엄연히 말해서 원하는 대상을 찾을 수 있는 탐지 마법이니까.
매복하고 있는 적을 찾을 때 이보다 유효한 수단은 없었다.
“아, 그건 단순한 이유야.”
그러나 이 마법에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를 중심으로 레이더가 퍼져 나가듯이 전 범위에 마나를 퍼트려서 목표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
특정 지역의 마나만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마나 파장과는 소모되는 마나의 규모가 달랐다.
어지간한 마법사는 기껏해야 방 하나 정도의 범위도 겨우 커버하리라.
그러나 나는 그 어지간한 마법사에 속하지 않았다.
“마나가 엄청 많이 소모되거든. 하지만 나한테는 아니지. 이 정도 마나는 차고 넘치니까.”
원래라면 좁은 범위에 한정될 수밖에 없는 마법을 광역으로 만들 만큼 마나가 많으면 된다.
내 마나는 처음부터 5티어 마법사로 시작하면서 압도적인 수준이었지만 지금까지 수련하면서 그 양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물론 단순한 수련만으로 이런 게 가능한 건 아니었다.
‘상점 덕분이지.’
상점에는 영웅의 승급권만 파는 게 아니었다.
도안과 장비 재료들도 널려 있었고, 사용하면 영웅의 능력을 강화해 주는 아이템이 수두룩했다.
그리고 그중에는 히든 능력치를 올려주는 아이템도 있었다.
승급권에 비해서는 한참 저렴하게 판매되고 있는 이 아이템을 통해 나는 여타의 마법사들과 비교할 수 없는 마나를 가질 수 있었다.
사실 히든 능력치를 올려주는 아이템의 존재는 일찍부터 알았지만, 지금까지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예전과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허. 이런 일도 있다니.”
게일 남작은 너무 당황해서 몸까지 휘청거렸다.
그가 이렇게 열렬히 반응하는 건 전혀 이상한 행동이 아니었다.
본래라면 당연히 아무것도 아닌 그저 편리할 뿐인 마법이 한순간에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마법이 되었으니까.
나를 상대로는 기존에 있던 상식에 입각한 전략들이 들어맞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작 이 정도에 놀라면 곤란했다.
‘앞으로 더할 텐데.’
이전까지 나 자신에게 보주를 투자한 일은 딱히 없었다.
효율이 전혀 안 나왔으니까.
제한적으로만 구할 수 있는 보주를 반쪽짜리 마법사인 나에게 쓰는 건 낭비 중의 낭비였다.
그래서 내가 아닌 다른 영웅들을 육성해야만 했고.
하지만 마법사로서 내가 제 몫을 하게 되었을 때부터 이야기가 달라졌다.
이제 투자했을 때 가장 큰 효율을 볼 수 있는 대상은 나 자신이었으니까.
지금까지 오는 게 어려워서 문제였지 이제부터는 그야말로 등에 날개를 단 것처럼 성장할 기반이 마련되었다.
잠재력으로 최고라 평가받는 마법형 영웅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