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65화
VVIP 영주님의 품격 65화
65화
* * *
“완전히 엉뚱하게 쓰셨는데요.”
“응?”
다음 날 루안이 나를 찾아왔다.
하루 쉰 걸로 피로가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제대로 씻었기에 사람 냄새는 충분히 나는 상태였다.
난 루안에게 갑옷의 성능에 대해 이야기하며 칭찬했는데 막상 내 이야기를 들은 루안은 뚱한 얼굴이었다.
“영주님은 마법사가 아니십니까? 그 갑옷도 마법사를 위한 겁니다. 창칼이나 막으라고 만든 게 아니란 겁니다.”
“그 말은?”
“마법으로 공격해 보십시오. 그래야 제 성능이 드러날 겁니다.”
2티어 영웅이 휘두른 네임드 장비를 튕겨내면서 그게 제 성능이 아니란 충격적인 이야기.
솔직히 믿기 어려웠다.
네임드 이상의 방어구라는 게 이미 확인되었는데 사실은 물리 공격에 대한 저항은 부가적인 효과일 뿐이라니.
그러나 다른 누구도 아닌 루안의 말이었다.
곧장 갑옷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 허수아비에 입힌 다음에 공격에 나섰다.
“윈드 불릿.”
마나 실드를 부수는 용도로 자주 쓰이는 윈드 불릿.
회전을 통해 높은 관통력을 지녔기에 기사의 갑옷을 노리기에도 적합한 마법이었다.
그러나 라이언의 공격을 튕겨낸 만큼 이 정도는 간단히 막았다.
“불도 막을 수 있나?”
“불에 더 강합니다.”
그러고 보면 루안의 능력은 쇠와 불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거였다.
불에 약하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하다.
화르륵!
자크론에게서 배운 불 속성 마법인 파이어 스피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무슨 재질인지 불이 제대로 붙지도 않았다.
“이 갑옷은 대체 어떻게 만든 거지?”
내가 전선에 나가 있는 바람에 레이드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이런 장비의 도안을 구해다 준 적도 없다.
그래서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루안이 대체 어떤 깨달음으로 이런 걸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영주님 덕분입니다. 온갖 희귀한 재료에 수준 높은 도안들을 보고, 또 달갑지는 않지만, 많이 만들다 보니까 저절로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무언가를 만들려고 하면 무슨 재료를 써야 할지, 어떤 기법이어야 할지. 그냥 다 알 거 같습니다. 시야가 넓어졌다고 해야 되나.”
그럭저럭 이해는 되었다.
마법도 비슷했으니까.
처음에는 마나를 어느 정도 써야 어느 정도의 위력이 나오는지 알지 못했지만, 이젠 아니다.
원하는 위력에 따라서 딱 필요한 수준의 마나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잠깐 집중만 하면 되는 마법과 달리 대장장이의 작업은 적어도 수 시간, 길게는 몇 주가 걸리는 과정이다.
그동안 계속 집중해서 유지할 수 있다는 말에는 혀가 내둘러졌다.
과연 비공식이지만 대장장이 5티어다운 위용이었다.
“그런데 루안. 계속 내 공방에서 일할 건가?”
루안이 내 밑에 들어오게 된 건 어디까지나 내기에서 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루안이 계속 공방에 남아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고작 내기로 붙잡은 걸음이 얼마나 가겠나 싶었다.
마침 시기도 적절했다.
좋은 장비도 만들어서 진상했고, 남부의 내전도 정리되었으니까.
슬슬 루안이 도주할 때를 엿볼 거 같았다.
“음.”
역시나 루안은 즉답하지 않은 채 망설였다.
“혹시 떠나겠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일단 절대 영지의 정보를 발설하지 않겠다는 약조부터 해야겠지.”
“그런 거야 당연한 것이고 제 목숨 말입니다.”
루안이 인상을 썼다.
그렇지 않아도 너무 뛰어난 솜씨 탓에 왈트 자작에게 억류된 전과가 있는 루안이었다.
나도 루안을 재능만 높이 사서 붙잡은 처지였고.
당연히 순순히 잘 가라고 손 흔들어줄 리 없고 루안도 이를 알 것이다.
“뭐, 죽일 생각 정도는 했지.”
“역시!”
“그런데 이젠 상관없어.”
“네?”
“얼마든지 떠나도 돼.”
“아니, 왜요?”
루안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닌지 의심했다.
“그렇게 말해 놓곤 제가 진짜 간다고 하면 기사들 불러서 죽이려는…….”
“방금 말한 깨달음 말이야.”
루안의 깨달음에는 한 가지 큰 결점이 있었다.
아무리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알 수 있다고 해도 어차피 수준 높은 공방이 없다면 무리다.
마찬가지로 필요한 재료가 없어도 무리다.
“이곳을 떠나서 쓸 수 있겠나?”
루안의 재능은 엄밀히 말해 도안이 불필요해진 것.
그러나 도안을 빼도 난 루안에게 많은 것들을 제시할 수 있는 영주였다.
이제는 그만한 위치에 있었다.
“이제 크레시안 왕국 남부에서 나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 영주는 없지.”
전용 공방과 최고의 장인들을 조수로 붙여주고 수준 높은 도안과 희귀한 재료들을 끝없이 공급해 준다.
앞의 것들은 다른 대영주라도 가능하겠지만 뒤의 것은 나만이 가능했다.
“물론 자유가 더 중요하다면 대단하지 않은 조건이지. 그렇지만 장인인 이상 언젠가 갈증이 나고 말걸?”
마법사인 내가 갑자기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된다면 어떨까?
잠깐은 괜찮다.
어차피 매일 마법을 써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렇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성장은커녕 오히려 퇴보하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마법을 쓸 수 없다면?
루안도 비슷하다.
아무리 떠도는 걸 좋아해도 루안에게는 목표가 있었다.
희귀한 재료들을 직접 공수해서 멋진 작품을 만들어내겠다는 목표가.
그런데 이제 어디를 가도 이곳에서보다 좋은 재료는 구할 수 없다.
게다가 대영주의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면 억류를 걱정해야 된다.
루안이 안전하게 원하는 만큼 장비를 만들 수 있는 장소는 내 밑이 유일한 것이다.
“그건…….”
“지금까지는 떠날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원한다면 공방의 우두머리 자리를 넘겨주지. 장인들도 반대하지 않을 테고.”
용병들과 마찬가지로 장인들도 실력을 매우 따졌다.
루안이 막 굴러들어 온 것도 아니고 그동안 실력을 유감없이 보였을 테니까 장인들의 반발도 거의 없을 것이다.
평시라면 모를까 전시에는 뭐든지 실력이 최우선인 게 당연하니.
게다가 기사단이나 마법사들은 이미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
창칼이 맞부딪치는 전쟁에서 연륜을 떠들 수 있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예외가 있다면 연륜만큼의 실력을 가진 사람.
마법사의 경우에는 자크론이 그랬다.
‘마법사들을 싹 휘어잡았지.’
아무리 협회에서 제명되었다지만 자크론의 실력을 의심하는 마법사는 없었다.
내가 별도의 직책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마법사들은 어느새 자크론을 중심으로 모인 상태였다.
기존의 우두머리였던 제이스가 오히려 주도적으로 자크론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할 거지?”
“우두머리 자리는 거절하겠습니다. 전 남들 부리는 일은 못합니다. 하지만 아직 영지를 떠날 생각은 없습니다.”
“왜?”
“영주님께서 오셨으니까 뭔가 또 대단한 몬스터를 잡지 않겠습니까? 그건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아직 성장할 수 있으니까 남아 있어야죠.”
대놓고 이용하겠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나야말로 루안을 통해서 이익을 남기는 입장이므로 나쁠 거 없는 대답이었다.
서로가 윈윈할 수 있는 것이니.
“나중에라도 생각 바뀌면 떠나도 돼.”
플레턴이 아직 나에 대한 시선을 완전히 거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추후에라도 내가 루안을 해치면 사이가 틀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루안을 죽이는 건 내 무능에 대한 증거가 되니까.
그러면 플레턴은 가망이 없다고 보고 협회에서 나를 제명시킬 것이다.
물론 루안이 적에게 넘어가는 건 곤란하지만 어차피 순순히 다른 영주 밑에서 장비를 만들 성격은 아니었다.
나중에 잡혔다는 소식이 들리면 내가 구해내서 은혜를 이유로 다시 부려먹으면 그만이다.
이제는 그럴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모두 레일리 왕녀 덕분이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그녀가 순순히 포기한 것들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다시금 느끼니까.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 * *
“모두 정렬!”
로크가 우렁찬 목소리로 기사들을 한데 모았다.
잠깐의 달콤한 휴식은 이제 끝이었다.
한편 안정화 기간 동안 남부에서는 몇 가지 호재가 생겼다.
우선 경제가 생각보다 빠르게 살아났다.
가장 먼저 남부를 안정화시킨 덕분에 그동안 전전긍긍하던 상인들이 남부로 몰려왔기 때문이다.
덕분에 물가에도 숨통이 트였다.
영주들도 남부를 쥐어짤 생각은 없었기에 세금을 낮추고 구호에 나섰다.
이는 연합의 이름으로 합의된 부분이었다.
남부는 가장 먼저 안정화에 성공한 지역.
지금 이 기회를 잘 살려야만 내전 이후를 바라볼 수 있었다.
‘내전이 끝이 아니니까.’
영주들은 아마 내전의 끝만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솔직히 그 이상을 생각할 여력도 없고.
그렇지만 내 목표인 절대군주는 대륙 통일을 이뤄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 마족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변수까지 생겼다.
눈앞이 아니라 미래를 봐야만 하는 것이다.
‘기사단이 늘어난 게 제일 좋은 소식이군.’
안정화가 되면 일견 입대하는 사람이 줄어들 거 같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영지를 잃고 떠도는 귀족과 기사들.
그리고 포로로 붙잡힌 이들.
남부가 완전히 통일된 이상 그들도 이제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훗날의 불안을 남겨두지 않기 위해 포로들에 대한 처분이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망설이던 이들은 삶과 죽음 중 하나를 골라야 했고 삶을 선택한 이들은 의탁할 영주를 찾았다.
대부분은 나였다.
마이어드 후작이 남부 연합의 맹주로 군림하며 다시금 이름을 떨쳤으나 주목도는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기대치의 문제였다.
원래부터 남부 제일의 대영주였던 그와 변방의 작은 가문에서 대영주에 버금가는 세력을 키워낸 나.
젊고 야망 있는 기사들이 나를 찾아왔다.
마법사 협회에서도 반응을 보였다.
내가 자크론을 제압했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나에게 호기심을 가진 젊은 마법사들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덕분에 안정화 이후로 급격하게 세력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150명이라.’
순수하게 기사들만 계산한 수였다.
3티어에 로크와 릴리아나 외에도 새로운 기사들이 생겼고, 2티어는 이제 이름을 전부 외우기도 어려울 만큼 많아졌으며, 1티어는 나도 잘 모를 정도였다.
마법사들도 40명을 넘었다.
병력의 규모는 3천을 돌파했다.
어디를 가도 대영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규모였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럼 출발하도록.”
인원수가 워낙 많으니 이동에도 제약이 생겼다.
쓸 수 있는 도로가 한정되었고, 한꺼번에 이동할 수도 없었다.
여러 무리로 나눠 로크가 먼저 선두에서 병력을 이끌었고 각 무리마다 기사들이 병사들을 통솔했다.
군량이나 화살 등 전쟁 물자를 나르느라 병사들뿐 아니라 따로 일꾼까지 고용되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행렬이었다.
“정말 많이 늘었네요.”
길게 늘어난 행렬을 본 레일리 왕녀가 감탄했다.
나도 감격스러웠다.
처음에 기사는 7명뿐이고 용병 구하느라 발품까지 팔아야 했던 때가 있었는데.
괄목한 만한 성장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안 움직이나요?”
보통 영주라면 행렬의 선두나 중심에 자리를 잡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나와 레일리 왕녀는 아직까지 출발하지 않은 채 가만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기다리는 게 있습니다.”
반드시 시간 내에 만들겠다고 약속했는데 생각보다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나 밤까지 새워가며 고생하는 걸 아는데 화를 내거나 재촉할 수도 없었다.
정 여의치 않으면 레일리 왕녀를 먼저 끼워 보내고 나는 나중에 합류해야 할 수도 있었다.
“영주님!”
다행히 약속이 지켜진 모양이다.
베르타가 공방으로 보냈던 젊은 행정가가 부리나케 뛰어왔다.
그는 서둘러서 나에게 작은 보석이 달린 귀금속 상자를 건넸다.
“그건?”
“약혼식 때 드릴 예물입니다.”
베르타가 고생해서 구한 걸 그대로 줄 수도 있었지만 그래서는 조금 부족했다.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정성의 측면이었다.
내가 딱히 뭔가를 한 게 아니라 아랫사람에게 구하라고 시킨 것뿐이니까.
그래서 직접 레이드를 통해 몬스터의 재료를 구한 뒤 루안을 시켜 가공했다.
루안이 자신은 세공사가 아니라며 난감해했지만, 성과는 기대대로 훌륭했다.
“주얼리 리자드라고 보석 같은 비늘을 가진 몬스터가 있습니다. 직접 녀석을 잡고 얻은 부산물과 남부 제일의 보석들을 합쳐 예물을 만들었습니다.”
효율을 보자면 엉망인 물건이었다.
결국에는 그저 예물이었고 이게 나에게 이득을 주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이를 마련하는 데 귀한 재료에 돈에 인력까지 소요되었다.
이 노력으로 장비를 만들었다면 네임드 장비가 몇 개는 더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의미가 있었다.
네임드 장비를 포기하고 만든 예물이니까.
“어, 네패스 자작? 방금 주얼리 리자드라고 했나요?”
“네, 맞습니다.”
“그건 이미 수백 년 전에 잦은 사냥으로 멸종한 몬스터인데.”
“변방의 영지에는 멸종한 몬스터도 종종 돌아다닙니다.”
레일리 왕녀는 나를 미친놈처럼 보았다.
억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