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64화
VVIP 영주님의 품격 64화
64화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차마 레일리 왕녀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했으나 그럴 필요도 없었다.
뒤이어서 레일리 왕녀가 모습을 보이자 베르타는 곧 상황을 이해했으니까.
그러나 그게 쉽게 받아들였다는 건 아니었다.
“영주님과 왕녀 저하와의 혼인이라니.”
“약혼만 간단히 할 예정이고 실제 혼인을 하게 될지는 모르지.”
“그럼 약혼식이라도 준비해야 하지 않습니까?”
“연합의 영주들이 있는 자리에서 아주 약소하게 진행할 거다. 준비는 마이어드 후작이 해줄 거고.”
“말도 안 됩니다!”
내 이야기에 베르타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당연히 우리가 약혼식을 주관해서 이 가문이 남부를 주름잡는 가문이라는 걸 확실하게 보여줘야지요!”
“형식적으로만 하고 대외적으로 크게 공표하지도 않을 건데?”
그런 베르타의 행동은 지극히도 혼인 동맹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레일리 왕녀와의 약혼조차 약소하게 진행하는 이유는 시기도 그렇지만 그녀의 존재를 여전히 알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니까.
당연히 이목이 쏠릴 만한 규모로 약혼을 할 수 없기에 간단히 예물을 주고받으며 서약을 하는 선에서 끝낼 계획이었다.
즉 나는 예물만 몇 개 고르면 되었다.
‘사실 좀 곤란하기는 한데.’
지금까지 많은 영지를 점령해 왔지만 의외로 내 수중에 남은 건 별로 없었다.
돈 좀 될 만한 것들은 팔아버리거나 공을 세운 부하들에게 다 뿌렸기 때문이다.
휘하의 기사 중에 나에게 하사받은 게 없는 이가 없을 정도로.
심지어 용병들에게도 많이 뿌리고 다녔다.
전투가 한 번 일어날 때마다 병력의 손실은 어쩔 수 없이 따라왔고 입대하는 자나 용병으로 고용될 자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기사라면 젊은 영웅이라는 명성에 이끌리겠지만 용병들에게는 돈 잘 주는 고용주야말로 가장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마법사 협회에도 꾸준히 선물을 보내고.’
점령한 영지의 마법사들을 계속 흡수하고는 있지만 아무리 대영주 휘하의 마법사가 많아도 협회 지부에는 비할 수 없었다.
이 남부에서 가장 많은 마법사는 지부에 있었기에 내가 마법사들을 우대한다는 이미지를 줘야 했다.
그래야 협회에서 일자리를 원하는 마법사가 나에게로 올 테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왕녀 저하와의 약혼인데…….”
“신분을 밝히지도 못하는데.”
“끙. 어찌 왕녀 저하께 이런 약혼을…….”
“베르타 경. 그대는 나보다 왕녀를 더 따르는 거 같군.”
일부러 목소리를 깔고 뚱한 눈길을 보내자 베르타가 몸을 떨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왕국의 국민으로서 왕녀 저하가 곧 이 왕국의 상징이라 생각하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흐응.”
“진심입니다.”
“그래, 베르타 경이 거짓말을 할 리 없지. 그리고 어차피 안주인이 될 사람이니 신경 써야 할 테고.”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게 베르타 경의 임무는 아니야.”
다른 기사들의 충성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와 전장을 함께 넘어왔기에 당연히 나를 신뢰하고 따를 것이다.
내가 레일리 왕녀에게 칼을 겨누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겠지.
그러나 베르타는 왕가에 대한 충성이 마음에 박힌 사람이라 확신하기가 힘들었다.
이제 와서는 상관없어졌지만 나보다 다른 사람에게 충성할지도 모른다는 건 절대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그대가 네패스 가문의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아줬으면 하는군.”
“명심하겠습니다.”
심상치 않은 경고에 베르타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내가 단순히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정으로 불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뭐, 그래도 확실히 체면은 생각해야겠지. 약혼식에 쓸 예물을 책임지고 준비해 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네패스 자작가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도록 최고의 예물을 구해보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베르타가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이대로 돌아가서 쉬면 좋겠지만 내 발걸음은 공방으로 이어졌다.
“영주님께서 오셨다!”
공방의 규모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커져 있었다.
겨우 몇 명의 장인이 있었던 때와 달리 규모도, 인원도 몰라보게 커졌다.
영지를 돌면서 열심히 인재를 모은 덕분이었다.
“영주님, 혼인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어딜 가나 그 소리군.”
우두머리 장인이 튀어나와서 한다는 말이 혼인에 대한 것이었다.
뭐, 그럴 수밖에 없긴 했다.
피의 연회 이후로 남은 네패스 가문의 혈족은 아인 네패스가 유일했으니까.
셋째 공자님의 혼인과 하나뿐인 가주의 혼인은 그 무게가 전혀 달랐다.
“루안은 어디 있지?”
그보다 내가 모습을 보였는데도 루안이 나타나지 않았다.
“아, 루안은 별도로 작은 공방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주님께서 오셨다는 이야기를 못 들은 모양입니다. 제가 어서 가서 데려오겠습니다.”
우두머리 장인이 서둘러서 뛰어갔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곧 그의 손에 붙들린 루안이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오랜만에 보는 루안의 모습은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루안과 지금의 루안이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에는 너무…….
“좀비인가?”
시체 같았다.
“아닙니다.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꼴이 영 아니군.”
검댕을 묻히고 땀과 땟국물 범벅에 눈은 퀭하고 다크서클이 생겼다.
감옥에 갇혀서 고생할 때도 저렇게 처참한 몰골은 아니었는데.
“송구합니다. 루안은 날밤을 새워가며 작업을 하느라…….”
“그 정도로 혹사시켰나?”
“절대 아닙니다. 전 말렸는데 본인이 원해서 한 것입니다.”
“왜지?”
루안은 나에게 인사를 한 건지 아닌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미동도 없었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넋이 나간 것 같았다.
“이 녀석, 영주님 앞에서는 정신 차려야지!”
근처에 있던 다른 장인이 루안을 나무랐지만 그런다고 정신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 정도로 고생해 가며 작업을 했는지 모르겠다.
“뭔가 깨달았다고 하더군요.”
“깨달아?”
이해하지 못할 대답이었다.
뭘 깨달았기에 저 몰골이 될 때까지 공방에서 일만 한 것인지.
“완성…….”
“응?”
“완성했습니다.”
루안이 팔을 부들부들 떨며 작은 상자를 꺼냈다.
아무래도 나에게 바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루안이 이 꼴이 되면서까지 만든 게 무엇인가 호기심이 들어 일단 받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잘 쓰도록 하지. 가서 좀 쉬도록 하게. 잘 좀 챙겨주고.”
“물론입니다.”
루안으로부터 물건에 대한 설명을 들을 겨를도 없었다.
난 서둘러 장인들을 시켜 루안을 돌려보냈다.
공방이 아니라 장인들의 숙소가 있는 방향이었다.
“흠.”
그렇게 루안에게 휴식을 쥐여주고 나서야 상자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솔직히 기대가 되었다.
최고의 재능을 가진 장인인 루안이다.
공방에서 보낸 시간 동안 허송세월을 한 것도 아니고 많은 장비들을 생산해 냈다.
그 과정에서는 레이드에서만 얻을 수 있는 온갖 희귀한 재료도 있었으니 분명 루안이 어느 정도 성장할 거라 기대할 수 있었다.
게다가 루안이 직접 어떤 깨달음을 얻어 만들었다고 하는 물건이다.
네임드 장비 중에서도 틀림없이 최상품일 것이다.
“무기가 아니군?”
상자를 열어보니 곱게 개어진 하얀 천의 옷이 보였다.
의외였다.
루안은 대장장이지 직물 장인이 아니었다.
게다가 수작업이 당연한 이 시대에서는 무기를 만드는 것보다 옷을 만드는 데 더 손이 많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이거 설마 갑옷인가?”
새하얗고 부드러운 감촉에 잠깐 속았지만, 손을 밀어내는 반발력이 느껴졌다.
겉은 평범한 의복처럼 해놨지만 이건 엄연히 갑옷이었다.
장비 정보를 보니 확실해졌다.
[성천(聖泉)의 레비아탄]
아무리 잘 만들어도 그저 단순한 의복에 장비 정보가 나올 리 없었다.
절대군주에 꾸미기용 아이템 같은 건 없었으니까.
애초에 갑옷을 입어도 수준 이하면 장비 정보 하나 보여주지 않았는데.
‘그런데 이름 형식이 이상한데?’
일반적으로 장비는 이름을 통해서 그 수준을 알 수 있었다.
영광의 검처럼 고유한 이름을 가진 게 아닌 경우는 하품.
로크 경의 아이투스처럼 고유한 이름을 가진 네임드 장비가 상품.
지금껏 다른 분류는 없었다.
그런데 이 갑옷은 달랐다.
‘레비아탄이 고유 이름이라면 앞에 붙은 성천은 뭐야?’
정보가 부족했다.
영웅 정보에서 온갖 정보가 나오는 것과 달리 장비 정보는 이름 말고는 알려주지 않았다.
게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름을 통해서 등급을 추측하는 것도 유저들이 머리를 맞댄 끝에 알게 된 사실이었고.
“상등품은 확실한데.”
절대 하품은 아니었다.
루안이 만들어서 그런 것만이 아니라 이 옷에서 마나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법사가 아니라 물건에서 마나를 느낀 건 처음이었다.
“뭐, 시험해 보면 알게 되겠지.”
루안과 좀 더 대화를 나누지 못한 건 아쉽지만 일단 이걸로 만족할 수밖에.
그럼 라이언이 어디 있으려나.
* * *
“우리 쉬는 거 아니었습니까?”
루안에게서 받은 갑옷을 걸치고 라이언을 찾자 라이언이 질색하며 말했다.
마치 주말에 쉬는데 업무를 지시하는 상사를 보는 눈빛 같았다.
그러나 난 쉴 거라는 말은 한 적이 없다.
“누가 그러던가?”
“분위기가…….”
“영주는 나야.”
실제로 쉬는 게 맞기는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동부 침공을 개시하기 전에 숨을 가다듬는 시간이었다.
남부가 안정화되었다고 해서 내전이 끝난 게 아니란 말이다.
실제로 훈련 강도는 여전하고 병장기 생산을 멈추지 않으며 그런 뜻을 확실히 보였다.
용병들도 이제 내 선에서 고용하지는 않으나 꾸준히 모으는 중이었고.
“그런데 왜 하필 저입니까?”
“가장 한가해 보여서.”
로크는 기사단장이기에 일이 많다.
릴리아나는 레일리 왕녀에게 붙어 있다.
빅터는 고향에 왔으니 쉬어야지.
그러다 보니 친분이 깊은 기사로 남는 게 라이언뿐이었다.
딱 적당하기도 하고.
루안이 만든 장비인데 1티어인 빅터 정도로는 충분한 테스트가 안 될 테고, 3티어인 다른 둘은 위험했다.
둘 다 네임드 장비를 무기로 갖고 있으니까 이 갑옷이 생각보다 쉽게 뚫릴지도 몰랐다.
겉면이 평범한 의복처럼 생긴 데다 실제로 착용해 보니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주 가벼웠기 때문이다.
‘라이언도 장비가 좋기는 하지만 본인이 2티어에다가 단검을 사용하니까.’
게임에서는 종종 단검이 관통력이 높게 나올 때가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단검보다 장검이, 도검보다는 둔기가 갑옷에 효과적인 법.
단검을 다루는 라이언은 딱 적당했다.
“어휴. 마음 놓고 쉬지도 못하게…….”
“로크 경 부를까?”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진작 그랬어야지.
라이언은 로크의 이름에 기함하며 냉큼 나에게 달려들었다.
난 별다른 공격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접근하는 라이언을 지켜봤다.
어차피 테스트 목적은 갑옷의 테스트니까.
‘라이언은 2티어 용병. 무기는 단검. 그리고 무기의 수준은 네임드.’
따앙!
라이언이 내지른 단검이 입고 있는 갑옷을 강하게 때렸다.
동시에 라이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질렀던 단검이 어느새 라이언의 손에서 벗어나 저 멀리 튕겨 나갔기 때문이다.
“이게 뭔…….”
“어떻지?”
“안에 대체 뭘 껴입으셨습니까? 아니, 그래도 겉면은 잘려야 되는데.”
라이언은 신기한 눈으로 자신이 단검으로 찌른 부위를 살폈다.
네임드 장비에 2티어 영웅.
비록 단검을 써서 위력이 약하다고는 해도 흠집 정도는 생기는 게 당연할 텐데 멀쩡했다.
“이 정도면 웬디고 가죽 같은 것보다 훨씬 더 질깁니다.”
라이언이 과거에 상대했던 웬디고를 예시로 들었다.
웬디고의 가죽은 라이언의 단검으로 상처를 입히지 못했으나 그건 당시 라이언이 가진 단검의 수준이 떨어져서였다.
지금의 라이언이라면 충분히 웬디고의 가죽을 갈라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갑옷에는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겉면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안에 이거.”
라이언은 주먹을 쥐고 노크를 하듯 갑옷을 때렸다.
“막는 게 아니라 완전히 튕겨냅니다. 하마터면 손목 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나 역시 그에 동의했다.
만일 화살이 날아온다면 왔던 방향으로 그대로 튕겨낼 것만 같은 반발력이었다.
심지어 이 와중에 나한테 돌아온 충격은 거의 없었다.
라이언은 손목이 나갈 뻔했다고 하지만 나는 제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으니까.
이름의 형식이 처음 보는 거라서 긴가민가했는데 이걸로 확실해졌다.
‘이 갑옷, 네임드 장비보다도 더 상등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