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62화
VVIP 영주님의 품격 62화
62화
레일리 왕녀가 동행하는 형식적인 이유를 들자면 친왕실파 귀족들이 항복을 거부할 때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난 그들이 아직도 왕가에 충성하리라 여기지 않았다.
설령 입으로는 그런 말을 내뱉더라도 이는 체면에 의한 것일 뿐, 실제로는 우리가 손을 내밀어주기를 간절히 바랄 거라고 생각했다.
이는 연합의 다른 영주들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레일리 왕녀가 동행한 것은 만약을 대비하기 위함과 더불어 나와 둘만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였다.
다른 이들의 앞에서는 할 수 없는 대화도 있었으니까.
“네패스 자작가의 기사단장 로크입니다.”
“라일이라고 해요.”
공표할 수 없는 그녀의 신분 때문에 연합의 모두는 그녀를 왕녀가 아닌 바이든 자작의 조카로 알았다.
“릴리아나 경, 밀착 호위를 부탁하네. 시녀들이 있지만 내 부대와 함께 움직이는 이상 곤란한 일도 있을 테니까.”
“맡겨주십시오.”
내 요청에 릴리아나는 한껏 투지를 불태웠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내 기사들 모두가 어쩐지 의욕이 잔뜩 들어 있었다.
“대체 왜 이렇게 의욕이 넘치는 거지?”
“그야 안주인 되실 분 아니십니까?”
빅터가 슬쩍 다가와 의문을 풀어주었다.
딱히 언질을 주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갑자기 귀족 영애를 데리고 다니기로 했으니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니었고.
신분은 숨긴 상태지만 혼인은 예정되었으니까.
다만 그게 언제일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나중에 약혼식만 간소하게 행하고 연합은 곧장 동부로 진격할 예정이니까.
그 선봉에 서는 건 나였다.
‘이제는 좋던 시절도 다 갔군.’
뒤에서 피 한 방울 안 흘릴 수 있었던 싸움은 이제 끝이었다.
나는 부맹주이자 실질적인 연합의 수장으로서 모범과 믿음을 보여주어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렇기에 선봉에 서는 건 당연하고 확실한 성과를 거둬야만 했다.
그러지 못한다면 이 연합에는 금이 가게 될 테니까.
“뭐야? 넌 또 표정이 왜 그러냐?”
그때 로크가 라이언을 향해 물었다.
나를 바라보는 라이언의 눈동자가 야릇하게 휘어지고 있었다.
“아니, 뭘 그러십니까. 좋은 일이니까 그러지요. 그나저나 영주님도 역시 남자셨습니다?”
“로크 경.”
“조지겠습니다.”
라이언에게는 레일리 왕녀 곁으로 접근하지 말라는 접근 금지령을 내렸다.
그 어떤 기사도 내 명령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라이언은 그대로 기사들의 대열에서 밀려나 최후방으로 쫓겨났다.
“참, 로크 경. 한 가지 지시해 둘 게 있는데.”
난 마지막으로 로크에게 지시를 추가로 내렸다.
밤에 막사 주변을 비우라는 지시였다.
로크의 표정이 잠시 흔들렸으나 곧 긍정의 대답이 나왔다.
왜 흔들렸는지 아는 내 입장에서는 일일이 해명해 주지 못하는 게 한이었다.
* * *
날이 어두워져 밤이 되었을 때 내 막사 주변은 텅 비어 있었다.
호위를 위한 기사들은 물론이고 스승인 자크론조차 출입이 통제되었다.
오직 한 사람을 제외하고.
“네패스 자작님.”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레일리 왕녀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나를 따라온 건 이 시간을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제야 단둘이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군요.”
마이어드 후작과 바이든 자작의 눈치 탓에 이전에는 둘만 대화할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연합의 준비로 바쁜 탓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번 남부 안정화는 상대적으로 여유로웠다.
신속하게 진행해야 할 일이기는 하지만 눈치 볼 상대는 없었으니까.
“차부터 드시겠습니까?”
미리 준비해 둔 차를 내밀자 레일리 왕녀는 곱게 미소 지었다.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러나 이성적인 어떤 느낌을 받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내가 그녀에게 가지는 감정은 지금까지 빅터에게 가진 동정이나 연민에 가까웠다.
결과적으로 나에게는 좋은 일이 됐지만, 왕녀로서 그녀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으니까.
“왜 그런 표정으로 저를 보는 건가요?”
“이번 혼인이 왕녀 저하의 진심이 아니니까요.”
“부정은 안 할게요.”
딱히 숨길 것도 없었다.
이미 다 말해 준 것과 다름없었으니.
“하지만 딱히 싫은 것도 아니에요. 오히려 가뿐한데요.”
레일리 왕녀는 정말 후련한 얼굴로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녀의 목표였던 왕가 재건이 나에게로 떠맡겨졌으니까.
혼인을 대가로 그녀는 부담을 많이 지워낼 수 있었다.
“게다가 네패스 자작이면 혼인 상대로는 매우 훌륭하지 않나요?”
“전혀 아닙니다.”
그녀가 웃으며 꺼낸 농담에 나는 즉각 부정의 말을 내뱉었다.
외적인 조건을 보자면 아인 네패스는 이제 꽤 괜찮은 상대가 됐다.
젊으면서도 대영주 못지않은 세력을 지녔고 남부 연합의 실질적인 맹주다.
아무리 왕녀라고 해도 이만한 혼처는 쉽게 구할 수 없었다.
하물며 왕가가 망해버린 지금으로서는 더욱.
그러나 레일리 왕녀는 여기에 꿇리지 않는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 역시 젊고 아름다우며 왕실의 정통성과 마이어드 후작이라는 뒷배가 있었다.
더구나 그것을 그대로 물려받을 예정이었던 후계자.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다.
외적 조건도 그럴진대 내적인 문제는 더 심각했다.
“전 왕녀 저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레일리 왕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사랑이라는 건 애초에 저한테는 안 어울리는걸요. 정략결혼을 맺는 이가 어디 한둘인가요?”
“그러나 대부분은 문제없이 살겠지요. 하지만 전 아닙니다.”
나는 불나방이었다.
안주하거나 멈추지 않고 영광을 향하다가 언젠가 스스로를 태우고 죽게 될 것이다.
그런 각오를 이미 다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나와 혼인을 한다면 결국 그녀에게 남는 건 멍에뿐이다.
“최소한의 마음도 내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그건 좀 충격적이네요. 제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가요?”
“왕녀 저하의 문제가 아닙니다. 상대가 누구라도 전 마음을 주지 않을 겁니다.”
야망에 휩싸인 사람이 가정에 관심을 가질 리 없다.
“야망이군요.”
레일리 왕녀는 내 말에서 내 속내를 깨닫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네페스 자작. 만약 혼인을 제안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나요?”
“이미 주변에서 충분히 말해 주었다고 짐작합니다.”
“직접 듣고 싶어요. 그 정도 들을 자격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레일리 왕녀의 고집에 나는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흔들림 없이 또박또박 사실을 고했다.
“마이어드 후작을 먼저 죽였을 겁니다.”
“이유는요?”
“레일리 왕녀 저하는 어차피 스스로를 밝히지 못하니까요. 영주들의 구심점이 될 수 없죠.”
마이어드 후작만 죽이면 충분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쓰든 그가 죽는다면 영주들은 고민하게 될 것이다.
과연 누구에게 붙어야 자신들에게 이득이 될까?
당연히 바이든 자작보다는 세력이 큰 내가 더 유리할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 마이어드 후작은 영주들로부터 신임을 조금 잃었다.
몇몇 영주들이 나에 동참해 준다면 바이든 자작과 레일리 왕녀를 해치우기도 쉬웠으리라.
“만약 밝힌다면 오히려 더 좋습니다. 영주들의 이탈이 가속화될 테니.”
혼란한 와중에 레일리 왕녀의 정체가 밝혀진다면 영주들은 진저리를 칠 것이다.
왕가와 엮이는 건 대영주들에게 밉보이는 짓이니까.
“결국, 저에 대한 충성은 모두 거짓이었군요.”
“제가 왕녀 저하께 고개를 숙인 것은 당시 제게 힘이 부족해서였으니까요.”
“굴욕적이었나요? 충성을 말했던 게. 전 당신에게 명예로운 기회를 줬다고 생각했는데.”
“딱히 굴욕이라고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힘을 가진 자가 약자를 부리는 건 당연한 이치니까요.”
권력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 권력을 움켜쥐려는 나는 잠깐 고개를 숙이는 정도에 굴욕을 느끼지 않는다.
그때는 나에게 힘이 없었으니까 당연히 받아들였을 뿐.
“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죠? 가족들의 죽음 때문인가요?”
레일리 왕녀는 내 가치관이 가족들의 죽음으로 인한 것인지를 궁금해했다.
그 일에 대한 책임이 왕가에 있으면 결국 그녀로서도 어느 정도 업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녀에게까지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보일 수 있는 마지막 충성이었다.
“가족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저는 원래 그런 인간이거든요.”
전략 게임 마니아를 자처했던 이유는 결국 승부에 대한 욕심이었다.
끝까지 올라가고 싶은 욕심.
그게 비생산적인 게임에 매달렸던 하나뿐인 이유였다.
위니스는 이런 나를 알아봤을 것이다.
돈 한 푼 쓰지 않고도 최상위 랭커에 이름을 올린 건 돈을 썼던 유저들과 비교해 우월한 위치에 서는 행동.
즉 내가 무과금을 한 건 순수한 전략성을 원해서가 아니라 그들보다 내가 낫다는 걸 보이고 싶어서였다.
그녀는 내 집념을 알아보고 나를 선택한 것이다.
“그렇군요.”
레일리 왕녀의 말을 끝으로 대화가 멈췄다.
잠시 차를 마시는 소리만 간간이 이어지다 그마저 비웠는지 레일리 왕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서 마주 일어나는데 레일리 왕녀는 제자리에서 환하게 웃었다.
너무 밝은 웃음에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왜 웃으시는 겁니까?”
“당신은 생각보다 순진한 사람이군요, 네패스 자작.”
“네?”
어쩐지 레일리 왕녀는 다분히 안도한 눈빛이었다.
“사실 여기 오는 동안 굉장히 불안했는데 이제 좀 마음이 놓여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질색할 줄 알았던 그녀는 오히려 굉장히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런 반응인지.
“그렇게 욕망의 화신인 네패스 자작이 누군가를 쉽게 신뢰할 리는 없죠. 그런데도 굳이 속내를 털어놓는 이유는 뭔가요?”
“그건…….”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그냥 해야 할 일이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플레턴 때도 그랬다.
막상 어떠한 관계를 맺게 되는 순간부터 진심이 될 때가 있었다.
“네패스 자작은 사람 사이의 관계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혼인하게 될 상대인 저에게 진심을 보이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는 거겠죠?”
예의라.
레일리 왕녀의 말에 잠시 고민해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진심에는 진심을 보이는 게 맞으니까.
“그런 거 같습니다.”
긍정의 대답을 내놓자 레일리 왕녀가 방긋 웃었다.
“보통은 안 그런다고요.”
“네?”
“아직 진짜 혼인한 것도 아니고 이후에도 진심을 숨기는 사람이야 얼마든지 있죠. 그런데 네패스 자작은 꼭 말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거잖아요.”
어안이 벙벙해졌다.
생각지도 못한 평가인데 도무지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빅터를 상대로 계속 흔들리고 있는 건 군신 관계에 있는 빅터에게 내가 반드시 보답을 해줘야 한다고 느껴서였다.
충성에는 충성에 대한 대가를.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계속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다.
능력이 없다면 모를까 나는 그럴 수 있음에도 효율을 위해서 빅터를 배제했으니까.
“말이야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막상 실천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죠. 그런 일로 괴로워하는 일도 드물고요. 그런데 네패스 자작은 그런 사람이네요.”
사실을 깨닫게 되니까 기분이 이상해졌다.
하필 이걸 몇 번 얼굴도 보지 않은 레일리 왕녀가 알아차릴 줄이야.
생각보다 내가 정말 순진한 걸까?
머릿속이 꽃밭에 있는 왕녀에게도 쉽게 읽힐 만큼?
어쩐지 앞으로 연합의 맹주다운 처신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귀여워라.”
“콜록콜록!”
마지막으로 들은 게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귀엽다는 말에 사레가 들렸다.
그러나 그런 내 모습조차도 레일리 왕녀에게는 오히려 자신의 이야기가 맞다는 확신을 준 거 같았다.
“그러고 보니 네패스 자작은 올해로 나이가 어떻게 돼요?”
“성인은 되었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이제 겨우 성년이 지난 모양이네요.”
레일리 왕녀는 나와의 거리를 좁히더니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진짜 좋네요.”
그 말을 남기고 레일리 왕녀가 막사를 떠났다.
혼자 남겨진 난 마지막으로 그녀가 남기고 떠난 말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어쩐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