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59화
VVIP 영주님의 품격 59화
59화
* * *
“왜 그러셨습니까?”
연회가 파하고 난 곧장 레일리 왕녀와 이야기를 나눌 자리를 마련했다.
물론 마이어드 후작과 바이든 자작도 동석한 자리였다.
“왜 누구에게도 상의하지 않고 이런 일을 하신 겁니까?”
나만 책망하는 게 아니었다.
마이어드 후작과 바이든 자작도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나섰다.
그렇게 세 쌍의 눈동자가 집중되는 상황에서 레일리 왕녀는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연회장에서 했던 설명으로는 부족한가요?”
“당연히 부족합니다.”
레일리 왕녀가 무거운 책무에 부담을 느꼈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거대한 전쟁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고 달아나고 싶었다고 해도 그건 책망할 일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테니까.
하지만 그게 연회장의 돌발 행동을 옹호해 줄 수는 없었다.
그녀의 정체를 밝히는 일부터 나에게 남부의 모든 것을 넘기겠다는 것까지.
절대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네패스 자작, 당신이 생각했을 때 저는 왕가를 재건할 군주로 합당한 능력을 갖췄나요?”
“책무가 두려우셨습니까?”
레일리 왕녀의 눈동자가 곱게 휘어졌다.
“아니요. 내가 두려워한 건 그게 아니에요. 바이든 자작이 저에게 그러더군요. 네패스 자작을 통제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마이어드 후작도 같은 생각을 하고 당신을 시험하려 했죠.”
잠깐 침묵이 찾아왔다.
다른 사람이 나를 경계하고 있던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오히려 최소한의 경계조차 하지 않았다면 난 그들을 어리석다고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일리 왕녀만큼은 지금까지 그런 낌새를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모습을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당신 하나를 어찌하지 못한다면 과연 나에게 군주로서 자격이 있는 것일까?”
마이어드 후작과 바이든 자작 모두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그녀는 군주로서 자격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에서는 그랬다.
내가 봤을 때 레일리 왕녀는 왕가의 여인으로 태어난 덕에 잘 교육받았을 뿐인 정원에 피어난 꽃에 불과했다.
야생에서 자라지 못한 그녀는 내전이라는 혼란 속에서 정국을 헤쳐 나갈 능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왕가의 핏줄로서 책무를 완전히 외면할 수도 없죠. 후작가를 이끌 후계자도 필요하고.”
“그래서 저를 선택하신 겁니까?”
“네패스 자작. 저는 당신을 믿어요. 하지만 주변에서는 당신을 경계하죠.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나요?”
없었다.
레일리 왕녀가 나를 신뢰하는지 어떤지의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주변의 귀족들은 내가 가진 힘을 경계할 것이고, 부족한 왕녀를 위해서 끊임없이 나를 시험하려고 들 것이다.
당연히 나는 그런 시험을 받아들일 정도의 충성심이 없기에 칼을 꽂을 준비를 하고 있었고.
레일리 왕녀는 내가 품은 마음까지는 모르나 이런 상황이 거듭되리라는 걸 짐작했다.
그래서 강제로 그 상황을 막아버린 것이다.
혼인 동맹을 맺게 되면 내가 그녀를 배신할 이유가 사라지니까.
“남부 영주들을 결속시키기 위해서도 이 방법은 나쁘지 않을 거예요. 저는 이번 전쟁에서 피해를 본 영주들을 위해 나섰으니까.”
“그게 계산된 행동이셨군요.”
레일리 왕녀가 왜 우익 영주들에게 보상을 해주겠다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그 행동은 내 아내로서 보여준 미래의 모습이었다.
아무리 내가 큰 권력을 가지더라도 그녀는 크레시안 왕가의 피를 잇는 정통성을 가진 여인.
절대 그녀를 무시할 수 없다.
그녀를 존중해 주는 모습을 보여야만 한다.
그런 만큼 포상을 내리는 자리에 있어서 그녀 역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녀는 공을 세운 자보다 잃은 자들을 챙길 것이라는 점을 어필했다.
‘현명한 판단이지.’
군주가 공을 세운 자를 챙긴다면 그녀는 소외되는 이들을 챙긴다.
한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마땅히 품어야 할 자비였고 고결하고 아름다운 기품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믿는 자들에게도 안전한 보험이 되는 것이었고, 무능한 이들에게는 정신적인 지주나 다름없었다.
‘전부 계산하고 있었군.’
레일리 왕녀는 보통의 귀족 여성들과는 달랐다.
왕가의 혈통으로 위에 선 자로서 아랫사람을 다루는 방법을 확실하게 익혔다.
어지간한 영주라도 생각하지 못할 것을 그녀는 제대로 인지했던 것이다.
“왕녀 저하의 뜻은 알겠습니다.”
바이든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 독단적으로 처리한 부분은 문제가 있었지만, 레일리 왕녀는 나름의 계산을 갖추고 행동을 취했다.
나와 그녀의 군신 관계가 흔들릴 여지를 없앴고, 자신이 감당할 무거운 책무를 가장 능력 있는 이로 보이는 나에게 전가했다.
하지만 여전히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왕녀 저하의 정체가 알려진 것은 큰 문제입니다.”
이 모든 건 레일리 왕녀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해석했을 때의 가정일 뿐이다.
그녀는 모든 대영주들이 죽이든 생포하든 반드시 노려야 할 존재.
대영주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명분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정통한 핏줄이다.
그녀와 혼인을 한다는 건 왕가에 편입된다는 의미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후계가 나온다면 왕실의 후사를 이을 수 있다.
당연히 스스로를 지킬 힘이 갖춰질 때까지 그녀의 존재는 드러나선 안 되었다.
“어차피 이곳에서의 일이 잘되었다면 제가 드러나는 건 예정된 일이었잖아요.”
그건 그랬다.
대놓고 공표하지는 않겠지만 영주들이 의심을 할 정도의 단서는 줬을 것이다.
바이든 자작처럼 마이어드 후작이 신뢰하는 영주에게는 진실을 알렸을지도 모르고.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전 네패스 자작을 믿어요. 이 남부의 운명을 건 카이로스 백작과의 전쟁에서 단 1명도 잃지 않고 최고의 공적을 얻어낸 당신이잖아요?”
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내가 의도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
그러나 의심받는 게 당연했다.
“당신을 의심하지 않아요. 그저 당신에게 하늘의 뜻이 달려 있을 거라 믿는 거죠.”
거짓말이다.
레일리 왕녀는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본인 스스로 생각하지 않더라도 주변에서 계속 의심하면 혹시나 하는 생각이 한 번쯤은 들기 마련이니까.
레일리 왕녀도 보통의 사람인 이상 그런 상황을 피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게 그녀의 이번 행동을 이끈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게 정말 내 의도에 의한 것이든 지독하게 운이 좋은 것이었든.
그녀는 그것을 계기로 삼았다.
“네패스 자작.”
“네, 왕녀 저하.”
“당신은 제가 싫은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계속 저에게 웃는 모습을 안 보여주는군요. 저와 혼인하기로 했으면서도.”
이걸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서?
아니면 앞으로의 미래가 걱정되어서?
아니, 아니었다.
어쩌면 내 불안감의 근원은.
“필사적으로 노력하셨군요.”
“네?”
레일리 왕녀의 노력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나에게 호감을 보였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걸고 혼인을 선택할 정도의 호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 역시 두려워하고, 망설였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자신이 가진 것 전부를 걸고 도박에 나섰다.
이 세계는 게임이 아니다.
알고 있고, 이미 몇 차례나 느낀 사실이다.
하지만 일전의 라이언에게 하소연하던 빅터도 그렇고 이런 레일리 왕녀의 모습은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런 이들의 삶을 걸고 내 욕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게 과연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
그리고 만약 이들이 죽었을 때 내가 그걸 견뎌낼 수 있을지도 걱정되었다.
‘이들을 숫자가 아니라 사람으로 보게 된다면…….’
그때 난 지금의 전쟁을 계속할 수 있을까?
‘이미 한 번 흔들렸다.’
빅터가 자신의 고민을 라이언에게 털어놓을 때 나는 흔들렸다.
물론 약간의 흔들림일 뿐이었고 결과적으로 나는 빅터에게 무엇도 내주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성장이나 명예 대신에 금전적인 보상만이 내가 줄 수 있는 전부였으니까.
그러나 흔들림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빅터의 목숨이 더는 다른 기사들과 동급으로 보이지 않았다.
1티어 기사에 불과함에도.
이는 나중에라도 내가 올바른 판단을 제때 내리지 못할 위험성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레일리 왕녀에게서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게 단순한 동정이나 연민일지라도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 * *
카이로스 백작가를 점령한 연합군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연회에서의 일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영주들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뻐하기는커녕 하나같이 심각한 얼굴을 했다.
“뭔가 소식이 있었나?”
“전혀 없습니다. 다른 녀석들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로크의 물음에 라이언은 고개를 내저었다.
기껏 몰래 꿍쳐둔 술과 약간의 돈을 가지고 다른 영주들의 기사들을 찾아가 봤지만, 그들도 아는 것이 없었다.
영주들이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있었단 소리다.
“흠. 그럼 당시 연회장에 있던 시종들은?”
“다 갑자기 몸이 아프다면서 코빼기도 안 보입니다.”
이어지는 대답에 로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연회장에 있던 당사자이자 자신들의 영주인 아인에게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인을 비롯해 마이어드 후작과 바이든 자작, 그리고 그 조카라는 여성 라일은 이틀 넘게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남부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영주 셋이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휘하 병력들이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안달이 난 것이다.
“뭔가 큰일이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한데.”
어쩌면 남부의 운명을 좌지우지할지도 모를 어떤 일이 연회장에서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의 이 어수선함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가 문제냐? 찾아서 물어보면 될걸.”
그때 한 노인이 로크의 곁으로 다가왔다.
상대의 속 편한 소리에 로크뿐 아니라 라이언도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영주님께서 어디 계신 줄 알고 그러시는 겁니까? 이곳을 헤집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인데.”
서로가 동맹을 맺은 연합군에서 함부로 행동하는 건 매우 위험한 짓이었다.
어떤 책을 잡힐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로크의 항변에 노인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뭐, 스승이 제자 보겠다는데.”
노인의 정체는 자크론이었다.
아인에게 생포된 자크론은 그동안 아인이 어떤 가르침을 청해 올지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이후로 아인이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자 그의 인내심은 바닥나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자리에서는…….”
“그럼 네가 날 막을 거냐?”
다른 영주들까지 있는 자리였기에 로크가 난색을 보였지만 자크론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리고 로크도 자크론을 적극적으로 만류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지금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흥, 처음부터 그럴 것이지. 그리고 엉뚱한 곳을 찾을 필요는 없다.”
자크론은 성의 한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으나 마법사 특유의 감각은 이곳에서 가장 거대한 마나를 감지해 낼 수 있었다.
“저만한 마나를 가진 놈이 둘은 아닐 테니까.”
마법사로서 아인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나이에 맞지 않은 거대한 마나였다.
보통 마법사라도 마나를 감지하려면 상대가 마법을 쓰고 있어야 했지만 자크론과 같은 고위 마법사는 달랐다.
워낙 마나에 익숙하고 예민해 상대가 일부러 감추는 게 아니라면 그 마나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플레턴 녀석은 왜 마나를 감추는 걸 안 가르쳤는지 모르겠군. 혹시 일부러인가?’
어차피 실력이 부족한 마법사라면 상대의 마나를 감지하기 어려웠다.
이를 알아내려면 상당히 근거리까지 접촉해야 하는데 이 경우 아인에게 당할 뿐이다.
반면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라도 아인의 마나는 신경 쓰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마나의 총량이 마법사의 수준을 가르는 기준은 아니지만 대체로 실력 있는 마법사의 마나가 적은 일은 없으니까.
저 거대한 마나는 플레턴의 제자에 대한 소문과 더해 마법사들이 아인을 피하게 만들 수 있었다.
또 마법사 협회에서 아인의 행적을 파악하는 데도 충분히 이용할 수 있었고.
‘플레턴 녀석이 분명 일부러 안 알려준 거야.’
자크론은 아인이 자신의 마나를 감추지 않는 걸 통해서 플레턴이 아인을 지켜보고 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아인에게 마나를 감추는 방법을 알려주는 건 플레턴의 눈을 가리는 일이 될 것이다.
‘플레턴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되는군.’
그러나 통쾌해하는 자크론과 달리 플레턴은 이를 예상하고 있었다.
어차피 협회의 눈길이 아인을 향했고 특히 원로인 벨로스가 아인의 행적을 조사하는 중이었다.
지금까지는 아인에 대한 감시를 위해서 알려주지 않았으나 이젠 아인 스스로 숨길 때였다.
아인이 자크론을 생포한 것은 뜻밖이지만 그게 아니었더라도 마나를 숨기는 방법을 알려줬을 것이다.
플레턴 입장에서는 굳이 번거롭게 직접 나서지 않고도 코를 푼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