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58화
VVIP 영주님의 품격 58화
58화
레일리 왕녀에 대해서 그동안 느낀 점을 말하자면 그녀는 정원에서 곱게 피어난 꽃이었다.
왕가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는 왕녀와 그를 따르는 충성스럽고 유능한 신하들.
아마 스스로를 그런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여기고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번 카이로스 백작과의 싸움에서 레일리 왕녀는 현실이 자신의 상상과 다르다는 걸 인지한 모양이었다.
문제는 그것을 그냥 받아들인 게 아니라 어떻게든 좋은 결과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서 그녀는 자신을 대신할 사람을 골랐다.
그게 바로 나였다.
“왕녀 저하? 그게 무슨…….”
그러나 이런 이해가 혼란에 빠진 나를 온전하게 되돌리지는 못했다.
나에게 있어서 레일리 왕녀는 언젠가 처리해야 할 적이었고, 마침 그녀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껏 이용했으나 이제 슬슬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주들도 이런 내 생각에 쉬이 동의할 것이다.
레일리 왕녀가 살아 있다는 게 알려지면 다른 지역의 대영주들이 공격할 명분을 내주게 되니까.
원래부터 왕실에 충성을 했던 귀족이라면 모를까 대영주파에 속하는 영주들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네패스 자작.”
하지만 이제는 그러기 어려워졌다.
“당신은 이 왕국을 일으킬 영웅이에요. 이번 싸움으로 그걸 깨달았어요. 부족한 나보다 당신이 이 왕국의 미래를 더 밝게 만들 거라고.”
난 입술만 달싹였다.
대체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머릿속이 온통 헤집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모든 걸 내드릴게요. 나를, 우리를 이끌어주세요.”
레일리 왕녀가 나에게 머리를 숙였다.
바이든 자작이 입에 거품을 물고 마이어드 후작이 뒤로 넘어갔다.
‘머릿속이 꽃밭이라는 건 알았는데.’
레일리 왕녀는 내 예상을 능가하고 있었다.
그녀는 직접 군주가 되기에 자신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나에게 넘기고 대신 이끌어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충성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나에게 충성하는 꼴이 된 것이다.
‘이거 완전히 미친년이잖아?’
나와 그녀 사이에는 어떠한 믿음도 없었다.
내가 이를 받아들여서 실제로 내전을 통일한다고 한들 칼을 거꾸로 들지 않을 보장이 없는 것이다.
나는 얼마든지 그녀를 베고 마이어드 후작의 세력을 이용하다가 내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한다면 난 당신의 여자가 될 거예요.”
그러나 마지막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레일리 왕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나에게 혼인 동맹을 제안하고 있었다.
‘아, 그럼 그렇지.’
혼인이야말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동맹의 형태였다.
남남에 불과했던 그녀와 내가 가족이 되고 서로의 세력이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
함께 이익과 손해를 나누는 운명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진심이십니까?”
하지만 레일리 왕녀는 독이 든 성배였다.
마이어드 후작의 세력이 가지는 가치는 이미 예전에 비해 많이 떨어졌다.
내가 충분히 도모해 볼 수 있을 만큼.
그런데 그 세력을 얻는 대가로 나는 크레시안 왕국에 있는 모든 대영주들을 적으로 돌려야 한다.
절대 달갑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러나 거절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여기서 거절하면 내 충성심에 대한 증명은 그대로 끝장난다.’
마이어드 후작을 비롯한 영주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이 자리를 넘어가려는 발언을 하는 순간 마이어드 후작과 바이든 자작은 어떻게든 나를 해치려고 할 것이다.
언제라도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는 자를 내버려 둘 리 없으니까.
‘외통수에 몰렸군.’
레일리 왕녀가 나를 의심하는 건지 단순히 본인이 힘들어서 포기한 건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짐을 나에게 떠넘기고 대신에 나를 외통수로 몰아넣었다.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내 대답은 정해져 있다.’
이 자리에서 나올 말은 긍정밖에 없다.
부정도 침묵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리고 긍정을 하는 순간 난 대영주들을 적으로 돌리게 된다.
“그게 왕녀 저하의 뜻입니까?”
“그래요. 이게 제 뜻이랍니다.”
숙고하는 척 이 상황을 넘어갈 방법을 고민해 보지만 역시나 답이 없었다.
그녀가 스스로의 정체를 까발린 순간부터 친왕실파였던 네패스 가문의 가주인 나는 왕녀를 따른 사람이 된다.
대영주들 입장에서는 내가 이 자리를 거부하더라도 의혹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레일리 왕녀가 이곳에 있는 이상 남부를 노리는 김에 나를 같이 처리하려 들 테고.
‘나 혼자서는 이 많은 입을 막을 수 없어.’
비밀을 지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정면으로 들이받아야 했다.
척!
난 곧장 레일리 왕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신 아인 네패스. 레일리 왕녀 저하의…….”
“그만두게!”
그런데 내 행동을 저지하는 손길이 있었다.
바이든 자작이었다.
“왕녀 저하, 재고해 주십시오! 이 결정은 너무 충동적입니다!”
“충분히 숙고하여 내린 결정이에요.”
“무슨! 네패스 자작에게 남부의 모든 걸 넘기는 게 어찌 숙고란 말입니까?”
“무례하군요. 바이든 자작은 저를 믿지 못하는 건가요?”
바이든 자작은 표정으로는 긍정했으나 그것을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네패스 자작! 그대도 잘 생각해 보고 대답하게. 이건 아니야.”
바이든 자작이 적극적으로 나를 말리자 나도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당연히 바이든 자작과 마이어드 후작이 레일리 왕녀의 뜻에 따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내가 이 자리에서 거부를 해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이 생길지도 몰랐다.
주변의 만류에 따른 것일 뿐이니까.
신중한 선택이 죄가 될 수는 없었다.
“후작 각하도 그리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바이든 자작은 마이어드 후작까지 끌어들였다.
만약 여기서 마이어드 후작이 그의 편을 든다면 확실히 나도 거부할 명분이 생긴다고 할 수 있었다.
아무리 상대가 왕녀라도 남부 제일의 대영주인 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그래, 어쩌면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마이어드 후작은 내 기대를 저버렸다.
“처음부터 과한 책무였다. 본인이 해낼 수 없다면 적임자에게 넘기는 게 옳지.”
저게 제 피붙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이유로 후계자를 두지 않은 마이어드 후작이 할 소리란 말인가?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마이어드 후작은 손해가 없었다.
어차피 다른 영주가 왕가를 세우기 위해서라도 레일리 왕녀라는 정통성을 포기하기는 힘드니까.
게다가 마이어드 후작은 늙었다.
그에게 허락되는 시간 안에 재건을 기대할 수는 없으니 어차피 남에게 맡겨야 할 일이었다.
“네패스 자작을 놔주게. 그의 대답이 듣고 싶군.”
바이든 자작은 믿었던 마이어드 후작의 배신에 충격을 받고 물러났다.
“네패스 자작. 그대는 어떤 대답을 하겠는가?”
고약한 늙은이였다.
이 상황에 나올 대답이 정해져 있다는 걸 뻔히 알 텐데도 구태여 묻다니.
하다못해 그가 부정해 주었다면 모를까 긍정한 시점에서 나는 거부할 명분을 상실했다.
“부족한 몸이지만 왕녀 저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 * *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연회가 파한 이후로 영주들은 침실로 돌아가지 못한 채 머리를 맞대어야 했다.
대표적인 대영주 파벌인 마이어드 후작이 설마 레일리 왕녀와 친척이었을 줄이야.
더구나 죽었다고 알려진 왕가의 혈족 중 한 사람인 그녀를 줄곧 숨겨두고 있었다.
“후작 각하는 이미 뜻을 굳혔소.”
차라리 그대로 계속 숨겼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혈육의 정을 못 이겨서 살려만 둔 것이라면.
그러나 마이어드 후작은 그 이상을 원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그녀가 대신 물려받기를.
결과적으로 레일리 왕녀가 이를 거부하기는 했으나 엉뚱한 이가 후계자로 떠오르며 지금의 혼란이 만들어졌다.
“남부에 한정해서 보자면 사실 나쁘지는 않소.”
게일 남작이 말했다.
현재 남부의 세력은 몇 남지 않았다.
그런데 가장 큰 세력인 마이어드 후작가와 그다음 규모인 네패스 자작가가 하나로 합쳐진다?
사실상 남부가 한 세력에 통일되는 것과 다름없었다.
“후작의 딸이라면 모를까 왕녀 저하시지 않소? 다른 대영주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겠소?”
“어차피 우리는 후작 각하와 한배를 탄 몸이 아니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영주들을 모두 적으로 돌리는 건 다른 문제요.”
영주들이 우려하는 건 레일리 왕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존재로 인해서 확정적으로 적이 될 다른 지역의 대영주들이었지.
“이미 심지에 불을 붙인 꼴이오.”
비밀을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연회에 참석하고 있던 영주들.
포상을 받으려고 대기 중이던 기사들.
그 근처에서 일을 하고 있던 시종들까지.
어림잡아도 쉰 명이 넘는다.
“네패스 자작이 받아들인 순간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소.”
“무슨 소리요?”
“남부에서 제일 큰 두 세력이 합쳐진 것이오. 남부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우리는 무조건 따라야 하오.”
“그야…….”
“혹 배신을 염두에 둔다면 잘 생각해 보시오. 다른 지역의 대영주들이 남부를 짓밟기 전에 우리가 먼저 응징당할 테니.”
배신하려면 영지를 버리고 달아나야 했다.
다른 지역의 대영주가 그만한 보상을 약속한다면 모를까 정보만 받고 죽이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설마 우리가 왕가를 위해 일하게 될 줄이야.”
“뭐, 나름 괜찮지 않소?”
그때 우익을 맡았던 영주 한 사람이 긍정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어차피 이 내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거요. 그런데 우리 남부는 빠르게 세력이 규합되었지. 거기에 정통성을 갖춘 왕녀 저하도 계시오.”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다른 지역도 평정해서 왕국을 통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게 해야만 하오.”
다른 지역의 대영주들이 언제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공격해 올지 몰랐다.
그렇다면 비밀이 새어 나가는 것보다 빠르게 그들을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터무니없는 소리요. 전쟁이라는 게 그리 간단히 끝나는 게 아니거늘.”
“네패스 자작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오.”
“그건…….”
영주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내전에서 보여준 활약상을 고려하자면 아예 불가능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었다.
레일리 왕녀 쪽도 놀라운 속도를 보여주기는 했지만, 네패스 자작은 그마저 넘어섰으니.
변두리의 한미한 영지를 다스리던 이가 불과 몇 개월 만에 남부에서 두 번째로 큰 세력을 거느리게 되지 않았는가?
범위가 왕국 전체로 늘어난다고 해도 그러지 못하리란 법은 없었다.
현재 대영주들도 내전으로 정신없기는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이미 화살은 쏘아지고 말았소. 되돌릴 수 없다면 뚫고 나가는 게 옳소.”
영주들은 각자 머리를 굴려봤다.
성공에 대한 보상은 어느 때보다 확실했다.
“성공만 한다면 돌아올 대가는 전례 없이 클 테지.”
그러나 실패에 대한 대가 역시 어느 때보다 가혹했다.
“대영주들을 모두 적으로 돌렸소. 그들을 꺾지 못한다면 이 왕국에 발을 붙이고 살 생각은 말아야 하오.”
시대의 풍랑에 맞서거나 도망치거나.
평생을 영주로 살아온 그들은 당연히 가진 것들을 내버린다는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
지켜야 할 가문과 영토를 내버리고서야 어디 가서 귀족이라 말하기도 부끄러우니까.
영지를 가진 귀족과 그렇지 못한 귀족의 차이란 무척이나 큰 것이었다.
“우리의 운명은 네패스 자작에게 달린 것이로군.”
레일리 왕녀가 한 가지 잘한 것이 있다면 네패스 자작에게 모든 힘을 집중시켰다는 사실이었다.
이번 일도 그렇고 레일리 왕녀를 믿고 따르라고 한다면 영주들은 대번에 질색했을 것이다.
차라리 도망치는 한이 있더라도 목숨을 보전할 방법을 찾았으리라.
그러나 네패스 자작이라면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 수는 있었다.
“젊은 영웅을 믿고 일생일대의 도박을 해야 할 처지라.”
영주 한 사람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과연 그를 믿을 수 있겠소? 솔직히 왕가의 재건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소. 네패스 자작을 믿고 따를 때 우리가 이 내전의 끝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보오?”
결국, 영주들이 가진 모든 걱정에 대한 답은 여기에 있었다.
네패스 자작에게 그럴 만한 자질이 있는가?
그리고 이를 판단할 근거는 지금까지의 행적뿐이었다.
“뭐, 지금은 믿을 수밖에 없겠지.”
영주들은 의견을 하나로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