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57화
VVIP 영주님의 품격 57화
57화
【 왕녀의 선택 】
나에 이어서 바이든 남작이 호명되었고 그도 자작이 되었다.
그러나 마이어드 후작의 부담은 이다음부터가 진짜였다.
객관적으로 좋은 공을 세운 좌익의 영주들이냐 혹은 큰 손해를 본 우익의 영주들이냐.
누구를 먼저 호명하느냐에 따라서 마이어드 후작에 대한 영주들의 태도가 달라질 게 분명했다.
영주들 사이에서도 긴장감이 흐를 때 마침내 마이어드 후작이 결단을 내렸다.
“게일 남작.”
그가 선택한 것은 좌익의 영주들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던 바였다.
‘레일리 왕녀 때문에 어쩔 수 없겠지.’
좌익의 영주들은 레일리 왕녀가 내민 전략으로 손해를 본 게 없었다.
그러니 원한이 생길 일도 없다.
게다가 그들을 먼저 챙겨주면 우익 영주들을 챙겨주는 것보다 결과적으로 적은 지출만 감당하면 되었다.
‘마이어드 후작이 입은 피해도 막대하니까.’
마이어드 후작은 카이로스 백작과 싸우며 누구보다 큰 손해를 입었다.
그의 기사단은 존속조차 힘들었고 휘하 병력의 희생도 매우 컸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카이로스 백작가가 다스리던 영토와 재물을 모조리 삼켜야 했으나 연합군을 결성한 이상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지출을 최대한 줄이는 수밖에.
물론 이 과정에서 우익 영주들의 불만을 사게 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정쩡하게 분배해서 두 세력 모두에게 불만을 사는 것보다는 한쪽이나마 확실한 아군으로 만드는 게 나았으니까.
그리고 세력을 크게 상실한 우익 영주들은 여차할 때면 내치기에도 쉬웠다.
‘게다가 레일리 왕녀를 위해서라도 이쪽이 나을 테지.’
마이어드 후작가를 빨리 회복시키지 못한다면 레일리 왕녀가 가질 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내전은 남부가 아닌 곳에서도 벌어지고 있었고 그중에는 남부를 위협할 새로운 적이 나올 수도 있었다.
레일리 왕녀를 생각한다면 몇몇 영주들을 내치더라도 후작가의 힘을 재건하는 게 급선무였다.
‘나를 시험해 볼 수도 있을 테고.’
지금 상황은 마치 나에게 등을 떠미는 것만 같았다.
가서 우익 영주들을 선동하라고.
확실히 저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건 분명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마이어드 후작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뜬 채 지켜보고 있다면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이빨이 빠졌어도 호랑이는 호랑이.
그가 확실한 근거를 찾아서 나를 배제하려고 한다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자, 내 성의가 부디 마음에 들었으면 하네.”
우익의 영주들까지 모두 포상한 마이어드 후작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불만을 가진 영주가 많았으나 그들은 쉽게 반발하지 못했다.
너무 큰 피해를 본 데다 먼저 나서기에는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일단 서로의 의견을 통일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다음 순서로 라일.”
마이어드 후작은 이어서 레일리 왕녀를 불러들였다.
영주들을 제외하고도 별도로 활약한 인물에 대한 포상이 마련된 것이다.
그리고 레일리 왕녀는 그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호명되었다.
‘결과는 시원찮았지만 어쩔 수 없지.’
아무 포상도 없이 넘어갈 수는 없다.
이는 마이어드 후작 자신의 체면과도 직결된 문제니까.
그리고 어쨌든 결과 자체는 승리였다.
여기서 이를 문제 삼는 건 승리를 부정하고 마이어드 후작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행동이었다.
“그대의 현명하고 영민한 머리로 무도한 카이로스 백작과 그 무리를 소탕하는 데…….”
마이어드 후작은 최선을 다해서 레일리 왕녀를 칭찬했다.
그녀가 대단한 공을 세웠다고.
상황을 잘 모르는 이가 본다면 정말 대단한 공을 세운 것처럼 보일 것이다.
심지어 가장 먼저 불렸던 나보다도 더.
그러나 이 자리에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모든 건 대영주인 마이어드 후작에게 어울려주는 연극에 불과했으니까.
“죄송합니다, 후작 각하.”
그때 연극이 삐걱이기 시작했다.
얌전히 후작의 변호와 변명을 들을 줄 알았던 레일리 왕녀가 갑자기 후작의 말을 끊어버린 것이다.
‘무슨 짓이지?’
마이어드 후작 본인은 물론 진실을 알고 있는 나와 바이든 자작마저도 이 일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레일리 왕녀의 저 말은 사전에 어떠한 논의도 되어 있지 않은 내용이니까.
“저는 후작 각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대단한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어찌 그리 말하는가?”
“저는 많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레일리 왕녀는 자신의 잘못을 하나씩 고했다.
카이로스 백작가 기사단의 전력을 오판하여 바이든 자작을 위험하게 만든 죄.
우익 영주들에게 심대한 손해를 입힌 죄.
폭염의 마법사 자크론의 존재를 알지 못하여 병사들을 희생시킨 죄.
그녀의 입에서 죄가 고해질 때마다 영주들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여기서 자신의 죄를 고하는 것은 절대 긍정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마이어드 후작의 치부를 드러내고 영주들의 분노를 살 행동이었다.
설마 레일리 왕녀가 그 정도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정말로 몰라서 하는 행동이라면 이는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고서도 하는 행동이라면 대체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
“만일 네패스 자작님께서 나서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패배했을지도 모릅니다.”
레일리 왕녀는 느닷없이 모든 전공을 나에게로 몰아주었다.
나로서는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식겁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우리 전력을 너무 낮춰보는 소리로군. 네패스 자작의 활약이 대단했던 건 맞지만 연합군의 승리는 자명했네.”
마이어드 후작이 식은땀을 흘리며 레일리 왕녀에게 반박했다.
이 자리는 어떻게든 레일리 왕녀를 띄워주어야 할 자리.
당연히 나를 위한 말이 나와서는 안 됐으니까.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이름 높은 삼기사 중 하나였던 루퍼스란 기사를 네패스 자작이 이미 무찔렀기 때문입니다.”
필사적으로 반박하던 마이어드 후작마저 말문이 막혔다.
연회장에는 무거운 정적이 찾아왔다.
영주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마이어드 후작의 입을 주시했다.
행여 저기서 레일리 왕녀에 대한 분노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어쩌면 그녀의 칭찬 대상이었던 나에게로 불똥이 튀지 않을까.
끝난 줄 알았던 남부 내전이 새롭게 시작되는 건 아닐까.
레일리 왕녀는 그 모든 불안을 떠안은 채 말을 이었다.
“네패스 자작.”
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난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는 나에게 존칭을 써야 옳았다.
하지만 쓰지 않는다.
나를 부르는 것이 바이든 자작의 조카 라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작.”
“설마…….”
“이리로 오세요.”
기존에 구상하고 있던 계획이 모두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지금 이 행동은 절대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처음 계획대로 레일리 왕녀의 전략에 따라서 훌륭한 승리를 거두었다면 또 모르지만.
그러나 지금 레일리 왕녀는 처참한 결과를 만든 범인이 된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신분을 알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누구도 왕녀의 신분인 그녀를 따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즉시 바이든 자작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래도 아직은 수습할 수 있었으니까.
술에 취해서 그렇다고 적당히 변명 하나 내놓으면 적어도 그녀의 신분만큼은 감출 수 있었다.
“바이든 자작.”
그러나 레일리 왕녀가 연달아 바이든 자작을 불렀다.
바이든 자작의 표정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한탄하듯 얼굴을 감싸 쥐었다.
“빌어먹을.”
입 밖으로는 곱지 않은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그것을 지적하기에는 영주들 모두가 지나치게 당황한 상태였다.
“어서.”
레일리 왕녀의 재촉에 바이든 자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 역시 마지못해 레일리 왕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게 대체 무슨?”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몇몇 영주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 놀란 얼굴을 했다.
반면 어떤 영주들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앞으로 나선 나와 바이든 자작은 그런 영주들의 반응을 빠짐없이 볼 수 있었다.
“전 저의 강한 의지와 저를 지지해 주는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있다면 왕가 재건은 얼마든지 가능할 거라 믿었습니다.”
레일리 왕녀의 말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바이든 자작은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아니었어요. 진짜 전쟁이란 어떤 것인지를 직접 경험해 보고 나서야 제 주제를 알았습니다.”
“저하.”
바이든 자작이 레일리 왕녀를 불렀으나 소용없었다.
“이번 싸움의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어요. 그러니 저는 그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저하!”
바이든 자작이 비명을 내지르듯 소리쳤다.
책임을 다하겠다.
당연하지만 승전에서는 책임질 게 없다.
그녀가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는 건, 이 싸움이 패배와 다름없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연합군을 이루고 있는 모든 영주의 무능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저하라고?”
“저하라니, 설마?”
바이든 자작의 외침은 쐐기가 되어 레일리 왕녀의 신분을 공개했다.
그에 한쪽에 있던 루카인 남작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는 게 보였으나 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맞아요. 저는 이 나라의 왕녀 레일리 크레시안입니다.”
폭탄이 터졌다.
나도, 마이어드 후작도 원하지 않았을 형태로.
“대체…….”
그때 마이어드 후작이 레일리 왕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대체 무슨 생각인 것이냐?”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였다.
그럴 만했다.
레일리 왕녀는 지금 성대하게 자폭하고 있었다.
마이어드 후작이 공들여 준비한 후계자 계획은 철저하게 망가지고 말았다.
왕녀의 존재를 믿을 수도 없는 영주들에게 완전히 개방했으니.
이제는 이 자리에 있는 영주들을 모조리 죽여서라도 입을 막아야 했다.
그러나 그런 짓을 벌인다면 마이어드 후작가는 남부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대영주라도 그런 일까지 감당하지는 못하리라.
“저로 인한 일에 책임을 지려는 겁니다.”
“책임이라니? 이 싸움은 승전이다.”
“피해를 입은 영주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도 못해주는 승전이죠.”
레일리 왕녀는 우익을 맡은 영주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과했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저로 인해 발생한 피해입니다. 그러니 제가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보다 정말 왕녀 저하이십니까?”
영주들은 혼비백산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제가 가진 모든 재산을 털어서라도 이번 피해에 대한 보상은 꼭 해드리겠습니다.”
사재를 털겠다는 레일리 왕녀의 말에 영주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받아들이기에도, 거절하기에도 애매하다.
그러나 의문과 의심보다는 실리가 먼저였다.
“정 그러시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이 받은 피해는 그만큼 컸으니까.
더구나 마이어드 후작이 자신들을 챙겨주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이상 비빌 언덕이 필요했다.
‘설마 저들을 설득하려고?’
혹시 우익 영주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레일리 왕녀가 이런 일을 했나 의심이 들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한 도박이었다.
게다가 좌익을 맡았던 영주들은 아무 이득도 없었고.
대영주 파벌로 살아온 이들이 굳이 왕녀를 편들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마이어드 후작이라도 건재했다면 또 모를까.
그러나 마이어드 후작은 이번 싸움으로 인해서 너무 큰 피해를 봤다.
다른 지역의 대영주들을 적대하기에는 승산이 없었다.
하물며 왕녀의 존재로 인해서 적이 될 대영주는 한둘이 아닐 터.
비밀이 새어 나가는 순간 모든 게 끝장이었다.
“그런데 왕녀 저하. 어째서 이 자리에 계신 건지 설명을 좀 해주십시오. 저는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영주들은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고 침착하게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제 모친께서는 마이어드 후작과 사촌이었습니다. 당연히 저 또한 남이라고 할 수 없지요.”
레일리 왕녀의 설명에 영주들의 입이 벌어졌다.
그야말로 상상도 못 했던 일.
그러나 모든 의문을 풀어주는 답이었다.
“그렇다면 마이어드 후작 각하께서는 왕녀 저하를 후계자로 정하신 겁니까?”
눈치 빠른 영주가 곧장 핵심을 짚었다.
단순히 혈연관계였다면 그저 정체를 숨겨주는 것에서 멈췄어야 했다.
그러나 마이어드 후작은 무리해서라도 레일리 왕녀를 드러내려고 했다.
이는 어떤 목적이 있었다고 봐야 했고 가장 유력한 목적은 공백인 그의 후계자 자리였다.
“그래요. 하지만 이번 일로 전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레일리 왕녀의 말에 영주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밝힌 이유가 다음에 나오리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레일리 왕녀는 입을 열었고.
“그래서 저 대신 네패스 자작이야말로 이 남부를 다스릴 적임자라 생각합니다.”
“네?”
내 입은 내 의사와 상관없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