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56화
VVIP 영주님의 품격 56화
56화
* * *
퇴각하던 카이로스 백작가의 기사들이 다시 되돌아온 순간 연합군은 기뻐했었다.
상대가 성으로 달아나 공성전을 하는 부담을 감수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이로스 백작이 되돌아온 이유는 항복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흐아압!”
카이로스 백작이 내지른 일격에 그에 맞서던 기사의 몸이 둘로 쪼개졌다.
모두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카이로스 백작과 그 기사들은 목숨을 내버리고 마지막까지 싸우려고 한다는 것을.
“영주님, 이대로 지켜만 봐도 되겠습니까?”
이를 본 로크가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나와 휘하 병력들은 여전히 싸움에 나서지 않은 채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전투가 마무리되면 뒷정리를 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이로스 백작이 돌아오면서 상황이 이상해졌다.
목숨을 내버린 카이로스 백작과 그 기사들은 남부 최고의 기사단다운 무위를 아낌없이 뽐냈다.
전공에 눈이 멀어서 달려들던 이들은 다시 한번 처참한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다른 기사들도 그렇지만 역시 카이로스 백작의 무용은 남다른 면이 있었다.
‘위압 효과도 있는 거 같고.’
아무리 상대가 강하다고 하지만 연합군이 필요 이상으로 겁먹고 위축되었다는 느낌도 있다.
물론 한계도 있었다.
3티어에 해당하는 로크나 릴리아나는 전혀 겁을 먹은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내가 명령을 내린다면 당장 가서 카이로스 백작의 목을 칠 기세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카이로스 백작은 수세에 몰렸고 그의 곁을 지키는 기사는 이제 몇 명 남지 않았으니까.
‘마지막으로 정보만 확인해 둘까?’
나는 조금 거리를 좁혀 삼기사 중 마지막 인물의 영웅 정보를 확인했다.
죽기 직전이지만 그에 대해서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영웅 정보]
이름 : 알렉스
국적 : 크레시안 왕국
소속 : 카이로스 백작가
유형 : 전투형
등급 : 4티어
칭호 : 위대한 암살자
스킬 : 기습(4), 단검술(4), 은신(3), 위장(3), 격투(2), 검술(2), 기마(1)
그리고 당황했다.
‘삼기사라더니?’
광전사였던 카이로스 백작은 적어도 기사다운 스킬은 구비하고 있었다.
반면에 알렉스는 어디로 봐도 기사로서는 부족한 이였다.
전면전을 하는 기사에게 기습이나 은신 같은 스킬은 의미가 없으니.
‘지휘는 아예 없고 기마도 겨우 익혔군.’
기사가 아니라 기사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인 암살자였다.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암살자면 암살자답게 활용해야지 뭐 하러 기사 행세를 하게 만든단 말인가?
제대로 된 암살자로서 활용했다면 카이로스 백작이 지금보다는 더 좋은 상황을 만들었을 것이다.
‘나였으면 영주 하나나 둘 정도는 죽였을 텐데.’
영주를 잃은 군대는 바로 옆에 후계자가 있는 게 아닌 이상 지리멸렬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기사 중 유능한 자라고 해도 전투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억지로 싸우려고 해도 불신과 망설임 정도는 새겨줄 수 있었다.
그러나 카이로스 백작이 저 뛰어난 암살자의 힘을 발휘한 건 마이어드 후작과의 싸움에서 딱 한 번뿐이었다.
그것으로 마이어드 후작이 공세를 취하게 만들어 한 차례 이득을 보았지만 겨우 그뿐.
멍청한 일이었다.
‘용병술에 심각한 문제가 있군.’
카이로스 백작가의 규모는 분명 마이어드 후작보다 열세였다.
그러나 품고 있는 힘은 충분히 마이어드 후작과 겨뤄볼 만했다.
당장 마이어드 후작에게는 4티어 영웅이 없던 반면에 카이로스 백작가에는 4티어 영웅이 넷이나 되었으니.
영웅 한둘로 전쟁을 해먹을 수는 없으나 휘하에 수천의 병력도 있었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카이로스 백작이 분전한 줄 알았는데 이래서는 정반대였다.
‘뭐, 그런 게 가능했으면 망나니 소리는 안 들었겠지.’
마지막까지 분투하는 용맹한 기사들이 있었을지언정 자크론은 결국 내 설득에 넘어갔다.
게다가 제 스스로 마법사 협회를 적으로 돌리는 거한 삽질도 해냈다.
인재를 알아보고 거두는 안목은 훌륭했지만 결국 거기까지가 카이로스 백작이 지닌 한계란 의미였다.
촤악!
“크윽!”
카이로스 백작의 팔뚝을 따라서 핏물이 솟아올랐다.
얼떨결에 공격에 성공한 기사는 이내 기회를 노리고 연달아 피해를 입혔다.
카이로스 백작은 악착같이 맞섰으나 누구도 그를 돕지 못했다.
그의 기사들은 이미 모두 땅에 누웠으니까.
알렉스마저도 드넓은 전장에서는 4티어라는 등급에 어울리는 활약을 보이지 못한 채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하압!”
마침내 어느 약소 영주의 기사가 카이로스 백작의 목을 베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으나 이내 환하게 웃으며 승전보를 전했다.
그에 따라서 카이로스 백작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지고 연합군은 확실한 승리에 기뻐할 수 있었다.
“엉망이군.”
거기에 나도 기뻐했다.
연합군은 완전히 엉망이었다.
그나마 정예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카이로스 백작가의 손에 몰살당했다.
이름 높았던 마이어드 후작가의 기사단은 생존자를 손으로 꼽아야 했고, 바이든 남작의 세력도 크게 약화했다.
숨겨져 있던 왕가의 병력마저 참패했으니 이 순간 나보다 뛰어난 군대는 남부에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수에서는 아직 부족하지.’
내 군대를 빼고 계산해도 대략 5천을 상회하는 전력이 아직 남아 있었다.
내가 마이어드 후작을 노리기 위해서는 나의 편에 설 영주들을 찾아야만 했다.
* * *
“자아, 모두 잔을 듭시다!”
카이로스 백작의 죽음 이후 연합군은 성까지 진격해서 점령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 추가적인 저항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미 군대가 몰살되었기에 저항할 수 있는 자가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영주들은 그날 밤 바로 승전 연회를 열 수 있었다.
준비하는 시간이 부족했던 터라 성대한 규모는 아니지만 괜찮았다.
이 자리에서 중요한 건 따로 있었으니까.
“여러 영주들의 도움을 받은 덕에 이렇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소.”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마이어드 후작 각하께서 잘 이끌어주신 덕분입니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친 덕이지요.”
마이어드 후작의 말에 영주들은 마음에도 없을 겸양의 말을 내뱉었다.
그게 가식인 이유는 그러면서도 은근히 자신의 전공을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힘들어지겠지.’
유감스럽게도 이번 내전에서 영주 중 진짜 제대로 전공을 세운 이는 드물었다.
나를 제외하자면 좌익을 공격했던 영주들이 유일할 것이다.
그러나 큰 손해를 본 것은 오히려 전공을 세우지 못했던 중군과 우익이었다.
마이어드 후작은 이제부터 연합군을 불러들인 대영주이자 전략을 주관했던 사령관으로서 이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보상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공을 세운 이는 공만큼의 보상을, 손해를 본 이는 손해만큼의 보상을 원한다.’
절대 공평한 보상은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섭섭하게 대하는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마이어드 후작은 레일리 왕녀에게 영주들의 지지를 이어주어야 하니까.
게다가 이번 내전으로 남부는 평정되었으나 다른 지역은 여전히 내전으로 고생하는 중이었다.
언제 다시 피바람이 몰아칠지 모르는데 여기서 원한을 만들어두는 건 현명하지 못했다.
‘과연 어떤 선택을 하려나?’
마이어드 후작이 어떠한 보상을 내릴지를 즐겁게 기다리기를 한참.
술잔이 몇 번 돌고 슬슬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때쯤 마침내 마이어드 후작이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대가를 바라지는 않았겠으나 도움을 받고 모른 척할 수는 없는 일. 이는 내 가문의 명예를 위한 일이기도 하오.”
드디어 기다리던 화제가 흘러나오자 영주들은 마치 선물을 받는 아이처럼 눈동자를 반짝였다.
“우선 네패스 남작.”
마이어드 후작은 가장 먼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정해진 순서는 없으나 통상적으로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를 먼저 부르는 게 관례였다.
그리고 이는 내가 받게 될 보상에 따라서 이후 받을 보상의 차등이 정해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젊은 영웅이란 말이 아깝지 않은 훌륭한 솜씨로 폭염의 마법사를 제압해 주었네.”
마이어드 후작은 하나씩 내 공적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사실 자크론을 잡은 것 이외에는 큰 역할을 한 게 없었으나 온갖 미사여구가 더해져 여러 다양한 공적들이 만들어졌다.
“내 어떤 선물을 주어야 할지 참으로 많이 고민하고 결정한 것이니 부디 마음에 들기를 바라네.”
그리고 마이어드 후작은 공적만큼 하나씩 보상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그가 말하는 재물은 솔직히 내 흥미를 끌지 못했다.
돈을 아무리 받아봐야 그저 군비로 요긴하게 쓰는 게 전부일 테니.
내가 진정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다른 쪽에 있었다.
‘승작과 영토라.’
마이어드 후작은 왕이 아니었다.
그러나 왕좌가 비어버린 현재 대영주인 그는 어느 정도 마음대로 행동해도 지적받지 않을 위치에 있었다.
여기에 모인 이들은 친왕실파도 아니니까.
그러니 마이어드 후작이 승작을 꺼낸 것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예상하고 있었다.
문제는 영토.
이는 그저 말뿐인 승작과는 달리 상당히 문제 될 부분이었다.
‘그래, 이게 당신의 선택이군.’
마이어드 후작이 나에게 내린 영토는 이번에 얻은 카이로스 백작가의 영토가 아니었다.
내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나에게 적대하지 않았고, 나도 굳이 건드리지 않은 중립에 해당하는 약소 영주들의 땅이었지.
이는 필연적으로 해당 땅의 원주인인 영주들과 나의 분란을 조장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어차피 그쪽도 거부하지는 못할 테니까.’
이제 나는 남부에서 마이어드 후작가 바로 다음가는 세력이 되었다.
보통의 영주가 대영주에게 저항하지 못하듯 그들 역시 불만은 품을지언정 자연스럽게 무너지게 될 것이다.
아마 마이어드 후작은 그들의 불만을 이용해서 나를 견제하려고 할 셈이겠지만…….
‘어차피 그럴 기회는 주지 않을 테니까.’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받아들일 수 있었다.
* * *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군.’
마이어드 후작은 자신이 내민 자작의 작위와 영토를 아무 반발 없이 받는 아인의 모습에 눈을 흘겼다.
뭐라도 한마디 정도는 있을 줄 알았기에.
아니면 동요하는 기색이라도 보이거나.
하지만 아인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또 여유 있게 이를 받아들였다.
이미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이.
‘뭐, 당연한 일인가.’
카이로스 백작의 세력이 무너지고 남부에서 힘을 갖춘 세력은 셋으로 줄었다.
마이어드 후작 자신과 아인 그리고 뒤이어 승작시킬 예정인 바이든 자작.
그러나 이 셋은 균형이 전혀 맞지 않았다.
이번 싸움에서 마이어드 후작가와 바이든 자작가가 큰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알려지지 않았던 왕가의 병력까지 크게 상실하며 마이어드 후작은 가지고 있던 패를 모두 잃게 됐다.
반면 아인은 이번 싸움에서 그 어떠한 손해도 보지 않았다.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았으면서 가장 큰 전공을 챙겨 간 것이다.
이에 견제를 받게 될 건 당연히 예상할 수 있었으리라.
‘섭섭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그저 단순히 아인의 세력이 커졌다는 이유만으로 견제하는 게 아니었다.
마이어드 후작은 이 기회에 아인이 레일리 왕녀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될 상대인지를 시험하고 싶었다.
아무리 군신 관계라는 것이 서로의 이득을 챙겨줘야 한다지만 때로는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밀어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조금의 손해도 용납하지 못하는 이는 제대로 된 충성을 바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이 자리에서는 아무 말이 없더라도 파하고 나면 뭐라도 말을 꺼내겠지.’
마이어드 후작은 멀리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레일리 왕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녀는 아인을 옹호했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제대로 알게 될 것이다.
상대가 신하로서 정말 믿을 수 있는 상대인지 아닌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