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55화
VVIP 영주님의 품격 55화
55화
테인 준남작의 숨통을 끊은 카이로스는 휘하 기사들을 돌아봤다.
패배에 이은 충격적인 상황에 많은 이들이 당황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성으로 퇴각에 성공해 봐야 어떤 결과가 나올지 불 보듯 뻔했다.
애초에 길을 막고 선 마법사들도 뚫기 힘들었지만.
“그래, 내가 졌군.”
선택지가 없어지자 카이로스는 오히려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어쩔 도리가 없는 참패.
마이어드 후작을 비롯한 연합군도 문제지만 마법사 협회마저 적이 되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자신을 따르는 충성스러운 기사들에게 남은 결말도 이제는 죽음뿐이었다.
“항복밖에 남지 않았어.”
“안 됩니다! 아직 방법이 있을 겁니다!”
“맞습니다! 제가 길을 뚫을 테니…….”
“됐다.”
카이로스는 최후까지 저항하려는 기사들을 만류했다.
“그대들까지 죽을 필요는 없다. 마지막 싸움은 나 혼자서 할 테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카이로스는 다시 말에 올라 몰려오는 적들을 보았다.
그야말로 개미 떼처럼 바글거리는 적들.
자신을 발견한 추격대는 전공을 위해서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알렉스 경.”
카이로스는 마지막으로 알렉스를 불렀다.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라. 다른 기사들은 몰라도 그대라면 시도 정도는 가능하겠지?”
카이로스의 물음에 알렉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기사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기사들처럼 전장에서 활약하지는 못해도 다른 방식으로 행동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빠져나가는 일 또한 그 혼자라면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진심이십니까?”
“그대의 충성이 진실함을 알았다. 충성스러운 신하가 모자란 나 때문에 죽기를 원치 않는다.”
지금까지의 카이로스라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에 알렉스는 울분을 삼켰다.
지금의 카이로스에게는 과거 마족과의 전쟁에서 활약한 젊은 영웅의 모습이 그대로 보이고 있었다.
망나니가 아니라 진짜 영웅이었던 이가.
“마지막까지 함께하겠습니다.”
알렉스는 결연히 의지를 다졌다.
“바보 같으니.”
카이로스는 살길을 포기한 알렉스의 행동에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무능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그럼 같이 가자.”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알렉스가 목숨을 버리는 선택을 고르자 다른 기사들도 이에 질세라 소리쳤다.
“끝까지 함께 싸우겠습니다!”
“모두 주군을 따라라!”
“마지막 싸움이다! 뒤처지는 놈은 용서하지 않겠다!”
카이로스는 멍하니 자신의 기사들을 보다 유쾌하게 웃었다.
“고맙다, 모두. 그럼 놈들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똑똑히 보여주자. 꿈에서라도 잊지 못할 악몽을 선사해 주는 거다! 선봉은 내가 맡겠다!”
카이로스가 먼저 선봉에 나서자 기사들은 카이로스의 뒤를 따라 말을 몰았다.
몰려오는 적들을 향해 무모한 돌진을 감행한 것이다.
잠자코 이 광경을 바라보던 마법사들은 새삼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망나니라고 악명을 떨친 카이로스임에도 죽음까지 함께하는 기사들이 저토록 많이 있었다.
“완전한 허명은 아니었나.”
가이트는 최후의 불꽃을 태우는 카이로스와 그의 기사들을 지켜봤다.
카이로스는 철저하게 실력으로 자신의 기사들을 선별한 영주였다.
오직 실력만이 조건이었던 만큼 그를 따르는 이들의 출신은 다양했다.
가문이 내놓은 사생아나 몰락한 영지의 기사.
일개 병사에 불과했던 평민과 억지로 전쟁에 내몰린 농노.
심지어 멸시받는 암살자 출신의 알렉스까지 껴 있었다.
“남부 지부장.”
그때 원로 중 한 사람이 가이트를 불렀다.
가이트는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네, 넵!”
“네패스 남작은 어떤 인물이지?”
원로의 물음에 가이트는 멈칫했다.
협회의 마법사들은 줄곧 전장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만일 연합군이 패배한다면 마법사들의 가족을 구해낸 협회의 입장도 상당히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크론이 나타났을 때 협회에서는 원로들이 직접 나서서 자크론을 제압할지를 두고 고민까지 해야 했다.
하지만 다행히 협회가 더 개입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협회의 원로들이 나서지 않고도 자크론이 제압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크론을 제압한 인물은 바로 최근 남부에서 명성을 떨친 플레턴의 제자였다.
“플레턴이 엄청난 제자를 들였더군.”
자크론의 제압은 원로들이라도 자신할 수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3명이 모두 나선다면 손쉽겠지만 일대일로는 아무리 마나를 상당히 소모한 자크론이라도 어려웠다.
일반적으로 제압이라는 건 죽이는 것보다 힘든 일이었으니.
그러나 플레턴의 제자는 그 일을 해냈다.
“게다가 단죄의 서에 있던 자신의 비전 마법까지 넘겨줬고.”
마법을 상세히 나누자면 그 분류가 한없이 많으나 간결하게 두 가지로 나누자면 일반 마법과 비전 마법으로 구분이 되었다.
일반 마법은 누구에게 가르쳐도 제한이 없는 대중적인 마법으로 마법사라면 그 종류나 효과를 훤히 꿰고 있는 게 기본이었다.
반면 비전 마법은 한 마법사가 일생을 바쳐서 개발하고 그것을 자신의 후계자에게만 물려주는 마법이었다.
그렇기에 비전 마법을 배웠다는 건 그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넘어 후계자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귀족을, 그것도 영주를 제자로 받아들인 것도 모자라서 비전 마법까지 내줬다라.”
원로는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직접 본 결과 그 재능은 진짜였다.
자크론을 제압했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상대는 그저 재능 있는 마법사가 아니라 귀족이었다.
그것도 영주였고 현재 남부에서 가장 크게 성장한 이였다.
자칫 잘못하면 남부 지부 전체가 상대의 손아귀에 넘어갈지도 몰랐다.
“그, 그것이…….”
원로들의 우려에 가이트는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아인에 대해 평가하자면 마법사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재능을 가진 인물이다.
그렇지만 협회에 있어서는 절대 긍정적인 영향만을 주지는 않을 족속이었다.
그러나 플레턴은 그것을 감수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다른 원로들이 이런 플레턴의 독단을 받아들일 리 없으니 최대한 아인을 포장해야 했다.
“내 제자에 관심 있나?”
바로 그때 플레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식도 없이 나타난 그의 모습에 원로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플레턴. 대체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거지?”
“처음부터 있었지.”
원로들의 물음에 플레턴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에 원로들은 침음을 흘렸다.
바로 뒤까지 플레턴이 다가오는 걸 알아차린 마법사가 없었으니까.
“이렇게 중대한 사안에 내가 모습을 보이는 게 이상한가?”
“그거야…….”
플레턴이 따지자 원로들은 할 말이 궁했다.
“플레턴, 쓸데없는 이야기는 집어치우지.”
그때 다른 두 원로들을 밀어내고 한 원로가 앞으로 나섰다.
노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체격과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자였다.
“오랜만이구나, 벨로스.”
플레턴은 상대의 이름을 부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벨로스는 플레턴과 같은 스승 아래에서 수학했던 사형제였다.
“그런데 플레턴이라니.”
하지만 다음 순간 플레턴의 눈가가 사납게 휘어졌다.
쿠웅!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내리누르는 것 같은 압력에 원로들이 휘청거렸다.
“말이 지나치게 짧군.”
“크윽!”
플레턴의 압박에 벨로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겨우 이 정도 마나로!”
하지만 그것도 잠시 벨로스는 플레턴의 기세를 뿌리쳤다.
그에 플레턴은 흥미로움을 느꼈다.
그가 알고 있는 것보다 벨로스가 한층 더 성장해 있었기에.
“내가 언제까지 당신 아래일 거라고 생각하지? 난 옛날의 내가 아니야.”
같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배웠으나 플레턴과 벨로스의 관계는 빈말로라도 좋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연륜도 앞서고 재능도 뛰어났던 플레턴은 스승의 뒤를 이은 후계자가 될 수 있었다.
반면 나이도 어리고 재능도 부족했던 벨로스는 그저 그런 제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후 벨로스는 부단한 노력으로 자신만의 성과를 이뤄 협회의 원로직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확실히 성장했구나.”
플레턴은 벨로스의 성장에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벨로스가 플레턴과 대등해진 것은 아니었다.
같은 원로일지라도 직책에서 차이가 있으니까.
벨로스가 최근에 원로가 되어 유명무실한 자리를 하나 얻었다면 플레턴은 집행관이라는 특수한 위치에 있었다.
이는 마법사 협회의 무력을 담당하는 위치로 유사시 죄를 저지른 마법사를 제압하고 나아가 처단하는 자리였다.
누구보다 전투에 능해야 하는 자리이기에 원로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 마법사만이 집행관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사형에 대한 불손한 행동은 용납하지 않겠다.”
“누구 멋대로 사형이라는 거냐!”
벨로스는 울분을 담아 소리쳤다.
스승의 관심은 애제자였던 플레턴에게 집중되었고 비전 마법 또한 오직 플레턴만이 배울 수 있었다.
언제나 믿고 따랐던 스승의 차별은 벨로스에게 큰 상처였다.
이에 벨로스는 자신의 스승과 사형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아무튼 내 제자에게는 무슨 관심이냐? 설마 나에 대한 원한을 내 제자에게 푼다는 그런 얼토당토않은 마음은 아니겠지?”
플레턴의 의심에 벨로스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는 자신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었다.
“나를 어찌 보고! 내가 네 제자에 대해 물은 건 네 녀석의 의중이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내 의중?”
“어째서 마법사 협회에서 귀족들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지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벨로스의 의심에는 나름 근거가 있었다.
하필이면 상대가 영주나 되는 권력을 가진 귀족이라는 것.
이는 보통의 마법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험성이었다.
“그런데 너는 영주씩이나 되는 녀석을 제자로 들였다! 그 위험성을 모르지는 않을 터!”
“난 또. 겨우 그런 문제였느냐?”
“겨우? 이게 그리 가벼운 사안은 아닐 텐데?”
“아니, 한없이 가벼운 문제지.”
플레턴은 무심하게 읊조렸다.
“마족들을 상대할 일에 비해서는.”
플레턴이 툭 던진 이야기에 원로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비전 마법까지 가르친 걸 보고 짐작하기는 했지만…….”
“하지만 플레턴, 상대는 귀족일세. 그것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야.”
영주라고 해도 변방의 한미한 가문이라면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대는 이 내전에서 무지막지한 속도로 힘을 키우고 있는 신성이었다.
일개 지부에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물로 성장하고 있었기에 협회에서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마법사 협회가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결국 그들은 귀족이 아니니까.
귀족의 세상에서 그들이 가질 수 있는 권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내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으면 그런 불확실한 추측이 아니라 제대로 된 근거를 가져오게. 벨로스, 너도 마찬가지다.”
“큭!”
벨로스는 이를 갈았지만 플레턴이 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항의는 불가능했다.
확실히 그들의 우려는 아직까지 우려 수준일 뿐 명확한 근거가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아예 귀족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물론 그런 규정을 만드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라서 만들지 않았을 뿐 암묵적인 규칙이기는 했다.
그러나 암묵적인 것은 결국 명문화되지 않았으니 근거가 될 수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헛된 마음은 품지 마라. 내가 언제까지나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벨로스는 엄한 경고를 날리고 모습을 감췄다.
그의 뒤를 이어 원로들과 마법사들도 사라지자 플레턴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드디어 협회에서 아인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 관심은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이제 올 것이 왔군요.”
가이트는 해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처음 플레턴이 아인을 제자로 받아들일 때부터 이런 날이 오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 일로 자신이 심하게 고생하게 되리란 것 역시.
“뭘. 빌미를 주지 않는 이상 놈들도 이 이상은 파고들지 못할 텐데. 걱정할 필요 없다.”
“벨로스 원로님은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벨로스는 절대 악인이 아니다.
하지만 플레턴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기에 플레턴과 관계된 이 일에 미친 듯이 달려들 게 분명했다.
“쯧. 그놈은 왜 그렇게 엇나간 건지.”
플레턴은 혀를 찼다.
스승이 자신을 후계자로 정한 것이다.
자신이 부정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능력에서 앞섰기에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벨로스는 거기에 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벨로스의 재능도 플레턴에 비해서 아래일 뿐, 결코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는 뛰어난 제자가 둘이나 있었기에 벌어진 문제였다.
플레턴은 이미 오래전 땅에 묻힌 스승이 새삼 원망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