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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영주님의 품격-54화 (54/250)

VVIP 영주님의 품격 54화

VVIP 영주님의 품격 54화

54화

* * *

“젠장! 젠장! 젠장!”

카이로스 백작과 그 휘하 기사들은 패배에 이어 초라한 퇴각에 나서야 했다.

분명 처음 양상은 나쁘지 않았다.

연합군에게 큰 피해를 줬으니까.

그러나 받은 상처의 깊이는 카이로스 백작 쪽이 더 치명적이었다.

원래부터 부족했던 병력은 이제 거의 남지 않았고 비장의 카드였던 자크론마저 아인에게 패했기 때문이다.

카이로스 백작은 설마 자크론이 패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다.

더구나 인질까지 잡아서 절대 안전하리라 여겼던 마법사들마저 배신했으니.

“가족들이 인질로 잡혔는데 한꺼번에 배신하다니. 설마 인질을 모두 구해낸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그 경우밖에 없었다.

가족의 안전이 확보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배신하는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았을 테니.

“그럴 리 없습니다. 인질로 잡은 마법사들의 가족은 세 군데에 나눠서 가둬뒀거늘.”

하지만 그 일을 직접 담당했던 테인 준남작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마법사들이 가족을 구해내기 위해 나설 건 뻔한 일이기에 당연히 대비해 둔 상태였다.

인질들을 모두 세 곳에 나누어 두었고 마법사들에게 여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마법사들이 인질을 구할 기회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럼 도대체 놈들이 뭘 믿고 배신한 거지?”

테인 준남작의 설명에 의문이 짙어질 무렵.

성으로 퇴각하는 그들의 앞을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가로막았다.

그들은 다가오는 카이로스 백작을 발견하자 마법을 퍼부었다.

“뭣?”

한순간에 눈앞을 뒤덮는 마법의 향연에 천하의 카이로스조차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놀랍게도 그들을 가로막은 이들은 전원 마법사였다.

자리를 잡고 있는 이들의 수를 생각하면 놀랄 일이었다.

저만한 규모의 마법사는 대영주라고 해서 쉽게 거느릴 수 없었으니까.

콰콰쾅!

일대를 뒤덮는 폭격에 카이로스 백작가의 기사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젠장! 저놈들은 또 어디서 나타난 거야?”

연합군의 마법사는 이미 모두 전투에 투입된 상태였다.

더구나 제정신이 박혔다면 마법사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이 기사의 앞을 가로막을 리 없었다.

최소한 앞을 지켜줄 울타리 정도는 있어야 했는데 상대는 그런 대비조차 갖추지 않은 상태였다.

“혀, 협회입니다.”

같은 의문을 품고 상대를 주시하던 테인 준남작은 곧 그 정체를 알아보았다.

상대의 정체는 다름 아닌 협회의 마법사들이었다.

“뭐? 협회라고? 설마 저놈들이 다 협회의 마법사들이란 소리냐?”

카이로스는 어이가 없었다.

이미 내전에 끼어들지 않기로 표방했던 협회가 이제 와서 왜 나타난다는 말인가?

그러나 곧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밑의 마법사들이 인질이 있음에도 배신할 수 있던 건 누군가가 인질을 구해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세력은 마법사 협회가 유일했다.

“마법사 협회 주제에 감히 귀족들의 일에 끼어들어? 협회는 중립이라더니 다 거짓이었나?”

카이로스의 항의에 가로막고 있던 마법사들 중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남부 협회의 지부장 가이트였다.

“그럴 리가요. 귀족분들께서 무엇을 하든 협회와는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지만 선은 지키셨어야죠.”

가이트는 무덤덤하게 카이로스를 응시했다.

왜 애꿎은 마법사들의 가족을 인질로 잡는단 말인가?

이 일은 일개 지부장인 가이트로서는 어찌하지 못할 대사건이었다.

당연히 본부에도 보고를 올려야 했고, 마법사 협회의 본부에서는 원로 회의까지 개최되었다.

“원로 회의 결과 이러한 일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협회가 직접 나설 필요가 있다고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협회는 인질이 된 가족들을 구해내기 위해 은밀하게 움직였다.

카이로스 백작에게 들키지 않도록 아예 다른 지역의 마법사를 동원했으며, 이 과정에서 다수의 원로까지 행동에 나섰다.

“그 결과 원로님이 세 분이나 나섰지요.”

가이트는 얼마 전 일을 떠올리고 혀를 찼다.

남부 지부는 움직임이 들키지 않도록 평상시와 같은 상태를 유지했으나 가이트는 원로들로부터 갈굼을 받아야만 했다.

협회가 오죽 우습게 보였으면 가족들을 인질로 잡았겠냐며 원로들이 그에게 성화를 부렸기 때문이다.

“이제 알겠습니까? 이 망나니 놈아.”

가이트는 존대도 집어치우고 싸늘한 눈으로 카이로스를 노려봤다.

자신이 받은 갈굼과 스트레스가 얼마인지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었다.

당연히 카이로스에 대한 태도 역시 고울 수 없었다.

“하! 뒤에서 공격하는 것밖에는 재주가 없는 것들이.”

그러나 카이로스는 그런 가이트를 향해서 오히려 조롱을 보냈다.

“내가 네깟 놈들을 신경 써줘야 하나?”

그 적반하장에 마법사들은 딱히 분노하지 않았다.

망나니로 유명한 상대에게 정상적인 행동을 기대하는 게 도리어 이상했으니까.

더구나 귀족이란 이런 존재라는 걸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뭐, 그렇지는 않지. 협회 방침에도 어긋나고. 하지만 먼저 건드리지는 말았어야지.”

“그래서? 네깟 놈들이 날 죽이기라도 할 생각인가? 귀족을 건드리고도 무사할 거 같아?”

카이로스의 분노에 가이트는 실소를 흘렸다.

“뭐 하러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하지?”

“뭐?”

두두두!

가이트의 말에 대한 대답은 카이로스의 뒤편에서 나왔다.

연합군에 소속한 군대가 바로 뒤까지 따라붙은 것이다.

성으로 퇴각하던 카이로스는 그제야 마법사들이 앞을 막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직접 손을 더럽히지 않고도 자신들을 처리할 자신이 있던 것이다.

“우리는 이 길만 지키면 되는데?”

“이놈들이!”

카이로스가 나서기 전 그의 옆에 있던 테인 준남작이 먼저 칼을 빼 들고 마법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앙!

그러나 테인 준남작의 칼은 마법사들에게 닿지 못했다.

수십 겹이나 되는 마나 실드가 마법사들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다른 기사들이 동참해서 길을 뚫으려고 했으나 실드의 파괴보다 새로 만들어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이에 카이로스 백작가의 기사들은 당황했다.

마이어드 후작가의 기사단도, 바이든 남작가의 기사단도 모조리 꺾은 자신들이었으니까.

아무리 지친 상태라지만 고작 마법사들에게 가로막힌다는 건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는 마법사들의 수준을 고려하지 못해서 일어난 착각이었다.

“말했을 텐데? 원로님들께서 세 분이나 나섰다고.”

가이트의 말과 함께 세 명의 원로 마법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무심한 눈으로 발악하는 카이로스 백작가의 기사들을 보았다.

상태가 온전했다면 또 모를까 이미 지치고 상처 입은 그들은 원로를 뚫어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기가 그대의 최후다. 카이로스 백작.”

“하찮은 마법사들이 감히!”

가이트의 선언에 카이로스는 이를 갈며 덤벼들었다.

그러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수십 차례나 검을 휘둘렀으나 마나 실드는 두꺼웠고 오히려 공격하던 카이로스가 지쳐서 휘청였다.

“참 추하군. 이게 한때 촉망받는 영웅이었던 카이로스 백작인가.”

“마족과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유능한 자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군.”

카이로스를 향해 협회의 원로들은 혹평을 쏟아냈다.

마족과의 전쟁에서 인류는 많은 영웅을 배출했었다.

그중에서 크레시안 왕국 출신의 유명한 영웅이라면 단연 카이로스 백작을 빼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자는 영웅이라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처절했다.

“으아아아!”

원로들의 평가에 카이로스는 격앙되어 괴성을 내질렀다.

이러한 원로들의 행동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마법사 협회를 건드린 카이로스를 일부러 조롱하는 것이다.

직접 손을 써 복수를 하지 못하는 협회에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분풀이였다.

“후. 어쩔 수 없군.”

그때 카이로스 백작가의 기사단 사이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카이로스의 최측근인 테인 준남작이 자신의 검을 내버린 것이다.

명백한 항복 선언이었다.

“테인 준남작, 그게 무슨 짓이오?”

테인 준남작의 행동에 곁에 있던 기사들이 기겁하며 그를 불렀지만, 테인 준남작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전쟁의 패배는 결정된 상황.

더구나 퇴로마저 막혔다.

이 이상 저항을 해봐야 무의미했고 도리어 목이 잘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항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싸움은 우리의 패배요.”

“그게 어쨌단 말이오? 기사라면 응당 마지막까지 주군과 함께해야 하는 법이거늘!”

한 상급기사가 결연하게 말하자 주변의 기사들은 그에 감화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망나니라 불리더라도 자신들을 알아보고 인정해 준 카이로스였다.

“그렇다면 더욱 후일을 도모해야 하지 않겠소? 지금 싸워봐야 개죽음일 뿐이오.”

테인 준남작은 카이로스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언제나 자신에게 반대한 적 없던 테인 준남작의 돌발 행동은 카이로스조차 놀라게 하고 있었다.

“지금은 항복해야 할 때입니다.”

“그게 무슨? 그런다고 죽음을 피하지는 못할 거다.”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모두를 죽이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훗날의 기회를 마련하려면…….”

테인 준남작이 카이로스를 설득하려 할 때였다.

“입에 발린 소리를. 그렇게 충성스러운 자가 굴을 두 개 파놓나?”

잠자코 있던 알렉스가 냉소적인 어투로 테인 준남작을 비웃었다.

“무슨 의미로 하는 소리지? 알렉스 경.”

“내가 기사로서는 부족해도 더러운 일에는 능하지. 테인 준남작, 주군의 재산을 상당히 많이 빼돌려뒀더군?”

알렉스의 밀고에 카이로스는 눈을 부릅뜬 채 테인 준남작을 노려보았다.

아예 몰랐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아첨꾼이니만큼 떨어질 재물을 노릴 거란 건 카이로스도 예상한 바였다.

그러나 테인 준남작은 카이로스의 예상을 능가하는 이였다.

“웬만큼 크고 비옥한 영지 하나는 사고도 남을 재산. 게다가 그 재산을 착복하는 과정에서 백작님의 이름을 팔아 악명을 떠넘겼지.”

“뭐?”

이 일은 카이로스로서도 들어본 적 없었다.

설마 테인 준남작이 자신의 이름을 팔아서 재산을 불리고 있었을 줄이야?

“그,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내 충성심만큼은 달라지지 않는다!”

심상치 않은 카이로스의 눈길에 테인 준남작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알렉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굴을 두 개나 팠다는 걸 내가 안다고 말했을 텐데? 마이어드 후작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테인!”

내통이란 단어에 카이로스는 눈이 뒤집혀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뒷주머니를 챙긴 것과 내통을 한 것은 죄질이 전혀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아, 아닙니다!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목을 붙잡힌 테인 준남작은 알렉스의 말을 격하게 부정했다.

이에 재차 시선이 돌아오자 알렉스는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마이어드 후작에게 패한다면 백작가의 재산을 바쳐서 제 목숨을 구할 생각이었겠지. 그리고 빼돌린 재산으로 호의호식하고.”

연합군이 모이자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는지 테인 준남작은 은밀하게 마이어드 후작과 접촉했다.

그렇다고 완전히 전향한 것은 아니었다.

테인 준남작은 마이어드 후작과 카이로스 백작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어느 쪽이 이기더라도 자신의 목숨과 재산을 챙기기 위해.

“거짓입니다! 이 싸움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마이어드 후작은 큰 손실을 봤습니다! 제가 내통을 했다면 그런 일이 있었겠습니까?”

“중요한 정보는 넘기지 않고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정보들만 넘겼으니까. 하지만 마이어드 후작의 입장에서 거부하기는 어렵지.”

무려 대영주나 되는 이의 영지와 재산을 수습하려면 이를 잘 아는 인물이 필요했다.

더구나 연합을 결성한 만큼 모였던 영주들에게 한 몫을 내줘야 하기에 마이어드 후작은 원치 않더라도 테인 준남작을 살려야만 할 처지였다.

즉 반대로 말하면 아무리 저항해도 테인 준남작을 죽이기 어렵단 의미이기도 했다.

굳이 테인 준남작이 감수해야 할 위험성을 논하자면 전투 도중에 눈먼 칼에 맞아 죽는 것뿐.

하지만 테인 준남작이 한때나마 카이로스를 직접 가르친 스승임을 고려하면 가능성이 낮은 일이었다.

삼기사에 미치지는 못하나 그 아래의 상급기사 수준은 되는 이였으니까.

“알렉스 경, 왜 이 사실을 미리 말하지 않았지?”

카이로스는 마지막 의문을 담아 알렉스에게 물었다.

그에 알렉스는 서글프게 말했다.

“우리에게는 테인 준남작이 필요했습니다. 최소한 가능성이라도 남겨두기 위해선.”

테인 준남작이 카이로스 백작가에 미치는 영향력은 엄청났다.

그가 내통한 사실이 알려지면 사기가 떨어질 것은 자명했고, 연합군에 대한 두려움이 퍼질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만 말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지금까지 숨긴 것이냐?”

“감정을 숨기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잖습니까.”

일전에 테인 준남작이 카이로스 백작의 무모한 행동을 말리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였다.

알렉스의 진심을 느낀 카이로스는 그대로 테인 준남작의 목을 비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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