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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영주님의 품격-53화 (53/250)

VVIP 영주님의 품격 53화

VVIP 영주님의 품격 53화

53화

아쉽게도 이 승리의 기쁨을 오래 누릴 수는 없었다.

아직 전투는 진행 중이었고, 자크론이 쳐놓은 불길은 사그라들고 있었으니까.

나는 적들이 몰려오기 전에 서둘러서 자크론에게 다가갔다.

“너! 역시 이 마법을 배웠었구나! 그런데 마지막까지 꼭꼭 숨겨놔?”

마나 쇼크에 적중당한 자크론은 무방비 상태가 된 채 치를 떨고 있었다.

역시나 자크론은 플레턴에게 마나 쇼크에 당한 전적이 있던 모양이다.

그걸 예상했기에 마지막까지 숨기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한 것이지만.

“그럼 모시고 가겠습니다.”

“이런 망신이 다 있나.”

침울해하는 자크론에게 최대한 정중함을 유지했다.

아무렴 이제부터 내 두 번째 스승이 되어줄 상대니까.

더구나 이번 싸움으로 내 밑천은 자크론에게 고스란히 노출된 상태였다.

“정당한 승부가 아니었지 않습니까? 제 순수한 실력이 아니었으니 망신이라 할 수 없지요.”

“그런 입에 발린 소리에 내가 기뻐할 거 같으냐? 이 뱀 같은 놈아.”

난 자크론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했지만 자크론은 오히려 역정을 냈다.

“대체 왜 플레턴이 너 같은 놈을 골랐지? 그놈이라면 좀 더 착실한 녀석을 제자로 둘 줄 알았는데.”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말입니까?”

내 물음에 자크론의 입이 다물어졌다.

플레턴은 내 목표를 알고 있었다.

내가 적당한 평화에 안주하거나 주변을 챙기는 대신 내 역량이 닿는 곳까지 올라가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당연히 이 과정에서 무수한 피가 흐르게 되리란 것도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험은 있었을지언정 결국 플레턴은 나를 선택했다.

“시대에는 시대에 맞는 가치가 있는 법이죠. 자크론 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나에게 제압당한 상태지만 자크론은 짧은 시간 동안에 이 전장에서 가장 많은 이를 죽인 마법사였다.

카이로스 백작이나 알렉스 같은 전투형 영웅들이 노력해 봐야 마법형 영웅의 학살 숫자를 넘어설 순 없었다.

그러나 이런 악명을 쌓고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누구도 자크론을 처벌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도, 마법사 협회에도 자크론의 힘은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니까.

“그럴 테지. 하아, 그래도 너 같은 거랑 엮이고 나니까 내가 잘못 살아온 게 아닌가 싶다.”

“제가 어떻다고 그러십니까?”

“카이로스 백작도 어지간한 놈이지만 그 녀석은 다분히 직설적이고 감정적이지. 개새끼일지언정 너처럼 음흉한 구석은 없다.”

망나니로 유명한 카이로스 백작보다도 내가 더 나쁘다는 평가였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카이로스 백작이랑 비견될 정도인가?

충격적이다.

그러나 태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이 자리에서 죽을 놈보다야 당연히 제가 더하지 않겠습니까?”

“섬뜩한 소리로군.”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와 자크론은 전장을 벗어나 연합군의 본진에 도달했다.

다행히 추격은 없었다.

카이로스 백작과 기사들이 자크론에게 방해를 받은 다음에 우익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전투 초반에도 카이로스 백작이 날뛰었고, 이후 자크론이 다시 급습한 덕에 아군 우익은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거기에 재차 카이로스 백작이 몰아쳤으니 우익으로 들어간 아군 영주들의 군대는 대패하고 말 것이다.

중군도 졌는데 우익까지 무너지는 것이다.

‘딱 이상적인 구도야.’

하지만 이는 나에게 매우 이상적인 흐름이었다.

본래라면 우익의 예비대로 준비된 내가 우익의 위기에 맞춰서 출정해야 했으니까.

그러나 자크론을 막느라 영주인 내가 자리를 비웠기에 내 부하들은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덕분에 처음의 예정과 달리 우익은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했고 나는 아무런 피해도 보지 않은 채 내 명성을 드높였다.

우익을 담당한 영주들이 나에게 항의할 수도 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본진과 인접한 중군이 더 중요하기도 하고, 그 중군에 있던 이가 바이든 남작과 마이어드 후작이니까.

대영주인 마이어드 후작이나 도움을 받은 바이든 남작은 나를 감싸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좋게 풀릴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자크론이 어디서 나타날지는 나 역시 알 수 없었다.

이후 카이로스 백작의 행보도 마찬가지.

내가 손해를 보지 않으리라는 건 예상했지만 충분히 기대를 넘는 성과였다.

“이놈! 역겨운 폭염의 마법사!”

“잔혹한 학살자!”

자크론을 본 영주들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자크론을 향해 분노를 표출했다.

하지만 이는 영주들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의도된 연출이었다.

자크론에게 가장 피해를 본 게 바이든 남작과 더불어 지원에 나섰던 마이어드 후작이었으니까.

그 때문에 대신 나선 것이다.

“후작 각하! 당장 저 간악한 마법사의 목을 쳐야 합니다!”

그러다 어느 영주가 외친 말에 모두의 시선이 마이어드 후작에게로 향했다.

연합군의 실질적인 수장이자 남부의 지배자가 될 그에게로.

그러나 마이어드 후작의 표정은 처참했다.

단순히 병력의 피해를 봤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영주씩이나 되는 이가 지금의 상황을 모를 리 없으니.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소.”

마이어드 후작이 침통하게 내뱉은 말에 시끄럽게 떠들던 영주들의 목소리가 싹 사라졌다.

전투는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영주들은 전선에서 공을 세우는 대신에 이 자리에서 목소리만 높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중군도, 우익도 크게 당했다.

좌익의 영주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겁을 먹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전통에 따라 포로의 신변에 대한 권리는 네패스 남작에게 있지.”

그제야 영주들이 아차 하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난 내 권리를 챙겨준 마이어드 후작에게 짧게 감사를 표했다.

레일리 왕녀가 의사를 전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마이어드 후작이 쉽게 관습을 깨지는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 후작 각하, 전 피곤해서 먼저 물러나야 할 거 같습니다.”

“그러도록 하게.”

이제 쉬겠다는 나를 누구도 붙잡지 못했다.

실제로 자크론과의 싸움에서 마나를 많이 소모한 건 사실이니까.

그러나 영주인 내가 쉬는 것으로 내 병력은 끝까지 전선에 나서지 않게 되었다.

‘내가 바라던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었어.’

본래대로라면 연합군에서 가장 세력이 큰 마이어드 후작이 중군을, 다음 순서인 나와 바이든 남작이 좌우의 날개를 맡았을 것이다.

이는 확실하고 빠르게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레일리 왕녀는 그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하나는 중군을 맡아야 할 마이어드 후작가의 기사단이 이미 크게 패퇴해서 전력을 상실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를 챙겨줘야 했다는 것이다.

물론 나에게도 나름 타당한 이유는 있었다.

급격하게 세력을 불리기는 했으나 이만한 규모의 병력이 맞붙는 대규모 회전의 경험이 없다는 것.

그래서 경험 많은 영주들에게 선봉의 명예를 내준다며 뒤편으로 물러났다.

대외적으로는.

그러나 실상은 내 전력을 보존하기 위함이었고 레일리 왕녀도 그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레일리 왕녀는 기꺼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 대신 자신이 공을 세울 기회를 얻으면 되는 거였으니까.

도리어 내가 너무 활약하면 그녀가 묻히게 될 테니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레일리 왕녀는 실패했다.

측근이었던 바이든 남작과 왕가의 병력을 크게 잃었고, 가뜩이나 휘청거렸던 마이어드 후작가의 기사단에 결정타를 꽂고 말았다.

반면에 나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녀가 원했던 명성을 손에 넣었으며, 그녀의 전략을 따랐던 우익 영주들에게도 피해를 줬다.

‘이 상황을 좀 더 이용할 수 있겠지.’

레일리 왕녀와 바이든 남작.

그리고 어쩌면 마이어드 후작에게도 향할지 모르는 우익 영주들의 불만.

이 또한 나에게는 새로운 기회였다.

와아아!

내 군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자 병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싱글벙글한 얼굴의 라이언이 주동한 것으로 보였다.

“역시 영주님이십니다! 전 믿고 있었습니다!”

코앞까지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며 날뛰는 라이언의 행동에 나는 쓰게 웃으며 로크에게 시선을 던졌다.

“로크 경.”

“조지겠습니다.”

“으잉? 왜? 영주님께서 대활약하셨는데 그럼 조용히 있어야 합니까?”

연합군의 사기를 올리는 건 좋지만 우익 영주들의 기분이 너무 상할 행동은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이곳은 혼자 싸우는 전장이 아니니까.

괜히 다른 영주와 불화를 일으키는 건 사양이다.

“눈치 없는 놈.”

이러한 분위기를 전혀 읽지 못한 라이언이기에 로크에게 제재를 받은 것이다.

“영주님,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나설 일은 없을 거다.”

마이어드 후작이 지시를 내렸는지 연합군에서 새로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좌익의 예비대로 남아 있던 영주들이 우익으로 군대를 돌린 것이다.

“전 계속 전장을 지켜볼 생각인데 스승님께서는 어쩌시겠습니까?”

전장을 살피며 자크론에게 묻자 자크론은 고개를 내저었다.

“마나를 너무 써서 피곤하구나. 난 쉬어야겠다.”

“알겠습니다. 로크 경.”

난 직접 로크를 지정해 자크론에게 붙여주었다.

“지금은 포로의 신분이지만 내 스승님이 되어줄 분이다. 시종들을 보내 불편하지 않게 잘 모시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스승이란 말에 로크는 놀란 표정을 짓기는 했으나 재빠르게 행동했다.

그렇게 자크론이 로크의 안내를 받아 자리를 비우는 사이 이 싸움의 승패가 갈렸다.

“퇴각하라!”

테인 준남작.

카이로스 백작의 측근이라고 알려진 기사가 급하게 철수를 지시한 것이다.

전면전 중에 퇴각은 실질적으로 패배를 인정하는 것과 같은 행동.

하지만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더는 버틸 방도가 없으니까.

카이로스 백작은 잘 싸워주었다.

자크론의 활약에 힘입어 중군과 우익을 각각 한 차례 궤멸시켰으니까.

그러나 결국 한계에 봉착했다.

체력이 떨어졌고 예비대도 남지 않은 카이로스 백작과 달리 연합군에는 아직도 여력이 있었다.

후방에 있던 예비대가 추가 투입되면서 카이로스 백작가는 계속 뒤로 밀려났다.

‘그래도 완전히 끝은 아닐 테지.’

병력 대부분을 상실했으나 수장인 카이로스 백작과 기사들이 남은 상태였다.

그들은 급하게 기수를 돌려 후퇴하고 있었다.

“성에서 농성할 셈인가?”

카이로스 백작이 바보라서 수성을 선택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연합군의 숫자는 성을 포위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사이에 병력 일부를 빼내 카이로스 백작의 다른 영지들을 점령할 여력도 있었다.

성에 틀어박혀서 방어하는 전술은 상대가 후방을 노리지 못할 때나 아군의 지원이 확실할 때에만 유효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간 벌이 이상의 의미가 있을 순 없었기에.

연합군은 수가 많지만, 남부 전체가 합심한 만큼 보급에 문제가 있지도 않고.

안에서 고사당할 바에야 밖으로 나와서 싸우는 건 분명 옳은 판단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바른 판단만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추격하라! 놓쳐선 안 된다!”

“카이로스 백작! 그 목은 놓고 가야 할 거다!”

도망치는 상대를 향해 연합군은 기세를 올려 추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그 무렵 마침내 예정된 신호가 왔다.

우웅!

나를 비롯해 전장에 있는 모든 마법사들의 주의가 그 신호에 집중되었다.

이는 마법사 협회에서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 작전 성공.

그 마나 파장은 아주 짧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전쟁의 쐐기를 박기에는 충분했다.

콰콰쾅!

퇴각하려던 카이로스 백작가의 군대는 느닷없이 마법에 휩쓸렸다.

억지로 전쟁에 동원되었던 카이로스 백작 휘하의 마법사들이 카이로스 백작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게 무슨 상황이지?”

연합군의 영주들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법사 협회에선 아주 은밀하게 행동에 나섰으니까.

혹시 연합군에 카이로스 백작가의 첩자가 있을 것을 우려해 이 사실을 전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이 일을 아는 건 플레턴으로부터 따로 이야기를 전달받은 나뿐이었다.

난 무너져가는 카이로스 백작가의 군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본진에 있는 마이어드 후작을 보았다.

가진 기사단을 거의 잃고 기껏 불러들인 영주들에게 불만까지 사게 된 상황.

지금의 마이어드 후작은 물어뜯기에 너무나도 좋은 상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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