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52화
VVIP 영주님의 품격 52화
52화
‘광전사라니, 대단한데.’
광전사는 절대군주에서 상당히 희귀한 유형의 영웅이었다.
비슷한 유형으로 마검사가 있는데 양쪽 모두 희귀한 만큼이나 강했다.
기사가 밸런스가 좋다면 이 둘은 각각 전투 지속력과 순간적인 고점에서 다른 전투형 영웅들을 압도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안심했다.
카이로스 백작의 저 끈질김이 확실히 이해되었으니까.
‘그래서 아직도 버티고 있었군. 순수한 정신력이었으면 오히려 더 무서웠을 텐데.’
광전사는 혈전이라는 스킬로 어떤 부상을 입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전투력을 유지하는 게 가능했다.
또 위압을 통해 적들을 물리칠 때마다 수준이 낮은 적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어 약한 다수를 상대로 절대적인 강함을 보였다.
그러나 이는 단독 혹은 정예의 싸움에서는 도움이 되는 스킬이 아니다.
그보다 문제가 되는 건 카이로스 백작과 나의 거리였다.
‘너무 가까운데?’
자크론과는 싸울 의향이 있었으나 카이로스 백작과는 아니었다.
더구나 둘 다 4티어 영웅이기에 동시에 적으로 뒀다가는 내가 위험했다.
“놈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막았어야지!”
다행스럽게도 카이로스 백작은 나는 안중에도 두지 않은 채 자크론을 향해 분노를 표출했다.
아무래도 자크론의 앞에 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마음대로 싸우라고 할 때는 언제고.”
“하! 전장을 읽는 눈도 없는 건가?”
자크론이 퉁명스레 말하자 카이로스 백작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러나 이는 카이로스 백작의 실수였다.
자크론의 성격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카이로스 백작, 혹시 겁먹은 건가?”
“뭐라고?”
겁먹었냐는 자크론의 비아냥에 카이로스 백작이 주춤거렸다.
근거 없는 비아냥은 아니었다.
마이어드 후작가의 포위망도 정면 돌파를 했다던 카이로스 백작이니까.
하지만 이 전장에서 카이로스 백작은 먼저 나서는 게 아니라 연합군의 공세에 맞춰서 대응하고 있었다.
이는 보통이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신중함이지만, 카이로스 백작이란 인물과는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한때는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던 녀석이 이제는 두려움을 느낀 모양이지?”
자크론은 카이로스 백작을 비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충성을 바치는 군신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동등한 입장이라고.
“그 꼴이 되고 나니까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냐?”
“이 늙은 마법사가!”
“이빨 빠진 맹수가 다 되었구나.”
화르륵!
자크론은 파이어 월을 사용하여 카이로스 백작과의 사이에 벽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그 벽 너머에서 얌전히 몸이나 사리고 있어라. 내 일에 참견하지 말고.”
“자크론!”
자크론의 모욕에 카이로스 백작이 앞으로 뛰어들려고 했다.
나는 순간 아연해졌다.
카이로스 백작은 충분한 실력을 갖췄으나 이쪽은 엄연히 연합군의 영역이니까.
만일 저 벽을 넘어온다면 카이로스 백작은 포위당하게 될 것이다.
아군의 피해가 증가하기를 원하는 나로서는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참으셔야 합니다!”
다행히 카이로스 백작의 정신 나간 행동은 곁에 있던 어느 기사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거 놔라! 내가 이런 모욕을 듣고도 참을 거 같으냐?”
“자크론은 적이 아닙니다!”
기사의 설득에 카이로스 백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말대로 아직까지 자크론은 카이로스 백작의 편이었다.
더구나 불리한 전장에서 그 흐름을 뒤집어낸 자크론을 적대한다는 건 있어선 안 될 일이고.
“제기랄!”
결국 카이로스 백작은 이를 갈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중군의 전투는 카이로스 백작의 승리로 막을 내리는 분위기였으나 아직 우익과 좌익이 남았기 때문이다.
“좋아, 방해꾼은 사라졌군.”
카이로스 백작이 기수를 돌려 사라지자 자크론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어쩌면 이 전투에서 가장 아슬아슬했을지도 모르는 위기가 해소된 것에 나는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콰앙!
물론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난 다시 자크론을 기습했다.
“혹시나 했는데 또 기습이냐?”
“상대가 빈틈을 보이는데,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내가 되묻자 자크론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전쟁에서 예의범절을 따지는 게 이상한 일이니까.
“하, 그래. 그렇게라도 해야 할 거다.”
자크론은 감정을 다스리더니 비릿한 살의를 풍겼다.
“부디 시시하게 당하지 말아라. 내가 네 녀석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줄 테니.”
* * *
“바이든 남작!”
바이든 남작이 무사히 퇴각에 성공하자 영주들은 서둘러 바이든 남작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바이든 남작은 별다른 부상이 없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오.”
그러나 영주들의 위로에도 바이든 남작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가 무사할 수 있던 대가로 기사단의 피해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이런 제기랄!’
바이든 남작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했다.
정면에서 카이로스 백작과 겨루더라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주변 영지들을 점령하며 얻은 세력에 더해 레일리 왕녀가 지원해 준 크레시안 왕가의 병력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기껏해야 동수를 이루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마저 시간이 지나면서 밀리고 말았다.
카이로스 백작이 가진 전력은 바이든 남작의 예상을 벗어나 있던 것이다.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마이어드 후작가의 기사들이 참패했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이야!’
상대는 그야말로 남부 제일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대로는 모두 위험하오. 적들이 중군을 뚫고 이곳 본진까지 노릴지도 모르오!”
바이든 남작은 이대로 중군이 완전히 무너지고 아군 본진이 위험에 처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선봉이었던 자신이 깨졌고 뒤이어 투입된 마이어드 후작가의 잔존 기사들마저 당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는 않을 거요.”
그러나 바이든 남작의 말에 영주들은 심드렁한 반응을 내보였다.
그에 바이든 남작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저 무시무시한 적들의 위용을 보고도 이렇게 태연하다니?
자신이 이 위치에 있었다면 즉시 기사단을 배치하고 후방으로 본진을 물렸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오? 적들의 강대한 기세가 보이지 않소?”
“뒤를 돌아보시오.”
어느 영주의 말에 바이든 남작은 다급히 전장을 살폈다.
카이로스 백작과 그 휘하 기사들의 추격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펼쳐진 건 거대한 불꽃의 벽이었다.
“저게 무슨!”
아직도 마나가 바닥나지 않고 무시무시한 위용을 뽐내는 자크론의 모습에 바이든 남작은 질리고 말았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이는 이상한 상황이었다.
자신이 퇴각한 시점에서 자크론의 역할은 추격이 되었을 텐데 그렇다면 제자리에 버티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
덕분에 카이로스 백작가의 기사들이 진격할 경로가 막히고 말았다.
‘폭염의 마법사가 실수한 건가? 하지만 카이로스 백작이 거두라고 명령을 내리면 될 텐데?’
콰앙!
의문은 곧 해결되었다.
갑자기 화염의 벽 한 곳이 뚫리며 거대한 구멍을 만들어냈는데 그 너머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네패스 남작?”
무시무시한 불꽃 속에서 아인이 자크론과 겨루고 있었다.
“엄청나군. 도대체 무슨 수를 써서 그 작은 영지의 젊은 귀족이 남부의 영웅이 되었나 했는데.”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재능이군. 저 나이에 저 정도 수준의 마법사라고?”
영주들은 그 광경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과연 남부 내전에서 그 이름을 크게 떨치고 있는 젊은 영웅이었다.
“어떤가요?”
그때 레일리 왕녀가 바이든 남작에게 슬쩍 말을 걸어왔다.
그에 바이든 남작은 화들짝 놀라 몸을 숙이다가 엉거주춤하게 멈춰 섰다.
레일리 왕녀가 내준 병력까지 잃고 큰 손해를 끼쳤지만, 이 자리에서 죄를 청하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네패스 남작님은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그, 그렇구나.”
바이든 남작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일리 왕녀가 아인을 상대로 존칭을 붙인 덕에 겨우 자신의 태도를 다잡을 수 있었다.
“분명 네패스 남작은 저를 지켜줄 최고의 방패가 될 거예요.”
레일리 왕녀는 남들이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직 곁에 선 바이든 남작만이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바이든 남작은 그녀의 말에 무심코 긍정했다.
폭염의 마법사로 악명 높은 자크론은 마법사 협회에서도 원로에 해당하는 배분.
제명당했다고 하지만 그 실력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존재와 대등하게 싸우다니?
아무리 중간에 나선 상태라지만 나이를 고려한다면 기겁할 재능이었다.
‘하지만…….’
바이든 남작은 어쩐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이 상황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드넓은 전장에서도 영주들이 알아볼 만큼 이름 있는 이들의 숫자는 극히 일부.
그리고 그마저 대부분은 카이로스 백작가에 속한 이들로 모두 적이었다.
반면 머릿수에서 훨씬 앞서는 연합군에서는 아인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주목받지 못했다.
‘이게 그저 우연인 걸까? 그리고 만일 그렇다고 해도 왕녀 저하가 과연 네패스 남작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까?’
바이든 남작은 의구심 섞인 눈으로 아인을 보았다.
* * *
퍼퍼펑!
폭음과 함께 일대를 뒤덮은 열기.
조금씩 차오르는 땀은 호흡마저 거칠어지게 만들었다.
“후우!”
그래도 한 차례의 공격을 넘기고 나니 숨 돌릴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자크론은 강했다.
플레턴처럼 다양한 마법을 사용하지는 않으나 압도적인 화력으로 상대를 짓누르는 이 단순한 강함.
그야말로 토 나오는 위력이었다.
‘하지만 마법은 마법일 뿐이지.’
마법형 영웅이 전략성이 강한 이유 중 하나는 그 힘을 무한정 쓸 수 없다는 단점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기사 역시 지치는 건 같지만 어느 정도 페이스 조절이 가능한 체력과 달리 마나는 전투가 이어지는 한 회복이 힘들었다.
특히 전면에 나선 마법사는 마나 실드를 풀지 못하기 때문에 이 단점은 더욱 크게 다가왔다.
그러나 지금 마나의 압박을 받는 건 내가 아니라 자크론이었다.
“이런 약은 놈 같으니.”
대치를 이어오던 자크론이 내 전술을 알아차리고는 혀를 찼다.
마나의 양에서 앞서는 내 실드를 뚫으려면 자크론은 다중 마법을 써야 했다.
같은 이유로 자크론의 실드는 내 마법에 쉽게 뚫릴 수 있었고.
그것을 막으려면 자크론은 공격에도, 방어에도 다중 마법의 사용이 강제되었다.
공방 양쪽에 소모되는 마나의 양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것이다.
“네 녀석이 날 가지고 놀고 있구나!”
“제가 가진 유리함을 쓰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기습과 마찬가지였다.
이는 자크론에 비해 내가 가지는 분명한 강점.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그 잘난 마법을 통째로 부숴주마!”
예상대로 자크론은 결국 승부수를 띄웠다.
아직 여분의 마나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 총력을 펼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자크론이 가진 마지막 패일 것이다.
아무리 4티어 마법사라도 지금까지 날린 마나가 얼마인데.
“윈드 불릿, 파이어 스피어, 파이어 스톰.”
자크론의 손에서 관통력이 좋은 윈드 불릿을 기반으로 사용하는 삼중 마법이 펼쳐졌다.
내가 기다려왔던 순간이었다.
“윈드 불릿, 마나 쇼크.”
공격을 위해 삼중 마법을 준비하는 순간 자크론에게 남는 건 실드 하나가 전부.
나는 윈드 불릿에 마나 쇼크를 조합한 이중 마법을 사용하여 일격을 날렸다.
서로가 동시에 공격을 날린 상황에서 당황한 건 자크론이었다.
내가 한 수 더 빨랐으니까.
이중 마법과 삼중 마법의 차이.
그리고 5티어라는 재능의 차이.
그것이 먼저 준비한 자크론보다 빠른 공격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다.
“이놈이!”
하지만 자크론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삼중 마법을 취소하거나 급히 방어를 준비하는 대신에 동귀어진이라도 할 생각인지 맞공격을 날렸다.
“아차!”
그러나 이내 본인도 자신의 선택에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반사적으로 공격을 선택했으나 막상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적중당한 자크론은 실드가 깨지며 마나 쇼크에 당해 쓰러졌다.
마찬가지로 내 앞에도 자크론의 삼중 마법이 날아들었다.
일단 쏘아진 마법은 마법사를 쓰러트려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콰콰쾅!
강렬한 화염이 나를 집어삼키며 일대를 휘저었다.
딛고 선 바닥이 녹을 정도로 막대한 화력이었다.
후끈후끈한 느낌에 숨이 텁텁해졌다.
‘그래도 어찌 막기는 했군.’
공격에도, 마법에도 이중 마법을 동시에 사용했다.
4개의 마법을 둘씩 나눠서 활용한 것이다.
다행히 내 선택은 잘 먹혀들어 갔다.
“영주님!”
아군 진영에서 나를 부르는 애탄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기사들의 목소리였다.
굳이 걱정시키는 장난을 칠 생각은 없었기에 즉시 마나 블래스트로 화염을 걷어냈다.
“와아아!”
내가 불길을 뚫고 모습을 드러내자 아군 진영에서는 성대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폭염의 마법사 자크론과의 일대일 승부에서 내가 승리를 거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