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50화
VVIP 영주님의 품격 50화
50화
- 싸우면 네가 질 거다.
플레턴은 망설임 없이 내 패배를 예상했다.
자크론은 플레턴과 동일한 4티어 마법사였고 삼중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온갖 다양한 마법을 자유자재로 쓰는 플레턴과 달리 철저하게 전투에 맞춰서 마법을 익혔기에 같은 4티어라도 자크론을 이길 마법사는 드물었다.
- 하지만 너를 공격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나 플레턴은 그가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 어째서입니까?
- 그놈은 마법사니까.
마법사 협회가 내전에서 중립을 지키는 건 상대가 귀족이라서였다.
그러나 자크론은 귀족이 아니었다.
나를 건드려서 협회의 원한을 사 좋을 게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자크론은 플레턴에게 패배한 전적이 있다고 했다.
- 네가 내 제자라는 걸 남부에서 모르는 마법사는 없다. 놈도 예외가 아니지.
그렇기에 제자인 나를 건드려서 스승인 자신의 분노를 사지 않을 거라는 게 플레턴의 설명이었다.
‘꼭 그렇지도 않은 거 같은데.’
그러나 나는 나를 향해 저릿하게 퍼지는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자크론의 시선은 절대 호의적이거나 겁먹은 것이 아니었다.
‘일단 지켜볼까.’
난 마법사 선배에 대한 예의로서 가볍게 고개를 숙여주었다.
그러자 자크론은 똥 씹은 표정을 짓더니 시선을 거뒀다.
“파이어 월, 파이어 스피어, 파이어 스톰.”
대신 자크론은 중군의 수뇌부가 모인 자리를 노렸다.
몇몇 기사들이 자크론을 막기 위해서 움직였지만 자크론의 공격이 좀 더 빨랐다.
‘불 속성 마법을 연달아서?’
일반적으로 마법사들은 특정 원소의 마법을 연달아서 익히는 경우가 드물었다.
효율의 문제였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도 마법 하나를 익히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린다.
더구나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면 배우는 것보다도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적어도 몇 달은 걸릴 텐데 그렇게 배우더라도 불과 불을 더해봐야 성질이 변하는 건 없었다.
그런데 자크론은 마법사들이 비효율적이라고 하지 않는 그 짓을 하고 있었다.
화르르륵!
“무, 무슨!”
“엄청난 불길이다!”
중군에서 비명이 터졌다.
소모되는 마나에 비해서는 비효율적이지만 그래도 눈으로 보이는 위압감 하나만큼은 엄청났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은 내가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마법보다도 강해 보였다.
“막아!”
아군 마법사들이 앞으로 나서서 다급하게 마나 실드를 펼쳤다.
그 수가 족히 수십 개에 달했다.
그러나 방향이 문제였다.
후방에 있던 마법사들은 마이어드 후작을 비롯한 영주들을 지키기 위해 그 앞을 지켰다.
그런데 자크론은 뜬금없이 우익을 향해 공격을 날렸다.
‘대단한데?’
난 그 광경을 보며 감탄했다.
언뜻 마법사들의 대응을 보고 다른 쪽을 공격하는 단순한 행동 같지만, 마법사의 마법은 대부분 즉발형이었다.
특히 화염을 다루는 마법은 제자리에서 유지하는 게 날려서 유지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그걸 규모를 키운 삼중 마법으로 해낸 것이다.
마법사들의 입장에서는 심리전으로 놀아난 것이기도 했다.
제자리에서 마법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 어느 방향으로든 공격할 수 있다는 건데, 그걸 날리기도 전에 겁을 먹고 먼저 막기 위해 나섰으니까.
애꿎은 마나만 날린 셈이었다.
“이 자식이!”
그때 자크론을 향해 접근한 바이든 남작가의 기사가 검을 휘둘렀다.
자크론은 마나 실드를 둘러서 그 공격을 막아내고는 마나 블래스트로 기사를 쳐 날렸다.
콰앙!
“크헉!”
기사가 입은 갑옷이 통째로 우그러지며 기사의 몸이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나도 예전에 라이언을 가지고 놀았을 때가 있었지만, 저건 그 이상이었다.
적어도 그때 라이언은 중무장한 기사가 아니었으니까.
맨몸의 성인 남성과 중무장한 기사의 무게는 두 배 가까운 차이가 있었다.
“마법사를 죽여라!”
“올 테면 와봐라.”
자크론은 마구 날뛰고 있었다.
오직 전투에만 특화된 자크론은 보통 기사들을 상대하기 어렵다고 평가받는 여타의 마법사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아무리 실력이 떨어지는 기사라지만 여럿이 달려드는데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맞섰다.
‘플레턴이 저런 자크론을 이겼다고?’
플레턴을 상대로 몇 번이나 겨뤄본 나로서는 플레턴이 자크론을 이겼다는 것이 놀라웠다.
아무리 봐도 플레턴보다도 강해 보였으니까.
‘마나 쇼크 때문인가?’
미리 알고서 방비했다면 모를까 기습으로 마나 쇼크에 당한다면 상대가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도 일격에 무력화될 수 있었다.
그거라면 플레턴이 자크론을 이겼다고 해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플레턴이 마나 쇼크의 원리에 대해서 굳이 알려준 게 아니라면 자크론은 뭐에 당하는지도 모르고 맥없이 당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려워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말도 안 돼. 저 정도 수준의 마법사가 있었다고?”
“자, 자크론이다! 자크론이 틀림없어!”
혼란스러워하는 연합군 사이로 한 영주가 자크론을 알아봤다.
“폭염의 마법사. 마족과의 전쟁이 끝난 다음에 자취를 감췄다고 들었는데.”
“그 폭염의 마법사라고?”
“악명 높은 전쟁광!”
영주들은 주춤거렸다.
아무리 자크론이 대단하다고 해도 절대 이곳에 모인 영주들을 이길 수준은 못 된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어마무시한 힘은 그러한 당연한 사실을 의심하게 만들고 있었다.
특히 동급의 마법사들에 비해서도 월등한 전투력을 지녔기에 더욱 그랬다.
“이걸, 이걸 어떻게 해야…….”
레일리 왕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우세한 싸움만 해왔다.
왕가의 병력이 언제나 함께였고 바이든 남작의 세력도 여타의 영주보다 컸다.
그렇게 큰 세력으로 작은 세력만 상대해 봤으니 저런 강자를 봤을 리 없었다.
단신으로 전장의 분위기를 휘어잡는 무시무시한 고티어 영웅.
‘역시 왕녀는 경험이 부족해. 마나가 벌써 절반 이상은 빠졌을 텐데.’
더구나 레일리 왕녀는 나처럼 마법사도 아니었기에 마법사가 가진 힘의 한계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당황하지 마라! 저 정도 위력의 마법은 몇 번 쓰지 못해! 마나가 다 떨어졌을 것이다!”
마이어드 후작가의 마법사가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정보를 확인하니 그는 3티어의 마법사였다.
비록 자크론보다는 아래였으나 지부장인 가이트와 동급으로 실력 있는 마법사였다.
“그래. 마법사의 마나는 기사의 체력보다도 쉽게 고갈되는 법이지.”
마이어드 후작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자크론은 일시적으로는 수백을 죽일 만큼 위협적이지만 전쟁 내내 그런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기사들을 투입해라. 오히려 당당하게 나왔으니 쉽게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일제 공격 명령이 내려졌다.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 자크론을 노리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고 있을 줄 알았나?”
그때 자크론이 있는 쪽을 향해 몰려드는 병력이 있었다.
우익에서 이탈했었던 카이로스 백작과 그 뒤를 따르는 삼기사 알렉스.
그의 등장에 중군에서 싸우던 카이로스 백작가의 기사단까지 합류했다.
“이대로 돌파한다!”
카이로스 백작을 선두로 모인 기사단이 마침내 제 본래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미 큰 타격을 입은 중군은 카이로스 백작을 막지 못하고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대로 가면 바이든 남작이 위험합니다!”
“퇴각하시오! 위험하오, 바이든 남작!”
영주들이 비명을 질렀다.
선봉을 맡았던 바이든 남작이 위태로워졌다.
“네패스 남작!”
그때 레일리 왕녀가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존칭을 생략할 정도로 다급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누구도 그런 그녀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화를 내지는 않았다.
위장이라지만 조카로 소개한 이상 가족은 가족이었으니까.
가족이 위험한 만큼 그녀의 반응은 누구나 이해할 만했다.
‘실제로 바이든 남작을 챙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레일리 왕녀에게 중요한 건 바이든 남작보다는 크레시안 왕가의 기사들이었다.
그들의 존재는 그녀의 정통성을 입증한다.
또 순수하게 그녀 개인만 따르는 충성스러운 병력들이었다.
‘어쩐다.’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카이로스 백작은 이 전장에서 결국 패할 것이다.
그러나 쉽게 당하지는 않는다.
마이어드 후작 역시 큰 피해를 입어야 했고 레일리 왕녀의 병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난 자크론의 존재를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
말해 줄 수 있었음에도.
만약 알았다면 분명 대비를 했을 것이다.
‘아직 살짝 부족한 거 같기도 한데.’
난 잠깐 고민하다 말을 끌고 앞으로 나섰다.
“남작!”
레일리 왕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미리 준비한 계획은 아니지만 부탁할게요.”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요?”
급한 상황에서 내가 조건을 내밀자 레일리 왕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물론 아무리 충성을 맹세했더라도 죽을지도 모르는 전장에 그냥 내보낼 수는 없다.
아랫사람이 바쳐야 할 충성만큼 윗사람도 보답을 해야 하는 게 군신 관계의 기본이니까.
하지만 자신이 꽤나 아끼던 내가 덥석 조건부터 거는 것에 당황한 듯했다.
“그게 뭐죠?”
“저 마법사.”
난 손을 들어 자크론을 가리켰다.
“신병을 확보하면 그 권리는 저에게 넘겨주십시오.”
그리 큰 조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중요했다.
자크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플레턴은 그가 굉장히 위험하니까 조심하라고 엄히 일러줬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순수하게 전투에 특화된 마법사.
찾아보기 쉽지 않아서 그렇지, 동급의 기사보다도 강할지 모른다.
‘놓치기 아까운 인재지.’
같은 티어의 마법형 영웅은 전투형 영웅에게 상대가 안 된다.
적어도 3티어는 앞서야 안전하며 2티어 차이는 상황에 따라서 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마법사들이 배울 수 있는 마법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마법사들은 마법서를 통해서만 마법을 배운다. 원하는 마법을 골라서 배우기가 힘들어.’
게임에서는 유저가 맞춰줄 수 있다.
실제로 내가 게임에서 썼던 5티어 마법사는 동티어의 전투형 영웅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성장 과정은 미친 듯이 어려웠다.
기사들은 검술 같은 것 하나로 전투력의 대부분을 설명하는데, 마법사는 그렇지 않으니까.
시너지 효과가 나는 마법과 그 마법의 시너지를 이끌어줄 이중 마법, 삼중 마법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러니 마법사를 키우는 데 한 세월 걸릴 수밖에.
그렇다고 고티어의 마법사를 영입하는 것도 해결책은 아니었다.
유저가 밑에서부터 키운 마법사가 아니라면 시너지가 안 맞는 마법을 배우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밸런스를 위해서는 필요한 조치였다.
다수를 상대하는 데 특화된 마법사가 전투형 영웅과 정면으로 대적할 만큼 강하면 밸런스에 문제가 생기니까.
그러나 손수 아래에서부터 키워온 마법형 영웅은 예외였다.
그리고 그 예외에 해당하는 게 자크론이었다.
저렇게 전투에 특화된 마법사는 없다.
실력이 부족할 때는 뭐라도 배우고 익히기에 바쁘지, 누가 배울 마법을 가려서 배우겠나.
또 재능이 충분하지 않다면 그마저도 못 익힌다.
정신 나간 마법사가 아니라면 저렇게까지 전투에 특화될 수 없다는 말이다.
‘나도 마법서를 못 구해서 저렇게는 안 되는데.’
5티어를 얻고 시작한 건 좋지만 습득하고 있던 마법은 마나 블래스트 하나뿐.
이후로 하나씩 채워나가는 나는 아직 한참이나 부족했다.
그러나 자크론은 플레턴과 동세대의 마법사로 협회에서의 배분은 원로에 해당했다.
문제를 많이 일으켜서 이미 협회에서는 제명 상태라고 하지만 그가 살아온 연륜 동안 쌓아온 힘은 진짜였다.
“알았어요.”
내 요구가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었다.
아무리 적이 뛰어나고, 아군에 큰 피해를 줬다고 해서 감정적으로 죽이지는 않는다.
붙잡을 수만 있다면 일단은 회유를 하는 게 보통이었다.
문제는 마이어드 후작이 반대하고 나서는 경우인데 레일리 왕녀가 약속한 이상 아무리 마이어드 후작이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직접 자크론을 무력화시킬 것이기도 하고.
‘내가 잡으면 처우도 내가 정하는 거지.’
귀족들 사이에서는 당연한 권리였다.
마이어드 후작에게서 뒷말이 나올까 봐 조건을 단 것뿐.
난 플레턴이 내가 질 거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정면에서 온전한 컨디션으로 싸웠을 때를 가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