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47화
VVIP 영주님의 품격 47화
47화
【 남부대전 】
그래도 레일리 왕녀의 전략만 선택된 것은 아니었다.
마이어드 후작은 이를 보충하기 위한 의견을 영주들에게 물었고, 영주들은 저마다 이런저런 의견을 꺼냈다.
그렇게 해가 떨어질 때가 되고서야 이야기가 끝났고 전술 지도 대신 음식과 술이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자아, 남부의 영웅들을 위하여 잔을 듭시다.”
“물론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그러지 않으면 섭섭하지요.”
당연하지만 전투에 앞서서 취할 생각은 없었다.
난 가볍게 입술만 적신 다음 잔을 내렸다.
“다시 제대로 인사를 해야겠네요.”
레일리 왕녀가 내 곁에 섰다.
“활약은 익히 들었습니다.”
“네패스 남작만 한가요. 게다가 이렇게 전공을 뺏게 되었는데.”
“어차피 제가 자랑을 한다고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내가 잃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레일리 왕녀가 명성의 일부를 가로채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누군가 날 무시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전리품들은 모두 나의 것이었다.
“카이로스 백작을 쓰러트리면 정체를 밝히실 겁니까?”
“마이어드 후작의 가신들에게 먼저 차근차근 알리고 설득해 나갈 계획이에요.”
“제가 필요하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고마워요, 네패스 남작.”
짝!
그때 누군가가 박수 소리로 이목을 끌었다.
아까 봤던 루카인 남작이었다.
그는 호의적인 미소를 지은 채 레일리 왕녀에게 다가왔다.
“라일이라고 했던가? 그대의 식견은 참으로 놀랍더군.”
레일리 왕녀는 영주와 대등한 신분은 아니었기에 급하게 예의를 차렸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미진한 머리로 괜히 혼란을 드린 게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그러지 마시오. 정말로 훌륭했으니까.”
난 의아한 눈으로 루카인 남작을 보았다.
대화를 할 거라면 조용히 말을 걸면 되지, 굳이 박수 소리까지 내가며 주변의 시선을 끌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좀 더 대화를 나눠보지 않겠소? 이 자리가 끝난 뒤에 말이오.”
한순간 몇몇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마이어드 후작과 바이든 남작 그리고 뜻밖의 소리를 들은 레일리 왕녀 본인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지금 루카인 남작이 레일리 왕녀에게 추파를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미친놈이?’
레일리 왕녀가 아름답기는 하다만, 지금 이 자리에서 꺼낼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술이 들어가서 들뜬 듯했다.
‘역시 술은 위험해.’
루카인 남작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멋모르고 위니스 앞에서 취할 때까지 마신 내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경계심을 풀었던 나는 그 대가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루카인 남작은 추후 자신의 주군이 될 인물에게 추파를 던지는 미친 짓을 하고 있었고.
“시간이 늦었으니 거절하겠습니다.”
레일리 왕녀는 상당히 직설적으로 거절 의사를 밝혔다.
다 큰 여성이 늦은 밤에 남성과 둘이서 시간을 보낸다는 건 구설수에 오르기 좋았다.
레일리 왕녀로서는 절대 피해야 할 일이었다.
“더구나 내일은 중요한 날이 될 테니 조금이라도 일찍 잠자리에 드시는 게 좋을 거예요.”
“너무 긴장할 필요 없소. 다 잘될 테니까. 카이로스 백작은 이미 죽은 목숨이지.”
그러나 루카인 남작은 눈치가 없는지 아니면 그래도 영주라는 제 위치를 믿는지 물러서지 않았다.
난 힐끔 다른 영주들의 반응을 살폈다.
전투를 앞두고 여자에게 작업을 걸고 있으니 그리 우호적인 시선은 아니었지만 의외로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뭐, 루카인 남작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
“저 나이에 아직 혼인도 못 하고 있으니.”
루카인 남작은 적어도 30대는 되어 보이는 나이였다.
아인의 몸을 가진 나조차도 얼마 전 베르타에게 슬슬 혼인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들었으니 루카인 남작은 혼기가 훌쩍 지난 노총각이었다.
물론 영주 귀족이나 되는 몸이니 주변에 여자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첩을 들였을 뿐 정식으로 청혼해서 혼례를 치른 상대가 없는 듯했다.
“바이든 남작의 조카라지? 상대로 나쁘지는 않군.”
“사이 나쁘던 두 사람이 혼인을 통해서 화해하는 것도 괜찮겠어.”
오히려 영주들은 루카인 남작의 행동을 반기고 나섰다.
덕분에 난처해진 건 레일리 왕녀였다.
큰소리로 뭐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좋게 말로 거절하자니 루카인 남작이 물러나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바이든 남작이 루카인 남작과 레일리 왕녀 사이를 가로막았다.
“남의 조카에게 무슨 짓인가?”
“자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뭐라고?”
“다 큰 성인 남녀가 서로 마음을 터놓고 어른다운 대화를 하자는 건데 왜 나서는 건가?”
“뭐가 어쩌고 어째?”
루카인 남작의 말에 바이든 남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실제로 루카인 남작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제 딸도 아니고 조카의 일에까지 바이든 남작이 참견할 자격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바이든 남작도 그걸 모르고 나선 게 아니었다.
“후회할 짓 말고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후회할 짓? 이 나이 먹고 더 지체하는 게 후회할 짓이지!”
“맞소, 바이든 남작. 루카인 남작의 사정도 이해해 주시오. 오죽 급하면 저러겠소?”
“잠깐 정도는 괜찮지 않겠소?”
영주들까지 루카인 남작의 편을 들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바이든 남작의 시선이 마이어드 후작에게 향했다.
그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그에 마이어드 후작이 나서려고 할 때였다.
스윽.
갑자기 레일리 왕녀가 나에게 바짝 다가서더니 옆에서 팔짱을 끼었다.
그 돌발 행동에 나도 당황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고, 레일리 왕녀는 스킨십에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무, 무슨?”
루카인 남작이 입을 떡하니 벌렸다.
난 급하게 레일리 왕녀의 얼굴을 보았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지금 이 자리를 넘기더라도 나중에 다시 집적거리면 귀찮잖아요.”
“그럼?”
“임자 있는 여자라고 해야죠.”
터무니없는 소리에 루카인 남작보다 내가 더 놀라고 말았다.
레일리 왕녀가 정말 평범한 여성이라면 이렇게 상황을 모면해도 괜찮았겠지만, 그녀는 왕녀다.
정체를 영원히 숨길 것도 아니고 마이어드 후작의 후계자가 되어야 할 몸.
다른 남자와 엮이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뒷일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십니까? 왕녀 저하의 곁에 남자가 있다는 건 좋지 않습니다.”
“그럼 평생 혼자 살까요?”
“그건 아니지만…….”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자리를 잡았을 때라면 상관없다.
왕가의 재건을 위해서라면 결국 그녀도 후계자를 만들기 위해 자식을 봐야 할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일러도 너무 일렀다.
“뭐, 젊은 사람들이 눈 좀 잠깐 맞았다고 하면 되죠.”
“전 옛사랑이었다는 과거 따위는 그리 달갑지 않습니다.”
“참아요.”
“아니…….”
이런 억지가.
그렇다고 여기서 레일리 왕녀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난리를 칠 수도 없다.
레일리 왕녀로부터 원한을 살지도 모르니까.
아직 그녀는 나를 믿어야 했다.
“루카인 남작님. 보시다시피 저는 마음이 맞는 분이 있습니다.”
“어버버…….”
루카인 남작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바이든 남작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지만 내 세력은 그 이상이었으니까.
두 대영주를 빼면 남부에서 세력이 가장 큰 이들에게 동시에 원한을 사는 건 일개 영주에게는 가혹한 일이었다.
아니, 이 일로 마이어드 후작까지 화가 났을 걸 감안하면 그는 앞으로가 고달플 게 분명했다.
“그, 그랬군! 젊은 사람들끼리 그럴 수 있지.”
뒤늦게 영주들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그들은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이전에 서둘러서 루카인 남작을 빼내고 나와 레일리 왕녀를 둘러쌌다.
“이거 참. 저 친구가 눈치가 없었어. 그래,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이 잘 맞던가? 언제부터 만났나?”
“바이든 남작, 미리 좀 말해 주지 그랬어.”
“아니, 이게 뭔…….”
그러나 놀란 건 바이든 남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황당한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심상치 않은 눈길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억울했다.
“크흠! 큼!”
심지어 갑자기 마이어드 후작마저 헛기침을 하며 나에게 은근한 눈길을 보냈다.
난 항변하듯 레일리 왕녀를 턱짓했지만 마이어드 후작의 매서운 눈초리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 * *
“아오, 큰일 날 뻔했네.”
험악한 시선 속에서 간신히 막사를 빠져나왔다.
그렇다고 해서 일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지만.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다가오자 난 바로 지시를 내렸다.
“로크 경, 가신들을 호출하게.”
회의 결과로 준비된 전략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줘야 했고 몇 가지 준비할 것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바라던 것과 다르게 나를 위한 전략을 준비해야 할 때였다.
“카이로스 백작가의 기사단을 상대하는 문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건 바이든 남작이 맡게 되었다.”
즉석에서 이야기를 한 게 아니라 사전에 조율이 된 전략인 만큼 난 레일리 왕녀와 서신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은 게 있었다.
카이로스 백작과의 싸움에서 가장 문제가 될 기사단을 누가 맡느냐였다.
각 영주의 기사단이 한꺼번에 모여서 싸운다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건 미친 짓이었다.
지휘 체계가 엉망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고, 서로 공적을 쌓겠다고 다투기라도 하면 큰 피해를 당할지도 몰랐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서 레일리 왕녀에게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그녀가 가진 왕가의 기사들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레일리 왕녀는 그에 대해서 우려를 표명했지만, 이는 그녀의 입지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왕녀가 쉽게 받아들이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카이로스 백작가의 기사들은 레일리 왕녀 밑에 있는 크레시안 왕가의 기사들로서도 쉽지 않은 상대였다.
아직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지 않은 세력들보다 확실하게 믿고 의지할 왕가의 병력을 소모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영주들이 바보도 아니고 레일리 왕녀의 정체가 밝혀지면 그녀에게 공적 몰아주기를 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때를 대비해 다른 귀족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만한 능력을 보여야 했다.
카이로스 백작가의 기사단을 상대하는 건 좋은 전공이 될 수 있었다.
‘그럼 서로 열심히 싸우라고.’
난 두 사람이 서로의 전력을 깎아먹기를 기대했다.
‘그나저나.’
제자리에 멈춰 서서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집결한 연합군의 한복판인 만큼 여러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남부의 군대가 다 모였다는 건 남부의 영웅도 다 모였다는 소리지.’
특히 밀집된 장소라서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죄다 영웅이었다.
그것도 흔하디흔한 1티어 영웅만이 아니라 2티어 이상도 있었다.
‘저쪽은 어디 소속이지?’
그렇게 영웅 정보를 확인하며 지나던 중에 내 눈길을 사로잡는 정보가 있었다.
[영웅 정보]
이름 : 탈론
국적 : 크레시안 왕국
소속 : 마이어드 후작가
유형 : 전투형
등급 : 4티어
칭호 : 위대한 궁사
스킬 : 궁술(4), 기습(3), 지휘(2), 은신(2), 격투(2), 검술(1)
“음?”
등급을 확인하자마자 내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3티어도 아니고 4티어.
게다가 기사가 아니라 궁사였다.
‘탈론이라고? 그 탈론?’
상대는 내가 아는 메인 스토리의 등장인물 중 하나였다.
크레시안 왕국 출신의 뛰어난 궁사 용병.
게임 내에 등장하는 궁사로서는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갖춘 영웅이었다.
“소속이 마이어드 후작가라. 마이어드 후작이 고용했나 본데?”
좋은 기회였다.
루안처럼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려고 하는 인물이 있다면 반대로 어디라도 상관없는 인물이 있었다.
그게 바로 탈론이었다.
용병 생활을 고집하는 탈론은 충분한 돈만 들인다면 어떤 세력이든 들어간다고 설정되어 있었다.
물론 실력에 걸맞은 큰돈이 필요했지만, 절대군주의 공략 게시판에는 탈론을 돈이 아니라 영구히 영입할 수 있는 방법이 올라온 적 있었다.
그 공략을 올린 건 이름 있는 랭커.
그리고 나를 비롯한 많은 유저들이 직접 시험해서 검증한 내용이었다.
“영주님? 왜 그러십니까?”
“로크 경. 따로 해줘야 할 일이 생겼군.”
행운이 제 발로 걸어온 상황이었다.
무려 4티어나 되는 전투형 영웅을 거저먹을 수 있는 기회.
절대 놓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