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46화
VVIP 영주님의 품격 46화
46화
허락을 받았다는데도 불만을 토하는 걸로 보아서 루카인 남작은 바이든 남작과 원래 사이가 좋지 않은 듯했다.
게다가 지금 한 말은 굉장히 모욕적이었다.
“입조심하시오. 루카인 남작.”
“조심해야 할 건 그대요. 그대가 마이어드 후작님의 장인이라도 된 것 같소?”
“내가 뭘 어쨌다는 것이오?”
“전쟁터에 분내 나는 여자라니.”
루카인 남작의 시선이 좋지 않은 것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최소한으로만 꾸몄지만 어쨌든 레일리 왕녀는 나름 꾸미고 이 자리에 있었다.
영주들 앞에서 후줄근한 모습으로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의 복장은 전투를 앞둔 상황에 맞지 않았다.
‘갑옷을 입은 것이 아니니.’
영주도 아닐뿐더러 싸울 수 있는 몸으로도 안 보이니 루카인 남작이 역정을 낸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또한 다 허락을 받았소. 마이어드 후작님께서 허락하셨다는데 왜 그대가 나서는 것이오? 후작님에 대한 불만이오?”
정론에는 정론으로.
바이든 남작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이분이 사실 왕녀 저하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곧 그렇게 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레일리 왕녀가 나서려면 카이로스 백작을 꺾고 남부에서 그녀를 위협할 세력이 완전히 사라져야만 했다.
“그만두세요.”
그때 레일리 왕녀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바이든 남작을 말리고 루카인 남작의 앞에 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루카인 남작님.”
그리고 아주 우아하고 정중하게 루카인 남작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보는 사람이 절로 감탄할 정도로 훌륭한 모습이었다.
‘겨우 인사 한 번인데 수준이 다르네.’
거칠고 투박한 형식만 갖춘 인사와는 차원이 달랐다.
고작 인사 한 번에 막사 내 분위기가 달라질 정도였으니.
‘왕녀는 왕녀인가.’
어렸을 때부터 왕가의 교육을 받고 자란 왕녀다웠다.
게다가 레일리 왕녀 본연의 아름다운 외모까지 더해지니 루카인 남작도 잠깐 주춤거렸다.
“저는 이 자리에 마이어드 후작 각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바이든 남작이 요청한 게 아니라 후작 각하께서 직접 불렀지요.”
“크흠?”
레일리 왕녀의 말에 루카인 남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이어드 후작이 직접 불렀다는데 루카인 남작이 거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위치는 아니었다.
“중요한 분을 뵙는 자리이기에 신경을 쓴다고 하였는데 제가 미진해서 루카인 남작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모양입니다.”
“아니, 난 그런 게 아니라…….”
루카인 남작이 화를 낸 건 아마 레일리 왕녀의 존재보다는 바이든 남작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역정까지 낼 필요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마이어드 후작 각하의 부름을 무시하고 돌아갈 수는 없으니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지요.”
“아니오. 내가 심했소.”
루카인 남작은 역정을 냈던 것에 비해 쉽게 물러났다.
영주 된 몸으로서 영주가 아닌 상대와 언성을 높이는 것도 그렇고, 마이어드 후작의 이름 때문에 눌린 탓도 있다.
그러나 레일리 왕녀가 보여준 특유의 분위기가 무엇보다 결정적이었다.
‘미인계라더니.’
슬쩍 시선을 피하는 게 레일리 왕녀의 미모에 홀린 듯했다.
“후작 각하께서 찾았다면 이유가 있었겠지.”
루카인 남작은 자신도 모르게 핵심을 짚었다.
레일리 왕녀가 괜히 이 자리에 온 게 아니다.
‘왕녀에게는 입지가 필요하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알 수 있듯이 레일리 왕녀는 마이어드 후작 휘하의 귀족에게도 그 존재가 감추어져 있었다.
이는 왕녀의 존재를 숨기기에는 좋으나 나중에 마이어드 후작의 후계자가 되기에는 문제가 될 부분이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왕녀에게 친왕실파에 적대적이던 대영주파 귀족인 마이어드 후작이 자리를 넘긴다?
뒷말도 아니고 앞에서 반대할 이들이 수두룩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자리를 기회로 레일리 왕녀의 존재를 드러내고 입지를 세워주는 게 마이어드 후작의 목적이었다.
“마이어드 후작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그때 기사가 들어와 마이어드 후작의 등장을 알렸다.
영주들은 입을 다문 채 정중한 태도로 마이어드 후작의 등장을 반겼다.
나 역시 마이어드 후작과 나쁜 관계를 맺어야 할 이유가 없었기에 분위기에 응했다.
“남부의 영웅들이 이리 한자리에 모이니 참으로 기쁘오.”
‘이 사람이 마이어드 후작.’
직접 눈으로 마주하게 된 마이어드 후작은 레일리 왕녀가 말했던 대로 상당히 늙은 사내였다.
마법사 협회의 원로이자 내 스승인 플레턴을 떠올리게 할 정도의 사내.
현역으로 뛰기에는 확실히 무리가 있는 나이였다.
그러나 우습게 보이지는 않았다.
마이어드 후작의 눈빛에는 매서움이 있었고 그의 세력은 남부 제일이었으니까.
“젊은 영웅께서도 와주었군.”
마이어드 후작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난 고개를 살짝 내려 인사를 건넨 뒤 마이어드 후작과 얼굴을 마주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인 네패스입니다.”
“그래. 아주 반갑군.”
마이어드 후작은 몇몇 영주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에 상석으로 향했다.
“이 자리에 모인 이유에 대해서 모를 사람은 없을 터,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남부의 안정을 위해 모두가 힘을 합쳐줬으면 하오.”
마이어드 후작은 카이로스 백작을 공공의 적으로 만들었다.
어디까지나 영주들이 단합하기 위한 명분으로써.
실제로 카이로스 백작이 어떤 성정을 가졌고 어떤 악행을 해왔는지는 이 자리에서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물론 실제로도 온갖 악행으로 유명하기는 했지만 영주들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카이로스 백작을 제물로 삼아서 마이어드 후작의 편에 서고 남부 내전에서 승리하는 것.
그게 영주들 대부분의 바람이었다.
“물론입니다. 무도한 카이로스 백작에게 희생당한 이들을 위해서라도 꼭 그를 물리쳐야 합니다.”
“명예로운 싸움에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영주들은 마이어드 후작에게 눈도장이라도 찍기 위해서 열심히 애썼다.
마이어드 후작은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영주들을 칭찬하더니 레일리 왕녀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비록 내전으로 힘든 시기지만 이러한 시기에 영웅이 나타나는 법이기도 하지. 모두 소식은 들었을 것이오. 바이든 남작.”
“네.”
마이어드 후작의 호명에 바이든 남작이 앞으로 나섰다.
“그대의 활약은 익히 들었소. 감탄이 나오더군.”
“감사합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비단 저만의 공은 아니었습니다. 이 아이가 아니었더라면 절대 불가능했겠지요.”
사전에 약속된 흐름으로 대화가 이어지며 바이든 남작이 레일리 왕녀를 부각시켰다.
그러자 영주들의 시선도 레일리 왕녀에게 집중되었다.
그들은 도대체 그녀가 누구이기에 바이든 남작이 저렇게 말하는지 궁금해했다.
“정말로 놀라운 재능을 지닌 아이입니다. 이 아이가 낸 의견에 따른 것만으로 여러 영지들이 제 손에 들어왔지요.”
바이든 남작은 침까지 튀겨가며 레일리 왕녀의 활약을 칭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얼마나 열성적이었는지 바이든 남작이 말하느라 숨을 쉬지 못해 호흡이 흐트러질 정도였다.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이번 카이로스 백작과의 싸움에서도 이 아이의 지혜를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몇몇 영주들이 그 말에 몸을 움찔거렸다.
마이어드 후작이나 다른 이름 있는 영주의 의견이라면 모를까, 오늘 처음 본 여자의 의견으로 연합군을 지휘하자는 소리와 마찬가지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건 너무 과하지 않은가?”
아니나 다를까, 영주들 중에 반대하는 이들이 나왔다.
“결코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이든 남작은 자신감이 넘쳤다.
그럴 만도 할 게 실제로는 왕녀 혼자가 아니라 마이어드 후작을 비롯해 그 측근들이 이미 필요한 계획을 모두 짜두었을 테니까.
이 자리는 어디까지나 레일리 왕녀의 얼굴을 알리고 공을 떠먹일 자리였다.
“뭐, 적어도 발언 정도는 괜찮지 않은가?”
마이어드 후작이 은근슬쩍 레일리 왕녀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에 몇몇 영주들이 의아한 눈으로 마이어드 후작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 갑자기 불러낸 것도 그렇고 이렇게 파격적으로 도움을 주니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앞으로 나오너라. 이름이 무엇이냐?”
“라일입니다.”
“라일이라.”
본명을 쓸 수 없었기에 레일리 왕녀는 가명을 대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기회를 주신다면 미진한 의견이나마 내보겠습니다.”
“부담 갖지 말게.”
마이어드 후작이 허락하니 영주들은 찝찝해하면서도 더는 뭐라 하지 못했다.
그리고 실제로 듣는 것만으로는 별다른 손해가 없었고.
의견을 내는 것과 그것을 채택하는 건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으니까.
“그럼.”
레일리 왕녀는 차분하게 이 자리에 모인 영주들의 군대부터 파악된 카이로스 백작가의 전력을 쭉 나열했다.
그리고 전술 지도를 놓고 어떤 식으로 싸움을 진행하는 게 좋을지를 설득시켰다.
이미 마이어드 후작가에서 신경 써서 만들었을 테니 그녀가 꺼낸 작전은 충분히 훌륭했다.
“호오.”
처음에는 별다른 기대 없이 듣고 있던 영주들도 하나씩 눈을 반짝였다.
실제로 전략대로 일이 흘러갈지 아닐지는 부딪치기 전에 알 수 없으나 어긋나는 부분 없이 유려한 작전임은 분명했다.
무엇보다 알려주지도 않은 각 군대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가산점을 받을 수 있었다.
‘저 많은 정보는 어디서 알아낸 거지?’
‘딱히 흠잡을 곳이 없는 계획이다. 하지만 실제 전투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지.’
영주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레일리 왕녀가 꺼낸 전략에 대해 평가했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보의 출처만 확실하다면야.”
“그거라면 걱정 말게. 나도 확인한 사실이니까.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실로 정확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마이어드 후작이 보증을 하고 나서자 영주들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이 자리에서 마이어드 후작의 뜻에 반대할 사람도 없었고.
“흠. 하지만…….”
그러나 영주들은 찝찝한 느낌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나타난 라일이라는 여성에 대해 의구심이 드는 것만큼은 피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여기쯤 내가 나섰다.
“발언을 해도 되겠습니까?”
“그러게.”
마이어드 후작의 허락을 받은 난 영주들을 향해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그녀의 지혜를 빌린 건 바이든 남작만이 아닙니다.”
바이든 남작과 마찬가지로 남부에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한 영주.
그게 바로 나였다.
그런데 나와 바이든 남작은 서로 마주하고 있는 이웃한 영지의 영주였다.
그리고 내전 동안 서로 충돌한 적이 없었고.
그건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영주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서로가 가진 배경 때문에 물러났다는 게 일반적인 정설이었겠지만 그건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니 여기서 가짜로 진실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그 말은 혹시?”
“저도 도움을 받았지요.”
나는 내가 써먹었던 전략들이 레일리 왕녀를 통해서 나왔다고 이야기했다.
생각지 못한 활약으로 남부의 새로운 돌풍이 되고 있는 나의 이야기에 영주들이 입을 떡하니 벌렸다.
“그, 그 정도라고?”
물론 다소 과하기는 했다.
바이든 남작뿐만 아니라 내 공적마저 그녀에게 넘긴 셈이니까.
가만히 믿기에는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캐물을 수는 없었다.
당사자인 나와 바이든 남작이 그렇다고 하는데 그들이 어쩌겠는가?
그리고 나중에 레일리 왕녀의 정체가 밝혀진다면 자연스럽게 납득하게 될 내용이었다.
“부끄럽습니다.”
레일리 왕녀는 겸손하게, 그러나 비굴하지는 않게 당당히 영주들을 마주했다.
자리에 모인 영주들은 이전과 달라진 눈으로 레일리 왕녀를 보았다.
“모든 게 사실이라면 정말 대단하군.”
“업적이 있다면야…….”
아무리 영주들이라도 증명된 성과 앞에서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모두 어찌 생각하는가?”
마이어드 후작은 영주들에게 레일리 왕녀의 의견에 대해서 재차 물었다.
이전에도 나름 좋게 평가했던 영주들은 아예 침이 마르도록 레일리 왕녀를 칭찬했다.
“훌륭한 계책입니다. 카이로스 백작을 이 남부에서 지워버릴 수 있을 겁니다.”
“믿어도 될 거 같습니다. 그녀를 알아보고 이 자리에 부른 마이어드 후작 각하의 안목도 대단하십니다.”
그 와중에 마이어드 후작에 대한 아부도 빠지지 않았다.
그에 마이어드 후작도 긍정해 주며 레일리 왕녀의 공을 다시 한번 높이 평가했다.
난 이 연극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기껏 이렇게 준비한 계획이 망가질 때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무척이나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