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44화
VVIP 영주님의 품격 44화
44화
* * *
“전군 돌격하라!”
카이로스 백작가의 군대는 포위를 뚫기 위해 힘차게 내달렸다.
혼자 그 앞을 막을 수 없던 학살자는 뒤로 물러났고 대신 화살 비가 마이어드 후작가의 기사단을 향해 쏟아졌다.
기사들은 방패로 화살을 막아내며 선두에 있던 카이로스를 감쌌다.
“괜찮으십니까?”
“보기 좋게 한 방 먹었어.”
카이로스는 부러진 손목과 사라진 귓가를 매만졌다.
피가 끈적끈적하게 배어 나왔다.
“지혈하겠습니다.”
“됐어. 죽을 정도는 아니야. 그보다 한 가지 시킬 게 있다.”
“무엇입니까?”
“활잡이를 찾아. 죽이지는 말고. 내 피를 본 이상 내가 직접 죽여야지.”
“알렉스 경에게 지시해 두겠습니다.”
테인 준남작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기사단의 지휘를 위해 앞서갔다.
카이로스는 천천히 말에 오른 뒤 느긋하게 그 뒤를 쫓았다.
싸움은 치열했고 또 처절했다.
포위망에서 나가기 위해 뚫으려는 카이로스 백작가의 기사들과 목숨을 버려서라도 막으려는 마이어드 후작가의 기사들.
지형지물과 함정, 장애물 앞에 카이로스 백작가의 정예들도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 가장 걸리적거리는 건 중간중간 날아드는 의문의 화살이었다.
푸욱!
“컥!”
쏟아지는 화살 비에 숨어 강철조차 꿰뚫는 무시무시한 화살이 날아와 기사의 숨통을 끊었다.
카이로스는 그 광경을 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활잡이의 방식이야 우월한 사거리를 이용해서 저격하는 게 당연하기는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자신이 당하는 입장이라면 더욱.
“크악!”
적을 찾아내지도 못한 채 기사들이 하나둘씩 고꾸라졌다.
방패를 앞세워도 소용없었다.
정면이 아니라 측면에서 느닷없이 날아와 기사의 목을 꿰뚫었으니.
“빠르군.”
적이 둘이 아닌 이상 굉장히 민첩한 몸놀림이었다.
그 뒤로도 기사 둘이 더 나자빠지며 쓰러졌다.
타악!
활잡이로부터 사격이 멈춘 것은 알렉스 경이 투입된 이후였다.
침착하게 활잡이의 방향을 살피던 그는 한쪽에서 화살이 날아오는 순간 그쪽을 향해 마주 나아갔다.
‘알렉스 경은 내 기사 중 가장 민첩하지.’
사실 기사란 말도 맞지 않았다.
보통 기사라고 함은 말을 타고 부대를 지휘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러다 필요하면 선두에서 적의 대열을 무너트리는 등 기사는 전장에서 필요한 대부분의 역할을 소화하는 자였다.
그러나 알렉스 경은 그런 다양한 활약이 불가능했다.
그의 특기는 어디까지나 상대를 죽이는 것.
알렉스 경은 타고난 암살자였다.
얼마 전 마이어드 후작가가 공세를 취하게 된 계기인 기사 암살 역시 알렉스 경의 솜씨였다.
“알렉스 경! 죽이면 안 된다고!”
카이로스는 부디 자신이 활잡이를 잡을 수 있기를 바랐다.
알렉스 경은 죽이는 건 정말 잘하지만 생포에는 의외로 서투른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손으로 죽여야 하는데.”
만약 다른 기사가 홧김에 상대를 죽인다면 카이로스는 그 기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알렉스 경은 아끼는 삼기사였다.
루퍼스 경까지 죽은 마당에 자신을 빼면 유일한 삼기사인데 실수 좀 했다고 제 손으로 죽일 수는 없었다.
“막아라! 여기서 저지해야 한다!”
그때 앞쪽에서 거대한 방벽이 나타났다.
실제 방벽은 아니고 중무장한 보병들이 거대한 방패를 앞세워서 만들어낸 방진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앞쪽에 층계를 만들어 위쪽에도 방진을 형성한 상태였다.
“쉽지 않겠군.”
카이로스는 적들의 무장 상태와 지형을 확인하고 만만치 않은 벽임을 느꼈다.
결정적으로 후방에 마법사들이 있었다.
“활잡이도 잡아야 하는데.”
카이로스는 잠시 고민했으나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루퍼스 경이 죽고 알렉스 경이 자리를 비운 이상 저 방진은 자신이 뚫어야 했으니.
“나를 따라와라!”
카이로스는 기사들을 이끌고 방진으로 달려들었다.
온갖 마법과 화살이 날아왔지만, 그가 입고 있는 갑옷이 그 모든 충격을 받아냈다.
따다당!
마치 돌멩이로 때리듯 화살이 갑옷을 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앞으로 번쩍이는 화염과 얼음, 바람 등 온갖 마법이 시야를 방해했지만 카이로스는 멈추지 않았다.
“지금이다!”
그러나 층계에 접근하는 순간 갑자기 정체 모를 액체가 쏟아지자 카이로스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냄새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기름이었다.
화르륵!
카이로스를 비롯한 여러 기사들의 몸이 불길에 휩쓸렸다.
기사들은 몸부림을 치며 바닥을 굴렀으나 기름 먹인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크하하하! 어떠냐, 카이로스 백작!”
회심의 노림수가 성공한 것에 벨로스는 통쾌하게 웃었다.
아무리 괴물 같은 무력을 가진 카이로스라도 온몸에 불이 붙은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갑옷을 입은 그대로 산 채로 태워지는 수밖에.
“필립 경의 복수다!”
푸히힝!
그때 말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여러 말들의 울음소리와 다른 점은 그 위치.
방진의 바로 코앞이기에 다른 울음소리보다 더 크고 선명했다.
촤악!
그리고 피보라가 일었다.
선두에서 방진을 형성하고 있던 병사들이 피를 쏟아내며 쓰러졌다.
범인은 불타고 있는 카이로스였다.
“뭐…….”
벨로스는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불타는 고통을 참아내면서 저럴 수 있단 말인가?
상대도 자신들과 같은 사람일진대.
‘정말 사람이 아닌 건가?’
한순간 그런 의심을 할 정도로 눈앞에서 보이는 광경은 비정상적이었다.
카이로스는 온몸이 불타는 와중에 놀라운 무용으로 방진을 깨부수고 있었다.
그의 뒤를 따라 몇몇 기사들이 합류하였고 한없이 단단해 보였던 방진은 여기저기에 틈이 만들어졌다.
“이익! 막아! 어떻게든 막아라!”
이대로 방진이 뚫린다면 그 뒤는 없었다.
포위망은 실패하고 너무 넓게 퍼져버린 마이어드 후작가의 병력이 도리어 각개 격파를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곳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사수해야 했다.
“남은 전력을 모두 투입해라!”
물러났던 기사들이 다시 달려들고 후방에 있던 부대들도 순차적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무너진 방진을 다시 세우려 했다.
촤좍!
그러나 카이로스 백작가의 기사들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용맹하게 달려들던 이들이 가장 먼저 죽었고 뒤를 이어 무자비한 살육이 이어졌다.
“큭! 용병들!”
정규군의 전술에 합류시키기 애매했던 용병들마저 투입되었다.
그중에서 학살자의 활약이 눈부셨다.
그는 카이로스 백작가의 기사 하나를 그대로 패대기치고는 짓이겼다.
그 놀라운 힘에 분위기가 다시 넘어오는 거 같았다.
“그래, 네놈한테는 손목의 빚이 있었지.”
그때 혼란을 틈타서 카이로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새 핏물로 화염을 꺼트린 그는 피부가 화상으로 얼룩져 악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헉!”
학살자는 끔찍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켰다.
그러나 기습적인 상황에 대응이 늦어졌다.
카이로스는 일전에 뺏어둔 낫을 치켜들었다.
촤악!
“크아악!”
학살자의 손목이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이건 내 손목의 몫.”
카이로스는 재차 낫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목이었다.
그러나 카이로스는 목을 베기 전에 급하게 몸을 틀어야 했다.
이전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학살자의 뒤편에서 날아온 화살이 카이로스를 물러나게 만들었다.
“젠장! 알렉스 경!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기어이 활잡이가 다시 돌아온 것에 카이로스는 분노를 표했다.
저 활잡이는 알렉스에게 붙잡혀 엉망이 된 상태로 나타났어야 했다.
그러나 알렉스 경은 어찌 되었는지 활잡이가 멀쩡하게 나타난 상황이었다.
그나마 이전과 달라진 건 모습을 온전히 드러냈다는 것.
하지만 그건 더 이상 몸을 숨길 곳이 없기 때문이었을 뿐이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정말 죄다 쓸모없어!”
네패스 남작에게 죽었다는 루퍼스 경도 그렇고 알렉스 경도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기껏 자신과 동등한 수준이라는 뜻에서 삼기사란 칭호를 내려줬건만, 이게 뭔가?
둘 다 자신이 내린 명령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그때 알렉스 경이 카이로스의 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어깨와 옆구리에 화살에 긁힌 상처를 달고 있었다.
카이로스는 그 모습에 울화가 치밀었다.
“그 꼴로 잘도 돌아왔구나.”
“활잡이의 솜씨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하, 그걸 변명이라고!”
카이로스는 이를 갈았으나 여기서 알렉스 경을 처벌할 수는 없었다.
저 활잡이는 너무 위협적이었다.
“학살자를 마무리해라. 저 활잡이는 내가 처리할 테니.”
카이로스는 활잡이를 향해 뛰어들었다.
역시나 활잡이는 거리를 주지 않기 위해서 물러나며 화살을 쏘았다.
그렇게 치열한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 * *
“후…….”
후드를 눌러쓴 활잡이는 나무 뒤에 숨어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금껏 숱한 적들을 사냥해 봤지만, 카이로스 백작 같은 상대는 흔치 않았다.
기습으로 날린 자신의 화살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피해내다니.
정면으로 날리는 건 아예 닿지도 않았다.
‘뭐 저런 괴물 같은 놈이 다 있지?’
더구나 화상으로 얼룩진 피부에 피를 뒤집어쓴 게 어떻게 봐도 사람보다는 괴물의 형상이었다.
사람이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였다.
‘저놈이 마족 아니야?’
오죽하면 카이로스 백작이 사실은 마족이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 때쯤.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졌다.
활잡이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그 장소를 벗어났다.
콰앙!
카이로스는 조금 전까지 활잡이가 있던 장소를 짓밟았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큭!”
활잡이는 다급하게 활시위를 당겼지만, 그것을 쏘기 전 카이로스가 날린 낫이 활잡이의 활을 때렸다.
따앙!
그 충격에 조준이 빗나가는 사이 카이로스는 활잡이와의 간격을 빠르게 줄였다.
‘다시 겨냥할 시간이 없다.’
활잡이는 지금 걸어둔 화살 한 발에 따라서 자신의 생사가 결정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카이로스가 노린 것도 그거였다.
단 한 발의 화살에 자신의 목숨이 걸린 상황.
침착하려야 침착할 수 없다.
더구나 지금까지 카이로스를 상대로 정면에서 날린 화살은 한 번도 통하지 않았다.
“쏠 테면 쏴봐라!”
승리를 확신한 카이로스는 활잡이를 비웃었다.
“어?”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던 카이로스를 무언가가 붙잡았다.
어깨를 잡힌 카이로스는 나아가지 못하고 휘청였다.
“못 간다!”
“학살자!”
손목이 아예 잘린 주제에 기어이 자신을 추격해 온 상대의 모습에 카이로스는 어이가 없었다.
다행히 학살자는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랬더라면 뒤에서 공격을 했지, 붙잡고 늘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알렉스 경의 공격에 이미 엉망으로 당한 학살자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아직도 살아 있었고 카이로스는 그에게 방해받은 상태였다.
쐐액!
공기를 꿰뚫으며 화살이 쏘아졌다.
카이로스는 안간힘을 써서 몸을 틀었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파악!
“큭!”
급소는 피했으나 옆구리를 따라서 갑옷이 찢기며 핏물이 솟구쳤다.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큰 통증을 남길 상처였다.
적어도 몇 주는 아물기 힘든.
“빚은 갚았다.”
학살자는 활잡이를 향해 말을 남겼다.
그의 뒤에서는 알렉스 경이, 앞에서는 카이로스가 공격을 날리고 있었다.
자신의 죽음은 사실상 확정이나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활잡이는 화살을 날리고는 곧장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에는 충분했다.
촤악!
뒤늦게 쫓아온 알렉스 경이 학살자의 목을 베어냈다.
카이로스는 악귀 같은 시선으로 알렉스 경을 보았다.
“알렉스 경. 오늘 나를 자꾸 실망시키는군.”
분노한 카이로스의 목소리에 알렉스 경은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껏 오늘만큼 자신의 역할을 해내지 못한 적이 없었다.
활잡이도 그렇고 학살자도 그렇고.
일개 용병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뛰어난 자들이었다.
“아무리 그대의 싸움 방식이 전장에 어울리는 방식은 아니라지만 이런 식이라면 곤란해.”
물론 알렉스 경에게는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그는 애초에 이런 대규모 전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유형의 싸움법을 익힌 몸이었다.
암살이나 기습이라면 모를까 자신의 위치를 드러낸 상태로 하는 싸움은 여러모로 불리했다.
활잡이나 학살자 같은 동급의 실력자에게는 활약하기 힘들 정도로.
“쯧. 생각을 잘못했어.”
카이로스는 차라리 네패스 남작에게 루퍼스 경이 아니라 알렉스 경을 보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만약 그랬다면 자신이 원하던 그대로 네패스 남작을 죽일 수 있었을뿐더러 활잡이와 학살자에게 이런 수모를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회할 기회를 주십시오. 쫓겠습니다.”
“이미 늦었어.”
카이로스는 저 멀리 사라져가는 활잡이를 보았다.
쫓으려면 쫓을 수 있지만 대가가 너무 컸다.
자신도 여기에 있고 알렉스 경도 빠진 상황.
테인 준남작만 믿고 포위망을 뚫길 바라는 건 다소 무리인 일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몸 상태도 최악이었다.
학살자에게 손목이 부러지지를 않나, 기름을 뒤집어쓰고 불타지를 않나.
옆구리를 꿰뚫린 활잡이의 화살도 위협적이었다.
아무리 인간 같지 않은 활약을 선보이는 그라도 이 이상은 무리였다.
그렇게 남부의 대영주들이 펼친 전면전이 한 차례 막을 내렸다.
카이로스 백작가의 기사단은 기어이 포위망을 뚫어내는 데 성공했다.
마이어드 후작가는 기사단장인 필립에 이어 부단장인 벨로스의 목이 떨어졌고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카이로스 백작가의 대승인 듯했지만, 포위망을 뚫는 데 시간이 다소 지체되었다.
카이로스 백작가는 포위 공격을 받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래도 포위망은 결과적으로 무너졌고 공격을 가하던 마이어드 후작가의 병력이 역으로 고립되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최종적으로는 카이로스 백작의 승리로 끝을 맞이했다.
상처가 큰 승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