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43화
VVIP 영주님의 품격 43화
43화
* * *
“남부 제일이라.”
카이로스는 자신의 앞에 쓰러져 있는 마이어드 후작가의 기사단장 필립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 남부 제일이라는 위명이 붙은 건 벌써 1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난 일.
이제는 늙었다고 해서 이상하지는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실망스러웠다.
“알렉스 경이나 루퍼스 경에게도 못 미치면서 남부 제일은 너무하잖아.”
전성기가 지났다는 걸 변명으로 하기에는 너무 실망스러웠다.
카이로스는 그걸 필립과 직접 겨룸으로써 깨달았다.
애초에 이 늙은 기사에게는 남부 제일이라 칭할 만한 실력이 없었다.
“당장 마이어드 후작가의 기사 중에도 더 강한 기사가 몇 명은 더 있겠구먼.”
그럼에도 남부 제일이라는 위명을 필립 경이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그가 남부 최강의 세력을 자랑하는 마이어드 후작가의 기사단장이라는 이유뿐이었다.
남부 최대 세력에서 무력의 상징인 기사단장을 맡고 있으니 그가 곧 남부에서 최강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추측으로 붙은 허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늙은이의 군대는 사고 관념도 늙었나. 아무리 경험이 풍부해도 이런 사람을 단장이라고 앉혀놓다니.”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카이로스의 곁으로 테인 준남작이 다가왔다.
그는 다소 씁쓸한 눈으로 필립의 시신을 보았다.
“어차피 메인은 네패스 남작이 아니었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남부 제일이라면 애피타이저 정도는 되어줬어야지.”
식욕을 돋우기는커녕 싹 사라지게 만든 상대.
카이로스는 인상을 쓰며 필립의 시신을 짓밟았다.
“다른 놈을 잡아야겠어. 어디 있지?”
“필립 경이 죽은 다음 진영을 뒤로 물리고 있습니다.”
“후퇴한다고? 이 늙은이가 진짜.”
카이로스는 어이가 없었다.
남부에서 최고의 세력을 자랑한다더니 내세울 게 숫자밖에 없단 말인가?
마이어드 후작을 지금껏 경계해 왔던 자신이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냥 후퇴가 아닙니다.”
“그럼?”
“저희를 좀 더 끌어들일 계획 같습니다.”
“호오. 무려 기사단장까지 내주고서는 덫을 꾸미고 있다?”
테인 준남작의 추측에 카이로스는 그제야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그래야지. 나이를 허투루 처먹은 게 아니라면. 그럼 초대를 받았으면 찾아가야지.”
“쫓으시겠단 말씀입니까?”
“준비된 함정에 들어가는 게 어리석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 하지만 참을 수가 없잖아.”
카이로스는 어렸을 때부터 마이어드 후작을 자주 봐왔었다.
그때도 마이어드 후작은 남부에서 최대 세력을 자랑해 왔다.
“그 늙은이를 넘어서는 게 어렸을 때의 꿈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대로라면 내가 넘기도 전에 먼저 늙어 죽을 거 같아서 조바심이 난다고.”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말리지 않나?”
카이로스는 자신의 곁에 붙어서 함께 추격을 준비하는 테인 준남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뻔히 준비된 함정에 제 발로 들어가겠다면 누구라도 말리는 게 정상이건만.
“말리는 게 통할 분이 아니니까요. 주군을 막을 방법을 찾을 바에야 함정을 뚫고 마이어드 후작을 잡는 게 더 쉬울 겁니다.”
어딘가 달관한 듯한 테인 준남작의 말에 카이로스는 폭소했다.
너무 웃어서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크하하하! 역시 경은 나를 너무 잘 알아.”
카이로스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래서 자신이 그를 아끼는 거였다.
자고로 안 된다는 말을 하기 이전에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모범적인 가신의 태도.
그런 면에서 충언이니 뭐니 하면서 반대부터 하고 보는 자들은 얼마나 가식적인가?
“그럼 가볼까?”
카이로스는 테인 준남작이 끌고 온 말 위에 올랐다.
* * *
마이어드 후작가의 부단장 벨로스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처음에 카이로스 백작이 총공격을 감행할 때만 하더라도 쉽게 승리할 줄 알았다.
백작가의 기사들이 대단한 실력을 지니기는 했지만, 개인의 무력이 드넓은 전장에서는 영향을 주기 어려웠으니.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런 줄 알았다.
‘혼자서 기사들을 도륙하다니.’
카이로스는 거대한 대검을 휘둘러 자신을 가로막는 마이어드 후작가의 기사들을 참살했다.
두 번은 필요 없었다.
방패나 갑옷까지 잘라내는 대검을 휘둘러 일격에 한 명, 때로는 두 명까지 베어냈다.
그렇게 기사단이 서로 맞붙어 몇 분 지나지도 않아 마이어드 후작가의 기사들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 했다.
‘이런 망신이 있나.’
결국, 기사단은 물러서야만 했고 기사단이 전선에서 이탈하자 병사들도 힘을 쓰지 못했다.
말을 탄 기사들을, 보통의 병사들로서는 감당하기 힘들었으니.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다. 필립 경의 원수를 갚아주마.’
벨로스는 준비된 함정으로 겁 없이 들어오는 카이로스의 모습을 두 눈에 담았다.
마이어드 후작은 노련한 인물이었고 그는 밀릴 경우도 상정에 뒀었다.
마이어드 후작가의 군대는 중군을 뒤로 빼내면서 좌익과 우익에 예비대를 합류시켜 적들을 감싸고 있었다.
아무리 병력이 두 배라도 포위는 쉬운 게 아니지만, 적의 선두를 끌어들임으로써 그 쉽지 않은 포위를 실제로 해냈다.
이제 중군이 뚫리지 않고 버티기만 한다면 카이로스 백작가의 군대는 궤멸을 피하기 힘들었다.
“흠.”
선두에서 기사단과 함께 들어오던 카이로스는 갑자기 고삐를 잡고 움직임을 멈췄다.
시야가 닿는 곳에 쫙 깔려 있는 마이어드 후작가의 병력들.
마치 호리병처럼 자신을 감싸고 있었다.
“매복. 그것도 포위인가. 꽤나 큰 그림을 그리고 있군.”
이만한 대규모 군대의 싸움에서 부분적인 포위도 아니고 전체 포위를 노리다니.
마이어드 후작의 배포에 카이로스는 감탄했다.
“그동안 가만히 시간만 축낸 건 아니었어.”
이러한 포위망의 형성이 가능한 건 카이로스 백작가와 대치하는 동안 미리 준비한 덕이었다.
틈새가 될 부분은 구조물을 쌓아 막아두거나 포위망 형성에 방해가 되는 부분은 반대로 뚫어두었다.
그렇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공세를 할 걸 알았거나, 몰라도 꼼꼼하게 대비했거나. 늙은이답게 굴 하나는 잘 파는군.”
포위는 성공만 한다면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전략이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병력이 넓게 퍼지느라 한쪽이 뚫리면 역으로 잡아먹힐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막기 위해선 선봉인 자신들을 버틸 만큼 중군이 튼튼해야만 했다.
“당연히 주력은 이 앞에 배치해 뒀겠지?”
“그것이 정석이지요.”
테인 준남작이 카이로스의 말을 받았다.
백작가의 이름 있는 기사들이 모두 이 자리에 모여 있었다.
당연히 포위망을 성공하기 위해선 이들의 돌격을 감당할 전력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 기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나 볼까?”
카이로스는 느긋하게 말을 몰았다.
돌파를 위해서는 전력 질주를 하는 게 맞았지만, 혹시 모를 노릇이었다.
기껏 기대하게 만들어놓고 실력 있는 기사 대신에 맥 빠지는 함정이 있을지.
그때 정면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카이로스는 흥미를 담아서 그를 봤다.
죽은 마커스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체구에 흉흉한 기백을 가진 이였다.
“누구지?”
“북부인이로군요.”
테인 준남작은 금방 남자의 정체를 알아봤다.
유독 덩치가 컸던 마커스 경에게도 북부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소문을 들은 적 있습니다. 북부에서 명성이 자자한 학살자가 남부로 내려왔다고.”
“학살자?”
“듣기로는 웬디고를 맨손으로 찢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래?”
카이로스도 웬디고에 대해서라면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 역시 맨손으로 잡아보고 싶은 몬스터였다.
“그런데 왜 마이어드 후작 밑에 있지?”
“그는 용병입니다.”
“그것도 마음에 드는군. 늙은이가 이런 중요한 싸움에서 용병을 내보낼 줄이야. 생각보다 고리타분하지만은 않네. 아니면 더 내보낼 기사가 없어서 그런가?”
“푸하하하!”
카이로스의 말에 그의 기사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남부 제일이라 큰소리를 치던 마이어드 후작가의 기사들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더구나 이런 중요한 때에 나온 게 외부에서 돈 주고 영입한 용병이라니.
남부 최고라는 마이어드 후작의 입장에서는 체면을 크게 구긴 셈이었다.
물론 그런 체면에 구애받지 않고 용병을 내보낸 건 높이 살 만했지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대로 밀어버릴까요?”
학살자의 완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이쪽은 중무장하고 말에 올라탄 기사들이었다.
인간인 이상 절대 막지 못한다.
“늙은이가 기껏 자존심을 굽혀서 부른 용병이잖아? 어울려줘야지.”
“포위망이 굳건해지기 전에 서두르셔야 합니다.”
“걱정 마라. 오래는 안 걸릴 테니까.”
카이로스는 말에서 내려 학살자를 향해 걸어갔다.
자신 역시 어디 가서 키가 작다고 느껴본 적이 없으나 학살자는 머리 두 개만큼 더 컸다.
“마커스 경보다도 더 크군. 북부인, 남부 말은 쓸 줄 아나?”
“죽을 사람과 말을 섞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오.”
학살자의 말에 카이로스는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랑은 반대로군. 난 죽을 사람을 존중해서 마지막으로 말이라도 걸어주는데. 망자에 대한 예의가 없어.”
“그래서 형제들도 때려죽였나?”
“하, 어디를 가나 그 얘기군. 그건 그놈들이 먼저 잘못했어. 이 형님이 전쟁에서 공까지 세워서 백작이 된 건데 집에서 손가락만 빨던 것들이 무슨 자격으로 내 자리를 넘봐?”
“제 아비를 때린 건?”
“다 큰 남자들이 주먹질 좀 할 수 있지. 내가 죽였어? 아, 다리가 부러지셔서 앉은뱅이는 되었지만. 그래도 괜찮아. 어차피 더 동생 만들 필요는 없잖아. 내가 있으니까.”
“듣던 대로 쓰레기로군.”
카이로스는 눈썹을 씰룩이며 학살자의 차림새를 살폈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기이한 날붙이.
추수할 때 쓰는 낫과 흡사했다.
“무기가 특이하군.”
“죽인 다음에 목을 수확하기에 좋지.”
“그래?”
다음 순간 카이로스는 번개 같은 움직임으로 학살자의 안면을 붙들었다.
콰악!
학살자 역시 카이로스의 움직임에 반응해서 두 팔로 카이로스의 손목을 비틀었다.
그러나 학살자가 아무리 안간힘을 쓰더라도 카이로스의 손목은 부러지지 않았다.
“웬디고를 찢을 악력은 아닌 거 같은데.”
“끄으윽!”
“뭐라고 했더라? 죽인 다음에 목을 수확하기에 좋다고?”
카이로스는 한 손으로 학살자를 고정한 채 빈손으로 그의 허리춤에서 낫을 빼 들었다.
“어디 얼마나 잘 드는지 한 번 써주도록 하지.”
카이로스가 낫을 휘두르려는 순간 학살자의 후방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가만히 그것을 지켜보던 카이로스는 곧 그 정체를 파악하고 당황했다.
촤악!
“큭!”
화살이었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갑자기 날아든 화살이 카이로스의 귓가를 꿰뚫었다.
원래라면 미간을 꿰뚫었을 것을 간신히 피한 덕이었다.
으직!
그때 멀쩡히 버티는 것 같던 카이로스의 손목이 학살자의 손아귀에 비틀어졌다.
카이로스는 다급하게 학살자를 걷어찬 뒤 뒤로 물러났다.
“이 자식!”
카이로스는 그제야 학살자가 힘이 부족했던 게 아님을 깨달았다.
힘이 없던 게 아니라 일부러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이었다.
마이어드 후작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준비한 진짜 칼은 학살자가 아니라 뒤에서 화살을 날린 활잡이였다.
‘보통이 아니다!’
카이로스는 지금껏 이만큼 빠르게 날아오는 화살을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판금 갑옷도 뚫어버릴 만큼의 위력이 담긴 화살이었다.
“후. 이게 실패하다니.”
학살자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만든 확실한 기회였지만 카이로스가 생각보다 기민했다.
하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한쪽 손목은 확실히 부러뜨렸으니까.
저래서야 제힘의 반도 발휘하기 힘들었다.
“역시 늙은이! 잔꾀 하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
카이로스는 엉망이 된 자신의 손목을 보며 이를 갈았다.
학살자라는 위명에 기사단의 앞을 홀로 당당히 막아선 것.
더구나 용병이라는 사실에 당연히 혼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런 인식마저도 자신을 잡기 위한 덫의 미끼로 내버린 거였다.
“학살자! 방금 그 활잡이는 이름이 뭐지?”
카이로스는 학살자에게 활잡이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당연하지만 활잡이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알려줄 이유는 없지.”
“그러냐.”
학살자의 대답에 카이로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볼을 타고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마족과의 전쟁 이후로 본 적 없던 자신의 피였다.
할짝!
카이로스는 자신의 핏물을 핥았다.
비리고 역한 맛이 났다.
“그럼 직접 붙잡아서 물어봐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