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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영주님의 품격-42화 (42/250)

VVIP 영주님의 품격 42화

VVIP 영주님의 품격 42화

42화

【 대영주들의 전쟁 】

해가 모습을 감추자 각 군영에는 어둠을 밝히기 위한 불이 피어올랐다.

모라스 자작은 막사 앞에 불을 피우는 병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소 자신의 막사 앞에 불을 밝히는 역할은 그가 아끼던 견습 기사의 몫이었다.

싹싹한 성격에 부지런함을 갖추고 있어 누구 하나 나쁜 평가를 한 적이 없던 훌륭한 아이.

아마 조금만 더 자란다면 자신의 기사가 되어 명예를 드높여주지 않을까 기대감을 품었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죽었다.

“무언가 있습니까?”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모라스 자작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카이로스 백작으로부터 이야기는 없었나?”

“전혀 없었습니다.”

보고를 올리는 기사는 자칫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을까 걱정하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모라스 자작은 얼마 전 카이로스 백작가에서 온 기사들과 손을 잡고 인근 영주들과 함께 네패스 남작을 습격했다.

그때 당시만 해도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세 명의 영주들은 서로 굳건한 동맹을 맺고 있었으나 주변에 다른 누군가를 노리기에는 힘이 미약했으니까.

대영주인 카이로스 백작가와 손을 잡는 건 결코 나쁜 선택지가 아니었다.

문제는 결과.

자신감 있게 선공을 주장했던 카이로스 백작가의 기사 루퍼스 경의 의도에 따라 진행된 전투에서 그들은 참패를 맛봤다.

네패스 남작도 큰 피해를 입었겠지만 자신들의 피해가 압도적으로 컸다.

무엇보다 그렇게도 자신감 넘치던 루퍼스 경을 비롯한 카이로스 백작가의 기사들이 전멸당하고 말았다.

‘애꿎은 네패스 남작만 들쑤신 꼴이지.’

네패스 남작은 복수를 위해서 세 영주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의 일환 중 하나가 마법사들을 향한 경고였다.

마나 파장으로 전달된 협박은 마법사가 아니면 알아차릴 수 없기에 경우에 따라서는 마법사들이 입을 다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라스 자작의 마법사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주인인 모라스 자작을 위해서 이 사실을 기꺼이 알렸다.

하지만 마법사의 충성심에 기뻐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나빴다.

‘카이로스 백작가의 기사들을 꺾은 자들이 있다. 저번 싸움에선 그들이 없었음에도 우리가 피해를 더 봤지. 이번 싸움에서는 그들까지 나설 텐데.’

카이로스 백작은 네패스 남작을 죽이기 위해서 기사를 파견한 것이지, 자신들을 도우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그러니 자신들이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 놓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실 그럴 여유가 없기도 하고.

마이어드 후작이 공세로 전환하면서 카이로스 백작가 역시 가문의 존망을 건 싸움을 해나가고 있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좋지는 않습니다.”

사실은 아주 나빴다.

카이로스 백작가의 지원을 받고도 패배한 상대였다.

자신들의 힘만으로 막을 수 없다는 걸 병사들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도 눈과 귀는 멀쩡히 달려 있었으니.

“하지만 부하들의 사기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네패스 남작은 급격하게 세력을 확장하느라 내부의 단합이 잘 안 되고 있을 겁니다. 조금만 전투가 늘어지더라도 그 단합을 무너트릴 수 있습니다.”

“정말 그러겠는가?”

분명 네패스 남작의 병력 구성에는 큰 문제가 있었다.

작은 변방의 영주에 불과했던 터라 현재 네패스 남작의 휘하는 정복한 영지에서 받아들인 이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그것도 한두 곳이 아니니 단합을 논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네패스 남작에게는 그들을 휘어잡을 몇 가지 매력적인 힘이 있었다.

젊은 나이, 뛰어난 마법사, 파격적이면서도 공정한 처우 등등.

그중 가장 매력적인 것은 지금껏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전이 그 특성상 한 번 패배하면 가문의 멸망까지 걱정해야 한다지만 그래도 크고 작은 패배는 나오기 마련이었다.

당장 카이로스 백작가의 기사들도 네패스 남작에게 패배하였듯.

그러나 네패스 남작 본인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도리어 자신을 노렸던 카이로스 백작가의 기사들을 물리치며 자신의 힘을 증명해 보였다.

‘그야말로 난세가 만든 영웅 같군.’

본래라면 영웅이라 부르기 가장 적합한 인물은 카이로스 백작이었을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마족과의 전쟁에서 활약하며 용맹을 떨쳤고 힘을 키웠으니.

그러나 제 형제들을 죽이고 아비를 폭행한 미치광이 놈을 영웅이라 불러줄 사람은 없었다.

마이어드 후작은 애초에 논외였다.

그는 전형적으로 고리타분하고 늙은 대영주의 표본 같았으며 사람들의 심장을 뜨겁게 만드는 젊은 영웅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들로 최근 남부의 호사가들은 네패스 남작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가 마이어드 후작과 카이로스 백작으로 나누어져 있던 남부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올 수 있을지.

모라스 자작 개인적으로도 내심 기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적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낸 적.

그리고 그 적의 칼날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상태였다.

“한순간의 실수가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만들고는 하지.”

어리석었다.

카이로스 백작가에서 보낸 기사들에게 휘둘려서 섣불리 결정을 내린 것이.

차라리 먼저 고개를 숙였더라면.

그러면 자신이 아끼던 아이가 죽을 일도 없었을 것인데.

화악!

그때 갑자기 막사 바깥에서 환한 불빛이 일었다.

불은 이미 아까 전에 피웠을 터.

그리고 고작 어둠을 쫓기에는 너무나도 과하게 밝은 빛이었다.

모라스 자작은 의아해하며 밖을 확인했다.

병사들이 하나같이 넋 나간 얼굴로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모라스 자작 역시 위를 보았다.

“무슨!”

하늘이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재앙과도 같이.

* * *

“경계가 허술하군.”

“뭐, 보통 보초 몇 명만 세워도 충분한 장소이니까요.”

나는 마법사들과 함께 상대 진영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상태였다.

상대 진영에는 첩자를, 길목에는 보초를 세우는 게 일반적이고 실제로도 그랬지만 그 사이에 빈틈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린 건 내 협박을 견디지 못한 어느 영주 휘하의 마법사.

그는 일부러 경계가 허술한 지점이 어디인지를 나에게 전달해 주었다.

‘생각 이상의 소득인데.’

죽이겠다고 협박은 했지만 그걸 이렇게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여기에는 지금껏 내가 쌓은 전공이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더구나 최근에는 카이로스 백작가의 기사들까지 죽였으니까.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부담을 느낄 만도 했다.

“그럼 시작하지.”

내 신호에 맞춰서 제이스를 위시한 마법사들이 공격을 준비했다.

화르륵!

흡사 하늘을 불태우는 것 같은 거대한 화염 덩어리.

마법사들은 거기에 별도의 힘을 가하지 않고 유지만 해주면 불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떨어져 적진을 집어삼켰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큰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철컥!

하지만 마법사들만 왔을 리 있겠는가.

첩보대로 허술한 침투로를 확인하기 무섭게 기사단이 출동해서 대기 중이었다.

히히힝!

“돌격!”

상대가 갑자기 떨어진 불에 당황한 틈을 노려 기사단이 나아갔다.

난 기습에 대비해서 앞에 놓인 장애물들을 마나 블래스트로 날려 기사단이 나아갈 길을 열어주었다.

쾌속하게 진격한 기사들은 아무런 대응도 되어 있지 않은 적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기습이라도 생각보다 저항이 약한데.”

난 그 광경을 지켜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고로 영웅의 진가는 위기 상황에서 나오는 법.

실력 있는 기사가 있다면 빠르게 혼란을 수습하고 후퇴해야 했다.

“아무래도 남은 기사가 몇 되지 않는 모양입니다.”

내가 홀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빅터가 그럴듯한 추론을 내놨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저번 전투에서는 카이로스 백작가의 기사들에게만 집중했으나 사실 세 영주들의 기사 역시 엄청난 손실을 입었었다.

특히 처음에 무모한 돌격으로 입은 피해가 컸다.

“카이로스 백작가의 지원도 없나 보군.”

이 싸움에서 가장 우려했던 건 이전처럼 카이로스 백작이 기사들을 파견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카이로스 백작도 여유가 없는 듯했다.

“그럼 이대로 끝나겠어.”

내전 동안 나에게 가장 큰 피해를 줬던 영주들치고는 상당히 김빠지는 결말이었다.

그러나 나쁠 건 없었다.

저들을 제물로 해서 내 이름은 남부에 확실하게 각인될 테니까.

* * *

“네패스 남작의 성장은 정말 눈부시네요.”

레일리 왕녀는 바이든 남작의 이름을 빌려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었다.

그렇게 새롭게 손에 넣은 영지가 4곳.

기존 바이든 남작의 영토와 왈트 자작의 영토를 합하면 영지 6곳만큼의 방대한 영토가 손아귀에 들어온 상태였다.

그러나 네패스 남작은 그녀를 훌쩍 추월했다.

8곳만큼의 영지가 그의 손에 들어갔으니.

“믿어지지가 않아요.”

출발점이라도 앞섰다면 모를까 왕가의 병력을 가졌던 레일리 왕녀에 비해 네패스 남작은 본인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녀보다 앞섰다.

마이어드 후작과 카이로스 백작뿐이었던 남부에 새롭게 자신의 이름을 새긴 것이다.

“대단하긴 하군요.”

바이든 남작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카이로스 백작의 견제를 받아냈다는 사실.

그 악명 높은 카이로스 백작의 삼기사 중 한 사람인 루퍼스가 네패스 남작을 노리다가 되레 당하고 말았다.

덕분에 마이어드 후작가의 입장에서는 호기를 잡은 셈이었지만…….

“카이로스 백작이 어찌 나올까요?”

마이어드 후작은 카이로스 백작과 한 차례 전면전을 치렀다.

그러나 양측 모두 상당한 희생만 있었을 뿐, 성과 없이 싸움이 끝났다.

지켜내는 처지인 카이로스 백작이 이겼다고도 볼 수 있지만, 병력이 많은 마이어드 후작으로선 소모전도 나쁘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 싸움이 루퍼스를 비롯한 기사 전력 상당수가 사라진 뒤에 나온 결과라는 것이다.

카이로스 백작가의 기사들이 대단하다는 건 알았지만 그만한 전력을 잃고도 여전히 마이어드 후작과 팽팽하게 겨룰 수 있다는 건 놀라웠다.

특히 가장 놀라운 건 카이로스 백작 본인이었다.

설마 전장 한복판에서 마이어드 후작가의 기사들을 도륙해 버릴 줄이야.

그의 손에 죽은 기사의 수가 열이 넘었다.

그 삼기사에 자신의 이름까지 넣은 게 절대 괜한 허세가 아니었다.

“아마 공세를 취하겠죠.”

마이어드 후작이야 원래 강하고, 네패스 남작의 성장도 폭발적이다.

왕녀의 존재는 모를 테지만 바이든 남작도 세력을 늘리고 있으니 시간은 카이로스 백작의 편이 아니었다.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카이로스 백작은 불리한 싸움을 해야만 한다.

먼저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공세라면 어느 쪽을?”

거리가 있는 바이든 남작을 노리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카이로스 백작이 노릴 만한 건 마이어드 후작과 네패스 남작 둘 중 하나였다.

“글쎄요. 아마 네패스 남작 쪽이 유력하기는 할 텐데…….”

레일리 왕녀는 말을 흐렸다.

이성적으로 본다면 약한 쪽을 먼저 꺾는 게 맞았다.

네패스 남작의 성장이 눈부시다고 해서 그가 아직 마이어드 후작에 비할 존재는 아니니까.

하지만 왠지 카이로스 백작이라면 그런 이성적인 선택을 내리지 않을 거 같았다.

실제로 그는 이성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그에게 올바른 조언을 내릴 만한 사람이 주변에 있지도 않았고.

그런 자들은 진작 다 죽었으니까.

그것도 카이로스 백작 본인이 모두 죽였다.

“혹시 모르니 양쪽 모두 조심하라고 일러두는 게 나을 거예요. 카이로스 백작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물론 마이어드 후작과 네패스 남작 모두 카이로스 백작을 경계하고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신경 써서 나쁠 건 없었기에 바이든 남작은 레일리 왕녀의 말대로 서신을 적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서신을 둘에게 보낼 일은 없었다.

“크, 큰일 났습니다!”

누군가가 문을 세게 두드렸다.

바이든 남작은 목소리를 통해서 상대가 누군지를 짐작했다.

레일리 왕녀를 따르고 있는 왕가 출신의 마법사였다.

마법사 협회의 지부장과 동등한 수준의 실력 있는 마법사.

평소에는 한없이 온화하고 느긋한 그가 성격에 맞지 않게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카이로스 백작이 총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총공격이라고요?”

굳이 누구를 노렸는지를 물을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네패스 남작이 가파르게 성장해도 경계를 직접 맞대고 있는 건 마이어드 후작이니까.

마이어드 후작을 두고 네패스 남작을 노린다는 건 불가능했다.

이전처럼 따로 병력을 빼내는 거라면 모를까 총공격이라는 단어는 오직 마이어드 후작을 상대로만 쓸 수 있었다.

“공세라니, 제정신인가? 백작의 세력은 절반밖에 안 되는데.”

마이어드 후작의 병력은 카이로스 백작의 두 배였다.

제자리에서 가만히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카이로스 백작이 정면을 공격해 봐야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아무래도 그 정신 나간 백작이 정말 미쳤나 봅니다.”

바이든 남작은 카이로스 백작의 선택을 비웃었다.

마이어드 후작이 많이 늙기는 했지만, 그는 그 나이에 걸맞은 풍부한 경험을 가진 자였다.

또한 그 아래에는 남부 제일을 자랑하는 마이어드 후작가를 지탱해 온 유능한 가신들이 있었다.

“큰일이 아니라 좋은 일 아닌가?”

“아닙니다!”

그러나 기뻐하는 바이든 남작에게 마법사가 소리쳤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필립 경이 전사했다고 합니다!”

“뭐?”

필립 경은 마이어드 후작가의 기사단장이자 남부 제일이라고 위명이 자자한 기사였다.

그런 그가 죽었다는 건, 곧 마이어드 후작가의 기사단이 패배했다는 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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