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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영주님의 품격-37화 (37/250)

VVIP 영주님의 품격 37화

VVIP 영주님의 품격 37화

37화

* * *

“카이로스 백작 각하.”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카이로스가 눈을 떴다.

그의 앞에는 피비린내 나는 방의 풍경이 보였다.

“끄응!”

카이로스는 밀려오는 숙취에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때 손끝에 차가운 뭔가가 닿았다.

싸늘하게 식은 여인의 시신.

감히 자신을 배신하고 마이어드 후작에게 투신하려고 했던 귀족의 여식이었다.

물론 그 귀족은 이미 죽었다.

“아침이군. 전선의 상황은?”

카이로스는 시선을 정면에 두었다.

자신을 깨운 이는 어렸을 때 자신에게 검술을 가르쳤던 검술 스승인 테인 준남작이었다.

“아직까지 특별한 움직임은 없습니다.”

“그 늙은이, 이대로 시간만 끌 셈인가?”

카이로스는 마이어드 후작이 곧장 정면 승부를 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나이만큼 고리타분한 사람인지 전선을 고착화한 상태로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마치 일부러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무슨 생각이래? 포위한 것도 아니면서.”

상대를 포위해서 말려 죽이는 방법이라면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이로스 백작령은 포위당한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정면으로 대치만 하고 있을 뿐 뒤쪽으로는 꾸준한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신경 쓰이는 걸 발견했습니다.”

“호오?”

무언가 단서를 잡았다는 소식에 카이로스의 눈빛에 투지가 들끓었다.

“어떤 거지? 그 늙은이의 속셈은?”

“바이든 남작이라고 아십니까?”

“아니.”

같은 남부의 귀족이었지만 카이로스 백작은 그 이름을 외우지 않았다.

애초에 별 볼 일 없는 약소 영주들을 일일이 기억하지 않는다.

어차피 자신에게 화도 못 내는 자들이니.

“마이어드 후작에게 자신의 딸을 첩으로 바친 자입니다.”

“딸을 첩으로? 그 늙은이한테?”

카이로스는 그대로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끈이 필요해도 그렇지, 제 딸을 그런 늙은이의 첩으로 보내다니?

주변에 여자를 그렇게 많이 두고도 후사를 보지 못한 사람 아니던가?

그나마 태어났다가 죽은 아이들이 있어서 고자라는 의심은 없지만 그뿐이었다.

“늙은이 참 고약하네. 그래서?”

카이로스는 말하면서 자신의 옆에 싸늘하게 식은 시신을 보았다.

자신도 술기운이 과하면 종종 이런 짓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술에 취해서다.

더구나 자신은 젊었고 마이어드 후작은 거기가 서는지도 의심스러운 나이 아닌가.

그런데도 여자를 계속 들이다니, 기가 막혔다.

“그 바이든 남작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특별히 능력 있는 자도 아닐 텐데 왈트 자작가를 시작으로 3개의 영지를 손에 넣었습니다.”

“호오. 벌써?”

카이로스는 그보다 더 확장을 했지만 양쪽의 전력 차이를 생각하자면 분명 대단한 수준이었다.

“뿐만 아닙니다. 그와 손을 잡은 것으로 보이는 네패스 남작이라는 자가 있는데 그는 자그마치 5곳의 영지를 정복했습니다.”

“허어? 그럼 합치면 얼마나 되지?”

그 정도라면 내전 초기의 카이로스 백작령의 절반은 넘는 규모였다.

“그 늙은이. 겉으로는 가만히 있는 척 뒤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단 말이지. 역시 늙은 여우는 잔꾀가 좋군.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카이로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속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니야?”

마이어드 후작가의 방해가 없었더라도 그 정도로 확장하는 건 쉽지 않았다.

아무리 약소 영주들이라도 힘을 합쳐서 저항한다면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으니까.

“특히 네패스 남작이란 놈은 뭐가 그렇게 빨라? 마이어드 후작이 기사단이라도 통째로 빌려줬대?”

“그건 아닙니다. 확인된 정보에 의하면 기존에 알려진 전력에서 크게 벗어난 건 없습니다.”

“그런데?”

“남작 본인이 상당한 수준의 마법사라고 합니다.”

“흐응? 그럼 지금 혼자의 무력으로 그런 일을 했다는 건가?”

카이로스의 눈에 호승심이 일었다.

기사가 아니라 마법사라는 점에서 아쉽기는 했지만 무력으로 그 정도라면 필시 대단한 실력일 것이다.

“무력만은 아닙니다. 네패스 남작의 전략이 꽤나 대단하다는군요. 그리고 추측이지만 마법사 협회의 협조가 있는 거 같습니다.”

“마법사 협회? 놈들은 중립이잖아.”

“하지만 협회의 원로인 플레턴이 네패스 남작의 스승이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원로라. 그럼 마이어드 후작에 이어서 마법사 협회까지 적이 된 건가?”

“물론 마법사 협회가 정면으로 나서지는 않을 겁니다.”

“음흉한 것들이니 그렇겠지.”

카이로스는 계산에 나섰다.

아무리 그래도 마법사 협회의 도움은 예상 밖이었다.

마법사란 존재는 무척이나 희귀하지만, 꽤 치명적이었다.

수준이 낮은 마법사야 할 수 있는 게 별거 없지만, 실력 있는 마법사는 어지간한 기사보다 훨씬 나았다.

“우리 마법사들은 믿을 수 있나?”

“백작 각하께 받은 은혜가 얼마인데 감히 배신하겠습니까?”

“그래도 모르지. 협회가 등을 돌렸다면 그것들도 어떻게 나올지 몰라.”

“그 말씀은 설마?”

테인 준남작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마법사들을 붙잡거나 죽인다면 카이로스 백작가의 전력에 큰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아, 안심해. 나도 바보는 아니니까. 대신에 가족들을 인질로 잡아.”

“가족들을 말입니까?”

“그래. 문제없이 남부를 평정하면 잘 풀어주고.”

“알겠습니다.”

테인 준남작은 지독한 명령을 반대하지 않았다.

죽이는 것도 아니고 가족들을 인질로 잡는 정도라면 카이로스의 행실에 비해 자비를 충분히 베푼 것이었다.

마법사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그들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대로 내버려 두면 마이어드 후작의 힘이 많이 늘어날 겁니다.”

“그건 안 되지.”

카이로스는 자신의 힘에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다.

마이어드 후작가의 전력은 자신의 가문이 가진 힘의 두 배에 가까웠다.

급하게 확장하면서 세력을 키웠지만 지금 보니 마이어드 후작 역시 급격하게 팽창하는 중이었고.

“막을 필요가 있겠어. 어디가 가깝지?”

“네패스 남작가입니다.”

“그곳으로 루퍼스 경을 보내. 상급 기사들도 붙여주고.”

“병력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영주들도 그냥 죽고 싶지는 않겠지. 도와준다고 말해.”

네패스 남작가의 성장 속도를 고려하면 그에 맞설 영주들이 받게 될 부담감은 엄청날 것이다.

카이로스는 그때 자신이 손을 내밀면 그들이 거부하지 않으리라 여겼다.

정확히는 감히 자신을 적으로 돌리지 못할 거라고.

“알겠습니다.”

“아, 한 가지 더.”

카이로스는 이만 나서려는 테인 준남작을 다시 불렀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 마이어드 후작에게 선물을 보내자고.”

* * *

영지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정비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대영주라면 영지 한두 개 정도야 먹어도 티도 안 날 테지만 난 그렇지 않았으니까.

기존에 소속되어 있던 이들을 최대한 받아들여서 활용하고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더 이상의 확장은…….”

눈가에 짙은 다크서클이 낀 베르타가 신음을 흘렸다.

관리해야 하는 영지가 늘어난 만큼 행정관인 베르타의 부담이 매우 컸다.

내정을 담당하는 영웅들도 있었지만 부족했다.

‘베르타 경을 먼저 승급시켜야 하나.’

이대로라면 베르타가 먼저 과로로 쓰러질 지경이다.

난 유료 상점을 확인하며 고민에 빠졌다.

새롭게 손에 넣은 보검과 베르타 사이에서 저울을 어느 쪽으로 기울여야 할지.

“흠.”

힐끔 바깥을 바라보자 연병장에 서 있는 기사들이 보였다.

적당히 모여서 가볍게 몸을 풀고 있었는데 그 수가 어느새 50명을 넘었다.

도미닉 남작가 때와 비교해선 늘어나는 속도가 줄어든 셈이나 이는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살린 채로 제압하거나 항복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웬만한 기사들은 다 죽으니까.

특히 오웰 남작가가 그랬다.

프레드를 비롯해 나를 노리던 기사들이 투항하지 않아 모조리 죽였었다.

로톤 자작가에도 죽은 기사들이 워낙 많아서 새로 영입한 이는 6명뿐이었고.

망하기 직전의 네패스 남작가의 7명과 비슷한 수준이다.

빅터가 정식 기사가 아니었음을 감안하면 똑같다고 볼 수 있고.

‘내정 쪽 인재가 필요한데.’

어디서 루안이나 릴리아나 같은 천재 안 떨어질까?

그러나 당연히 그만한 인재가 갑자기 나타날 리 없었다.

메인 스토리를 생각해 봐도 크레시안 왕국에 속한 인물은 떠오르지 않았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루안이 특이한 거고 보통은 국적에 맞게 있으니까.’

타국에 있는 인물을 데려올 능력은 없었다.

그나마 기억나는 크레시안 왕국 소속의 영웅들은 전부 전투형이었다.

우웅!

그때 간만에 마나 파장이 일었다.

난 외워뒀던 신호에 맞춰서 파장을 분석했다.

“이건…….”

“영주님, 왜 그러십니까?”

“적습이다.”

다른 영지와의 경계에 배치해 둔 마법사가 보내오는 신호였다.

혹시나 해서 배치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내가 먼저 공격받는 상황은 생각하지 못했기에 당혹스러웠다.

이 주변에 나만큼 세력 있는 영주는 없었으니까.

“무슨 생각이지?”

약소 영주의 입장에서 굳이 먼저 내 심기를 거스를 만한 이유가 없었다.

물론 더 힘을 키우기 전에 견제하고야 싶겠지만 한두 영주의 연합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어디서 영주들이 한꺼번에 연합해 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고.

“출정해야겠군.”

난 서둘러 기사들을 소집시켰다.

50명이나 되는 기사들이 나란히 도열하니 장관도 그런 장관이 없었다.

장비도 훌륭했다.

루안이 만든 네임드 장비는 아니라도 영광의 검 수준의 장비는 다른 장인들도 만들 수 있었으니까.

지금껏 모아둔 재료들을 아낌없이 풀어 장비 정보가 나올 수준으로 모든 기사들이 무장한 상태였다.

“동쪽 경계 너머에 적들이 나타났다. 그 수는 1천 이상.”

상당한 숫자에 기사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물론 우리 병력도 그만큼은 되지만 이건 급하게 보낸 보고였다.

정확한 숫자가 아니니 더 많을 수도 있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그 적들을 맞이하러 간다.”

* * *

무장한 기사들을 이끌고 도착한 경계에는 미리 배치된 병사들이 있었다.

영토가 늘어난 만큼 지켜야 할 범위도 넓어져서 병사들은 몇 곳에 나눠서 배치된 상태였다.

“적은 어디까지 왔지?”

“거의 다 왔습니다. 곧 모습이 보일 겁니다.”

경계에 남아 있던 기사가 상황을 보고했다.

그 말대로 지평선 너머로 적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1천을 넘는 병력인지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어느 가문이지?”

방향으로 봤을 때 몇 개의 영주 가문이 있기는 했으나 우리를 가로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무리하게 군사를 일으켜서 나타났기에 의문이 들었다.

‘방어도 아니고 공격이라.’

불리하다면 오웰 남작가가 그랬던 것처럼 요새라도 짓고 버티는 게 기본인데.

상대가 어지간히 바보거나 이길 자신이 있어야 가능한 선택이었다.

“깃발은 모두 셋입니다. 동쪽에 있는 영주 가문 세 곳이 다 있습니다.”

“영주 셋이라…….”

난 혹시 다른 곳으로 돌아오는 영주가 더 있지 않은지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보고에 의하면 다른 곳에서 움직임이 감지되지는 않고 있었다.

“흠.”

그래도 혹시 모르는 상황이라 다른 장소의 병사들을 불러오기는 망설여졌다.

상대가 바보가 아닌 이상 믿는 구석이 있을 터.

어차피 방어하는 입장이라 서두를 이유도 없기에 차분하게 상대의 대응을 확인했다.

“공격할 모양입니다.”

“정말로?”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상대는 우리를 향해 공격해 올 생각으로 보였다.

오웰 남작가에서 그랬듯 우리도 목책을 끼고 버티고 있는데 말이다.

‘무슨 생각이야?’

나 정도 수준의 마법사가 또 있는 게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선택이다.

그리고 장담하는데 크레시안 왕국에 나만 한 인물은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플레턴이 이미 이야기해 주었을 테니.

‘5티어가 갑자기 나타나는 건 3티어가 나타나는 거랑은 상황이 전혀 다르잖아.’

5티어는 왕국 하나에 한 명 있을까 말까다.

있다면 그 명성이 알려지지 않았을 리 없고.

마족과의 전쟁에서도 영웅으로 활약했을 테니 정체를 숨기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진짜 돌격해 옵니다!”

그렇게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적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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