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35화
VVIP 영주님의 품격 35화
35화
절대군주는 어디까지나 게임이다.
그렇기에 여성 영웅들의 숫자는 남성 영웅에 비해 적지 않았고, 그중에는 신체 능력이 중요한 전투형 영웅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게임이라서 그랬던 건지 막상 이 세계에서 직접 본 여성 영웅은 딱 한 명이 전부였다.
‘레일리 왕녀.’
그마저 레일리 왕녀는 외교형 영웅이었다.
직접적인 전투력은 갖추지 못했다.
그 외에 다른 여성 영웅은 찾아볼 수 없었다.
메인 스토리에 등장하는 여성 영웅들은 분명 많았지만 그건 아마 메인 스토리 쪽에서만 유독 여성의 비율이 높을 뿐인 듯했다.
“뭐? 여자라고?”
라이언이 화들짝 놀라며 여성 기사를 살폈다.
나도 그녀를 자세히 살폈다.
이 기사는 체격도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아니, 여성이라면 충분히 큰 편에 가깝고 실제로 남성치고 왜소한 라이언과 비슷했지만…….
‘어려 보이는데?’
라이언은 경험 많은 노련한 용병 출신이었다.
그러나 이 여성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20살이나 되었을까 말까다.
‘실력도 부족하고?’
아무리 사람이 없어도 굳이 기사로 서임할 필요는 없는 상대였다.
그런 내 의문을 알아차렸는지 그녀는 얼른 자신을 변호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기사가 되기 위해 수련을 받은 몸입니다.”
“얼마나 됐지?”
“12년입니다.”
20살이나 될까 싶은 나이를 감안하면 무척 오래 수련한 셈이었다.
그러나 기사로서 수련한 기간으로는 그리 길지 않았다.
무엇보다 영웅 정보가 나오지 않는다.
실력이 부족하다는 소리다.
“실력을 봐야겠는데.”
항복의 조건 중에는 기사의 작위를 유지해 준다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내 밑에서 종군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따로 적은 내용은 아니지만, 이 조건은 최소한의 실력을 갖춘 기사에게만 해당했다.
그 기준점은 당연히 영웅 정보였고.
‘1티어도 안 되면 용병이랑 동급이거나 그보다 못할 수도 있다는 소리인데.’
기사에게 줘야 하는 봉급은 절대 싸지 않다.
터너처럼 영지를 하사하는 경우보다야 적다지만 그래도 큰 지출이다.
그런데 실력도 안 되는 기사를 거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알겠습니다.”
여성 기사가 비장한 얼굴로 검을 빼 들었다.
“잠깐.”
난 다급하게 그녀를 막았다.
“워우.”
라이언이 감탄하며 여성의 검을 보았다.
신체에 맞게 보통 기사들의 검보다는 가볍고 짧았지만 대신 날렵해 보이는 세검.
물론 무기의 종류야 아무래도 좋았지만, 문제는 그 수준이었다.
[실버 스타폴]
‘네임드가 왜 여기서 나와?’
이 비슷한 광경을 로크에게서 본 적이 있었다.
얘도 루안에게 받은 건가?
난 황당해하며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세검을 가리켰다.
“어디서 난 검이지?”
“조모님께서 쓰시던 검입니다.”
할아버지가 아니라 할머니란다.
하긴 그러니까 이 기사의 체격에도 적당한 것이겠지.
‘네임드 장비를 쓸 정도라면 대단한 실력일 텐데.’
이 세계의 결혼 적령기가 현대 지구보다 빠름을 감안하면 아직 현역일지도 모른다.
“지금 어디 계시지?”
“마족과의 전쟁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안타깝군.”
이미 죽었다는 소리에 난 혀를 찼다.
마찬가지로 마족과의 전쟁에 참가했던 3티어 영웅인 프레드도 네임드 장비는 갖추지 못했다.
로크의 경우에는 운 좋게 루안에게서 얻어낸 경우였고.
게임에서야 유저가 직접 제작해서 장비를 갖춰주지만, 이곳에선 실력 있는 자라도 좋은 장비를 갖추는 게 힘들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2티어 용병이었던 라이언은 처음에 아예 정보가 보이지도 않는 싸구려 단검을 썼다.
그런데 흔치 않은 형태인 세검으로 된 네임드 장비를 가졌다는 건 맞춤 제작일 확률이 높고 이는 분명 대단한 실력자였다는 증거다.
어쩌면 4티어 이상이었을지도 모른다.
‘12년 동안 논 게 아니라면 장비발로 기사를 해먹을 수는 있겠군.’
제대로 된 장비 없는 평범한 1티어 기사라면 수월하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아무 이유도 없이 서임을 해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검을 빼고는?
“빅터 경.”
난 다시 빅터를 불러들였다.
“나의 기사들 중 가장 최근에 서임을 받은 기사다.”
같이 서임받은 라이언은 원래부터 2티어였던지라 애초에 수준이 다르니까 논외다.
“한번 겨뤄보도록.”
“알겠습니다.”
쐐액!
빅터는 자세를 갖추자마자 상대를 공격했다.
채챙!
‘응?’
그런데 여성 기사는 생각 외로 빅터의 공격을 아주 잘 막고 있었다.
어째서 영웅 정보가 나오지 않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흐음.”
라이언이 자신의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훌륭한데요?”
무려 라이언의 입에서 나온 평가다.
로크 덕분에 기사가 된 이후 다소 얌전해졌지만 그래도 라이언은 라이언이었다.
누군가의 실력을 좋게 평가하는 건 흔치 않았다.
“확실히 그렇군. 충분히 기사다운 실력인데.”
“아, 여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그쪽도 괜찮지만.”
“응?”
라이언을 돌아보자 그는 빅터를 집중해서 살피고 있었다.
“오웰 남작가의 기사에게 죽을 뻔했다더니. 사선을 넘은 경험으로 꽤 성장한 모양입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이전보다 훨씬 발전했습니다.”
로크가 라이언의 말을 받았다.
두 사람의 눈에는 빅터의 성장세가 보였던 모양이다.
“저 정도면 터너 경과 동급이라고 봐도 되겠네요. 아니, 조금 더 우세할 수도.”
“그 정도인가?”
라이언은 자신이 직접 겨뤄봤던 터너와 빅터를 비교했다.
비록 터너가 로크에게 밀려서 이제는 기사단장이 아니라지만 잠깐이나마 기사단장을 했던 몸이다.
네패스 남작가 출신 기사들 중에는 최고 실력자이고.
그런데 그런 터너와 비교해서 동급이거나 나을 수도 있다고 말한 것이다.
빅터의 나이가 터너보다 훨씬 젊은 걸 생각하면 엄청난 성장이었다.
‘등급이나 스킬은 똑같아도 실제 실력은 밀렸는데.’
실력이라는 게 눈에 띄게 올라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나나 로크는 애초에 논외고.’
로크에게는 승급권을 썼고, 나는 플레턴에게서 수련을 받았다.
더구나 처음부터 특전으로 5티어였고.
‘많이 노력했군.’
빅터를 흐뭇하게 바라볼 때였다.
갑자기 두 사람의 싸움에 이변이 일어났다.
나름 잘 막고 있으나 조금씩 밀리고 있던 여성 기사가 서서히 반격에 나선 것이다.
챙!
“윽!”
그리고 빅터가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순식간이었다.
우세를 잡았던 빅터는 그 흐름을 유지하지 못했고 여성 기사는 빅터를 크게 압박했다.
세검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잔상이 눈을 어지럽혔다.
[휘하 영웅의 정보가 갱신되었습니다!]
그때 지금껏 본 적 없던 메시지가 나타났다.
하지만 게임에서는 이 메시지를 본 적 있었다.
영웅 정보에 변화가 있을 때 나타나는 메시지.
릴리아나의 영웅 정보가 새롭게 떠올랐다.
[영웅 정보]
이름 : 릴리아나
국적 : 크레시안 왕국
소속 : 네패스 남작가
유형 : 전투형
등급 : 1티어
칭호 : 어설픈 검사
스킬 : 검술(1)
단출하다.
내가 봤던 모든 영웅 정보를 통틀어서 가장 형편없는 영웅 정보였다.
그러나 이게 지금 보인다는 건 이제 영웅이라 인정받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는 소리다.
‘성장했다고? 하지만 빅터를 넘을 수준은 아닌데?’
서임을 앞두고 있던 때의 빅터도 아니고 라이언과 로크가 터너와 동급이라고 인정한 빅터다.
그런데 왜 빅터가 밀리는 건지 모르겠다.
‘잠깐만, 기사가 아니잖아?’
칭호가 기사가 아니라 검사였다.
용병도, 기사도 아닌.
정보를 통해 이름을 알게 된 릴리아나가 세검을 비틀었다.
절묘한 손기술.
빅터가 막으려던 궤도에서 벗어나 순식간에 빅터의 턱밑까지 칼날이 차올랐다.
빅터는 입이 떡하니 벌어진 채 릴리아나를 보았다.
“저거 설마…….”
로크와 라이언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술로 압도했다.’
부족한 신체 능력을 기술로 커버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자신의 등급을 명백히 넘어서는 기술이었다.
다른 부분은 전부 영웅이 되기에 자격 미달인데 검을 다루는 재능 하나만큼은 그것을 넘어섰다.
‘자신보다 경험이 많고 신체 능력도 우월한 상대를 기술로 잡았어.’
싸우고 있던 도중에 성장해서 영웅이 되었다라.
틀림없었다.
릴리아나는 천재라고 불리는 부류였다.
“라이언 경.”
난 바로 라이언을 불렀다.
“압니다.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건지.”
라이언은 굳이 내 지시를 기다리지 않았다.
이미 라이언은 나와 같은 생각에 도달한 것이다.
스르릉.
라이언은 두 자루의 단검을 뽑았다.
루안이 라이언에게 만들어준 네임드 장비인 ‘어스트 블레이드’.
빅터가 가진 ‘영광의 검’보다 상위 장비로 ‘실버 스타폴’과 동급이며, 라이언은 2티어 영웅이었다.
이길 수밖에 없는 조건.
“이번에는 나랑 해보지.”
“실력은 이미 충분히 보이지 않았습니까?”
“물론. 넌 훌륭한 기사야. 이건 순수한 호승심이다.”
“알겠습니다.”
릴리아나는 라이언이 나타나자 처음에는 표정이 어두웠지만, 실력을 인정한다는 말에 금세 밝아졌다.
그녀가 가장 우려한 건 아마 여성이라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
하지만 나로서는 당연히 그럴 이유가 없었다.
남성이고 여성이고 싸움만 잘하면 됐지.
탁!
라이언은 특기인 빠른 속도를 살렸다.
보통의 1티어 영웅은 방심할 경우 크게 낭패를 당해 일격에 당할지도 모르는 위력적인 속도.
그렇지만 릴리아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챙!
힘에서 라이언은 릴리아나를 압도하지 못한다.
남성임에도 체격의 차이가 크지 않으니 사실상 동급에 가깝다.
더구나 라이언의 무기는 두 자루.
무기를 두 자루 쓰는 건 분명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다.
양손으로 힘을 담은 공격을 할 수 없다는 것.
즉, 라이언은 힘의 우위를 가질 수 없었다.
물론 라이언은 애초에 기사들을 상대로 힘이 아닌 속도의 우위로 싸워왔지만…….
채챙!
릴리아나를 상대로는 그리 의미가 없어 보였다.
분명 릴리아나가 더 느림에도.
“눈이 아주 좋군요.”
로크가 그 이유를 파악했다.
라이언의 속도는 현란한 검술을 펼치는 릴리아나의 눈에 훤히 읽히고 있었다.
애초에 용병 출신인 라이언은 기술적인 부분에서 다른 기사들에게 크게 밀린다.
그걸 경험과 단검 두 자루라는 기사들에게 다소 낯선 형태로 커버하고 있었을 뿐.
그렇지만 릴리아나의 눈앞에서는 모두 무용했다.
오히려 빅터보다 안 좋았다.
기사는 힘뿐 아니라 속도와 기술 모두 평균 이상이다.
전투형 영웅 중에서 가장 밸런스가 좋다.
그러나 용병인 라이언은 특히 속도에 특화된 유형.
2티어라고 해도 힘이나 기술적인 측면에서 1티어 기사보다 낫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2티어란 사실이 어디 가는 건 아니지만…….’
릴리아나는 티어의 차이를 확실하게 커버하고 있었다.
단검보다 긴 세검의 장점으로 라이언을 적절하게 견제했다.
기사들보다 월등한 반응 속도에 라이언은 쉽게 틈을 노리지 못했고.
‘괴물 같은 재능인데?’
티어를 능가하는 재능.
스킬로는 표현되지 않는 숨겨진 정보.
그게 신체 능력이 아니라 좋은 눈과 기술이라는 점이 더욱 특별했다.
그래도 라이언은 분전했다.
빅터와 이미 한 번 싸워서 그런지 릴리아나는 체력 소모를 감당하지 못했고.
결국, 라이언은 체면치레에 성공했다.
그러나 라이언의 표정에서는 승리의 기쁨 따위 찾을 수 없었다.
만약 릴리아나의 체력이 멀쩡했다면 결과를 알기 힘들었을 테니까.
특히 밑바닥이 얕은 편에 속하는 라이언은 릴리아나와의 상성이 최악에 가까웠다.
‘보는 눈과 기술이 좋은 천재와 빠른 속도와 잔기술이 특기인 라이언. 완벽한 카운터다.’
릴리아나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앞으로 그녀가 따르고 모셔야 할 사람은 나다.
내가 그녀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기사들이 그녀를 어떻게 대우할지도 결정될 것이다.
물론 내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훌륭하다.”
난 박수를 보냈다.
아주 훌륭했다.
어쩌면 릴리아나는 승급권이 없더라도 티어를 올리는 영웅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도 2티어 같은 저등급 정도가 아니라 3티어 이상의 고티어 영웅이.
‘로톤 자작이 큰 선물을 줬군.’
로톤 자작은 이 사실을 알았을까?
아닐 것이다.
릴리아나가 영웅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12년.
가진 재능에 비해 너무 긴 시간이 걸렸다.
‘독학이었겠지.’
마족과의 전쟁은 제법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할머니라는 사람은 릴리아나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전선으로 갔을 것이다.
그리고 죽었고.
아쉬운 일이었지만 다행이기도 했다.
릴리아나가 더 성장했다면 프레드처럼 나를 위협하는 상대가 되었을지도 모르니까.
성장하기 전이니까 내 품에 넣을 수 있었다.
난 로크를 향해 눈길을 주었다.
로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기사 중 최고의 실력자인 로크가 앞으로 릴리아나를 가르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