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31화
VVIP 영주님의 품격 31화
31화
* * *
나는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영지로 돌아왔다.
그러나 협회에서 쌓인 피로를 풀 겨를은 없었다.
곧장 행정관 베르타가 튀어나와 나를 집무실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마이어드 후작과 카이로스 백작의 싸움은 어떻게 되고 있지?”
“아직까지는 팽팽합니다. 한 번 충돌이 있었지만 서로 간만 보고 물러났습니다.”
“레일리 왕녀는? 바이든 남작이 연락을 해왔다던데?”
“영주님의 안부만 확인했습니다. 정확히는 협회와의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궁금했던 모양입니다만…….”
베르타는 뒷말을 흐리며 기대감을 담은 눈빛을 보냈다.
“어떻게 되셨습니까?”
“마법사 협회가 중립을 표방한 건 잘 알지 않나?”
“하지만 영주님은 다르지 않습니까?”
“개인적인 도움을 받는 것과 협회 차원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하는 건 다르지.”
애초에 마법사 협회는 개인이 움직일 수 있는 단체가 아니었다.
협회에 속한 마법사들에게는 몇 가지 의무가 주어지지만 강한 구속력을 가진 건 드무니까.
협회가 특정 세력의 편을 들더라도 그건 협회 간부의 개인적인 선택일 뿐, 협회 전체의 뜻은 될 수 없었다.
정 마법사 협회를 움직이고 싶다면 협회에 속한 모든 마법사들의 지지를 받아야만 한다.
“그럼 이번에는 성과가 없으신 겁니까?”
베르타가 한껏 실망스러운 반응을 내보였다.
일전에 내가 원로인 플레턴의 제자가 되는 것으로 큰 성과를 얻어 왔기에 이번에도 충분한 성과를 냈으리라 기대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쉽지만 그렇군.”
티를 낼 수는 없었기에 나도 실망한 척을 해주었다.
베르타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는 입장이 좀 다르다.
베르타는 나의 사람이기 이전에 이 몸의 아버지였던 전대 네패스 남작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전대 네패스 남작과 함께 친왕실파라는 사실에 나름 자부심이 있었던 듯했고.
지금 내가 레일리 왕녀의 세력을 무시할 만한 힘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왕녀를 적대할 생각이 있다면 당연히 좋은 반응이 나올 순 없을 것이다.
베르타에게 내 진심을 이야기하려면 레일리 왕녀와 대적할 만한 힘을 갖춘 이후여야 했다.
“그 외에 따로 보고할 일이 있나?”
“바이든 남작이 군사를 이끌고 다른 영지들을 노리기 시작했습니다.”
바이든 남작도 새롭게 점령한 왈트 자작가를 그럭저럭 소화시켰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나도 이대로 있을 순 없었다.
“나도 출정해야 되겠군.”
바이든 남작의 이름을 빌린 레일리 왕녀의 세력이 확장될 텐데 뒤처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레일리 왕녀에게는 일이 잘 안 되어서 미안하다고 전해둬.”
“알겠습니다.”
베르타는 별다른 의심 없이 내가 말한 내용에 따라서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에게는 마나 파장이라는 훌륭한 통신 수단이 있었지만, 귀족들 사이에서는 급한 소식이 아니라면 인편을 보내는 게 일반적이었다.
“출정 준비는?”
“이미 모두 마쳐두었습니다.”
역시 베르타는 유능했다.
난 베르타가 준비해 둔 보고서들을 살펴봤다.
영지 내 병력 현황과 군수 물자 등이 잘 정리된 보고서였다.
그리고 우선해서 노릴 만한 근처 영지의 정보도 들어 있었다.
“먼저 노리셔야 할 곳은 오웰 남작가입니다. 저희가 그랬듯이 마족과의 전쟁과 피의 연회 등으로 세력이 크게 꺾인 곳입니다.”
“이런 곳이 용케 아직 남아 있었군?”
“저희가 남부에서는 가장 빨리 내전이 일어난 곳 아닙니까?”
확실히 그랬다.
카이로스 백작의 움직임이 있자마자 내가 먼저 선수를 쳐서 나섰으니까.
그래서 남부의 내전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오웰 남작가는 덩치가 크지 않으니 빠르게 점령한 다음 동쪽으로 진군하면 될 거 같습니다.”
베르타는 남부의 지도에서 동쪽으로 쭉 선을 그었다.
그 끝에는 카이로스 백작가가 있었다.
‘저기에 도착할 때쯤이면 대영주와도 어느 정도 겨룰 세력이 되어 있겠지.’
* * *
“네패스 남작이 협회를 설득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바이든 남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긍정적인 소식을 바랐지만 역시 무리였다.
물론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네패스 남작이 마법사라는 이유로 어느 정도 협회의 비호를 받기는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협회가 도와준 쪽에 가까웠으니.
네패스 남작의 뜻에 따라 협회가 움직이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건 너무 아쉽네요.”
레일리 왕녀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만약 여기서 마법사 협회를 끌어들일 수 있었다면 남부의 내전을 끝내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일 것이다.
원래부터 남부는 마이어드 후작이 가장 강성했는데 거기에 마법사 협회라는 날개가 달리는 것이니.
그러나 역시 그리 쉽게 풀리지만은 않았다.
“다른 소식은요?”
“네패스 남작은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갈 생각인 거 같습니다.”
“함께하지 않고 말인가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군요.”
“자신감이 넘치네요.”
레일리 왕녀에게는 왕가의 병력이 있었다.
거기에 왈트 자작가를 흡수한 바이든 남작의 전력이 합해지면 보통의 영주 가문은 우습게 무너트릴 수 있었다.
그러나 네패스 남작은 그렇지 않았다.
도미닉 남작가를 흡수했다고 한들 망해가던 남작가가 평범한 남작가가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혼자만의 힘으로 세력을 키우겠다는 건 터무니없는 자신감이었다.
“한 번쯤 패배를 맛봐야 정신을 차릴 겁니다.”
바이든 남작은 아직까지 아인의 역량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전의 활약은 마법사 협회가 적극적으로 도와줘서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마법사로서의 역량은 뛰어난 거 같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번 선택은 상당히 무모했다.
“전쟁은 장난이 아닙니다. 기고만장해져서 방심했다가는 순식간에 목덜미를 물리지요.”
심통이 난 바이든 남작의 모습에 레일리 왕녀의 눈가가 곱게 휘어졌다.
“혹시 질투인가요?”
질투냐는 말에 바이든 남작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그런 어린놈한테 질투라니요?”
“상당히 의식하는 거 같아서요.”
“제멋대로 구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제가 봤을 때 네패스 남작은 왕녀 저하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푸훗!”
존중이라는 말에 레일리 왕녀는 그만 웃음이 터졌다.
바이든 남작은 혹시 자신이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 되짚었지만,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친왕실파와 대립했던 바이든 남작이 왕가에 대한 존중을 이야기하니까 웃기잖아요.”
“그런 옛날이야기를…….”
레일리 왕녀가 과거를 거론하자 바이든 남작은 얼굴을 붉혔다.
확실히 왕가에 대한 존중을 자신이 요구하는 건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대영주 세력이었던 과거의 일.
심지어 그 대영주인 마이어드 후작이 친왕실파인 이상 바이든 남작은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자신 있게 나선다면 네패스 남작도 뭔가 믿을 구석이 있다는 뜻일 테니까. 그게 본인의 능력이든 외부의 힘이든.”
“왕녀 저하께서는 놈을 너무 높게 평가하십니다.”
“뭐, 두고 보면 알겠죠?”
결국, 답은 시간이 알려줄 것이다.
* * *
이번 출정에는 행정관 베르타도 동참했다.
그는 내정의 수뇌지만 동시에 전략을 입안하는 데 필요한 조언자였다.
“핵심은 로톤 강입니다.”
영지의 동쪽으로 향하는 길에는 제법 큰 폭의 강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놓인 다리가 하나 있는데 그 폭이 좁은 편이었다.
“오웰 남작가의 병력이 강을 점거하고 있을 테니 그냥은 넘을 수 없습니다.”
세력이 약하다고 해서 순순히 백기를 올릴 영주는 존재하지 않았다.
귀족이라고 해도 영지를 가진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큰 차이였으니까.
작위와 영지를 가지지 못한 귀족은 솔직히 신분만 높지, 평민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하물며 내전으로 인해서 왕국의 법이 유명무실해져 버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더욱.
“다리를 무너트릴 수도 있겠군.”
오웰 남작가를 치려면 로톤 강의 다리를 먼저 점령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되면 새롭게 다리를 만들어야 할 텐데 시간이 상당히 지체될 겁니다.”
“강을 그냥 넘는 경우는?”
“가능이야 하지만 가만히 지켜보지는 않을 겁니다.”
오웰 남작가가 강에 배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병력의 숫자는 약 200명.
아무리 기사들이라도 강을 넘는데 말을 타거나 갑옷을 입기는 힘드니 그들이 화살만 날려도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이만큼 병력을 빼놓고 오웰 남작은 다른 영지로부터 괜찮은 건가?”
우리 쪽 방향을 견제하기 위해서 200명이나 차출했다면 이웃 영지들을 감당하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저희의 존재가 걱정될 테니까요. 그래서 굳이 오웰 남작을 공격하지 않고 자신들끼리 먼저 싸우는 모양입니다.”
어차피 제일 약한 세력.
별로 위협이 되지 않을 테니 괜찮은 활용이었다.
공식적으로 그런 대화가 오간 것은 아니겠지만 이웃 영주들은 모두 계산을 마쳤을 것이다.
“그럼 다리를 공략하는 수밖에 없겠군.”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안 된다.
최악의 경우는 상대가 다리를 무너트리는 것.
지금까지 계속 다리를 점거하고 있었다면 이미 언제든지 무너트릴 수 있도록 준비를 해놨을 것이다.
어쩌면 이쪽의 병력만 나타나도 바로 다리를 부술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시선부터 돌려야겠지.”
* * *
“네패스 남작가에서 출정했다고 합니다!”
로톤 강의 다리를 지키는 오웰 남작가의 병력은 긴급 소식이 들어오자마자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분명 가만히 웅크리고 있지만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결국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방향은?”
“동쪽. 이곳 로톤 강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강 너머의 오웰 남작가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오웰 남작가의 기사 프레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굳이 다리를 끊지 않고 지금까지 남겨둔 것은 이 다리를 끊음으로 인해 잃게 될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도시 하보크로 가려면 이 다리는 꼭 필요하지. 행상인들이 드나들거나 용병을 구하기 위해서도.’
게다가 다리 건너편이 아니라 이쪽에 있는 다른 영주들의 존재도 부담스러웠다.
만약 최악의 경우가 되면 자신들이 이 다리를 넘어 피신하게 되는 일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게 적들이 다리를 쓰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불을 준비해라.”
다리를 무너트릴 방법은 미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미 몇 개의 주춧돌을 빼놓아 다리를 약하게 만들어두었으니.
여기에 미리 준비한 화약들에 불만 붙이면 로톤 강을 건널 다리는 그대로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물론 다리를 무너트린다고 해서 건너지 못할 정도로 로톤 강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다리 없이 무장한 병력이 지나갈 만큼 만만하지도 않았다.
결정적으로 자신들이 지키고 있을 테니.
삐이익!
그런데 다리에 불을 붙이기 전 어디선가 신호가 들려왔다.
강을 따라서 배치해 둔 초소에서 비상사태를 알리는 신호였다.
“뭐야? 무슨 일이냐?”
“상류 쪽에 네패스 남작가의 군대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그쪽에서 도하를 하려는 모양입니다.”
“이런! 다리는 진작 포기한 건가?”
상류라는 말에 프레드의 표정이 구겨졌다.
다수의 병력이 도하하기 좋은 지점은 아니지만 그만큼 이쪽의 배치도 적었다.
강 전체를 감시해야 하는 만큼 애초에 뭉쳐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서둘러서 지원을 보내지 않으면 상대가 강을 먼저 넘어버릴지도 몰랐다.
“백부장! 병사 열과 함께 다리를 무너트리고 따라와라! 나머지는 나와 지원에 나선다!”
프레드는 다리를 무너트릴 소수의 병력만 남겨두고 급히 지원에 나섰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말을 탄 프레드의 뒤를 이 악물고 쫓기 시작했다.
“우리도 서두르도록 하지. 어서 다리를 무너트려라!”
백부장의 명령에 병사들은 서둘러 횃불을 가져왔다.
그리고 준비된 심지로 다가가 불을 붙였다.
“물러나!”
이대로 심지가 다 타면 화약에 불이 닿아서 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병사들은 냉큼 몸을 돌려서 뛰기 시작했다.
투각!
“어?”
그때 강 건너편에서 먼지구름이 일었다.
백부장은 눈을 깜빡이며 강 너머를 살폈다.
무장한 기사들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네패스 남작가의 기사들인가?”
백부장은 적의 등장에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심지에 불을 붙인 상황.
강을 건너기 전에 다리가 먼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양동이였나 보군. 하지만 늦었다.”
상류에 병력이 나타나더라도 다리는 무너트리게 되어 있었다.
첨벙!
“응?”
그런데 느닷없이 물장구 소리가 들렸다.
백부장은 당황하며 물가를 살폈다.
다리 아래에서 갑자기 물이 솟구치더니 사람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