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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영주님의 품격-27화 (27/250)

VVIP 영주님의 품격 27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7화

27화

나는 긴장감 없이 물었다.

레일리 왕녀가 나에게 물어볼 만한 내용은 한정적이었으니까.

“네패스 남작은 내 사람이 되어줄 의향이 있나요? 그대의 가문이 대대로 왕가에 충성했던 것처럼?”

역시나 뻔한 질문이 나왔다.

왕녀가 굳이 자신의 정체까지 드러내고 나타난 시점에서 예상할 수 있었다.

“하하하. 그런 질문이라면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베르타는 호쾌하게 웃으며 나를 돌아봤다.

내가 당연히 그러겠다고 대답하리라는 확신이 서린 행동이었다.

“확실히 저희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지요.”

레일리 왕녀는 일부나마 왕가의 병력과 물자를 보존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변방의 한미한 영주를 훨씬 능가하는 힘이다.

그러나 핵심은 그녀가 마이어드 후작의 뒤를 이어 남부를 지배할 대영주라는 사실.

바이든 남작이 기존의 노선을 변경하고 왕녀에게 고개를 숙인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레일리 왕녀는 남부에서는 비할 바 없는 권력자였다.

“왕녀 저하를 따르겠습니다.”

“기쁜 말이네요. 왕가의 충성스러운 신하였던 네패스 남작가가 다시 충성해 주겠다니.”

레일리 왕녀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난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손등에 입을 맞췄다.

계승식에서 다른 가신들이 나에게 했던 행동이기에 익숙한 예법이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레일리 왕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어디까지나 겉으로는 말이다.

‘레일리 왕녀에게는 심각한 결점이 있지.’

왕녀의 약점은 핏줄 자체.

왕국이 멀쩡할 때라면 모를까 피의 연회로 친왕실파가 쓸려 나간 지금 왕녀의 존재는 대영주들에게 있어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나로서는 손을 잡기 좋은 상대였다.

‘언젠가 거꾸러트려야 할 상대가 분명한 약점이 있다니, 이만한 메리트가 어디 있겠어?’

레일리 왕녀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진심으로 그녀에게 충성할 생각이 없었다.

위니스가 나에게 요구한 것은 절대군주가 되는 것이니까.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충성스러운 신하보다는 군주가 되는 쪽이 더 욕심났다.

‘숙이는 건 잠깐뿐이야.’

이후 여러 대화가 오갔다.

하지만 내가 충성을 맹세하며 좋아진 분위기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근처 지역은 바이든 남작과 내 손에 평정되었지만 그사이 남부 전체에도 내전의 불길이 번져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카이로스 백작의 행보가 결정적이었다.

마이어드 후작이 카이로스 백작과 맞서기 위해 나섰지만, 카이로스 백작은 그보다도 빨리 움직였다.

자신에게 복속하지 않은 영주들을 향해 칼날을 휘두른 것이다.

백작령과 인접한 영지들이 그대로 무너지며 카이로스 백작의 수중에 떨어졌다.

“두 대영주의 충돌이 일어나겠군요.”

카이로스 백작과의 전쟁은 마이어드 후작의 몫이었다.

그러나 레일리 왕녀는 그걸 잠자코 구경할 생각이 아니었다.

“네패스 남작. 그대의 도움을 받고 싶어요.”

“어떠한 도움 말씀이십니까?”

“이 싸움에 남부 마법사 협회의 힘을 보태주세요.”

레일리 왕녀의 말에 바이든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보기에 내가 가진 최고의 힘은 마법사 협회에 대한 영향력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달랐다.

플레턴으로부터 약속받은 도움은 이미 다했고 마법사 협회는 이득이 없다면 나를 도울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마법사 협회에 뭔가 내줄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고.

“전 협회에서 일개 제자의 입장일 뿐입니다. 원로인 플레턴 님께서 절 좋게 봐주셨지만 협회를 움직일 힘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고 걱정하지 않으셔도 마이어드 후작님이 카이로스 백작에게 패배하지는 않을 겁니다.”

카이로스 백작이 급하게 확장을 시작했지만 마이어드 후작의 대응이 결코 늦은 게 아니었다.

양측의 힘을 보자면 마이어드 후작이 병력에서 두 배 정도는 앞서고 있었다.

별다른 예외가 없는 이상 두 대영주의 싸움은 다소 시간은 걸릴지언정 마이어드 후작의 승리가 분명했다.

“저도 후작의 승리를 의심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상대는 카이로스 백작이 전부가 아닌걸요.”

남부에서는 마이어드 후작과 카이로스 백작의 구도지만 다른 지역에도 대영주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게다가 빠르게 왕국을 평정하고 안정화시키지 못한다면 타국의 습격까지 염려해야 했다.

“한번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딱히 생각은 없지만 적당히 말을 받았다.

그럼 이제 본론을 꺼낼 차례다.

“그런데 바이든 남작, 개인적으로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무엇이지?”

“왈트 자작가에 억류된 사람에 대한 소식을 접하지 못했나?”

“왈트 자작가?”

바이든 남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히 짚이는 게 없는 듯했다.

“내전 때문에 풀어둔 이들 중 붙잡힌 사람이 있어서.”

바이든 남작이 루안에 대해서 모른다면 굳이 내 쪽에서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루안의 가치는 어마어마하니까.

특히 마이어드 후작과 같은 거대한 세력으로서는 바라 마지않을 인재였다.

“아직 살아 있다면 돌려보내 줬으면 좋겠는데.”

“그렇군.”

다행히 바이든 남작은 내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실제로 내전 동안 각 영주가 풀어둔 첩자들의 수는 엄청났다.

어떻게든 정보를 모으고 군대의 움직임을 감시해야 했으니까.

그러나 모두가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치지는 못했고 사로잡힌 이들도 몇 명 있었다.

“사람을 시켜서 보내도록 하지.”

“아니, 제 입으로 내가 보낸 첩자라고 말하지는 않을 테니까 직접 가서 찾지.”

“직접?”

내가 직접 간다는 말에 바이든 남작이 의문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첩자들의 중요성이야 말할 것 없지만 그게 영주가 직접 찾으러 갈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인식이 그렇다는 거였다.

“승리도 불확실한 가문을 위해서 목숨을 걸어준 이들이니까. 그 정도는 해야지.”

네패스 남작가의 처참했던 상황이 내 말의 설득력을 높여주었다.

“그럼 그러게.”

드디어 루안을 얻을 때였다.

* * *

‘하. 벌써 한 달이 넘었군.’

루안은 오늘도 지하 감옥에서 눈을 떴다.

기간으로 치자면 한 달도 더 지난 시간.

그동안 홀로 감옥에서 지내며 루안은 갈수록 지쳐갔다.

‘빌어먹을 왈트 자작.’

모든 것은 왈트 자작 때문이었다.

내전을 앞두고 루안의 실력에 대한 소문을 들은 왈트 자작가의 가신들이 루안을 잡으러 온 것이다.

그들은 루안에게 군대를 무장할 뛰어난 품질의 장비를 요구했고 루안은 이를 거절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기에 결코 누군가의 밑에서 일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나 상대는 대화로 설득되지 않았고 루안은 그대로 감옥에 갇혔다.

그렇게 된 후 왈트 자작은 오래 지나지 않아 패배했고 목숨을 잃었다.

그의 영지 역시 지금은 바이든 남작이라는 귀족의 손에 떨어졌고.

그래서 루안은 자신이 그대로 풀려날 수 있을지 알았다.

- 뭐 하던 놈인데 감옥에 갇힌 것이냐?

문제는 바이든 남작가에서 루안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했을 때였다.

루안은 왈트 자작과 같은 목적으로 바이든 남작에게 이용당하는 걸 우려했고 그 때문에 자신이 대장장이라는 걸 밝힐 수가 없었다.

그러니 자신이 왜 붙잡혔는지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고 바이든 남작가의 병사들은 죄목을 확인하지 못한 루안을 굳이 풀어줄 이유가 없었다.

결국, 왈트 자작가가 망한 뒤에도 루안은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가 된 것이다.

‘제발 좀 서둘러줘!’

그렇다고 루안이 아무 대책 없이 마냥 갇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루안에게는 동행하던 마법사 친구가 있었다.

고향에서 함께 나고 자란 오랜 친구였는데 비록 같이 잡히기는 했으나 친구는 금세 풀려났다.

아무리 왈트 자작이라도 마법사 협회를 건드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왈트 자작까지 죽은 이상 루안은 친구가 자신을 금방 풀어주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철컹!

“오!”

마침 지하 감옥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지금껏 문이 열리는 일은 극히 드물었기에 루안은 기대감을 품었다.

드디어 친구가 자신을 구해주러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안의 기대는 배신당했다.

“여기 있었군.”

루안은 웬 낯선 이들이 자신이 갇힌 감옥 앞으로 다가온 것을 보았다.

척 보아도 신분이 높은 게 분명한 귀족이 기사들의 호위까지 받으며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친구가 아닐뿐더러 친구가 보낸 사람 같지도 않았다.

“누구긴. 너의 주군이지.”

“네?”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루안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자신도 모르는 주군이라니?

그러나 상대는 루안의 의문을 풀어주지 않았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열쇠로 문을 열더니 안으로 들어와 그대로 루안을 잡아챘다.

“왜, 왜 이러십니까? 어디로 데려가는 건데요?”

“들킬 수도 있으니까 입은 막도록.”

“뭘 들켜? 당신들 대체 정체가… 커억!”

루안이 버둥거리며 저항하자 덩치 큰 기사가 루안의 뒷목을 후려쳤다.

루안은 그대로 의식을 잃고 풀썩 쓰러졌다.

* * *

“다행히 아직 남아 있었네.”

축 늘어져서 빅터의 어깨에 짐짝처럼 들려진 루안을 보았다.

게임에서 봤던 일러스트와 실제 외모에 큰 차이가 없어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로크에게 들은 것과도 똑같고.’

감옥 생활이 힘들었는지 몸이 다소 야위었지만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루안을 내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루안은 날 알지 못한다는 것.

하지만 이를 속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베르타가 풀었던 첩자들 중에 왈트 자작에게 붙잡힌 이가 있었던 덕분이다.

그를 빼내면서 2명이 잡혔다고 말하고 루안을 하나 더 얹었을 뿐이다.

물론 루안 본인이 이를 부정할 위험성이 있었지만 바이든 남작의 병사들을 적당히 윽박질러 열쇠를 받아 오는 것으로 해결했다.

빠져나가는 길이야 루안을 기절시키면 간단했고.

감옥 생활로 힘들어서 탈진했다고 하면 변명도 그럴듯했다.

“그럼 우리는 이렇게 두 사람을 데리고 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그렇게 감옥의 책임자에게 확인까지 받고 나서야 나는 루안을 업어 올 수 있었다.

바이든 남작이 루안의 정체를 알았다면 땅을 치고 후회했을 테지만 이미 늦었다.

난 내 수중에 들어온 루안을 바이든 남작에게 내줄 생각이 없었으니.

‘상대가 레일리 왕녀라도 무리지.’

언젠가는 넘어야 할 상대.

루안은 앞으로 내 세력이 성장하는 데 날개를 달아줄 인물이었다.

마이어드 후작이라는 거대한 배경을 두고 있는 레일리 왕녀를 꺾기 위해서라도 루안은 꼭 필요했다.

“으윽…….”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루안이 의식을 되찾았다.

그러자 빅터는 루안을 내리고 물을 먹였다.

잠깐 혼란스러워하던 루안은 그래도 물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후.”

그렇게 정신을 차린 뒤 루안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와 기사들을 보았다.

“마법사 협회에서 오신 분들은 아닌 거 같은데…….”

“협회?”

의외였다.

루안의 입에서 마법사 협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줄이야.

아무래도 마법사 협회가 루안의 위치를 빨리 파악했던 건 우연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협회에서 루안의 존재를 알고 있었나 보군.’

그럼에도 나에게 덥석 루안에 대해 알려준 건 플레턴이나 가이트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봐야 했다.

계승식에서 가이트가 따로 언급한 게 없으니 플레턴이 유력했다.

“대체 누구신데 절 데려가시는 겁니까?”

“내 이름은 아인 네패스다.”

“네패스 남작님이라고요?”

루안은 내 정체를 듣고도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왜 영주 귀족인 내가 자신을 찾아왔는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

“그런 분께서 왜 직접?”

“훌륭한 인재를 얻으려면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지.”

절대군주에서도 영웅들을 얻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어떤 영웅이라도 영입에는 반드시 조건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고티어 영웅일수록 그 조건이 어렵고 수도 많아서 유저들은 다소의 수고를 해야 했다.

더구나 루안은 영웅 정보는 없으나 만약 생산형 같은 유형이 있다면 5티어로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뛰어난 대장장이.

업어서라도 데리고 가는 게 당연했다.

“하……. 또입니까?”

이미 왈트 자작에게 크게 데었던 루안은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고는 황망한 눈으로 나를 봤다.

“전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잘 알지. 그러니까 왈트 자작에게 잡혔을 거고.”

루안이 혹할지는 모르겠지만 난 루안의 영입을 위해서 많은 것들을 준비해 뒀다.

물론 이것이 루안에게 그리 매력적일지는 모르겠지만.

“지원할 수 있는 최고의 시설을 주지. 장인들도 모두 부릴 수 있게 해주고.”

“그러십니까?”

역시나 첫 떡밥에 루안은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시설이 어떻고 밑에 사람들이 어떻고.

최고의 대장장이에게는 당연한 것이지, 특별한 대우가 아니었다.

게다가 남작인 내가 줄 수 있는 최고는 대영주들의 최고에 비해서는 한참 모자랄 것이다.

“그리고 최고의 재료들도.”

내가 눈짓을 주자 기사가 가져온 보따리를 풀었다.

지난 레이드에서 모은 재료들이었다.

영지의 대장장이 중에는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썩히고 있었으나 루안이라면 분명 다룰 수 있을 것이다.

“흠?”

역시 이번에는 루안도 제법 반응을 보였다.

“희귀한 재료들을 갖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그 정도는…….”

“필요한 도안도 얼마든지 제공하지.”

난 뒤이어 이 재료들로 만들 만한 네임드 장비의 도안을 꺼냈다.

루안이 로크에게 만들어준 아이투스와 비교했을 때 결코 밀리지 않는 수준 높은 장비들이었다.

“어, 어라?”

여기까지 하자 루안의 눈빛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했다.

확실하게 쐐기를 박아 넣을 수준은 못 되었다.

더구나 내가 내줄 수 있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고.

“이보다 더 좋은 재료도 있지.”

난 직접 품에 고이 넣어 가지고 온 마지막 패를 내보였다.

도미닉 남작가의 병력을 절망에 빠트렸던 주간 레이드 몬스터.

핏빛 뱀 블러드 바실리스크의 결정이었다.

이름처럼 피를 연상시키는 시뻘건 결정이 모습을 보이자 루안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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