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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영주님의 품격-26화 (26/250)

VVIP 영주님의 품격 26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6화

26화

* * *

“이게 뭔…….”

내가 상대가 일전에 봤던 기사라고 이야기하자 바이든 남작가의 기사단장 벤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확신을 담아서 자신들뿐이라고 했는데 정말 바이든 남작가에서 온 행렬이었으니까.

더구나 그 상대는 그로서도 어찌하지 못할 인물이었다.

“바이든 남작의 조카겠군. 왜 따로 왔나?”

벤은 내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난 사과하는 벤을 뒤로한 채 레일리 왕녀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은 긴장을 풀었지만 반대로 베르타는 바짝 긴장하는 게 보였다.

“흠.”

난 잠시 고민하다가 앞으로 나섰다.

아무래도 왕녀를 맞이하는 건 행정관보다는 내가 직접 나서는 게 맞았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손님들도 내가 초대한 만큼 이렇게 나와 있기는 했지만 행정관을 거치는 것과 처음부터 내가 먼저 맞이하는 건 의미가 달랐다.

“직접 맞이할 생각이십니까?”

“왕녀 저하니까.”

“알고 있다는 티를 보여도 되겠습니까?”

“저쪽도 숨길 생각이라면 이렇게 나서지도 않았겠지.”

레일리 왕녀가 바이든 남작에게도 말하지 않고 온 건 나에게 할 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뜻을 전하자 베르타는 반대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

뒤에서 벤이 뭐라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는 행동을 멈췄다.

어느새 안내를 받고 들어갔던 바이든 남작이 다시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에는 당황이라는 감정이 확연히 떠올라 있었다.

마차가 멈춰 서고 그곳에서 레일리 왕녀가 내렸을 때 바이든 남작은 기어이 한숨까지 내뱉었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네패스 남작님.”

“반갑군.”

레일리 왕녀가 기만적이게도 먼저 인사를 했다.

나도 어색하게 거드름을 피우며 그 인사를 받았다.

뻔히 아는 티를 내면서도 모르는 척 가증스럽게 구는 작태는 내 모습임에도 참 어처구니없고 우스웠다.

그러나 레일리 왕녀는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즐거워하는 거 같았다.

“베르타 경.”

“예.”

“내 방을 내줘라.”

난 가장 좋은 방인 내 방을 굳이 내주라고 지시했다.

바이든 남작도 아니고 그 조카에게.

레일리 왕녀와 함께 온 왕가의 기사들이 그에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설마하던 그들도 내가 확실하게 그녀의 신분을 알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눈치였다.

그들은 난감해하며 왕녀를 보았으나 레일리 왕녀는 그냥 감사하다는 인사만 할 뿐이었다.

* * *

계승식은 진부했고 지루했다.

신관을 한 명 초청해서 신이 어쩌고 귀족의 의무가 어쩌고 이야기했으니까.

듣고 있는 입장에서 하품이 다 나올 지경이었지만 다행히 조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남작이 된 다음에는 기사들의 차례가 되었다.

정식으로 로크가 기사단장이 되었고 라이언과 빅터에게 기사 작위가 내려졌다.

그리고 도미닉 남작가 출신의 기사들 모두가 새롭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외에도 각 마을을 관리하고 있던 이들이 찾아와서 인사를 올리는 등 몇 가지 절차가 더 지나고서야 나는 바이든 남작과 마주할 수 있었다.

물론 레일리 왕녀 역시 동석한 자리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어떻게 알았나?”

방에는 단 네 사람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와 베르타, 바이든 남작과 레일리 왕녀.

굳이 행정관만 남겨둔 내 행동에서 바이든 남작은 베르타 역시 왕녀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걸 짐작했는지 거리낌 없이 물어왔다.

“왕녀님의 고결한 기품이 염색 정도에 가려지지는 않더군.”

이전과 달리 난 말을 높이지 않았다.

이제는 나 역시 같은 남작의 작위를 가진 귀족이었으니까.

“지금 내가 농을 하는 것으로 보이나?”

대충 내뱉은 대답에 바이든 남작의 손에 힘줄이 올라왔다.

“누구에게 들었다는 대답을 원하는 모양이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스스로 알아냈고 그마저 옆에 있는 행정관에게만 말했지.”

이건 사실이었다.

내가 시스템으로 왕녀의 정보를 확인했으니까.

아마 바이든 남작은 마법사 협회를 의심하고 있을 테지만 마법사 협회는 아무것도 몰랐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그게 아니라면 왕가의 병력들이 고작 남작의 조카를 호위하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했지?”

“그들이 왕가의 병력이라는 건 또 어떻게…….”

“상자 안에 멋진 장비들을 싣고 가는 것도 봤지.”

바이든 남작의 시선이 레일리 왕녀에게로 돌아갔다.

내 말을 듣고 레일리 왕녀가 뭔가 큰 실수를 저질러서 정체를 들킨 쪽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레일리 왕녀는 그에 당황하며 나에게 물었다.

“정말 저와 만났을 때 알았나요?”

“다시 말하지만, 왕녀님의 고결한 기품이 가려지지 않았을 뿐입니다.”

“흠.”

레일리 왕녀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민에 잠겼다.

혹시 나와 만났을 때 자신이 뭔가 실수한 부분이 없었나 되짚어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런 부분이 있을 턱이 있나.

“그럼 네패스 남작. 그대는 제 정체를 다른 영주들에게 알릴 생각이 있나요?”

“물론입니다.”

내가 덥석 긍정하고 나서자 레일리 왕녀와 바이든 남작 모두 흠칫했다.

“대영주들에게 왕녀님의 존재를 알리고 그들에게 붙을 겁니다.”

“네놈! 네패스 남작가의 가주라는 녀석이!”

바이든 남작은 씩씩거렸고 레일리 왕녀도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줄은 몰랐네요.”

“아니라고 했으면 믿으셨겠습니까?”

“아닌가요?”

“어떨 거 같습니까?”

난 자리에서 일어나 레일리 왕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제가 어떤 말을 하든지 믿을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왕녀 저하께서 어떤 말을 하든 제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겠죠. 서로에게 쌓은 어떠한 신뢰도 없으니.”

내 지적에 레일리 왕녀는 수긍한 듯했다.

네패스 남작가와 바이든 남작가 사이에도, 네패스 남작가와 크레시안 왕가 사이에도 신뢰 관계는 없었다.

과거에 친왕실파였다는 건 왕실이 몰락하고 기존 세대가 모두 바뀐 지금 아무런 의미도 없었으니까.

“그럼 신뢰를 쌓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겠군요?”

레일리 왕녀는 금방 내 진의를 꿰뚫었다.

신뢰가 없으니까 신뢰를 쌓자.

서로를 위한 거래를 하자는 소리였다.

“바라는 게 있나요?”

“당연히 있습니다.”

“그게 뭐죠?”

“마이어드 후작.”

내 목표는 루안이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이들은 모르겠지만 나에게 이제 마법사 협회의 그늘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설령 마법사 협회가 적극적으로 감싸주더라도 대영주인 마이어드 후작과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분이 왜 왕녀님을 숨기고 있는지 들어야겠습니다. 한배를 타려면 그걸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군요. 얼마든지 알려드릴게요. 하지만 남작도 저에게 말해 줘야 될 게 있을 거예요.”

“물론입니다.”

그렇게 난 레일리 왕녀와 정보 교환을 시작했다.

“마이어드 후작은 사실 친왕실파의 대영주예요. 다만 그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있었죠.”

시작부터 폭탄이 터졌다.

알려진 것과 사뭇 다른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그럼 바이든 남작도?”

“아니요. 바이든 남작은 그때까지 아무것도 몰랐어요. 제가 오고 나서야 마이어드 후작에게 이야기를 들었지요.”

레일리 왕녀의 말에 바이든 남작이 민망했는지 시선을 피했다.

자신이 연줄을 넣은 대영주가 알고 보니 친왕실파였다니,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마이어드 후작은 저를 통해서 많은 걸 얻을 수 있죠. 흩어졌던 왕가의 병력과 숨겨져 있는 물자, 그리고 드물지만 네패스 남작과 같이 내전에서 살아남는 친왕실파 귀족들.”

“마이어드 후작은 왕이 되려는 겁니까?”

절대군주를 목표로 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 마이어드 후작이 왕좌를 노린다는 건 긍정적인 소식이 아니었다.

당장은 아군이 될지도 모르나 결국에는 적으로 마주해야 한다는 소리니까.

“아니, 그건 아니에요.”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마이어드 후작은 남부 제일의 세력을 자랑하는 대영주다.

그런 이가 그나마 남아 있는 친왕실파의 지지를 얻고 정통성을 가진 왕녀까지 내세운다면 왕위를 노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설령 당장 욕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내전이 끝날 때쯤에는 생각이 달라져도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그러나 레일리 왕녀는 그 가능성을 일축했다.

마이어드 후작을 믿는다는 감상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마이어드 후작에게는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거든요.”

신뢰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차라리 마이어드 후작의 후계자라면 모를까 후작 본인은 베르타 이상의 고령자였으니까.

“이 내전만 아니었으면 후작은 마족과의 전쟁이 끝났을 때 바로 은퇴했을 거예요.”

“그럼 후계자가 왕위를 노리지 않겠습니까?”

“모르고 있었나요? 마이어드 후작에게는 후계자가 없어요.”

“네?”

연달아서 예상을 빗나가는 대답이 나왔다.

하다 하다 후계자가 없다니?

연로함을 이유로 은퇴를 염두에 두어야 할 사람에게는 생각할 수 없는 이유였다.

“아니, 왜?”

“무슨 비극인지 후작의 자식들은 모두 어렸을 때 죽었거든요.”

레일리 왕녀는 곧 마이어드 후작의 가정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바이든 남작의 딸과 혼인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마이어드 후작은 상당히 많은 부인과 첩들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어떻게든 자신의 뒤를 이을 후사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마이어드 후작의 핏줄이 태어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그마저 출산 도중이나 이후에 금세 죽었다고 한다.

“그럼 양자를 들이면 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친자식을 볼 수 없다면 양자를 들이면 될 일이니까.

남부 제일의 대영주가 될 기회인데 누구나 탐낼 만했다.

“마이어드 후작은 완고한 면이 있어서 그런 부분에서는 양보가 없어요. 자신의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이 뒤를 잇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죠.”

“아무리 그래도 후계자는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후작 본인이 아무리 고집을 피우더라도 주변에서 어떻게든 설득을 했을 것이다.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으면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제가 마이어드 후작과 함께하는 거예요.”

그에 레일리 왕녀가 스스로를 가리켰다.

“마이어드 후작은 어머니와 사촌이었으니까.”

“콜록!”

옆에서 듣고 있던 베르타가 사레가 들렸는지 마른기침을 토해냈다.

아무래도 전혀 몰랐던 사실인 모양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레일리 왕녀 저하의 어머니라면 크리스텔 왕비 마마이실 텐데 그분이 마이어드 후작과 친척이라는 이야긴 들은 적이 없습니다.”

“모르는 게 당연해요. 마이어드 후작이 왕실과 연관되어 있다면 의심받을 테니 왕가에서 일부러 그 사실을 숨겼으니까.”

난 슬쩍 바이든 남작을 보았고 바이든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직접 듣고서야 알았지.”

“허.”

그럼 마이어드 후작은 자신의 후계자로 레일리 왕녀를 지목했다는 소리였다.

나는 이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렇게 되면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크레시안 왕국의 정보는 틀린 게 되는 셈이니까.

대영주 세력에 의해서 빠르게 통일된 줄 알았는데 그 대영주 세력에 왕녀가 끼어 있던 것이다.

‘게임의 설정과 무관하게 진행된 이 세계만의 독자적인 이야기인가? 아니면 훗날 게임으로 나왔을지 모르는 내용인가?’

이건 크레시안 왕국에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 대륙에 있는 여러 국가 중에 이와 유사한 사례가 없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메인 스토리조차 이제는 확신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하긴 오픈 6개월밖에 안 된 게임이었으니까.’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면 나중에 큰 낭패를 봤을지도 모른다.

“자, 네패스 남작. 이 정도면 충분히 성의 있는 정보를 제공했다고 보는데 남작의 생각은 어때요?”

엄청난 기밀을 터트려놓고 레일리 왕녀는 곧장 나를 재촉해 왔다.

아무래도 내가 정신을 추스를 틈을 주지 않을 생각 같았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저도 성심성의껏 대답해 드려야겠군요.”

하지만 알고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엄청난 이야기였으니까.

레일리 왕녀는 단순히 마이어드 후작에게 쓸모 있는 패라거나 동맹 관계가 아니었다.

그녀야말로 마이어드 후작의 모든 것을 이어받을 사람이었고 이 남부를 이어받을 지배자였다.

그리고 내전의 향방에 따라서는 다시 왕가의 재건을 노려도 될 법한 힘이 있었다.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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