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25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5화
25화
또각!
“큽!”
“큭!”
결국, 라이언의 품으로 파고든 로크의 주먹이 내질러졌고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신음이 흘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라이언과 함께 로크도 신음을 흘린 것이다.
“너!”
“후배를 너무 무시하셨소, 선배.”
로크가 주먹을 내지른 것에 맞춰 라이언은 자신의 이마를 내리쳤다.
주먹에 제대로 힘이 실렸다면 위험했겠지만, 라이언의 움직임이 좀 더 빨랐다.
주먹에 제대로 힘이 담기기 전에 이마가 도착해 도리어 로크의 손가락이 다친 것이다.
“아무리 용병 출신이라도 지나간 얘기 아니오? 아직도 개싸움에 자신 있으시오?”
라이언은 그대로 로크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균형을 잃은 로크가 쓰러지며 두 사람은 한데 뒤엉켜 바닥을 뒹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라이언의 단검이 움직였다.
핏!
장갑이 보호해 주지 못하는 부위에서 핏물이 튀었다.
라이언은 악착같았다.
지금이 아니면 승리할 기회가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물어뜯을 듯 이빨까지 들이밀며 엉망진창으로 싸웠다.
그러나 그 와중에 단검만큼은 조금씩 소득을 내고 있었다.
로크도 순순히 당하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라이언을 떨쳐내려고 하기보다 똑같이 개싸움으로 나가 이마를 부딪쳤다.
그 엉망인 싸움에 기사들은 아연실색했지만, 용병들 사이에서는 환호성이 나왔다.
자신들에게 익숙한 싸움 형태였기 때문이다.
“이 자식이!”
퍼퍼퍽!
로크가 연달아서 라이언의 옆구리를 때렸다.
“크아아!”
라이언은 괴성을 지르며 로크에게 자상을 입혔다.
유혈이 낭자한 싸움이었다.
“그만.”
난 마나 블래스트를 사용해서 두 사람을 떨어트렸다.
양쪽 다 눈이 뒤집혀서 이미 말로 어떻게 할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피투성이가 된 둘은 서로 씩씩거리며 여전히 투지를 내보이고 있었다.
몸 상태는 양쪽 다 처참했지만.
‘그래도 판정으로 보자면 로크 쪽이기는 한데.’
기사이기에 갑옷을 입고 있어 보호되는 부위가 많았다.
피는 좀 흘렸지만, 상처가 깊은 것도 아니라 몇 주 쉬면 될 수준이었다.
반면 라이언은 중상이었다.
용케 의식을 유지하고 있으나 심한 후유증이 남거나 운이 나쁘면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 마법을 여기에 처음 쓰네.’
난 플레턴에게서 배운 치유 마법을 사용해 그 자리에서 바로 두 사람의 치료에 들어갔다.
우웅!
옅은 빛과 함께 빠르게 상처가 아물자 흥분해서 날뛰던 둘도 움직임을 멈췄다.
“이건 설마…….”
“아니, 이런 것도 쓸 수 있었습니까?”
로크가 그냥 놀랐다면 라이언은 나를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나를 단순히 전투에 능한 마법사 정도로만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게 중요한가?”
두 사람은 내 말을 어기고 서로를 죽이기 위해서 공격했다.
상대가 멀쩡할 때는 그렇게 해도 막거나 피할 수 있을 테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개싸움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심지어 당하는 쪽도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하고 상대를 공격했다.
“판정을 내리지. 이 싸움의 승자는 없다.”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차게 식었다.
그러나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내가 직접 내린 판정이기도 했고 양쪽 다 반칙을 했기 때문이다.
“아, 선배!”
“너 때문에!”
라이언은 비명을 지르듯 로크를 불렀다.
로크도 그런 라이언을 향해 쌍심지를 켰다.
“그리고 내 앞에서 추태를 보인 벌을 내리지.”
씩씩거리던 두 사람은 벌을 주겠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당황하며 나를 보았다.
* * *
“이래도 되겠습니까?”
베르타는 한참 전부터 연병장을 뛰고 있는 둘을 보며 물었다.
추태를 보인 죄로 매일 연병장을 뛰라는 것이 내가 내린 벌이었다.
그리 대단한 벌은 아니지만 뛰어야 하는 거리와 들고 뛰어야 하는 짐까지 합쳐져 전투형 2티어 영웅들이라도 고생할 게 분명했다.
“벌은 줘야 할 거 아닌가?”
“그것이 아니라 단장 자리가 공석이 되었지 않습니까?”
알고 보니 베르타의 걱정은 기사단장 자리가 비어버린 상황에 대한 염려였다.
“뭐, 벌 다 받으면 넘겨주지.”
사실 승패는 아무래도 좋았다.
내 목적은 누가 더 세서 3티어 영웅으로 승급시키면 될지였지, 포상으로 약속한 자리는 아무래도 좋았으니까.
‘역시 로크 쪽이 낫군.’
스킬을 보고 어렴풋이 어떤 타입으로 싸울지는 짐작했지만 기대 이상이었다.
마지막에는 라이언에게 휘말렸지만 그럼에도 훨씬 강했고 쓸모도 있었다.
‘용병 출신이라니 더 좋지.’
로크라면 도미닉 남작가 출신 기사들의 마음을 잡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용병들의 마음도 잡을 수 있었다.
라이언의 상위 호환인 셈이다.
빅터와 터너가 그랬듯이.
“라이언이라는 용병은 어찌 됩니까?”
“그쪽도 기사 서임은 해줘야지. 오히려 잘됐어.”
내가 언제까지 라이언을 관리해 줘야 할지 의문이었는데 로크라는 적임자가 나타났다.
라이언이 기사가 되면 단장이 되는 로크의 밑에 들어가는 것이니까.
더구나 같은 용병 출신이라서 라이언을 잘 길들일 수 있을 거 같았다.
“서임을 해줘도 제대로 된 기사가 될지 의문이었는데 선배가 있으니 잘 보고 배우겠지.”
“주먹으로 패서 가르칠 거 같습니다만.”
“그것도 좋지.”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 나도 라이언에게서 해방될 때였다.
“우리는 루안이나 노려보자고.”
내 말에 베르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크 경의 검을 보니까 확실해졌습니다. 그는 꼭 끌어들여야 할 실력 있는 장인입니다.”
“위치는 여전하겠지?”
왈트 자작가에 억류되어 있던 루안이었다.
하지만 바이든 남작가의 군대가 왈트 자작가를 없앴으니 자연히 바이든 남작가에게로 넘어갔을 것이다.
“아직 갇혀 있을 겁니다. 무슨 이유로 잡혔는지 모를 사람을 쉽게 풀어주지도 않을 테고…….”
“본인이 장인이라고 말할 수도 없겠지.”
그 좋은 솜씨 때문에 왈트 자작가에 억류되었던 루안이었다.
바이든 남작이 왈트 자작과 같은 선택을 할 수도 있으니 자신이 실력 있는 장인이라는 걸 숨길 것이다.
혹시 누군가 알려줄 수도 있지만 그래서야 결국 붙잡힌 신세라는 건 변치 않을 것이고.
“신경 써야 할 건 확보가 아니라 영입인데.”
목에 칼을 들이밀고 위협할 수는 없다.
어쩌다 한 번 정도는 통해도 반발만 심해질 것이고 무엇보다 본인이 누구 밑에서 일할 성격이 못 된다.
“어렵군요. 아무리 좋은 대우를 약속해도 본인이 거부하려고 한다니.”
“역시 직접 부딪쳐보는 수밖에 없겠지?”
“그럴 거 같습니다. 정 안 되면 풀어준 대가로 장비 몇 개만 내놓으라고 하고 보내시거나…….”
베르타는 뒷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무슨 말을 생략했는지는 알 수 있었다.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죽이는 게 낫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확실히 네임드 장비를 만들 수 있는 수준의 장인은 위험하다.
어지간한 영웅들보다 더 위협적이니까.
‘부디 죽여야 할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 * *
며칠이 더 지나고 마침내 내가 정식으로 작위를 계승할 날이 왔다.
마법사 협회가 먼저 사람들을 보내며 축하 소식을 전했다.
“스승님이 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 사람들 중 최고 책임자는 남부 마법사 협회의 지부장 가이트였다.
플레턴의 방문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의외의 인선이었다.
“원로님은 연세가 있으셔서 잘 움직이지 않습니다. 대신 이 말을 전해주라더군요.”
“경청하겠습니다.”
“협회의 도움은 여기까지다.”
아예 예상을 못 한 건 아니었다.
이렇게 와준 것만 해도 마법사 협회는 꽤 많이 양보해 줬으니까.
이제는 바이든 남작뿐 아니라 남부의 영주들 모두가 내가 마법사 협회와 연결 고리가 있다는 걸 알았을 테니.
【 고개를 숙이다 】
실제로 마법사 협회가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이것만으로 큰 도움이었다.
“명심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더 있습니다.”
가이트는 나에게 마법서 한 권을 내밀었다.
“지금쯤이면 생명의 서는 어느 정도 익혔을 테니 이걸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플레턴의 예상은 막 스킬을 얻은 수준이겠지만 5티어의 재능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어느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경지에 이른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정정해 주지 않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단죄의 서?”
마법서의 이름은 단죄의 서였다.
단죄라는 단어에 공격 마법이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어떤 마법서입니까?”
“이건…….”
가이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몰라서가 아니라 말하기를 꺼려 하는 기색이었다.
“마법사를 사냥하는 마법입니다.”
“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난 당황했다.
그런 마법이 있었던가?
절대군주에서는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유형의 마법이었다.
‘특이하군.’
플레턴이 왜 이 마법을 보내줬는지도 의문이었다.
“저도 스승님께 드릴 게 있습니다.”
난 작은 책 한 권을 꺼냈다.
“이건 무엇입니까?”
“가문의 비전을 제 나름대로 재해석한 것입니다. 스승님께 전달해 주십시오.”
마법사에게 줄 선물이 뭐가 좋을지 고민해 봤지만 솔직히 마법서 말고 생각나는 건 없었다.
플레턴 정도의 위치라면 보주를 구하는 게 어렵지도 않을 테니까.
그래서 네패스 마법 이론을 내가 다시 정리해 놓은 책을 준비했다.
“원로님께서 받으실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번에도 한 번 거절하셨지 않습니까?”
“전달만 해주십시오. 원본이 아닐뿐더러, 협회 소속 마법사로서 협회에 마법 하나 정도는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 협회가 기득권을 유지하는 방법은 마법사들끼리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장성한 마법사라면 자신의 마법 하나쯤은 풀어놔야 했다.
“그리고 이번에 협회의 도움에 보답하고자 따로 재물을 좀 준비했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는…….”
“편의에 대한 대가입니다. 정당한 값을 치르는 거지요.”
공식적으로 지부에 주는 것과 별개로 가이트에게도 좀 더 챙겨주었다.
플레턴의 고집으로 나름의 피해를 봤을 테니 거기에 대한 보상이었다.
“바이든 남작가의 행렬이 오고 있습니다.”
가이트를 방으로 안내할 때 새로운 손님이 등장했다.
행정관 베르타가 먼저 나서서 바이든 남작을 맞이했다.
난 뒤편에서 영웅 정보를 확인했는데 레일리 왕녀나 왕가에 속한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바이든 남작만 온 건가?’
딱히 나쁠 건 없었다.
레일리 왕녀에게 직접 확인하는 쪽이 확실했겠지만 그건 이쪽도 부담이 크니까.
적당히 바이든 남작을 찔러보면서 마이어드 후작과 레일리 왕녀의 관계에 대해 알아볼 셈이었다.
“네패스 남작가의 막내 공자를 이렇게 보게 되는군.”
바이든 남작은 안내를 맡은 베르타를 그대로 지나쳐 나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일전에 들었던 대로 아르카디아에서는 흔하지 않은 검은 머리를 가진 이였다.
그리고 조금 동글동글한 얼굴을 가져 나이에 비해 살짝 어려 보였다.
레일리 왕녀가 조카로 위장한 것을 생각하면 역시 적당한 인선이었던 것 같다.
닮았다는 느낌이 확실히 있으니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은 계승식 전이었기에 난 그에게 높임말을 써주었다.
저번에 레일리 왕녀 때야 계승식을 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기 싸움을 위해 남작이라고 한 것이었으니까.
“우리 나눌 이야기가 많을 텐데.”
“물론입니다.”
“기다리고 있지.”
뒤따라온 베르타가 직접 바이든 남작을 안내했다.
난 바이든 남작가의 행렬을 다시 확인했다.
적진에 들어온다는 각오 때문인지 무장한 기사들을 비롯해 많은 병력을 끌고 온 상태였다.
덕분에 내 기사들과 은근한 기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서로 눈을 마주치면 피하지 않고 노려보는 상황 같은 것 말이다.
그렇다고 우격다짐까지 벌어지지는 않겠지만 신경 써야 할 필요는 있어 보였다.
‘혹시 모르니까 주의를 좀 줘야겠어.’
로크를 찾아서 기사들에게 절대 싸우지 말라고 전달하려는데 빅터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축하하지, 빅터 경. 이제 경도 진짜 기사가 될 수 있겠군.”
“감사합니다. 그런데 공자님,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바이든 남작가 쪽에서 행렬이 하나 더 들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음?”
그 말에 난 의아해하며 다시 바이든 남작가의 행렬을 보았다.
저만한 숫자가 왔는데 더 있다니?
그리고 올 거라면 같이 오지 굳이 따로 나눠서 올 필요도 없었다.
“바이든 남작가가 확실한 건가?”
“그렇습니다.”
“확인해 봐야겠군.”
난 빅터를 시켜서 바이든 남작가에서 온 기사 한 명을 불러냈다.
바이든 남작가의 기사단장인 벤이라는 기사였다.
“일행이 더 있었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바이든 남작가의 깃발을 단 행렬이 더 오고 있다는데?”
“아닙니다. 저희가 전부입니다.”
벤은 확신을 담아 부정했다.
“아무래도 보통 일은 아닌 거 같은데.”
내가 신호를 보내자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 모여들었다.
바이든 남작가의 기사들이 경계하는 눈으로 우리를 주시했지만 난 적당히 무시했다.
이곳은 내 영지였으니까.
“상대를 확인해야겠다.”
“알겠습니다.”
빅터를 비롯하여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나에게 붙었다.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들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주변에 신호를 보냈다.
그렇게 긴장이 최대로 올랐을 때 난 가까워진 두 번째 행렬로부터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뭐야?”
행렬의 선두에 선 기사는 일전에 한 번 봤던 상대였다.
레일리 왕녀를 모시고 있던 기사였으니까.
혹시나 싶어서 마차 쪽을 확인하니 아니나 다를까.
레일리 왕녀의 정보가 떠오르고 있었다.
‘왕녀가 왜?’
바이든 남작과 굳이 따로 들어오고 있는 왕녀.
더구나 바이든 남작의 사람들이 왕녀가 온다는 걸 모르고 있다.
틀림없는 왕녀의 독단이었다.
“그렇군.”
무엇보다 왕녀의 곁에 있는 건 이전과 마찬가지로 왕가의 인물들.
그 모습을 보고 확신이 들었다.
지금 레일리 왕녀는 바이든 남작의 조카로서 이 자리에 오는 게 아니었다.
크레시안 왕국의 왕녀로서 이 자리에 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