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21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1화
21화
* * *
“헉헉! 이번에는 또 뭐야?”
“브, 블러드 바실리스크다!”
연달은 괴수들의 습격으로 피해가 발생한 도미닉 남작가의 군대 앞에 나타난 또 다른 괴수.
녀석의 정체는 피처럼 새빨간 비늘로 온몸을 뒤덮고 있는 거대한 괴물 뱀 바실리스크였다.
별도로 블러드 바실리스크라고 명명된 이 괴수는 앞선 웬디고나 트롤, 하피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주간 레이드는 일일 레이드랑은 수준이 다르지.’
너무 위험하기에 나도 이 녀석을 사냥한 적은 없다.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바이든 남작가의 군대라면 다소의 희생은 따를지언정 충분히 잡을 만한 녀석일 것이다.
“오, 온다!”
그렇게 다시 한 번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후 싸움은 아주 처절했다.
하지만 그래도 바이든 남작가의 군대는 블러드 바실리스크를 무찌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누구도 승리를 기뻐하지 못했다.
행여 또 다른 몬스터가 나타날까 그대로 달아나야 했으니까.
얼마나 서둘렀는지 힘들여 잡은 몬스터들의 부산물을 하나도 챙기지 않을 정도였다.
난 당연히 우리 영지에서 사냥한 것에 대한 정당한 세금으로 그것들을 챙기기로 했다.
“모두 챙기자고.”
병력들을 이끌고 돌아오자 전장을 살피던 라이언의 눈에서 생기가 없어졌다.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괴수들의 시신을 통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차린 듯했다.
“귀족 나리.”
“응?”
“저 이 영지가 너무 무섭습니다.”
“뭘,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야.”
“이게 왜 특별하지 않습니까? 북부 몬스터 웬디고에 동부에서 나타나는 트롤, 서부의 하피, 그리고 저 흔적을 봐서 바실리스크도 나타났던 모양이군요. 이 정도면 아주 마굴이 따로 없는데.”
내 사냥에 따라다니느라 그 끔찍함을 충분히 맛본 용병들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런데 제일 무서운 건 이 괴수들이 아닙니다.”
“그럼 뭐가 제일 무서운가?”
“귀족 나리입니다.”
“내가?”
라이언이 뜬금없이 나를 지목하자 난 의문을 표했다.
내가 뭐 그렇게 무섭게 했다고.
“매일 이유도 없이 갑자기 인사하거나 열심히 하라고 격려하는 게 미친 사람 같습니다.”
“아.”
라이언의 말에 난 탄식을 흘렀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일일 퀘스트를 깜빡하고 있었다.
전쟁에 집중하느라 저지른 실수였다.
“날씨 좋지 않나? 오늘 하루도 수고하게.”
“바로 그거 말입니다!”
라이언이 입에 거품을 물었다.
난 그런 라이언에게 피식 웃어주었다.
사실 이런 소리를 이미 빅터에게 들은 상황이었다.
일일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인사도 하고 격려도 하고 해줘야 할 게 많았으니까.
그때마다 하인들이 기겁을 하고 기사들도 나를 피하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퀘스트가 그런 걸 어쩌겠는가?
“뭘. 그냥 친절하게 인사나 하는 건데.”
“그 인사를 너무 두서없이 하시지 않습니까?”
빅터가 슬쩍 끼어들어 불만을 얹었다.
나는 그런 빅터에게도 방긋 웃어주었다.
“좋은 오후군.”
“흐익!”
빨리 신관을 불러야 한다며 중얼거리는 빅터를 뒤로하고 난 도미닉 남작가의 군대가 사라진 방향을 보았다.
저들은 돌아가는 길이 그리 순탄치 못할 것이다.
‘하긴 남 신경 쓸 때는 아니지.’
아직 전쟁은 끝난 게 아니었다.
전투에서 이기는 게 아니라 영지를 손에 넣으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베르타 행정관이 잘 해줘야 할 텐데.’
* * *
“움직인다.”
도미닉 남작가의 군대가 경계를 넘었다는 보고를 들은 왈트 자작은 칼을 빼 들었다.
바이든 남작가가 어떻게 나올지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시간은 그들의 편이 아니었으니까.
대영주 가문인 마이어드 후작가에 자신의 딸을 첩으로 내준 바이든 남작가는 언제라도 마이어드 후작가에 도움을 청할 수 있었다.
“시간이 없다. 기회가 왔을 때 몰아쳐야 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왈트 자작가는 총공세를 개시했다.
물론 무작정 나간 행동은 아니었다.
“바이든 남작가의 군대가 네패스 남작가로 향했습니다!”
바이든 남작가에서 먼저 연락을 줬고 실제로 군대가 이동하는 걸 확인했다.
가능하다면 좀 더 기다려서 확실하게 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 정도로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았다.
네패스 남작가의 군대가 도미닉 남작가의 군대를 상대로 도망치는 게 아니라 맞서 싸울 낌새를 보였기 때문이다.
“도미닉 남작가의 군대는 절대 제시간에 돌아오지 못한다!”
도미닉 남작가의 입장에서도 이는 기회였다.
절대 그것을 쉽게 포기하고 물러나지는 못할 것이다.
게다가 물러나더라도 오히려 뒤를 잡히게 생긴 상황이었다.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본대가 빠져나간 도미닉 남작가는 상당히 무력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기사들도 이제 별로 남아 있지 않군!’
왈트 자작은 총력을 퍼부었다.
바이든 남작이 자신의 눈을 속인 것이라 할지라도 출정한 병력을 회군시키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터.
왈트 자작은 바이든 남작가가 뒤를 치기 전에 먼저 도미닉 남작가를 무너트릴 생각이었다.
도미닉 남작이 이끌고 간 본대도 돌아오려면 시간이 있으니 이는 확실한 기회였다.
“본성을 점령하고 인질을 붙잡아야 한다!”
왈트 자작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모든 것은 시간과의 싸움이었기에 다른 것보다 본성의 점령과 인질을 잡는 것에 신경 썼다.
“남작의 가족들을 잡아라!”
다행히 신속한 공격이 먹혀들어 바이든 남작가와 도미닉 남작가 양측의 군대가 돌아오기 전에 목적을 완수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한 가지 도움이 있었다.
“이 더러운 배신자 놈!”
도미닉 남작의 차남은 자신을 붙잡은 기사들을 향해 분노를 표출했다.
그들은 왈트 자작가의 기사가 아니었다.
아버지를 따르는 도미닉 남작가의 기사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왈트 자작의 침공에 맞춰서 배신하여 자신을 생포했다.
도미닉 남작이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차남까지 잡혔으니 지휘가 제대로 될 리 만무했다.
“아버님을 배신하다니! 네놈들이 그러고도 기사란 말이냐?”
“어차피 도미닉 남작가에는 승산이 없었습니다.”
도미닉 남작가의 기사들은 원래부터 승산을 그리 높게 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장남이 잡히는 등 악재가 겹쳤으니 이대로라면 가문과 함께 침몰할 거 같았다.
새로운 배로 바꿔 타는 건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해해 주시지요.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내부의 배신자라는 치명적인 문제로 도미닉 남작가는 예상보다도 빠르게 무너졌다.
‘생각보다도 빠르게 성공했군.’
성공적인 결과에 왈트 자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말로 시간에 쫓기는 싸움이었지만 결국 자신이 해냈다.
이것으로 도미닉 남작령은 자신의 손아귀에 떨어진 것과 다름없었다.
물론 남은 본대가 있지만 그리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성을 점령한 이상 자신이 절대적으로 유리했으니까.
“쉴 시간은 없다. 바로 다음 싸움에 대비하라! 도미닉 남작가의 군대와 바이든 남작가의 군대를 찾아!”
먼저 확인된 것은 도미닉 남작가의 군대였다.
다소 처참한 몰골로 그들이 돌아오는 모습이 확인되었다.
뒤이은 보고에 따르면 네패스 남작가가 아니라 괴수들에게 습격을 받았다고 한다.
“괴수?”
뜬금없는 일이었지만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쨌든 그들도 피해를 입어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전력이라 보기는 힘들었으니까.
공격해 온다면 성을 끼고 가볍게 해치우면 그만이었다.
“바이든 남작가는?”
“아직 회군하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그러나 이어지는 보고에는 왈트 자작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정말로 바이든 남작가가 네패스 남작가를 침공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진심이었나? 나와 둘이서 겨뤄보자고?’
자신이 도미닉 남작가를, 바이든 남작이 네패스 남작가를 얻는다면 자신이 훨씬 유리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병력의 출정은 어디까지나 눈속임일 뿐 금방 회군해 오리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리석군. 하긴, 이 정도로 빨리 도미닉 남작가를 잡으리라 생각하지는 못했겠지.’
내부 기사들의 배신을 염두에 두지 못한 데다 또 도미닉 남작이 예상보다 시간을 지체하기까지 했다.
바이든 남작도 이렇게 상황이 흘러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왈트 자작은 승기가 자신에게 넘어오고 있음을 느꼈다.
“도미닉 남작의 군대가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해치우면 그만이다.”
왈트 자작은 여유롭게 도미닉 남작의 군대와 마주했다.
보고로 들었던 것처럼 꼴이 영 아니었다.
‘운도 지지리 없는 놈.’
어쩌다가 거기서 괴수들에게 걸렸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하긴 괴수들이 아니었더라도 네패스 남작가와 충돌했을 테지만.
“왈트 자작! 나와 맺은 약조를 짓밟고 감히 내 가족들을 건드려?”
“뭘 새삼스럽게. 어차피 그대도 진심으로 날 믿은 건 아니지 않나?”
“크윽!”
“자, 빨리 덤벼라. 가족들을 구해야 하지 않나?”
왈트 자작은 경우에 따라서 성에서의 유리한 방어를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었다.
행여 도미닉 남작이 이대로 바이든 남작에게 항복할 경우 괜히 둘을 한꺼번에 상대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도미닉 남작은 후일을 도모하지 않고 공격을 개시했다.
장남과 차남 모두 잡힌 상황에서 어쩌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최고의 결과로군.”
그 순간 왈트 자작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이 영지전의 최후의 승자는 틀림없는 자신이었다.
* * *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하다.’
바이든 남작가의 기사 제이콥은 네패스 남작가를 공격하는 척하라는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상황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자신들의 앞을 네패스 남작가의 군대가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실수했군. 징집을 고려하지 못했어.’
그들은 네패스 남작이 이끌던 정규군이 아니었다.
지금껏 모습을 보이지 않던 징집한 장정들로 대충 만들어진 조잡한 군대였다.
그러나 나름 숫자는 되었다.
‘이쪽은 공격할 생각이 없는데.’
진짜 싸울 생각은 없던 바이든 남작가의 입장에서 상대가 먼저 공격해 오면 이는 큰 손해였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갈 수도 없고.’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쯤에서 회군한 뒤 본대와 합류해 왈트 자작가를 공격해야 했다.
그러나 뒤에 적을 남겨두고 등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협상을 해야만 한다.’
기사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 했다.
“나는 바이든 남작가의 기사 제이콥이다. 그대들의 지휘관은 누구인가?”
“나다. 네패스 남작가의 행정관을 맡고 있는 베르타다.”
“행정관?”
제이콥은 행정관이란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졌다.
병력이라는 것도 징집병들이나 모아놓은 주제에 지휘관도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행정 업무나 담당하는 책상물림을 지휘관이랍시고 뽑아놓다니?
‘이걸 그냥 밀어버려?’
숫자는 제법 갖췄지만, 무장이나 훈련은 최악일 게 분명한 징집병.
정면으로 돌격만 해도 얼마든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아니지. 내가 받은 명령은 그게 아니다. 더구나 네패스 남작가의 군대가 저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도미닉 남작가와 충돌할 것 같던 군대가 싸우지 않았다고 하니 지금쯤 이곳을 향해 오고 있을 것이다.
저들은 단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 나와 있는 것뿐이었다.
‘그러면 우리가 철수할 때 뒤를 잡지 않을지도 모른다.’
저들의 입장에서도 진심으로 싸우고자 하는 건 아닐 테니 그냥 물러가면 잘 해결될 거 같기도 했다.
“우리는 딱히 공격할 의사가 없고 회군할 것이니 그대들도 물러나시는 게 어떻소?”
“내가 받은 명령은 이곳을 지키는 거다. 네놈의 말을 들어줄 이유는 없지.”
그러나 상대가 순순히 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그럼 그냥 그곳을 지키고만 있으시오. 우리는 물러갈 테니.”
“이미 우리를 공격하려고 했으면서 순순히 보내줄 거 같으냐?”
“그게 아니라니까!”
“그 말을 어떻게 믿겠나?”
제이콥은 어떻게든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진땀을 빼야 했다.
다행히 한참의 실랑이 끝에 어찌어찌 상대로부터 추격하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아낼 수 있었다.
“젠장, 괜히 시간만 버렸군!”
그래도 네패스 남작가의 진짜 군대가 뒤를 잡기 전에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제이콥은 합류 예정지로 향했다.
“야 이 새끼야! 왜 이제 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기사단장 벤이 회군한 제이콥을 발견하고 역정을 냈다.
“죄송합니다. 네패스 남작가의 군대가 나타나서 그만…….”
“뭔 개소리야! 네패스 남작가 놈들은 도미닉 남작가 쪽에 나타났는데!”
“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제이콥은 눈을 깜빡였다.
그럼 도대체 그 행정관은 뭘 믿고 자신에게 뻗대었다는 말인가?
‘나를 속인 건가? 일부러 시간을 끌려고?’
뒤늦게 속았음을 깨달은 제이콥은 치욕에 얼굴이 붉어졌다.
설마 자신이 기사도 아니고 일개 행정관에게 속았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건 네패스 남작가의 본대가 나타난 위치였다.
“그놈들이 대체 왜 거기에…….”